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is(한국사)

조대비 수절 60년, 세도정치에 칼을 겨누다.

mkpark2022 2015. 8. 18. 20:55

 

 

 


조대비 수절 60년, 세도정치에 칼을 겨누다.

 


개요(槪要)

- 안동김씨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순조(純祖), 이들의 독주에 제동을 건 이가 있었으니 바로 순조(純祖)의 아들, 효명세자! 하지만 효명세자는 날개를 채 펴기도 전에 22세의 나이로 단명하고 만다.

- 그로부터 약 30년 후, 효명세자의 아내 신정왕후 조씨는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다. 오랜 세월 남편의 뜻을 가슴에 품어왔던 신정왕후, 마침내 세도정치의 심장에 칼을 겨눈다!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부부

- 1954년 부산 용두산 화재에서 건진 훼손된 어진(御眞) 한 점, 대부분이 불에 타 인물의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으나 오른 쪽 상단의 표제로 밝혀진 주인공은 효명세자로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의 아들

- 아버지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나설 정도로 총명했던 효명세자, 그는 정권을 장악한 안동김씨를 견제하기 위해 개혁정치를 펼치고, 예악(禮樂)을 통해 황실 권위 높이면서 강력한 친위세력을 키운다.

- 그러던 1830년 윤4월에 22살의 효명세자는 갑작스런 각혈에 시달리다 13일 후 돌연 숨을 거두게 되며 그가 남긴 것은 어린 세자와 세자빈 뿐, 그의 죽음은 세자빈의 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 시작한다.

- 효명세자는 순조(純祖)의 아들, 신정왕후는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뮤지컬 명성왕후>에 등장하는 조대비로 잘 알려진 인물인 반면, 남편인 효명세자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조선말 역사에서 결코 간과(看過)할 수 없는 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효명세자

- 역대 가장 장수(長壽)한 왕비는 누구?

신정왕후(효명세자빈) 83 정순왕후(단종의 정비) 82헌경왕후(사도세자빈) 81순정효황후(순종의 정비) 73효정왕후(헌종의 계비) 73, 1~3위가 남편이 단명했던 것으로 남편의 요절(夭折)과 장수와의 상관관계(?)

- 쉽게 접하기 어려운 왕후의 초상화, 신정왕후의 초상화로 알려진 그림의 정체는?

인물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에서 발견된 초상화로 어두운 얼굴 형색의 초상화, 남편 효명세자는 22· 아들 헌종(憲宗)23세에 사망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살아 아픔이 얼굴에 묻어났을 듯

 

효명세자의 실상

- 효명세자의 실제 외모(外貌)?

지문에 의하면 세자는 이마가 융기한 귀함에다 용의 눈동자로 모습이 빼어나고 아름다워서 궁중사람들이 말하기를 장효왕(정조)과 흡사하다고 했다.” <순조실록 30715>

지문(誌文) : 죽은 사람의 행적을 기록해 무덤에 넣은 글

- 초상화의 기록으로 보아 대리청정 1년 전()18세의 어진으로 정조(正祖)의 둥근 얼굴과는 달리 갸름한 얼굴형으로 추정되는 효명세자, 최근 효명세자를 주인공으로 한 웹 소설이 등장하였는데 소설 속의 효명세자의 얼굴은 많이 미화된 듯

- 실제로 세자에게 중요한 것은 외모도 있지만 성품과 자질, (순조)과 왕비(순원왕후)의 적장자였던 효명세자는 숙종(肅宗) 이후로 처음 있는 정통성으로 효명세자가 태어났을 때 순조(純祖)오늘의 경사는 곧 국조(國祖)에서 1백년 안에 처음 있는 경사이다” <순조대왕 행장>

- 4살에 세자 책봉하고 9살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정상적인 국왕교육을 받은 준비된 세자로 어린 시절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 <잠룡(潛龍)>, “남녘 못에 잠긴 용이 있으니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도다. 이 용이 만물을 키워 내리니 능히 사해의 물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군왕으로서의 자질이 드러나는 시()로 숨길 수 없는 국왕의 DNA

-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혼인?

1819년 효명세자는 11세이고 신정왕후는 12세에 가례를 올리는데 지금보다 평균 수명이 짧았던 조선시대, 세자의 이른 혼인은 왕실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

- 안동김씨가 주축인 순조(純祖), 풍양 조씨가 세자빈으로 선택된 이유?

정치적으로 봤을 때,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가 결합하던 시기로 결정적인 사건은 1812년 호조판서 박종경(반남 박씨)의 탄핵상소를 올린 조득영(풍양 조씨), 박종경은 순조(純祖)의 외삼촌이자 <홍경래의 난> 격문에 등장했던 인물로 안동 김씨와 권력을 양분했던 반남 박씨였지만 이제는 안동 김씨의 입장에서는 정적으로 바뀐 반남 박씨를 제거하고 자신들과 같이 할 새로운 동지로 풍양 조씨를 맞아들이게 되는 것, 또한 순조(純祖)의 입장에서도 안동김씨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던 상황이었기에 그러한 결정을 하지 않았겠는가(?)

- 왕권을 강화하려면 외척이 아닌 자신의 정치적 조력자가 필요한 것 아닌가?

풍양조씨 세자빈 간택 배경에는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있고, 이 시기에는 자연재해·전염병이 창궐하게 되며 또한 1812년 탄핵상소로 반남 박씨가 제거되면서 세력(勢力)이 더욱 커진 안동 김씨, 정치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순조(純祖)의 입장에서는 대안이 필요했을 것

 

기후변화가 역사에 미치는 영향 (김문기, 부경대학교 사학과교수)

- 순조(純祖) 때 자연재해가 극심했던 이유?

19세기 초() 이상저온현상을 보인 조선, 봄에는 가뭄과 여름에는 홍수가 잦아 토지를 이탈해 유리걸식(遊離乞食)하는 백성들이 증가하고 기근으로 백성들의 불만은 가중해지면서 민란이 발생하기 시작하는데, 순조(純祖)가 재임기간 중에는 민란의 시대로 접어드는 시작점이었고 그 배경에는 기근이 있었다.

- 역대 조선 국왕들의 자연재해 대치법?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하늘의 기상현상은 군주의 도덕성과 관련이 있다고 믿어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군주는 스스로 하늘을 두려워하며 자성(自省)했던 것 임금이 금주하고 수라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였다. 형조로 하여금 가벼운 죄는 용서하거나 면제하였으니 대개 가뭄을 걱정한 것이었다.” <태종실록 11711>

- 조선시대 기록을 통틀어 자주 등장하는 기우제, 순조(純祖) 1809년은 9차례 · 1814년은 10차례 ·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1811년은 14회의 기우제를 시행, 또한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침호두(沈虎頭)>의식을 행하기도 했었다.

석척기우제 : 도룡뇽을 병 속에 넣고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의식 & 침호두 : 강에 호랑이 머리를 넣어 용을 자극해 비를 기원하는 의식

- 19세기 당시 기후변화가 세계에 미친 영향?

세계적으로도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폭발로 화산재가 대기권을 덮으면서 흐린 날씨가 지속, 이 기간 동안 유럽과 아메리카에서는 여름에 눈·서리가 내리는 이상 기후가 발생하여 식량부족으로 물가가 폭등하면서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전염병이 창궐하게 된다.

- 이런 환경 속에서 유럽은 새로운 에너지인 석탄을 활용해 위기를 극복하게 되지만 동아시아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 또한 인간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때 기후는 결정적인 작용을 하기도 하는데, 당시는 서세동점의 시기로 공교롭게 이상기후가 겹쳐 동아시아(··)는 집권세력의 입지를 뒤흔들게 한다.

- 설상가상으로 재위 13년째인 1813년부터 건강이 악화된 순조(純祖)는 정치적 한계를 실감하고 1827년에 19세의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다.

 

춤을 사랑한 효명세자

- 순조(純祖)를 대신해 국정을 맡게 된 효명세자, 국정을 돌보는 틈틈이 궁중무용창작에 몰두하면서 맥이 끊겨가던 궁중무용은 효명세자의 노력으로 활기를 되찾게 되고 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장엄한 무용으로 흔들리던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워 나간다.

- 어머니의 탄신을 축하하기 위해 창작한 <춘앵무>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한 다양한 궁중무용을 탄생시킨다.

춘앵무 : 당 고종이 새벽에 꾀꼬리 소리를 듣고 묘사해 곡을 만들었다는 고사를 빌어 효명대사가 창작한 춤

- 효명세자가 궁중무용에 관심을 쏟은 이유?

효명세자가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있지 않지만 한국무용연구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로 왕실에서 베푸는 궁중 무용인 <정재(呈才)>, 현존하는 정재 53가지 중 26가지가 효명세자가 직접 만든 작품

- 효명세자 외에 <정재>를 창작한 왕실 사람이 있나?

국왕·세자 중 안무(按舞)를 한 인물은 효명세자가 유일, 효명세자의 정재는 현재도 계속 복원 중이며 <춘앵무>는 현존하는 53가지 정재 중 유일한 독무(獨舞)로 꽃이 수놓아진 화문석 위에서 춤추는 것이 특징으로 효명세자가 20세에 어머니인 순원왕후 40세의 생일을 기념해 만든 춤인데 이 때 쓰인 노래가사·춤 모두 효명세자가 창작한 작품, 마치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서의 할아버지 정조(正祖)와 닮은 꼴

- 춘앵무가 공연된 창덕궁 연경당(演慶堂)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시기에 아버지 순조(純祖)를 위해서 지은 건물로 경사를 연출하는 집이라는 뜻

- 잔치·건축은 국가예산이 필요한 사업, 백성들은 이상기후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데 효명세자의 정책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 아닌가?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행사의 주인공은 순조(純祖)와 순원왕후, 당시 건강상의 이유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순조(純祖), 그런 상황에서 왕실의 잔치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면서 세자는 부모에게 효를 실행하는 행위, 또한 신하와 백성들은 임금에게 효를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충()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세자가 잔치·건축·궁중무용으로 효()를 보여주는 것은 신하들에게는 충()을 요구하는 고도의 통치행위인 것

- 예술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역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영화<왕의 춤>의 주인공인 루이 14, 어린 나이에 왕위에 즉위를 하여 주위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당하자 직접 발레를 만들어 춤의 주인공인 전능한 신으로 등장하면서 제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예술을 통해 정치적으로 약()한 입지를 바로 세워나가기 위한 방안 중의 하나

왕의 춤 : 발레음악을 통해 왕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던 루이 14세의 이야기로 마지막에 전능한 신으로 등장

- 안동김씨 세도정치에 맞선 효명세자의 개혁조치는?

정치에서 제일 중요한 자원은 사람과 재정으로 효명세자도 대리청정을 하면서 자기세력을 키워나가는데, 당시 정권을 장악하던 외가인 안동김씨를 견제하는 조치로 자기세력으로 하여금 국가재정을 담당하는 호조판서·선혜청의 요직을 맡게 하면서 상대적으로 안동 김씨는 서서히 물러나게 된다.

 

세도정치 타파(打破), 효명세자의 개혁정책

- 막강한 세력 안동김씨가 순순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간 안동김씨에 의해 소외되었던 남인·북인·소론계열을 양사(사헌부·사간원)인 당시의 언론기관에 집중 배치하여 안동김씨의 부정부패를 감시하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안동김씨의 세력이 약화되는 것

- 재정·언론·사정업무 모두를 장악했던 효명세자의 대리청정기는 19~22세로 나이에 비()해 노련한 정치력을 구사한 효명세자의 정치적 기반에는 순조(純祖)가 있었던 것으로 대리청정 시 효명세자에게 확실하게 핵심권한을 부여했던 것

- 사도세자와 세손인 정조(正祖)에게 까지 두 번이나 대리청정을 명()했던 영조(英祖)도 인사권만은 자신이 직접 장악한 반면 순조(純祖)는 인사권까지 세자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1830년 대리청정 말기에는 완전히 국정을 장악한 효명세자

- 실록에는 이때가 되면 대부분의 국가업무를 주관하며 국왕의 역할을 한다. “왕세자가 말하기를 옛날의 습관을 통렬히 고쳐 다시는 멋대로 굴거나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한다. 만약 혹시라도 어김이 있으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각 아문에 써서 게시하라” <순조실록 30년 윤 411> 22세의 어린 효명세자에게서 느껴지는 왕의 카리스마

- 효명세자의 개혁조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유명무실해진 과거제도 폐단 시정 왕실 권위회복을 위해 경복궁 중건계획 등 일련의 조치로 보면 순조(純祖)의 정책들, 효명세자가 순조(純祖)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면 19세기 조선의 역사는 달라질 수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기회가 오지 못한 것이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33개월 만에 갑자기 숨을 거두게 된다.

 

효명세자의 죽음, 운명이 달라진 신정왕후

- 효명세자의 사망원인?

밝혀지지 않은 효명세자의 사인으로 기록에 의하면 갑자기 각혈(咯血)을 했다는 것 약원에서 왕세자의 진찰을 청했는데 각혈이 있고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순조실록 30422> 각혈을 시작한지 10여 일만에 급사한 효명세자

- 갑자기 남편을 잃은 신정왕후 경인년 5월에 익종이 훙서(薨逝)하니 왕후가 음식도 들지 않고 슬피 울어 곁에서 감히 볼 수가 없었다.” <고종실록 27년 대행 대왕대비의 지문>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고 청상에 홀어머니 신세가 된 신정왕후, 무력한 시아버지 그리고 시어머니는 안동 김씨이고 아들은 이제 겨우 4살로 믿고 기댈 곳이 없어진 것, 그로부터 4년 후 순조(純祖)마저 승하하고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이는 세손으로 역대 최연소인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24대 왕 헌종(憲宗)

- 어린 헌종(憲宗)을 위해 시행된 수렴청정, 하지만 수렴청정을 한 사람은 어머니 신정왕후가 아닌 할머니인 안동김씨 순원왕후, 이 모든 상황을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풍양조씨 신정왕후였지만 시간은 아직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남편 없는 하늘아래, 신정왕후의 수난

- 수렴청정은 왕실 최고 어른이 하는 것이 원칙, 게다가 엄격히 말하면 죽은 효명세자는 세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신정왕후는 왕대비가 될 수 없는 것

- 세자빈인 신정왕후에게 왕후호칭이 주어진 이유?

헌종(憲宗) 즉위 후 효명세자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하여 남편을 따라 왕후도 추존되는 것

- 헌종(憲宗) 즉위 후 안동김씨 순원왕후와 풍양조씨 신정왕후의 권력구도?

순원왕후의 비호로 더욱 세력을 키운 안동김씨, 헌종(憲宗)의 왕비도 안동김씨 집안에서 간택하고 안동김씨에 위협이 될 만한 효명세자 측근의 인물을 모두 제거를 하게 되는데, 안타까운 것이 아들 헌종(憲宗)이 후사 없이 23세에 요절하면서 안동김씨 천하에서 고립무원에 빠진 신정왕후.

- 후사없이 승하한 헌종(憲宗)의 후계자는?

순원왕후는 <강화도령>을 선택하여 자신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헌종(憲宗)의 아버지인 효명세자와 같은 항렬이 된 강화도령 철종(哲宗), 계보상 정조-순조-철종의 순으로 중간의 헌종(憲宗)과 효명세자와 신정왕후가 빠져나가 왕실의 계보가 꼬이기 시작한다.

- 헌종(憲宗) 사후, 안동김씨의 행보?

1850년 철종(哲宗) 즉위 1년 후, 풍양 조씨는 대대적으로 탄핵을 받아 사사(死事)되면서 풍양 조씨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안동김씨의 독주로 세도정치의 폐해가 최고조에 달한 철종(哲宗)

 

40여년의 기다림, 역전의 신정왕후

- 신정왕후의 반격?

철종(哲宗) 8년에 순원왕후가 돌아가자 40여 년 만에 비로소 왕실 최고 어른이 된 신정왕후, 그 후 6년 뒤인 1863년에 철종(哲宗)도 후사 없이 승하하면서 신정왕후는 인생역전의 기회를 맞게 되고 왕위계승지명권까지 갖게 된다.

- 조선의 미래를 결정지은 신정왕후의 선택, 후계자를 고종(高宗)으로 선택하고 자신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헌종(憲宗)과 항렬이 같아진 고종(高宗), 순조-효명세자-헌종-고종의 계통을 잇게 되는데, 이는 신정왕후의 입장에서 보면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

 

효명세자의 뜻을 이은 신정왕후

- 1863년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승하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서 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로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종(高宗), 고종(高宗)을 양자로 입적하고 왕위에 올린 신정왕후는 친아들 헌종(憲宗) 때에는 미처 앉지 못했던 수렴청정의 발 뒤에 앉게 된다.

- 4년간의 수렴청정, 신정왕후는 부정부패로 유명무실해진 과거제도를 정비하고 경복궁 중건을 계획하는데, 모두 남편 효명세자가 추진했던 정책 익종께서 여러 번 경복궁터에 행차하여 옛터를 두루 돌아보면서 다시 지으려는 뜻을 두었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였다” <고종실록 242>

- 권력의 정점에서 남편의 뜻을 이어간 신정왕후, 그녀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임금이라고 해서 세상만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왕실의 어른은 이 어미이니 어미의 말씀을 따르세요.” <드라마에서 신정왕후의 대사>

- 흥선 대원군의 업적으로 알려진 경복궁 중건(重建)의 뒤에 신정왕후가 있었다는 것 대왕대비가 말하기를··· 이 처럼 더없이 중대한 일은 나의 정력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모두 대원군에게 맡겼으니 매사를 꼭 의논하여 처리하라” <고종실록 243> 대원군을 내세워 정책을 펼치지만 실질적인 뒤편에는 신정왕후가 있었던 것

- 엄청난 예산이 필요한 경복궁 중건, 무리해서 추진한 이유?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조선 후기 왕실의 과제로 남겨진 경복궁 중건, 또한 경복궁은 태조(太祖)가 세운 정문으로 영조(英祖) 때부터 경복궁을 재인식하게 되는데, 조선의 기초가 되는 정궁(正宮)으로서의 이미지로 활용된 경복궁, 효명세자 대리청정시 경복궁 터를 두 번이나 방문해 중건을 계획하는데, 고종(高宗)을 통해 이를 계승한 신정왕후

- 신정왕후 수렴청정 기간 4년은 흥선 대원군의 개혁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던 시기와 맞아떨어지는데, 경복궁 중건·과거제 폐단 시정·서얼의 허통(許通) 등은 효명세자가 계획했던 개혁정책을 그대로 실행에 옮긴 것

- 조선시대 세도정치의 종식과 개혁을 흥선 대원군의 업적으로 흔히들 얘기를 하지만 출발점은 효명세자이고 남편 효명세자의 정치적 계승자가 된 신정왕후가 있었던 것

- 정적 안동김씨에 대한 풍양 조씨 신정왕후의 정치적 보복은?

상징적인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세도정치 권력의 집중지인 비변사를 혁파하여 집중된 권력을 의정부와 삼군부로 분할하고 후에 비변사를 다시 의정부에 통합하는 것

비변사 : 조선 중기 이후 국정 전반을 총괄하던 실질적 최고 관청

- 흥선 대원군의 업적으로 알았던 비변사 혁파, 여성이 표면적으로 정치일선에 나서기 어려웠던 시대에 반() 안동김씨인 흥선 대원군을 정치적 협력자로 선택한 신정왕후, 존호가 무려 56자에 달하는 조선 왕비 중 가장 긴 존호를 가진 왕후로 고종(高宗)은 행사 때마다 존호를 붙여 올린다.

- 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재회?

사후 60년 만에 합장한 무덤 수릉(綏陵, 경기도 구리시), 합장된 무덤은 수릉 외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융릉(隆陵), 정조(正祖)와 효의왕후의 건릉(健陵)이 있고, 한 왕실에서 부부의 삶을 함께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그런 점에서 효명세자와 신정왕후는 19세기 조선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 셈

- 흔히들 세도정치의 시대를 정치는 실종(失踪)되고 권력만 추구했던 시대로 평가를 하지만 효명세자와 신정왕후는 시대적 모순에 운명적으로 저항했던 인물상대적으로 조명 받지 못한 조선왕실의 개혁시도가 있었다는 것, 물론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속에는 기억해야 할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부부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것이고 당시는 상대적으로 민()이 성장하는 시기였기만 왕실 내에서도 나름대로 개혁을 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