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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史劇) 속 인물, 제1편 <대왕의 꿈> 김춘추

mkpark2022 2015. 8. 18. 21:21

 

 

 

사극(史劇) 속 인물, 제1편 <대왕(大王)의 꿈> 김춘추

 


김춘추는 누구?

- 7세기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하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영웅,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 하지만 그를 둘러싼 논란! 통일신라의 초석을 마련한 역사의 영웅? VS 외세를 끌어들여 백제 · 고구려를 멸망시킨 사대주의자?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역사 속 인물,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일까? 그리고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이며, 극 중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오늘 날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話頭)는 무엇일까?

- 김춘추는 어떤 인물?

신라 25진지왕의 손자로 신라 최초 진골(眞骨) 출신의 왕 · 문무왕의 아버지 · 선덕여왕은 이모 · 그의 최측근으로는 김유신 장군으로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백제 의자왕이 동시대의 인물

- 신라 역사상 유일한 묘호 태종(太宗), 이는 신라인들이 추숭하고 존경했다는 의미, 드라마 <대왕의 꿈>은 선덕여왕의 조카이자 훗날 29대 태종 무열왕이 된 김춘추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로 김춘추는 선덕여왕을 도와 조정을 돌보고 김유신과 함께 화랑도를 이끌며 탁월한 외교력과 지략을 펼치며 삼한일통(三韓一統)의 꿈을 향한 원대한 꿈을 펼친다.

- 그러나 삼국전쟁에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임으로써 비난을 받게 되는데, 김춘추를 둘러싼 논란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김춘추에 대한 엇갈린 평가

- 역사서에는 나당연합을 어떻게 기록하는가?

김춘추 논란의 핵심은 당나라와 손잡고 같은 민족인 백제를 멸망시켰다는 것, 하지만 역사서의 나당연합(羅唐聯合)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긍정적이고 나당연합의 비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 것 김춘추는 오랑캐의 풍습을 버리고 중화의 제도로 바꾸었다” <성호사설>

- <소셜 빅데이터>로 본 김춘추?

삼국시대 인물 선호도 1위는 광개토대왕, 김춘추에 대한 평가는 긍정(삼국통일·영웅·처세술·외교·전략전술) 55%, 부정적(나당연합·외세·뒤통수·사대주의·매국노)인 측면이 45%로 가장 엇갈린 평가를 받은 인물로 나당연합군과 삼국통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김춘추의 평가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

- 나당연합에 대한 대중들의 평가는?

나당연합에 연관된 키워드는 반감·실패·거짓말·외세·이기주의·야욕등으로 나당연합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무려 93%, 결국 대중들은 김춘추라는 인물에 대해서 화려한 외교술·영웅·통일과 같은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김춘추가 성사시킨 나당연합에 대해서는 민족의 배반·백제에 대한 보복이라든지 부정적 평가를 확인 할 수 있는 것

- 나당연합으로 660년 백제 멸망시키고, 668년 고구려 멸망시킨 것을 단재 신채호 선생은 다른 종족을 불러들여서 동족(同族)을 멸망시키는 것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따위 망상을 지어내어 이족(異族)으로 하여금 동족(同族)을 멸망시키도록 한 김춘추여!” <독사신론> & “ ··· 본국에 전하여 퍼뜨림으로써 사대주의의 병균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상고사>

- 학생들도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매우 불편하게 생각, 특히 고구려 역사의 단절과 영토의 상실로 신라의 삼국통일(三國統一)에 대해 아쉬워하는 학생들

 

김춘추, 백제에게 딸을 잃다.

- 김춘추에 대한 상반된 평가, 그 시작점이 되는 사건은 삼국경쟁의 중심지였던 한강의 점령으로 4세기에는 백제 · 5세기에는 고구려 · 6세기에는 신라가 점령하면서 삼국은 각각 견제와 대립구도를 이어간다.

- 6428월 대야성 전투, 신라를 향한 백제의 공격이 절정에 달하게 되고 백제는 신라의 40여 개 성을 빼앗고 군사적 요충지인 대야성 마저 함락시킨다. 이는 신라에게는 최대의 위기로 성이 함락이 되고 백제군에 항복한 대야성 도독 김품석(김춘추의 사위)과 고타소(김춘추의 장녀)의 죽음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품석의 목을 베어 왕조에 보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제6>

- 기록에 의하면 그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하고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어쩌면 이 때 백제를 멸망시킬 각오를 하지 않았을까? “슬프구나!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손에 넣지 못하겠는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6>

- 개인적인 복수심으로도 충분히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일을 개인적인 복수심에서만? 복합적인 이유로 김춘추가 애지중지한 장녀 고타소 춘추는 딸의 죽음에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

 

나당연합의 시초, 대야성 전투의 진실

- 대야성 함락의 원인은 대야성 도독 김품식 때문, 부하의 아내를 빼앗은 김품식에 화가 난 부하는 백제군과 내통하여 대야성 창고를 불을 질러 버린다.

- 대야성은 신라의 입장에서는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신라는 서부 국경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는데, 대야성 일대는 김춘추의 세력기반으로 결사항전 대신 항복을 해버린 사위 김품식이 김춘추의 정치생명에는 큰 타격을 입힌 것

- 당시 시대적 배경은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이 손잡고 한강유역을 점령하였으나, 553년 신라가 백제를 배신하고 한강을 독차지해버리고 이어서 554년 신라와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백제 성왕, 따라서 7세기는 100여 년 간 지속돼 온 나제동맹이 깨질 무렵

- 백제 중흥의 기대주였던 성왕의 비참한 죽음(목 잘림)은 한으로 남아 백제의 무왕 · 의자왕에게는 신라 정벌의 주요 동기중의 하나, 딸을 잃은 김춘추 VS 왕을 잃은 백제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김춘추도 알았을 것이고, ()을 끌어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김춘추, 연개소문을 만나다.

- 백제와의 관계는 그렇다 치더라도 고구려와의 결속은?

642년 백제를 치기 위한 도움을 얻기 위해 고구려로 가는데,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로 고구려를 향해 떠나면서 김유신이 말리자 김춘추는 60일 내에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영영 볼 수 없을 것이다하고 떠난다.

- 김춘추는 연개소문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하지만 연개소문은 옛 고구려 땅인 중령 이북(以北)의 한강유역을 신라가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자 신은 신라 군주의 왕명을 받은 하나의 신하일 뿐, 죽령 이북 땅을 돌려드릴 명분도 권한도 없습니다.” 결국 실패로 끝난 고구려와 신라의 협상

-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근대 이전에는 포악하고 잔인한 모습으로 표현되던 연개소문 “···여러 대신들을 불러서 모조리 죽여 버렸는데··· 왕을 시해하고 몇 동강으로 잘라 도랑에 버렸다.” <삼국사기, 열전 제9> 중국의 경극에도 등장하는 연개소문은 다섯 자루의 비도(飛刀)를 지닌 용맹한 장수로 표현

- 만약 고구려와 김춘추의 협상이 성공했다면?

결렬의 가장 큰 이유는 고구려의 역제안, 군사협조의 대가를 요구한 고구려의 속내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의 땅이었다. 너희가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병사를 내보낼 수 있으리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

-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는 것 보다는 신라와 백제가 서로 싸우는 것이 오히려 유리한 것으로 처음부터 협상의 여지는 없었을 것

- 고구려에 간 김춘추의 진짜 의도는?

642년 대야성 전투 외에 같은 시기에 중국과 교류하는 핵심창구였던 신라의 당항성(지금의 화성)을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서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모두를 경계해야 하는 처지로 신라가 백제와 맞서는 동안 고구려는 가만히 있으라는 의도?

- 두 나라만 있을 때에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병합하기 쉬우나, 삼국시대에는 약한 두 나라가 연합하여 강한 나라를 견제하면 쉽게 통합하기가 힘든 구조오랜 기간 삼국시대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인 것

- 그렇다면 절묘한 힘의 균형 ‘3’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3 밖의 새로운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7세기 새로운 동아시아의 외교가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게 됐다는 논리로 전개될 수 있을 것

 

김춘추, () 와 당()에 가다.

- 647년 고구려와의 협상이 실패하자 김춘추는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전통적으로 친백제 외교정책을 유지해 온 일본에서도 군사협조는 쉽지 않았고··· 결국, 648년 김춘추의 발길은 당()으로 향한다.

- 당시 당나라는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주변으로 세력을 넓히며 고구려의 복속을 요구하면서 요동성을 비롯해 고구려 정벌에 나서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애를 태우던 상황

- 이러한 사정을 간파한 김춘추는 당 태종을 만나 바로 군대를 요청하지 않고 오히려 당()의 최고유학 기관인 국학에서 석전과 각론을 참관하기를 청하는데, 신라가 처한 위기상황을 고려하면 너무도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의외의 행보, 김춘추의 속내는?

- 고구려·일본·중국 방문의 무려 6년간의 행보, 당시 김춘추의 직책은?

김춘추는 이찬(17관등 중 2번째. 진골만이 될 수 있음), 이찬과 같은 최고의 관직이 사신으로 가는 것은 드문 경우선덕여왕을 대신해 외교적인 결정·판단을 했음을 의미하고, 마치 차세대 대권주자의 외국 순방 같은 느낌~

- 김춘추가 장시간 나라를 비우면 국내에서의 입지는?

국내에서 김춘추의 입지를 지켜준 것은 그의 최측근이며 충신인 김유신이 있었던 것으로 당나라로 가기 직전인 647<비담의 난>이 발생하는데 비담의 난의 명분은 여자가 왕이 되니 정치를 잘못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는 것.” 이의 진압을 계기로 인연을 맺어 김춘추와 김유신이 정치적으로 급부상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되고, 이런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사망을 하게 된다.

- 647년 선덕여왕의 사후, 사촌인 진덕여왕이 즉위하여 김춘추 세력이 왕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국내정치는 김유신에 맡기고 국제외교에 나선 김춘추. “(당태종이 이르길) 신라는 임금이 여자라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나라가 해마다 편한 적이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

 

야망을 가진 김유신과 김춘추의 만남

- 금관가야 왕실 출신으로 정치적 한계(항복한 가야 출신)를 가진 김유신 VS 폐위된 왕(진지왕의 손자)의 후손이라는 한계를 가진 김춘추, 서로의 한계를 보완해 줄 수 있었던 문무(文武)의 만남

- 김춘추와 김유신이 인연을 맺게 되는 설화, 어느 날 함께 축구를 하다 일부러 김춘추 옷고름을 밟은 김유신, 찢어진 옷을 꿰매기 위해 집으로 데려오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여동생 보희가 전날 밤 꿈에 소변을 보는데, 이 소변이 나라를 덮쳤다는 것 이 꿈 소식을 들은 동생 문희는 그 꿈을 자기에게 팔라고 하고···” 마침 집에 온 김춘추의 옷고름을 꿰매준 문희는 이를 인연으로 하여 김춘추와 결혼을 하게 된다.

- 환갑을 맞은 김유신에게 김춘추가 딸을 시집보내는데, 조카와 결혼하여 외삼촌이 된 김유신, ()의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중세시대 결혼은 권력분산을 막는 방식으로 권력유지를 위해 근친혼은 신라에서도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유교적인 윤리관으로 굳이 예민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

 

김춘추, 외교의 달인이 되다

- 김춘추가 군사요청 대신 먼저 국학을 참관한 이유?

고구려 때와 다르게 행동한 이유 신라 내 정치기반의 안정화 고구려와 일본에서 쌓은 외교 노하우와 ()의 입장에서도 차세대의 대권주자가 사신으로 온 것이 때문에 뭔가 잘 보이고 싶은 과시욕도 있었을 것이고, 외교 과정에서 외모의 덕을 본 김춘추 춘추의 용모가 영준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접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

- ()과의 외교에서 김춘추의 이상행보는?

김춘추가 당나라에 간 목적 군사요청 당의 선진문물을 확인 및 습득하는 복합적인 것으로 귀국하여 신라의 복식(服飾)을 당나라 식으로 바꾸고 독자적인 신라 연호 대신 당()의 연호 영휘(永徽)’까지 도입

- 사대외교의 또 다른 증거로 <태평송(太平頌)>은 진덕여왕이 당나라 고종을 칭송하는 내용을 비단에 수놓아 보낸 헌정시로 강대국을 종주국으로 대접할 수는 있으나 스스로를 제후국으로 만드는 것은 사대주의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 당시 김춘추는 고구려·일본과의 협상에서 실패한 후, 백제와는 일촉즉발의 대치 중으로 당()의 도움이 절박했던 신라는 태평송의 결과로 나당연합의 성사를 이뤄낸다.

- 사실 중국과 삼국의 역사적 경험도 중요! ·당에 의해 통일이 되기 이전의 남북조 시대에는 삼국이 모두 조공·책봉관계를 맺었지만, 사실 조공·책봉관계는 형식적인 외교관계조공·책봉은 했어도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했던 고구려·백제와는 다르게 신라는 당시 왜소했고 국제무대에 서 본 경험이 없어서 쉽게 수·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사대주의를 외교 전략으로 구사하는 것에 대하여 역사적 경험상 크게 저항감이 없었던 것.

 

민족이냐? 국가냐? 그것이 김춘추의 문제로다.

- 마침내 당 태종으로부터 군사협조를 얻어낸 김춘추, 당 태종은 나당연합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뒤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을 신라에게 줄 것을 약속한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는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영원토록 평안하게 하리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 문무왕>

- 이는 곧 평양 이북의 고구려 땅은 당()이 차지하겠다는 말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킬 의지는 있었지만, 삼한일통(三韓一統)의 대업을 꿈꾼 건 아닌 듯

- 나당연합에 숨은 진실은?

김춘추가 같은 민족 국가를 당나라에 팔아먹었다는 비판이 있긴 하지만, 당시는 민족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민족의식이란 역사와 운명의 공동체로 오랜 기간 역사를 함께하면서 공동운명체로서의 하나의 민족을 의식하게 되는 것으로 삼국이 서로가 갈라져 각각의 나라를 성립하고 경쟁하며 성장하던 시기에 민족의식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

- 하지만, 삼국 간에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 않았나?

논란은 많지만 최근의 연구결과는 말이 서로 달랐다 해도 오늘날의 사투리 정도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정도의 차이로 통역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

- 외세를 끌어들인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외세에 수난을 당했던 근대사의 아픈 기억 때문에 외세는 부정적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 측면도 있는 것

- 당시 신라의 최대과제는 백제병합,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당()의 약점을 건드린 김춘추, 당시 당()은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는 별관심이 없었고 목표는 오직 고구려로 645년에 30만 대군이 출정했던 안시성 전투에서 대패한 당나라 당이 고구려를 정복하려면 신라가 필요할 것을 주장한 김춘추는 고구려 병합이라는 당()의 목표를 명확히 읽고 그에 맞는 외교전술을 펼친 것

 

김춘추의 선택과 책임

- 6607월 황산벌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이 백제공격을 시작하고 9일 만에 항복을 선언한 백제 의자왕, 이어서 668년 나당연합군은 고구려에 칼을 겨누게 되는데, 연개소문이 죽고 없는 고구려 역시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 만약 김춘추라면 어떤 선택을 후회할까?

일각에서 매국노·사대주의자로의 비판이 있으나, 이것은 오늘 날 한국인으로써의 김춘추에게는 타당한 소리일 줄 모르지만 신라인 김춘추로서는 부끄러운 것이 없는 것,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라 29대 왕이 된 김춘추는 목표했던 백제병합까지 이뤄 후회는 없을 것이지만, 후대에 이런 평가를 받을 줄 알았다면 자기변론의 글을 남기지 못한 걸 아쉬워해야 할 듯···

- 하지만 삼국통일의 영웅인지는 모르겠으나 구국(救國)의 영웅인 것은 틀림없겠다~ , 신라인의 입장에서··· 따라서 김춘추는 한국인이 아니라 신라인 김춘추로 이해해야 할 듯, 우리가 지나간 역사를 논해야 하는 이유는 그날의 선택이 오늘 날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 것이냐의 역사관이 중요하기 때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