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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군주 정조(正祖)의 신해통공

mkpark2022 2015. 7. 27. 18:52

 

 

 

개혁군주 정조(正祖)의 신해통공

 

 


정조(正祖), 소상인들의 눈물을 닦아주다

- 상공업이 눈부시게 발전하던 18세기 조선, 하지만 그 뒤엔 소상인들의 피눈물이 있었다?! 판매 독점권을 등에 업은 시전(市廛) 상인들이 소상인들의 물건을 헐값에 빼앗는가 하면 관아에 끌고 갔던 것! 소상인들의 억울한 눈물을 본 정조(正祖), 혁신적인 경제개혁을 단행

- 드라마, <거상 김만덕>

정조(正祖) 제위 초, 도성 밖에서는 매일같이 백성들의 통곡소리가 이어졌는데, 정부로부터 특정상품의 판매 독점권을 부여받은 시전상인(市廛商人)들이 힘없는 소상인들을 불법행위를 하는 난전(亂廛)으로 몰고, 시전상인의 권한을 악용해 물건을 헐값에 빼앗으며 형조·한성부에 끌어가는 것도 서슴지 않았는데 소상인들은 속절없이 당하기만 하는 억울한 상황, 소상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정조(正祖)의 고민이 시작됐다.

- 시전(市廛)은 조선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은 상설시장, 난전(亂廛)은 허가를 얻지 못한 상인으로 잉여농산물과 가내수공업의 전형적인 생계형 상인들인데, 시전상인들이 금난전권의 특권을 행사하면서 갖은 횡포를 일삼았던 것

금난전권(禁亂廛權) : 시장 상인들의 난전(亂廛)을 금지할 수 있는 권리

- 난전은 원칙적으로 불법, 처벌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지만 경우가 지나쳐서 횡포까지 나타나는 것이 문제, 지방 소상인이 서울에 물건을 팔러오면 반드시 시전상인에게 넘겨야 하고, 이를 파는 행상들은 시전상인에게 물건을 사야 하는 구조로 시전상인들은 중계권을 장악해 싼 가격에 물건을 사서 행상에게 비싼 가격으로 판매하지만 이를 거부하면 난전은 불법이므로 처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

 

18세기 조선의 시장을 가다

- 시장의 가장 인기 있는 구경거리는?

<태평성시도>18세기 도성 내 전경을 그린 풍속화, 원숭이는 70~80년대까지 볼 수 있었던 구경거리, 또 하나는 방()으로 고구려시대부터 시장의 사형집행 기록, 조선 초기는 주로 정치범들을 대상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김종서 부자·성삼문·한명회 등이 시장에서 효시(梟示)를 당했던 인물, 시장에서의 사형집행은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여론을 환기시키는 작용을 하려는 것

- 시전 상인들 중 가장 권세 있는 자들이 운영하던 육의전은 선전(비단) · 면주전(명주) · 면포전(무명) · 저포전(모시) · 지전(종이) · 어물전으로 조선 정부로부터 특권이 부여된 6개의 큰 시전으로 화폐로도 통용될 만큼 중요한 종이와 직물, 시전(市廛)상인들의 상품 독점 판매권은 이미 권력이 된 상황

 

소상인 울리는 <금난전권>

- 시전상인은 국가에서 지정한 상인?

세금 부담의 대가로 독점 판매권을 갖는 시전상인 머리에 이고 손에 든 물건까지 길목에서 사람을 기다렸다가 싼값으로 억지로 사는데··· 이 때문에 물건을 가진 사람이 간혹 본전도 되지 않는 값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팔아버리게 됩니다.” <정조 15>

- 상품독점판매권을 악용해 소비자에게 폭리를 취했던 시전상인, 금난전권을 행사하던 시전의 수가 육의전의 614100개 이상(18세기)으로 판매금지품목이 점점 많아지는 것으로 상품 판매를 독점한 소수의 상인에게만 이익이 집중되는 불공정한 시스템으로 조선판 대기업의 골목상권 잠식

- 시전의 폐단, 예측하지 못했나?

조선시대 기본정책은 농본상말(農本商抹)농업은 우대하고 상업은 억제하는 것으로 노동에 비례하여 대가를 얻는 농업과는 달리, 경우에 따라 노동의 양과 상관없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상업은 성리학의 이념인 ()를 추구하는 욕구의 억제에 반하는 것

- 그렇지만 18세기 조선은 인구가 증가하여 필요한 물품이 많아지면서 상업이 확대되자 국가는 방침을 바꿔 전문 상인집단을 육성하여 상행위를 인정해 주고 이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게 되는 것

-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관리를 하게 되면서 상인들의 동태를 쉽게 파악하고 조절할 수 있는 효과도 거둬들이면서 이들에게 독점판매권의 특권을 부여하게 되는 것, 또한 이들은 시역을 감당하는 부담이 있는 만큼 금난전권의 특권이 필요했던 것

시역 : 시전(市廛)에 부과되는 특별세금으로 왜란과 호란 이후 재정확보를 위해 특권을 주고 세금을 부과

- 시전상인 증가는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세수(稅收)가 확보되는 방안으로 이를 묵인하면서 시전상인의 수가 점점 증가하게 되어 권력화 된 것, 후에 이들은 방납(防納)에 깊숙이 관여하여 사신단을 수행하면서 사무역에 종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전쟁 이후 국가재정이 회복되면서 시전상인들에게 지나친 이권이 집중하게 된다.

시전 상인의 특권 금난전권 관수품 납품 국고의 잉여물 처분 우선권 부여


내 억울함을 들어주오, 상언(上言)과 격쟁(擊錚)

- 정조(正祖)의 행차에 소상인들의 격쟁이 연일 이어지고··· 영조(英祖)는 창경궁 홍화문 근처의 궁 안에 신문고를 설치하여 민의를 청취하려 하였으나, 이는 상징적인 의미로 백성들이 궁 안의 신문고에 부담 없이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 그러나 상언(上言) · 격쟁(擊錚)은 왕이 공개적으로 능행길에 접수받을 것을 명령하고 능행 후에 왕이 곧 바로 민원을 해결하는 것으로 특히 격쟁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 징을 치면 담당 관리가 받아 적어 왕에게 올리는 제도로 상언·격정의 주체는 천민과 평민이 반 이상을 차지 구경 나온 백성들이 산과 들을 가득 메웠다. 상이 백성의 고통에 대해 두루 물었다.” <정조실록 정조 16>

- 수많은 상언과 격쟁 처리, 비효율적인 국정운영이 아닌지?

경호의 어려움을 들어 백성들의 접근을 금지할 것을 건의한 포도대장에게 정조(正祖)무릇 팔방의 백성은 모두 나의 赤子(갓난 아이)이므로 내가 보살펴야 한다.”는 대답을 하여 민원청취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 대신들도 이를 막기 위해 소민이 상언을 하는 것은 매우 외람되고 난잡한 행동입니다. 상언과 격쟁을 받지 마소서” & “듣거라! 저 말할 곳 없는 자들이 억울함을 가슴에 품고 달려와 하소연하기를 어린 자식이 부모에게 하소연하듯 하니 그렇게 만든 자가 잘못이지 저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 애민군주(愛民君主)의 진정성200년의 시공간을 건너서 가슴에 감동을 주고 진정한 소통과 공감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으로 구중궁궐을 벗어나 백성과 소통한 정조(正祖), 보고만 듣고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민심의 현장을 보면서 정확한 진단으로 정책을 펼쳤기에 보다 효율적일 수 있었던 것

 

덩치 커진 시전(市廛), 배후는?

- 정조(正祖) 1년에 주요 군문대장 실각사건, 그들이 부리던 노비의 불법상업행위에 발목 잡힌 것, 사건을 파헤쳐보니 덩치가 커진 시전상인들은 군영과 노론 세도가와 결탁해 뒤를 부탁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백성들은 그들에게 힘으로 대항할 수 없게 되고, 뿐만 아니라 군영과 노론 세도가들 휘하의 상인들 중에는 난전(亂廛)으로 분류되던 가게들이 허가를 받은 시전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 더 큰 문제는 조정에서도 시전상인이 늘어나는 것을 반긴다는 것으로 이는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는 방식으로 활용한 것, 조선정부·시전상인(노론 세도가군영 이들의 삼각관계를 끊지 않고서는 조선의 상공업사회로의 발전은 요원한 것.

- 비리세력의 실체가 명확히 밝혀졌나?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노론세도가와 군영이 권력과 결탁했음이 추정 가능한 것이 숙종(肅宗)때의 사례이긴 하지만 노론집안 인현왕후 민씨 세력이 외어물전을 시전(市廛)으로 등록한 사례를 보아 당시 실세 노론세도가가 정치자금을 끌어 모으는데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

- 중요한 것은 정조(正祖)의 개혁방향, 당시 군영은 막대한 군사력과 화폐 주조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조(正祖)는 즉위 초부터 비리를 저지른 군영세력을 처벌한 것

 

정조(正祖), 정치개혁의 선봉에 채제공을 세우다

- 기득권 세력보다 일반백성들의 민심을 수용하려고 노력했던 정조(正祖), 당시의 실세인 노론 출신이 아닌 남인 출신 채제공을 정승으로 내세워 형식상 채제공이 건의하고 이를 받아들여 정책을 추진한 정조(正祖)

- 채제공의 건의 만들어진 수십 년이 안 된 작은 시전(市廛)은 혁파 육의전 이외의 시전(市廛)은 금난전권 행사 불가 지나치게 소상인을 고발하는 형사권 남용금지 등으로 불법적으로 탈바꿈한 난전을 혁파하는 것과 지나치게 소상인을 고발하는 횡포는 금지하라는 건의 내용

- 경제개혁의 이면에는 노론과 남인의 정치적 힘겨루기?

그런 측면이 없지 않은 것이 체제공의 건의에 가장 반발하는 인물이 호조판서 김문순 노론 대신 김문순이 아뢰기를 여러 점포들 가운데는 설치한지 수백 년에 가까워 뿌리가 이미 단단해졌고··· 위로 국가의 수요에 응()하는 것도 있는데···’ 이것이 실로 금지하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정조실록, 정조 15>

- 채제공은 항의하는 시전상인들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수원에서 관리생활 할 때는 수원까지 따라 내려와 비난받는 경우도 겪게 되지만, 모든 반대는 왕이 아니라 자신이 감내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하며 정책을 밀고 나가면서 정조(正祖)의 정치개혁에 방패막이 겸 행동대장 역할을 하게 된다.

- 정조(正祖)는 신하들 간 권력의 힘 조율을 이루면서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추진할 줄 아는 현명한 왕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결국 경제개혁은 채제공을 내세운 정조(正祖) 자신의 뜻일 것

 

정조(正祖)의 어찰(御札) 수신인 심환지, 그는 정조(正祖)를 독살했나?

- 드라마 <영원한 제국> 노론에 의한 정조(正祖)의 독살설을 그린 드라마로 정조(正祖)와 가장 날선 대립각을 세우는 노론 대신 심환지는 권모술수에 능한 역적으로 그려졌다. “사도세자가 우리 노론을 비판하고 자기 세력을 키우려 하자. 우리가 미치광이로 몰아서 죽게 했다고···” <심환지 대사>

- 그런데, 2009정조(正祖)의 정적이라 여겼던 노론 대신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正祖)의 어찰 299통이 대량 발견되는데, 왕이 신하와 주고받은 편지치고는 역사상 최대 규모, 그런데 편지의 내용을 보니 정적(政敵)이라 하기엔 너무 친절해 보이는 사이

심환지 : 조선 후기 문신으로 노론계 인물, 사도세자의 반대편에 섰던 벽파의 영수

- 자료가 나오기 전까지는 정조(正祖)의 독살설 배후에는 항상 등장하는 노론 대신 심환지였는데 편지의 내용을 보니 정조(正祖)와 심환지는 정치적 협력관계로 특정사안에 대한 상주문(신하가 올리는 글)을 정조(正祖)가 미리 작성해 심환지에게 보내면 심환지는 정조(正祖)의 지시대로 상주문을 적어 올린 것

- 대표적으로 17988월에 심환지를 우의정에 재수해 놓고는 사직상소를 미리 준비하라는 지침을 내리면서 사직상소 내용의 유의점까지 알려줬던 정조(正祖), 또한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동생이자 정조(正祖)의 고모로 정조(正祖)의 즉위에 반대한 인물이지만 정조(正祖)는 말년에 화완옹주를 사면하려하는데, 심환지 같은 경우에는 반대를 해야 할 입장이어서 사전에 조치가 이루어진다. 네가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면 내가 너를 자를 것이고, 이내 다른 방도가 있으니 그리 알라는 지시를 한다.

- 실제로 조치가 이뤄지면서 심환지는 아니 되옵니다!를 외치는데, 이것은 심환지 입장에서 보면 화완옹주의 복권을 반대하여 자신의 명분을 지킬 수 있는 것이고, 정조(正祖)는 대신을 내치면서까지 자신의 강한 의지임을 표현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심환지는 복귀가 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면서 반대여론을 잠재우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 <정약용 편>에서 정약용에게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던 사례가 있었는데 이는 정조(正祖)의 뛰어난 정치력

- 비밀편지 발견은 역사학계에서는 충격적 사건으로 정조(正祖)는 개혁의 선봉에 채제공 뿐만 아니라, 최고의 정적이라 여겼던 심환지에게도 정치적인 지침과 조율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것으로 편지 내용 중에는 체재공의 의견에 너무 공격하지 말라거나 심환지의 부인이 병석에 눕자 쾌유를 기원하며 인삼까지 선물하는 내용도 포함,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개혁의 방패막이 채제공의 뒤에는 분명 정조(正祖)의 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

 

<신해통공>, 경제개혁의 포문을 열다

- 조정에서는 금난전권의 폐단이 공론화되고, 마침내 1791년 정조(正祖)는 개혁정책을 발표한다. “과인은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백성 누구에게나 상거래를 허용할 것이오.” <신해통공>의 통공은 양 쪽으로 잘 통한다는 의미로 정조(正祖) 15년인 1791년에 실시된 정책으로 육의전을 제외한 다른 시전들의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 상업을 가능케 한 정책이다.

- 기존의 시전이 갖던 특권을 몰수하고 모든 상인이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한 통공정책으로 정조(正祖)는 소상인의 편에 서 주었던 것, 발포 당일 길거리와 성문에 한글과 한자로 쓴 방()을 붙여놓고 공고하여 대대적인 홍보로 정부의 정책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 신해통공의 실제로 효과가 있었나?

긍정적 효과의 기록을 보면 어물 등의 물가가 갑자기 전보다 싸졌다고 하니 개혁을 하고 난 뒤에 실효가 있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장작 값이 단숨에 옛날 수준으로 돌아왔습니다.” <정조실록, 정조15> 독점을 혁파하여 긍정적인 효과는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보다 더 긍정적인 효과는 사상(私商)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 독려로 전국 각지에 지점을 설치해 유통망확보와 대외무역도 사상(私商)이 장악하게 되는 것

사상(私商) :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해 물품을 교역

- 부정적 효과로 사상(私商)에 의한 매점매석으로 물가상승도 없진 않았으나, 거시적(巨視的) 관점으로 볼 때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것으로 자유로운 경제활동의 발판을 마련한 셈, 시장의 경제논리를 믿었던 군주의 밑바닥에는 정치라는 것은 민심을 존중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지 않았을까(?)

- 이러한 정조(正祖)의 기본정신을 알 수 있는 창덕궁 후원 <존덕정>정자의 현판 萬川明月主人翁달은 하나뿐이고, 물의 종류는 일만 개가 되지만, 물이 달빛을 받을 경우 달도 일만 개가 된다. 정조(正祖)는 스스로가 달로 생각하고 모든 백성을 달이 비추듯이 골고루 사랑하겠다는 애민사상이 소상인 보호정책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