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주에 갇힌 사도세자(思悼世子)
〇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
- 아바마마, 소자의 죽을죄가 무엇입니까? 조선 역사상 전대미문의 비극이자 아비가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인 엽기적인 사건, 영조(英祖)의 아들 사도세자의 죽음! 광증(狂症)에 사로잡힌 비운의 왕세자 혹은 당쟁에 휘말린 정치적 희생양, 사도세자를 둘러싼 수많은 의혹들, 그는 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일까?
- 1762년 윤5월 13일(영조 38년) 조선왕실 최대의 비극, 아들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요구한 영조(英祖), 아비가 원한 아들의 죽음은 세손(정조)조차도 막을 수 없었던 왕명이었다.
- 마침내 사도세자는 스스로 뒤주에 들어가 갇히고 무더운 한여름 뒤주 속에서의 8일, 천둥·벼락이 치던 날 마침내 사도세자는 죽음을 맞이했다
※ 임오일기(壬午日記) : 승정원 주서(主書) 이광현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임오년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
- 세자가 이런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된 이유?
영조(英祖)는 사도세자에게 칼을 내주며 자결을 하라 하지만 세자는 칼을 두고 목을 매려하고 신하들은 세자를 말리면서 땅에 이마를 찧어 자결을 하려하지만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결국 뒤주를 가져오라고 명한다.
- 신하들이 뒤주를 가져오지만 작아서 다른 큰 것을 가져오도록 명하는 걸 보면 치밀하게 계획된 형벌은 아닌 듯 하고, 사도세자 역시 뒤주에서 죽을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듯··· - 발로 차며 탈출을 시도했다는 기록과 갇힌 세자에게 음식을 준다는 소리를 들은 영조(英祖)는 좀 더 튼튼하게 봉하고 새끼줄로 동여매도록 명한다. “영조(英祖)는 결국 초경에 이르러 ‘어버지 임금님 저를 살려주소서.’ 라며 혈육의 정에 호소하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고 직접 널빤지를 대고 대못을 박은 뒤 새끼줄로 다시 묶어 뒤주를 봉한다.” <임오일기>
- 공식 기록은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 윤 5월 21일 사도세자 죽다.” <영조실록 윤 5월 13일> 이것이 공식 기록의 전부이지만 야사와 민담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나중에 부채가 발견됐는데 부채로 물 대신 오줌을 받아먹었다는 것(?)
〇 영특했던 세자의 유년기
- 영조(英祖)가 35세 때 10세의 나이로 효장세자가 사망하게 되고 7년 만인 영조(英祖) 42세에 얻은 귀한 아들 사도세자, 출산 직후 원자 칭호를 부여하고 2살에 세자에 책봉되는 조선시대 최연소 세자에 등극한다.
- 기록에는 생후 4개월 만에 기어 다니기 시작했고 6개월 만에 영조(英祖)의 부름에 답했다고 영아기의 영특한 모습이 기록될 정도로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사도세자, 세자가 돌이 될 무렵부터 조기교육이 시작 되고, 영조(英祖)의 기대에 부응하는 사도세자 “비단과 무명을 놓고 ‘어느 것이 사치이고 어는 것이 사치가 아니냐?’ 라고 묻자. 세자는 비단을 집어 들고 ‘이것은 사치’라고 하더니 무명을 집고는 ‘무명은 사치가 아니다.’ 라고 하였다.” 세 살 때 이미 효경을 읽고 글도 쓰는데 글을 너무 잘 써 신하들이 서로 갖겠다고 다투는 모습도 기록으로 등장한다.
〇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 어긋나는 아들.
- 어려서 천재적 소양을 보였던 사도세자는 10여 세 무렵부터 공부를 멀리하기 시작하고, 영조(英祖)도 눈치를 채고 직접 세자를 가르치지만 아프다는 핑계로 아버지와 공부하는 자리조차 피했던 사도세자, 영조(英祖)는 사도세자가 꾀병을 부린다고 단정한다.
- 공부와 함께 사라진 부자간의 신뢰, 부모의 과도한 기대 + 자녀의 심약한 천성 = 스트레스성 질환, 공부를 게을리 하는 아들을 점점 비난하기 시작한 영조(英祖)는 풍채 좋은 아들의 모습이 싫었던지 ‘그만 좀 먹여라’ & ‘세자가 비대하니 가마가 좁다’는 등으로 자식을 비난하고 밥 먹는 모습조차 미워진 영조(英祖).
- 성격 면에서도 차이가 있는 듯, 영조(英祖)는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에 무수리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매사에 철저히 준비하는 습성 VS 이에 비(比)해 잡서에 관심이 많았던 사도세자는 병석(홍역)에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삼국지연의>를 읽으며 영웅호걸들의 무용담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도세자, 실제로 사도세자는 무인(武人) 기질이 많았다고 함
〇 무인(武人), 사도세자
- 15세 무렵부터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사용한 사도세자, 청룡언월도는 실전에 사용할 수 없을 정도의 상당한 무게로 중국의 모원의 같은 사람은 실전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고 평가할 정도이지만 빠르게 움직일 수만 있다면 파괴력이 대단한 무기
※ 모원의(茅元儀) : 명나라 말기 병법서 <무비지>를 지은 인물
- 사도세자가 쓴 <무예신보>는 어떤 책?
임진왜란 직후 왜군과의 전투를 대비한 필수 6가지 무예를 수록한 <무예제보>,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면서 북방의 기병(騎兵)에 대적할 수 있는 무예의 필요성이 대두 되었고, <무예제보>에 나온 무기는 곤봉·등패·낭선·장창·당파·쌍수도 등 총 6가지인데 이들은 주로 찌르기에 사용되는 무기로 단점은 빗나갔을 때 방어가 전혀 안 된다는 점.
- 그래서 창의 공격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제작된 낭선은 조선군의 창을 자르고 공격했던 왜군의 특기에 칼로 잘리지도 않아 수비에 효과적으로 적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 또한 당파는 적의 병장기를 걸어 제치거나 누를 수 있는 무기로 상당한 수련이 필요한 고급무기
- <무예제보>는 왜군의 특성상 방어적인 무기 위주로 사용된 검법, 그러나 왜군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청나라 기병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 <무예신보>로 왜군뿐만 아니라 청나라 기병(騎兵)을 상대하기 위해 발간한 책으로 <무예제보>의 6가지 무예 + 12가지 무예가 추가되어 총 18가지 검법이 등장하고 조선시대 ‘군영무예’였던 18기는 <무예신보>에 첫 등장
※ 무예신보 : 영조(英祖) 35년(1759년)에 사도세자가 만든 무예교본으로 훗날 정조(正祖)의 무예도보통지 간행에 참고자료가 됨
- <무예신보>가 조선의 군사력에 미친 영향?
당시 조선의 5군영은 국왕의 통치를 받지 않고 각 군영대장에게 충성을 바치는 군벌적 특성을 지님, 그 결과 군영과 붕당(朋黨)이 연결되어 왕권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또한 이들은 제각기 다른 무예를 익혀 사도세자는 각 군영을 아우르는 무예표준이자 평가기준을 마련하여 군영을 장악하는 무(武)적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는 것
※ 청룡언월도의 자세
신월상천세(新月上天勢) : 초승달이 떠오르듯이 월도를 돌려 잡는 동작
맹호장조세(猛虎張爪勢) : 용맹한 호랑이가 발톱을 세우듯이 월도를 치켜드는 동작
지조염익세(鷙鳥瀲翼勢) : 사나운 새가 날개를 거두듯이 잡는 동작
오관참장세(五關斬將勢) : 관우가 다섯 관문을 지나며 여섯 장수를 참살 하는 듯한 동작
금룡전신세(金龍纏身勢) : 금빛용이 몸을 감싸듯이 칼을 몸 주위로 돌리는 동작
용광사우두세(龍光射牛斗勢) : 용광검의 검광이 우성과 두성을 쏘아내는 듯한 동작
〇 무인 사도세자와 북벌(北伐)
- 고조부인 효종(孝宗)을 닮고 싶었던 사도세자, 효종(孝宗)이 쓰던 청룡언월도를 물려받은 사도세자는 북벌(北伐)에도 관심이 많았으나, 호학군주(好學君主)였던 영조(英祖)는 못마땅했던 것, 문무겸비는 왕에게 필요한 자질이지만 상대적으로 무적기질이 강했던 아들에 대한 불만을 가졌던 것
- 또한 영조(英祖)의 특징은 호불호(好不好)를 노골적으로 구분하는 성향, 출신 콤플렉스로 왕권을 지키기에 집착했던 영조(英祖)에게 생긴 일종의 편집증은 불길한 글자를 꺼려 (죽을 死, 돌아갈 歸)는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같이 있는 것조차 싫어하고, 불길한 말만 들으면 바로 귀를 씻는 습관을 가졌으며 사도세자를 만난 후에는 꼭 귀를 씻었다고···
〇 멀어져만 가는 영조(英祖)와 사도세자
- 영조(英祖)의 귀 씻는 물받이였던 사도세자와 화협옹주, 화협옹주는 사도세자의 3살 위의 동복(同腹)누나로 효장세자 사후에 아들을 기다렸는데 딸로 태어났다고 하여 미워했다고···, 조선의 왕들이 주로 아들과 함께 했던 능행길에도 사도세자와 동행하는 일이 드물었던 영조(英祖), 어쩌다 같이 간 날에 비가 오면 ‘네가 오니까 비가 온다.’는 등으로 꾸짖기도···
- 사도세자는 얼마나 아버지의 신임을 받고 싶었던지 숙종(肅宗)의 무덤인 명릉을 행차할 때 영조(英祖)가 사랑하는 화완옹주에게 부탁을 하여 동행을 허락받는다. “1756년 8월 1일에 처음으로 숙종(肅宗) 능에 따라가니 기분이 시원하시는 듯 하더라!··· 그런 일에는 조금도 병환(病患) 계신 이 같지 않으니··· <한중록>
- 영조(英祖)가 아끼는 인물 효장세자빈과 화평옹주(사도세자 동복 누나)는 영조(英祖)와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지만 화평옹주는 세자 14세 때에 세상을 떠나고, 불행의 연속으로 사도세자 23세 때는 후견인 역할을 했던 정성왕후(영조의 정비)가 사망하면서 같은 해에 인원왕후(숙종의 계비로 영조의 왕위를 지지)도 세상을 떠나서 같은 해에 후견인이었던 어머니를 동시에 잃은 영조(英祖)와 사도세자, 슬픔 속에서 중재자가 없어진 부자지간의 관계는 더욱 멀어져만 간다.
- 사도세자가 더 좋지 않은 상황으로 몰리게 된 것은 1759년에 66세 영조(英祖)는 15세 정순왕후와 재혼을 하는데, 사도세자의 입장에서 보면 10살이나 어린 새어머니를 맞이한 것이고, 게다가 새어머니는 노론계로 소론의 지지를 받고 있던 사도세자와는 정치적 입장이 서로 다른 사람이 들어온 것, 그래서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드라마적 정설이 있는 것
- ,나주괘서사건> 1775년(영조31년) 영조(英祖)의 집권을 비난하는 괘서가 붙는데, 영조(英祖)에 의한 경종(景宗)의 독살의혹 제기로 소론이 지지하는 경종(景宗)을 독살하기위해 영조(英祖)와 노론의 음모가 있었다는 것으로 집권 이후 끊임없이 정당성을 의심받은 영조(英祖).
- 그런데 나주괘서 사건 당시는 사도세자의 대리청정기로 이 일에 대한 사도세자의 처분은 노론의 바람과는 달랐다. 소론을 처벌하라는 노론의 요구를 거부한 사도세자, 소론을 옹호하는 듯 한 사도세자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품은 노론은 점차 사도세자를 경계하고 소론을 가까이 하는 반면 노론과는 거리를 두는 사도세자, 그는 과연 당쟁의 희생양이었나?
〇 사도세자, 당쟁의 희생양이었나?
-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시 소론의 영수 이광좌를 보호하려 했고 뭔가 소론 측에 기울어진 측면이 없지 않았고 사도세자가 어린 시절 머물렀던 저승전의 궁녀들 대부분이 소론이 지지했던 경종(景宗)을 보필하는 등 상대적으로 소론에 가까웠던 사도세자였으나 노론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결정적 근거는 없다.
- 하지만 노론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의 정책 입장과는 서로 달랐기 때문에 부자간의 사이를 벌리려고 노력한 측면도 없진 않았으나, 문제는 처분을 결정하는 주체는 영조(英祖)로 소론에 가까웠다는 이유로 아들을 죽였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오히려 영조(英祖)와의 갈등은 대리청정 기간에 영조(英祖)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인 것
〇 사도세자, 영조(英祖)의 시험대에 오르다
- 왜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했을까?
영조(英祖)의 52년 재위 중 8번의 양위선언을 하는데, 이는 세자와 신하의 길들이기 수단으로 활용한 것으로 첫 번째 양위선언을 한 1739년 당시 사도세자는 5세로 양위를 할 수 없는 나이로 이는 곧 신하 길들이기 위한 조치
- 네 번째의 양위선언은 1749년 당시 사도세자는 15세, 신하들이 양위를 반대하자 영조(英祖)는 이를 거두고 대리청정을 선언한다. “내가 살아있을 때 세자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 15세부터 13년 5개월간 지속된 대리청정은 조선 역사상 최장의 대리청정 기록으로 가장 오랜 기간 대리청정을 했지만 정작 왕은 되지 못한 사도세자
- 대리청정은 상당히 위험한 것으로 너무 잘하면 왕의 자리를 넘보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왕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는 것.
- 실록의 기록에 대신들의 청을 듣고 사도세자가 그대로 시행하라고 하면 “신하들의 요구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면 안 돼!” 하고 질책을 하자 아하!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생각하고 다음에는 그것은 아니 되고 이렇게 하시오 하면 왜 신하들의 말을 안 듣느냐고 나오자 이래도 저래도 안 되는 것으로 나중에는 사도세자가 말이 없어진다는 것
- 영조(英祖)의 목표는 탕평(蕩平)으로 노론과 소론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대리청정의 역할을 잘해서 당쟁(黨爭) 속의 상황을 주도하는 군주의 모습을 기대했으나, 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여긴 영조(英祖)는 세자가 하는 일마다 역정을 내자 “동궁 저하께서 성상의 뜻을 우러러 몸 받지 않음이 없어 찬탄하였는데 전하께서는 매양 지나치게 책망을 하십니다.” <영조실록 27년 6월 12일>
- 결국 영조(英祖)는 사도세자가 하는 일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자 모든 일을 자신에게 거친 뒤 결정할 것을 명하고 심지어 매일의 일정을 빠짐없이 보고하라고 명한다.
〇 죽음까지 부르는 사도세자의 광증(狂症)
- 비운의 여인 세자빈 혜경궁 홍씨, 그녀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쓴 통한(痛恨)의 기록 <한중록(閑中錄)>에서 사도세자가 심각한 광증(狂症)을 앓았다고 기록한다. 사람을 보면 이유 없이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경패증>, 천둥 벼락 소리를 몹시 두려워하는 <뇌벽증>, 옷을 제대로 입을 수 없는 <의대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 “세자는 발작이 시작되면 시중을 드는 궁녀와 내관을 함부로 구타하고 죽이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 “경진년(1760년, 사망 2년 전)이후 내관과 내인이 상(傷)한 일이 많아 다 기억하지 못한다.” & “소조께서 자살하려고 심지어 우물에 빠지려고 했다”
- 혜경궁은 “이 광증(狂症)에 대해서는 자모(子母)도 자세히 모르시고 부왕께서도 알지 못하였다. 어른들을 뵐 적과 신하를 대할 적에는 보통 때와 다름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또한 사도세자의 죽음은 광증(狂症)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묘의 처분도 애통망극한 가운데 부득이 하신 일이요. 경모궁께서 병환으로 어쩔 수 없이 불행한 일을 당하셨다”
- 흔히들 한중록(閑中錄)은 혜경궁 홍씨의 한(恨)이 서려있는 책으로 <원한 恨>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한가할 閑>으로 노년에 혜경궁이 자신의 인생을 편하게 회고해 보겠다고 기록한 책, 처음 부분은 잔잔하게 전개되지만 동궁전 부분에서는 생지옥으로 표현하며 갈등국면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 한중록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광증(狂症)은 실록에도 나타나는데, 사도세자 21세 때 의관(醫官)의 기록에 의하면 세자가 영조(英祖)를 두려워하여 “동궁이 근래에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후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이런 증세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영조실록 31년 4월 28일>
- 최근, 사도세자가 장인(丈人) 홍봉한에게 쓴 편지가 발견됐는데 “열은 높고 울화는 극도에 달해 마치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더불어 상의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사도세자도 자신의 병증에 대하여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
- 사도세자가 앓던 <의대증>은 일종의 강박증, 결국 사도세자가 영조(英祖)를 만나러 가기위해서는 항상 옷차림을 갖춰야 하는데 사도세자의 입장에서 보면 옷을 입는 순간 아버지의 꾸중이 먼 저 떠오른 것.
- 본인 스스로 광증(狂症)이 심해지면서 이성까지 잃는 자포자기상황, 그래서 자기 자식을 낳고 옷시중을 들던 빙애(후궁)를 때려죽였을 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우물에 빠져 자살시도까지 할 정도로 심각해진 광증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표출시킨 것.
- 스트레스를 해소할 다른 방법은 없었나?
궁궐 밖에 나가고 싶어 한 사도세자, 화완옹주의 도움으로 허락받은 온양온천 행차는 사도세자에겐 꿈같았던 16일간의 여행이었다. “경모궁께서 그 때 마음이 시원하여 병이 물러나고 본연의 천성이 나타나셨던가 싶더라.” <한중록>
- 아버지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었을 것으로 서로 부딪히는 사이에서는 하나가 피(避)해 주는 것도 또 다른 해결방법인 것을...
- 온양온천 행(行)에서 보인 차기 군주로서의 훌륭한 모습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 “어려운 백성들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여행이 끝나고 다시 궁(宮)에 돌아오자 아버지와의 만남을 걱정하며 궁(宮)을 떠나 무단탈출 사건이 벌어진다.
〇 사도세자의 무단 궁궐이탈 사건
- 세자가 무단탈출을 할 수 있나?
영조(英祖)와의 갈등이 극(極)에 달했던 시기로 아들의 문안인사도 거절했던 영조(英祖), 사도세자는 내관들의 입을 단속한 후(後) 20여일의 평안도 여행에 나서는데 무단 탈출도 모를 만큼 멀어진 부자관계
- 결국 알게 되는 결정적사건, <나경언 고변 사건> 1762년 5월 나경언이 고변을 핑계로 영조(英祖)를 직접 만나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발한 사건으로 고변을 통해 사도세자의 무단이탈을 알게 되고 영조(英祖)는 사도세자를 꾸짖자 “화증(火症)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며 잘못을 비는 세자에게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지 그랬냐?”며 나무라는 영조(英祖)
- 고변 중에는 충격적인 사건이 들어있었나?
대표적으로 자식을 낳은 빙애를 죽인 일과 여승(女僧)을 궁에 들인 것을 고변한 것으로 추정하고, 나경언의 고변이 사도세자 처분을 결단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
〇 사도세자의 죽임에 결정적 역할, ‘내 아들을 죽여주오!’
- 사도세자의 생모(生母) 선희궁이 혜경궁 홍씨에게 보낸 편지 “일이 이왕 이렇게 된 바에는 내가 죽어 모르거나 살면 종사를 붙들어야 옳고···” 그 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도세자의 생모 선희궁, 결국 영조(英祖)를 찾아가 “동궁의 병이 점점 깊어 바랄 것이 없으니··· 대처분 하소서” <한중록>
- 생모가 영조(英祖)에게 직접 아들의 처분을 요청한 것으로 영조(英祖)가 내린 <폐세자반교문>에 선희궁이 영조(英祖)에게 “세자가 내관·내인·하인 등 백 여 명을 죽였으며 저도 죽이려 했다··· 비록 제 몸이야 괜찮지만 임금의 위험이 숨 쉴 사이에 있으니 사실을 아뢸 수밖에 없다” <폐세자 반교>
- 영조(英祖)와 사도세자의 갈등이 점점 커지면서 고변사건이 일어난 것이 사도세자 죽음의 결정적이었다고 보고 있었으나, 보다 더 결정적이었던 것은 선희궁의 요청으로 사도세자의 광증(狂症)이 자신뿐만 아니라 영조(英祖)의 신변까지 위협한다고 판단했던 것
-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선희궁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상당한 키를 가지고 있는데, 기록을 보면 선희궁은 원칙이 분명하고 경우가 바르며 상당히 이성적이었던 것으로 추정, 종사(宗社)를 위해서는 아들의 죽음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것, 본인이 요청했지만 누구보다도 아들의 죽음에 괴로워했을 어머니, 사도세자의 3년 상(喪)이 끝나고 돌아온 바로 그 날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
〇 사도세자, 죽을 수밖에 없었나?
- 세종(世宗)대의 양녕대군처럼 사도세자를 폐위시키면 되지 않았을까?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아버지를 건너뛰고 세손이 왕위에 오르면 정조(正租)에게는 정치적으로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 세종(世宗)의 경우는 아버지가 아닌 형이라 부담이 덜했으나 왕이 되지 못한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것은 정조(正祖)가 져야할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큰 것
- 영조(英祖)가 사도세자에게 극한 처벌을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正祖)가 있다는 대안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한 달 가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아들 사도세자에 비해 며칠만 못 봐도 찾게 되는 손자 정조(正祖)는 사도세자 죽기 몇 달 전(前) 혼례를 올린다.
- 영조(英祖)의 입장에서는 왕위를 이어갈 후계자로 믿음직스러웠던 손자 정조(正祖)였던 것이고, 영조(英祖)의 기대대로 영·정조의 부흥기를 구현한 것을 보면 영조(英祖)의 선택은 큰 것을 얻기 위해 작은 것을 버린 선택이 아니었나(?)
- 영조(英祖)는 천륜보다 역사를 생각한 왕이었다?
지금까지 사도세자의 입장에서 사실을 바라봤지만, 영조(英祖)의 입장에서 보면 왕이 아닌 아버지에게 어렸을 적 사랑을 독차지했던 아들 사도세자, 이것도 결국 사랑의 표현일 것인데 왜곡된 것으로 표현되지 않았나··· 원하는 의도와는 달리 자식들과 불화하고 극단으로 치닫고 돌아가신 후에는 후회하는 부자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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