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조(純祖), 김조순의 딸을 왕비(王妃)로 맞던 날
〇 19세기 퇴행의 역사로 가는 비운의 그 날
- 1802년 10월 16일 창덕궁에서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조선 제 23대 왕 순조(純祖)의 가례로 13살의 순조(純祖)가 맞이하는 신부는 선왕 정조(正祖)의 신임을 받던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였다
- 순조(純祖)와의 혼례로 임금의 장인이 된 김조순, 이날의 혼례는 안동김씨를 시작으로 세도정치 63년간 퇴행의 역사로 가는 서막을 열게 되는 것이었다.
- 세도정치란?
세도(世道)는 중종 때 조광조가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로 사용했던 용어이지만, 19세기(순·헌·철종)의 세도정치는 세도(勢道)로 극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상황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사용
- 안동김씨, 세도(勢道)를 부리다.
“조선은 이씨의 나라가 아니라 김씨의 나라다!” & “세상에는 장동 김씨만 알고 국가가 있는 줄은 모른다!” 장동김씨는 본래의 안동김씨가 16세기 한양으로 상경하여 장의동(청운·효자동) 일대에 터를 잡은 장의동 김씨가 장동김씨, 즉 안동김씨 중 장의동에 사는 권문세족이 장동 김씨인 셈
- 연달아 3명의 왕후를 배출한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이 왕비가 되던 날을 시작으로 23대 순조(純祖)의 순원왕후(김조순의 딸), 24대 헌종(憲宗)의 효현왕후(김조순의 6촌 김조근의 딸), 25대 철종(哲宗)의 철인왕후(김조순의 7촌 김문근의 딸)
〇 정조(正祖)는 왜 김조순의 딸을 선택했나?
① 할아버지의 은인, 김조순의 집안은 노론 명문가집안으로 고조부인 김창집(1648~1722)은 경종(景宗) 때 영조(英祖)를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한 노론 4대신 중 한 사람, 당시 김창집은 영의정으로 영조(英祖)가 왕위를 이어받도록 했고 김조순은 그의 후손
- 또한 조부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척화파로 조선시대 의리론의 상징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김수항(숙종 대 영의정), 김창집(숙·경종 대 영의정), 김조순까지 영의정을 연이어 배출한 명문가, 이런 후광에 힘입어 정조(正祖)도 김조순의 딸을 간택
- 김조순은 정치적으로는 노론의 시파(時派), 이들은 정조(正祖)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세력으로 정조(正祖)의 입장에서는 노론 명문가 출신 + 같은 정치적 입장인 시파(時派)로 정조(正祖)에게 김조순은 금상첨화인 셈
② 김조순의 본명은 낙순, 1785년 문과에 급제한 김조순 “과연 문정(김상헌)을 닮은 손자로구나!” 하셨다. 처음 휘는 낙순이었는데, 이때에 임금께서 지금 이름을 하사하셨다.” <김조순, 신도비> 할아버지 조(祖)자를 추천한 것
③ 반성문, 김조순은 예문관 근무시절에 청나라 연애소설 <평산냉연>을 읽게 되는데, 당시 정조(正祖)는 노론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문체반정>을 시행하던 시기로 김조순도 같이 부르게 되지만, 청나라 사신으로 가게 된 김조순에게는 “압록강을 건너기 전(前)까지 반성문을 제출하고 모범적인 글을 써서 보내라”는 어명을 내린다.
※ <평상냉연> 평·상·냉·연이라는 네 명의 남녀가 주인공인 청나라 초기 풍속소설
- 반성문을 읽은 정조(正祖)는 “문체가 바르고 우아하며 뜻이 풍부하여 무한한 함축미가 있다. 촛불을 밝히고 읽고 또 읽으며 무릎을 치곤하였다” <정조실록 16년 11월> 결과적으로 반성문사건으로 정조(正祖)의 신임을 한층 더 얻게 되고, 김조순을 세자(순조)의 스승으로 임명한다. “영고께서 소자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기를 ‘지금 내가 이 신하(김조순)에게 너를 부탁하노니’ 이 신하는 반드시 비도(非道)로 너를 보좌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렇게 알라고 하셨다” <순조실록 32년 4월 3일> 하지만 비도(非道) 대신 세도(勢道)를 선택한 것은 문제
- 정조(正祖)는 하나 뿐인 아들 순조(純祖)의 혼처를 고르는 일이기에 많은 고민을 했을 것, 모순인 것이 외척의 득세에 염증을 느꼈던 정조(正祖)가 순조(純祖)의 정치적후견인으로 외척 김조순을 택한 것이 실망스럽지만, 정조(正祖) 역시 외척의 도움이 정치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듯
- 초(初)간택 이전부터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고른 정조(正祖) “신(김조순)의 집 처녀단자가 보이지 않자··· 상(정조)이 즉시 명하여 단자를 올리게 했다” <풍고집 권17 별집 영춘옥음기> 초간택 후(後) 김조순에게 친서를 보낸 정조(正祖) “자전·자궁이 특별히 그를 가리키면서 저게 뉘 집 처자냐고 물으시고 상하 모두가 진심으로 좋아하면서 그런 처자는 처음 보았다고들 하였다.” <정조실록 24년 2월 26일> 그러나 마지막 간택을 남겨놓고 정조(正祖)는 갑자기 승하하게 된다.
※ <영춘옥음기>는 김조순과 정조(正祖)의 독대(獨對) 기록집
〇 정순왕후의 수렴첨정, 김조순의 위기
- 1800년 6월 정조(正祖)의 갑작스런 승하로 11살 순조(純祖)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시작한 대왕대비 정순왕후, 정국은 급박하게 돌아서고 정권을 잡은 정순왕후는 정조(正祖)의 개혁정책을 없던 일로 되돌리면서 천주교를 핑계로 시파(時派)인 남인세력을 축출하고 왕권강화책으로 조직한 군대인 장용영을 혁파하고 규장각의 기능마저 축소시키면서 정조(正祖)의 총애를 받던 김조순은 정순왕후의 반동정치 속에서 그 역시 정치적 보복을 피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다.
- 선왕(先王)의 업적을 뒤엎어도 되는가?
정조(正祖) 사후에 벽파(辟派) 정권이 권력을 잡는데, 이들은 강성으로 반대파인 시파(時派) 축출에 집중, 정순왕후 역시 정치적 야심이 드러나는 것이 기록에도 스스로를 여주·여군이라 칭하고, 심지어 옛날 문정왕후가 다시 나타났다는 인식으로 문정왕후 때 외척 윤원형(문정왕후 동생)이라는 인물이 있었듯이 정순왕후도 친정가문인 경주김씨가 외척정치를 행사하면서 김도순 세도정치의 전 단계를 밟아 놓은 셈
- 정순왕후가 김조순과의 혼담을 깰 수도 있었을 텐데?
실제로 벽파세력의 방해사건이 있었는데, 정조(正祖)의 3년 상(喪)이 끝나고 다시 거론된 순조(純祖)의 가례일, 1802년 10월로 결정했을 때 ‘권유’라는 신하가 10월에는 길일(吉日)이 없다며 반대상소를 올리지만 관철되지 못하고, 오히려 권유는 순조(純祖) 가례 이후 국혼방해죄로 처벌을 받게 된다.
- 정순왕후는 왜 혼사를 뒤집지 않았을까?
제일 중요한 것은 재간택까지 마친 정조(正祖)의 유지로 혼사를 뒤엎을 명분이 없었던 것, 실제로 김조순도 정순왕후에게 정치적인 동조의 반응을 보이면서 벽파(辟派)쪽에서 정적을 제거할 때도 반대하지 않고, 되치기 당하기 쉬운 고위직을 계속 사양하며 사표를 제출하여 처세를 이어나간다.
- 또한, 정조(正祖)는 영조(英祖)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원릉을 조성했는데, 영조(英祖)의 정비인 정성왕후 무덤인 홍릉 옆에는 이미 영조(英祖)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만약 영조(英祖)가 정비인 정성왕후 옆에 묻히면 정순왕후는 홀로 남게 되는 것, 그래서 정조(正祖)도 자신이 영조(英祖) 곁에 묻히면서 자연스럽게 정순왕후의 자리를 배려하여 원릉을 조성했던 것, 지금도 영조(英祖) 옆에는 계비인 정순왕후가 있는데 종합해서 보면 정순왕후는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정조(正祖)가 고른 혼처를 뒤집지 않은 것
※ 원릉 : 영조(英祖)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무덤
- 김조순이 정치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그의 성품으로 조정에서 은인자중했던 김조순, 관직의 후보에 올랐을 때도 “풍고 김조순이 상소하기를··· 신은 무능하고 노쇠한 사람이니 우선 놔두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임하필기 제31권 순일편> 하면서 같이 후보에 오른 네 사람을 모두 칭찬했다는 사례를 보면 노련한 처세술로 적을 만들지 않은 김조순의 처세력
〇 발 뒤의 정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궁금하다.
- 수렴청정의 대명사 네 사람, ① 명종(明宗)을 대신해 수렴청정한 문정왕후(중종의 계비) ② 조선시대 처음으로 수렴청정한 성종(成宗) 때의 정희왕후(세조의 비), ③ 19세기에 들어서 정순왕후와 순원왕후의 연이은 수렴청정으로 역사에 기록을 세운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는 헌·철종 두 명의 왕을 연이어 수렴청정.
- 수렴청정 시 왕과 대비 중 누가 정중앙에 위치? <임혜련, 숙명여자대학교 박사>
문정왕후 대는 대비가 정중앙에 있었으나, 순조(純祖) 대에는 왕이 정중앙에 있었고 대비는 발 뒤의 동쪽 편에 신하를 마주보게 위치, 이는 영·정조 시대에 신장된 왕권이 반영된 것
- 수렴청정이라 해도 보고는 왕에게 직접 하는 것으로 왕은 단순히 허수아비가 아닌 최고의 권력자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대비가 참여했던 차대(次對)는 5일에 한번(6회/월) 모여 수렴청정 하는 날로 정해져 있었던 것
※ 차대(次對) : 비변사를 포함한 대신들이 임금에게 주요 정무를 아뢰는 일로 지금의 국무회의
-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모후의 섭정(攝政)과 수렴청정의 차이?
고구려·신라·고려시대 어린 왕이 즉위할 경우에는 왕의 어머니인 모후가 섭정(攝政)을 펼쳤는데, 섭정은 어머니가 왕을 보호하기 위한 대리정치이지만 조선시대 수렴청정은 이러한 섭정과는 다른 것으로 왕과 대비가 함께하는 정치
- 수렴청정은 대비의 뜻에 따라 거두나?
조선시대 수렴청정은 총 7회로 보통 왕이 15세(철종 22세)무렵이면 철렴환정(撤簾還政)을 하는데 시기는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친정(親政)이 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대왕대비는 철렴을 공식적으로 하교한 뒤 물러나게 되는 것
〇 김조순, 권력의 중심에 서다
- 3년 만에 정순왕후가 철렴하고 1803년 순조(純祖)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국정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김조순은 여러 벼슬을 두루 역임한다 “김조순이 이미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을 총찰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이었다.” <순조실록 32년 4월 3일 ‘김조순의 졸기’>
- 30여 년간 권력의 중심이었던 김조순, 이 무렵 일어난 홍경래의 난 “권세 있는 간신배가 날로 치성하여 김조순·박종경의 무리가 국가의 권력을 제 멋대로 하니···” <홍경래의 난 격문> 이는 안동 김씨와 반남 박씨가 세도(勢道)를 부렸다는 것
※ 홍경래의 난 : 1811년 세도정치와 지역차별에 저항해 평안도 지역에서 일어난 변
- 그러나 최고 권력자 김조순의 태도는 물러나려는 듯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자리를 바라보는 처세의 달인다운 모습, 최고의 실세이지만 권력의 핵심요직은 맡지 않고 측근들을 주요 관직에 포진시키고 자신은 막후에서 조정 역할을 맡았던 것
- 주변에서 좋은 평판을 듣는다 해도 세도(勢道)정치의 시발점이라는 책임은 면치 못할 것, 역설적으로 김조순이 차라리 권력을 휘두르는 성격이었다면 안동김씨 세도정치는 계속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뛰어난 처세술 덕분에 안동김씨가 60여 년의 세도정치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 게다가 왕(효명세자 익종 · 현종)들의 요절(夭折)은 안동 김씨에게는 세도정치의 기회를 제공한 셈
〇 안동김씨 세도, 본격화되다.
- 대표적인 김조순에 관한 기록 “조순이란 사람은 또한 자못 삼가고 조심스러우며, 넉넉하고 후덕한 성품인지라··· 지금까지 사람들이 혹 칭찬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람스럽게도··· 권세를 거머쥔 간신으로서의 흔적이 있었다.” & “그의 아들과 손자 등이 계속 뒤를 이어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는데, 그 교만하고 사치스러움과 음란하고 잔인함은 끝이 없었다.” <황현, 오하기문>
- 김조순이 기틀을 마련하고 후대에 본격화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은 순조(純祖) 말년에 김조순을 이어 세력을 잡게 되고, 둘째 김원근은 오래 살지 못했으며, 문제의 셋째 아들 김좌근은 42세에 과거를 급제하여 4년 만에 이조판서에 오르면서 헌·철종의 연이은 세도정치를 장악하는데 이 시기가 순원왕후가 힘을 쓰던 시기로 이때부터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본격화되고 김좌근의 집 앞에는 연일 사람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 이들이 찾는 이유는 지방수령임명권을 가진 김좌근에게 청탁하기 위해서였는데 정작 벼슬청탁을 위해 만난 사람은 김좌근의 소실 나합, 그녀에게 뇌물을 바치면 뇌물의 액수에 따라 벼슬의 고하가 결정됐는데 매관매직의 온상인 김좌근의 사랑방
〇 부패한 세도정치, 매관매직
- 철종(哲宗) 때 병(炳)자 돌림인 김병학·김병국·김병기의 연 이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지금의 인사동에 있는 그들의 집 앞에는 청탁을 하려는 자들로 문전성시, 야사에 따르면 김좌근의 첩이었던 나주출신 기생 나합은 김좌근과 아들 김병기의 권력을 이용하여 조정과 지방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했는데, 나주(羅州) 출신의 나(羅)와 합하의 합(閤)자를 딴 이름으로 나합은 합하(閤下)만큼의 영향력을 가졌던 것 “전략과 술수가 뛰어나 김좌근이 그(나합) 독에 빠졌다가 오랜 뒤에는 제압당했다. 많은 방백과 수령들이 그 녀의 손에서 나왔다.” <매천야록 제1권>
※ 합하(閤下) : 정1품 벼슬아치를 높여 부르는 말
-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도 등장하는 나합, 한강 하류에 밥을 풀어 물고기를 먹이는 행사를 하는데 굶주린 백성들이 한 술 얻어먹고자 구름 떼처럼 나왔다가 매질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당시 위정자의 타락상이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보여주는 것
- 당시는 가뭄과 자연재해에 역병까지 창궐하여 백성들은 매우 살기 힘든 시기로 매관매직의 시세는 소과급제 3만 냥 · 대과급제 10만 냥 · 초사(처음 벼슬) 1만 냥 · 관찰사·유수는 10만 냥으로 당시의 1냥은 쌀 20Kg의 구매력으로 3만 냥은 현재 돈 약 12억 원으로 매관매직한 관리들은 본전을 찾기 위해 백성들을 더욱 수탈하게 되는 것
〇 부패한 세도정치, 과거제도의 문란
- 세도정치의 가장 큰 병폐는 과거제의 문란으로 관료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린 세도가문의 권력독점 “여러 유생이 서로 밀치느라 소동이 일어나서 소란이 극심하였다. 제학은 도포가 찢어지고 관모가 떨어졌으며 대사성은 허겁지겁 달아나서 그 광경이 놀라웠다.” <무명자집 문고>
- 시험도 치르기 전, 합격 잔치 준비까지 한 세도정치 가문, 심지어 글을 모르는 사람도 과거에 응시하여 과거시험 자체가 권위에서 추락한 것
- 능력에 따라 출셋길에 오를 수 있었던 조선의 과거제도이지만 세도정치 기(期)에 무너져버린 과거제도의 긍정성, 또한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세도가문 자제들이 주요보직을 독차지하여 지방출신이나 한미(寒微)한 출신들은 출셋길이 막혀 홍경래 난의 배경은 지방차별로 인해 출셋길이 막힌 평안도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
〇 부패한 세도정치, 국혼(國婚)으로 이은 권력
- 19세기 세도정치는 안동 김씨가 주축을 이루며 몇몇 세도가들이 함께했는데, 유독 안동 김씨를 떠올리는 이유 ① 권력 독점에 대(代)를 이어 지속 ② 3대에 걸친 왕비 배출했기 때문으로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는 헌·철종의 왕 지명권까지 가졌던 상황.
- 만약 김조순의 딸이 순조 비(妃)로 간택되지 않았다면 세도정치는 없었을까?
정조(正祖)는 김조순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여 외척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개혁의 뜻을 펼치려 했으나 갑자기 승하한 것이 패착, 또 하나는 선왕(先王)들의 요절(夭折)로 충분히 국왕교육을 받지 못한 세자가 왕으로 즉위하여 결국은 세도정치가 지속된 것으로 어느 한 사람의 책임이라 할 수는 없을 것.
- 당시는 정말 국운이 기울고 있었던 것인지 왕들의 요절(夭折)로 국운이 나빠졌던 것인지 영·정조시대의 르네상스가 소수가문의 권력독점으로 무너져 버린 것, 또한 세도가문을 견제할만한 세력이 없었던 것도 문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윤리를 망각했을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〇 세계는 그 때
- 19세기 당시 유럽, 영국은 철도 개통 후 산업혁명으로 세계를 향해 진출, 프랑스는 계속된 혁명으로 인권이 신장되는 등 산업화와 민주화로 약진 중인 반면, 19세기 조선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
- 이 때를 역사학에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라 하는데, 서양세력이 점점 동쪽으로 밀려오는 시기로 1840년 아편전쟁으로 홍콩이 할양되고, 1860년에는 우리나라 북쪽에 러시아가 나타나는 등, 현재의 국제상황과 비슷한 판이 서서히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조선은 내부적으로 이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
- 뼈아픈 반성을 통해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를··· 지난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 논어(論語)의 부진즉퇴(不進則退) 불변즉망(不變則亡)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뒤처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는 변(變)해야만 했던 시기, 왜냐하면 세계정세가 급변하고 있고 판도가 바뀌는 세상이라서 변하지 않으면 망하는 시대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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