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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의 아들 경종(景宗), 왕이 되다

mkpark2022 2015. 7. 20. 19:05

 

 


장희빈의 아들 경종(景宗), 왕이 되다

 



1720, 경종(景宗) 즉위

- 1720년 숙종(肅宗)이 죽고 경종(景宗)이 왕위에 오른다. 14세의 나이에 친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경종(景宗),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죄인이 되어 사약을 받아야만 했던 어머니와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아버지 숙종(肅宗)은 끝내 사약을 내리고 어머니가 없는 세상에서 죄인의 아들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경종(景宗), 그가 드디어 왕위에 오른 것이다.

- 경종(景宗)을 아시나요?

교과서에도 경종(景宗)을 가르칠 기회가 없고 숙종(肅宗)다음에 영조(英祖)의 치적을 다루기 위해 언급되는 정도의 경종(景宗)은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30년의 세자생활

- 죄인 장희빈의 아들이 왕이 될 수 있나?

숙종(肅宗)의 정비인 인경·인현·인원왕후는 모두 후손이 없었고, 후궁(後宮)인 희빈 장씨는 경종(景宗)을 숙빈 최씨는 연잉군(영조)을 명빈 박씨는 연령군(20세에 사망)을 출산, 경종(景宗)이 즉위 시에는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계승에 문제가 없었던 것, 연산군도 폐비 윤씨의 아들로 어머니의 죽음을 몰랐던 8세의 연산군에 비해 경종(景宗)14세의 나이로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던 것

- 실제로 승정원일기에는 어머니에게 자진명령을 내렸다는 소식에 잠도 설치고 괴로워했던 어린 경종(景宗)의 심정을 기록, 쉽게 자진하지 않았던 장희빈에 어린 경종(景宗)의 기대감은 커졌고 잠시 안도의 숨을 쉬지만, 끝내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 장희빈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아들 경종(景宗)은 온몸에 열꽃이 돋는 증상을 겪기도 한다.

- 세자(훗날 경종)에 대한 대신들의 시선은?

갑술환국 후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노론·소론으로 나뉘고 노론이 주요 집권세력이 되지만, 경종(景宗)을 지지하는 세력은 힘이 약한 소론파로 세자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작은 실수라도 할까 속마음을 숨겨야 했다.

갑술환국 : 1694년 인현왕후 복위로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들이 재집권한 사건


노론 VS 소론, 조선 붕당사

- 15세기 조선 건국의 정치주역 훈구파(勳舊派)16세기 사림파에 의해 물러나고, 사림파(士林派)는 이조정랑의 인사권을 두고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으로 분당하고 이후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동인(東人)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서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강경파인 북인(北人)과 온건파인 남인(南人)으로 분당

- 북인(北人)의 지지를 받던 광해군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북인(北人)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 남는 것은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이들은 현종(顯宗) 때 예송논쟁과 숙종(肅宗) 때 환국의 정쟁을 거치면서 두 세력은 현·숙종 시대를 관통하게 되는데 최종 승리자는 서인(西人).

- 서인(西人)도 남인(南人)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를 두고 강경파인 노론(老論)과 온건파인 소론(少論)으로 분당, 강경파를 이끈 노론(老論)의 영수(領袖)는 송시열 VS 온건파인 소론(少論)의 영수(領袖)는 윤증

- 이후 이들은 왕위계승에 관련하여 부딪히게 되는데, 영조(英祖)를 지지하는 세력이 노론, 경종(景宗)을 지지하는 세력이 소론이 되는 것

 

경종(景宗), 천덕꾸러기 되다

- “내가 태어났을 때 어버지께서는 누구보다 나의 탄생을 기뻐하셨다.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나를 원자로 삼으시고 세 살 때 왕세자로 책봉할 만큼 아낌없는 사랑을 주셨다.”

원자(元子) : 아직 왕세자에 책봉되지 아니한 임금의 맏아들

- “하지만 행복은 길지 않아 어머니는 죄인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 나는 그때 양자로서 인현왕후의 빈소를 지켜야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대신들은 내가 실수하기만을 바랐고 내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아버지조차 나보다 동생들에게 더 애정을 쏟으면서 그렇게 나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다.”

- 실록에는 경종(景宗)의 어린 시절은 밝게 나오는데 8살 때 쓴 글을 신하들은 서로 가져가려고 할 정도로 총명했으며 양어머니인 인현왕후에게도 효성스러웠다는 기록으로 <단암만록>은 노론측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조석으로 내곁(인현왕후)을 떠나지 않았으며 사모하고 공경함이 사친(장희빈)한테 하는 것 보다 낫다.” <단암만록>

- 장희빈 사사될 당시 경종(희빈 장씨 소생)14· 연잉군(숙빈 최씨 소생)8· 연령군(명빈 박씨 소생)3세로 늦둥이였기에 어린 아들들에게 숙종(肅宗)의 마음이 갔을 듯

- 아버지 숙종(肅宗)을 바라보는 경종(景宗)의 마음은?

친어머니를 죽게 한 아버지 VS 복종과 사랑의 애걸 대상인 아버지, 대단히 모순된 상황으로 절대 카리스마로 복종의 대상인 아버지를 따라야 하고 어머니 죽음의 슬픔마저 표현할 수 없었던 경종(景宗), 게다가 호응해 주는 세력마저 미약하여 안으로 움츠려지면서 자신의 의사를 드러낼 수 없는 상태이지 않았을까(?)

- 그러면 인원왕후와 경종(景宗)의 관계는?

인원왕후는 경주 김씨이고 노론가의 인물로 숙종(肅宗)42세 때 16세로 경종(景宗)보다 한 살 위인 새어머니 인원왕후, 아들을 낳으면 오히려 경종(景宗)의 지위를 위협할 수도 있는 것으로 인원왕후가 들어오면 불안해진다.

선조(宣祖)의 계비 인목왕후가 낳은 영창대군이 세자 광해군의 지위를 위협했던 사례

- 친모 장희빈은 사사되고, 친애하는 양모(養母) 인현왕후는 사망하고, 계모(繼母) 인원왕후는 반대파로 고립무원에 빠진 경종(景宗)의 위치로 모든 일에 조심하고 말수가 적었다고 기록 평상시에 말씀과 웃음이 적어서 사람들이 마음의 정도(程度)를 측량하지 못했다”. <경종 행장> 30년 관록의 세자생활 경종(景宗), 장희빈 사후만 해도 19년의 세자생활의 경종(景宗)에게 찾아온 위기(?)

 

대리청정, 위기냐? 기회냐?

- 세자 경종(景宗)에게 찾아 온 위기?

정유독대 (171771914~16) 숙종(肅宗)과 노론 대신 이이명의 독대 결과, 경종(景宗)에게 대리청정을 명()한다.

독대(獨對) : 사관과 승지도 없고 기록도 전혀 남기지 않음

- 숙종(肅宗)의 갑작스런 대리청정 결정에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조차도 숙종(肅宗)의 저의를 의심한다.

대리청정(代理聽政) : 왕이 병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살피는 것이 어려울 때 세자가 왕의 업무를 대신하는 것

- 좋게 보면 왕의 실무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 VS 잘 못하면 세자 자리에서 낙마할 수도 있는 위기, 대리청정을 명할 당시 숙종(肅宗)은 안질이 심해서 글을 볼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했을 것으로 추정

- 하지만 노론 측은 숙종(肅宗)이 연잉군 · 연령군을 부탁했다고 주장하면서 경종(景宗) 즉위 후 이를 근거로 연잉군(영조)을 후계자로 지지하는데 노론의 일방적 주장으로 숙종(肅宗)의 본심인지는 불명확

- 흔히 여야영수회담을 할 때 서로 딴 생각을 하면서 하듯이 숙종(肅宗)은 현실적으로는 고령으로 안질이 심했기 때문에 대리청정이 필요했던 시기(3년 후 승하)이므로 빨리 세자에게 왕 수업을 받게 하고 싶은데 노론이 반대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를 통해서 공식화하면서 너희들로 지지하지 않았느냐?’ 는 쪽으로 몰아가고, 반대로 이이명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왕이 동의를 해줬으니 이제부터 세자 흔들기에 들어가면 되겠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정유독대는 동상이몽인 셈

- 경종(景宗)의 대리청정 성적은?

세금 감면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며 아버지 숙종(肅宗)의 의사를 정사에 최우선으로 반영하면서 성공적으로 대리청정을 수행한 경종(景宗), 숙종(肅宗) 말기의 업적은 바로 경종(景宗)의 업적

 

왕이 된 경종(景宗) 불행 끝, 행복 시작?

-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장희빈의 명예회복이 급선무이지만 경종(景宗) 즉위 후 희빈 장씨의 명호(名號)를 회복하자는 조중우의 상소가 올라오지만, 장례 지낸지 이제 한 달밖에 안됐는데··· 조중우의 죄를 엄히 다스리라는 사헌부(노론 일색)의 탄핵에 경종(景宗)도 그 지적이 옳다고 하고 결국 형장에서 맞아 죽은 조중우, 친모의 복권을 주장한 이들을 벌해야 했던 경종(景宗)

- 반대된 사례도 있는데 정유독대 얼마 후, 성균관 유생 대표 윤지술은 이이명이 지은 숙종(肅宗)의 지문에 장희빈의 악행이 미흡하게 기록됐으니 고쳐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경종(景宗)은 윤지술을 유배 보내지만, 사헌부의 반대상소가 올라오고 성균관 유생·사부학당의 수업거부로 밀리면서 윤지술울 풀어줄 수밖에 없었던 경종(景宗), 왕위에 올랐지만 여전히 정국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의 힘이 강했다는 반증

- 왕이 된 경종(景宗)이 노론을 몰아낼 수는 없었나?

오늘날의 생각으로는 가능한 일이나 조선사회에서는 쉽지 않은 것이 우선 자기의 세력이 확보가 되어야 하고, 환국(換局)을 단행하더라도 왕좌를 보존할 최소한의 힘이 필요한 것이어서 경종(景宗)도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는 때를 기다렸을 것

- 왕이 된지 1년 만에 불거진 후계문제로 노론이 내세운 인물은 숙빈 최씨의 아들이자 이복동생 연잉군, 32세의 나이에도 아들이 없었던 경종(景宗)은 결국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고 노론은 여세를 몰아 세제(世弟)의 대리청정을 요구하는데 이 모든 것이 즉위 1년 만에 일어난 일, 노론의 대리청정 요구에 경종(景宗)은 과연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경종(景宗), 동생을 세제(世弟)로 삼다

- 노론이 세제책봉을 주장한 근거는 경종의 후사가 없다는 것, 당시 경종(景宗)34세이고 선의왕후 17세로 충분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왕과 왕비

- 하지만 노론의 주장이 일관성 없는 것이 경종(景宗) 세자 책봉 시, 노론은 인현왕후가 22세로 아직 젊은 나이인데 성급하다고 반대를 했었으나, 경종(景宗)이 왕이 되고 나자 선의왕후 17세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후사가 없다고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장한 노론.

- 왕세제나 왕세자로 책봉을 받기위해서는 청나라의 허락을 받는 절차가 있는데 청()에서도 젊은 왕과 왕비인데 후사를 기다리지 않고 세제책봉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 이상하게 여기고 조건부 수락을 하는데 만일 왕이 아들을 낳으면 다시 알리라는 것, 경우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 뉘앙스

- 경종(景宗) 고자설은 정설이 아닌 야담으로 실록에는 모든 성색과 유전과 궁실과 화훼 등··· (경종)께서는 털끝만큼도 뜻을 빼앗긴 적이 없었다.”. <경종 행장> 왕실의 후사는 중요한 문제로 노론 측의 기록이긴 하지만 <단암만록>에도 왕비 어씨(선의왕후)는 종친의 아들로 나이가 어린 자를 구하여 길러서 자기 자식으로 삼으려 했다”.

- 이는 노론의 입장에서는 연잉군 대신 경종(景宗)의 양자가 후계자가 될 수도 있는 상황으로 자칫 소론에게 권력을 뺏길 수도 있다는 노론 측의 위기감으로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인원왕후를 움직이게 한다.

- 경종(景宗)의 후사로 이복동생 연잉군을 내세운 노론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인원왕후와 상의할 것을 경종(景宗)에게 요구하고 경종(景宗)은 이를 상의하는데, 노론의 예상대로 인원왕후는 후사로 연잉군을 지목하고 인원왕후의 교서로 명분을 획득한다.

 

엄마 없는 경종(景宗)의 설움

- 경종(景宗)의 입장에서는 새어머니까지 합세하여 왕권을 견제하는 상황, 결정적인 순간 나타나는 대비의 존재, 조선왕실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가장 강력한 정치적 후견인, 왕비일 때 보다 대비일 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

cf) 인조반정 당시 광해군 폐위 명분 확보를 위해 인목대비를 찾아 갔던 반정 세력

- 세제책봉에 이어 대리청정까지 주장한 노론, 훗날 영조(英祖)도 수시로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지만 왕의 본심이 뭔지 몰라 신하들도 함부로 반응할 수 없는 중요한 사안, 노론의 연잉군 대리청정 주장은 노론이 경종(景宗)을 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

cf)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거론했다가 선조(宣祖)에게 미움을 받은 정철

 

경종(景宗)과 노론의 한판승부, 대리청정

- 노론은 승부수를 던졌지만 경종(景宗)도 승부수를 던진 셈, 노론의 대리청정 요구를 받아들인 경종(景宗), 왕의 대리청정 명령에 대한 모범답안은 아니 되옵니다!” 인 것이고 모범답안대로 경종(景宗)의 대리청정 명령에 형식상 반대를 외친 신하들··· 결국 경종(景宗)은 없던 일로 하고 대리청정을 거둬들인다.

- 노론 측의 주장이긴 하지만 경종(景宗)의 불안한 군주의 모습 때때로 벽을 향하고 앉아서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하였다” & “두발이 엉겨 붙어 먼지와 때로 꽉 차서 머리에 쓰는 관의 크기가 점점 커졌다<단암만록>은 노론에 속한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원이 쓴 책으로 경종(景宗)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했을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소론에 속한 이건창이 쓴 <당의통략>을 보더라도 경종(景宗)이 심리적으로 불안정했던 것은 사실인 듯, “갑자기 사관(史官)에게 왜 쳐다보냐고 질책하는 등···”의 기록

당의통략 : 소론에 속한 이건창이 쓴 책으로 선조~영조까지의 당쟁사를 기술

- 실제 경종(景宗)의 모습은?

실록에는 외모에 관한 기록이 별로 없는 것 같고 <승정원일기>에는 체격이 크고 건장했다고 기록하고 경종(景宗)의 질병관련 자료도 세자 시절 1년에 한번 크게 아팠으나 즉위 이후는 세 달에 한번 정도 크게 아팠다는 기록으로 보면 왕이 된 후 건강이 악화된 것으로 추정


경종(景宗), 노론에 칼을 빼들다

- 1722<목호령의 상소>가 올라온다. “전하! 전하를 시해하려는 역적 무리가 있사옵니다. 이들은 칼로 혹은 독약으로 전하를 해하려 하였고, 심지어 전하의 폐출을 모의하였습니다. 전하! 이 역적들을 토벌하여 종사를 안정시키소서.” <1722년 목호령의 고변>

- 고변의 내용은 숙종(肅宗) 사망 무렵에 노론가 자제들이 경종(景宗)을 죽이려는 음모로 삼급수가 있었다는 것 대급수는 장례를 치를 때 자객이 칼로 경종을 직접 시해 소급수는 음식에 독약을 넣어 시해 평지수는 숙종의 유언을 조작해 폐위시키는 것으로 세 가지 방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 이천 냥을 백망과 김용택 · 이천기에게 주어··· 상궁과 더불어 독약을 쓰는 일을 도모해 이루려고 한다” <경종 2327> & “약을 진어하신 뒤에 누런 물을 토해냈다는 말은 약원의 일과 서로 부합한다.” <경종 324>

- 실제 경종(景宗)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있었나?

진술이 엇갈리는 등 사건의 진실은 알 수 없으나, <목호령의 고변>과 더불어 큰 정치적 변란이 일어나고 소론이 노론을 맹공격하기 시작하며 연잉군 대리청정을 수용하려 했던 노론 4대신을 처형시키는 예상치 못한 경종(景宗)의 초강수가 등장한다..

- <목호령의 고변 사건> 이전에 일어난 또 다른 사건으로 소론 강경파 김일경이 연잉군 대리청정을 비판하는 상소가 올라오면서 경종(景宗)나를 지지하는 세력이 있구나!’ 하는 분위기 속에서 고변이 올라온 것

-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딘 경종(景宗)의 반격시나리오 1단계로 30년 세자시절을 조심하며 버틴다. 2단계로 즉위 초() 자신의 의도를 숨긴다. 3단계로 자신을 지지해줄 소론세력을 결집시킨다. 노론이 지나쳤을 때 칼을 빼든다는 것

- 소론의 지지에 힘입어 노론에 대한 반격을 감행한 경종(景宗), 목호령 고변 당시의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즉위 후() 병이 잦았던 경종은 17223~11월까지는 무병했다고 기록하는데, 이 시기는 노론 숙청기간과 겹치는 기간으로 목호령 고변 이후 노론 4대신과 노론 60여명이 처형되고, 170여명이 심문·유배를 당하게 되지만 노론이 지지한 연잉군은 처벌하지 않은 경종(景宗)

 

경종(景宗), 원수의 아들을 살려주다

- 경종(景宗)은 연잉군과 노론을 분리해서 생각한 듯, 노론은 정적이지만 연잉군은 나의 동생이고 실제로 당시 숙종의 핏줄로는 경종(景宗)과 연잉군 뿐, 살벌한 정치판에서도 형제간의 우애를 지킨 경종(景宗), 왕세제 책봉 당시 청()나중에라도 왕자가 태어나면 알려 달라고 조건부 승인을 했으나, 경종(景宗)내 아들이 태어나도 알리지 않겠다!”고 답변한 것으로 보아 이미 입장을 정했던 것으로 추정.

- 또한 불안했던 자신의 경험을 동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을 듯··· 하지만, 사실은 연잉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고변으로 경종(景宗)의 어머니 장희빈이 사사된 것으로 보면 원수의 아들인 셈

 

경종(景宗), 의혹을 남긴 채 사라지다

- 1724(경종4) 병석에 누운 경종(景宗)은 음식물도 제대로 삼키지 못하던 왕은 진상된 게장과 생감을 모처럼 잘 먹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병세는 더욱 악화되고, 이에 왕세제 연잉군은 어의(御醫)의 충고를 무시하고 인삼과 부자를 처방하라 명한다. 잠시 콧등에 온기가 돌면서 차도를 보이는 경종(景宗),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새벽을 넘기지 못하고 재위 4년 만에 숨을 거둔다.

- 갑작스런 경종(景宗)의 죽음, 독살?

독살설은 주로 소론의 주장으로 경종 사후 노론세상이 되고 후에 영조(英祖)때 소론세력들이 역모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경종(景宗)이 독살됐다고 주장하며 배후에 연잉군(영조)이 있다는 것, 잡혀온 사람 중에 신치운이라는 사람은 영조(英祖)가 심문하자 저는 경종 사후 게장과 생감은 절대 먹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 그러나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면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경종(景宗)과 연잉군, 경종(景宗)이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굳이 독살할 이유는 없었을 것.

- 그런데 <본초강목>에 감과 게장은 함께 쓰지 말라고 하는데, 상극(相剋)인 두 음식을 진상한 것은? 하지만 독살(毒殺)을 의도했다면 공개적으로 게장과 생감을 함께 드리지 않았을 것, 단지 아픈 임금이 잘 드시는 음식을 드렸을 뿐···


경종(景宗), 역사에 무엇을 남겼나?

- 정치보복을 하지 않고 어쨌든 정적인 연잉군을 살려둔 것은 정치적으로 높이 평가해야 할 일, 연잉군은 훗날의 영조(英祖)로 동생의 정치적 역량을 알아 본 경종(景宗), 그리고 그에 부응하여 영·정조 부흥기로 가는 길을 열어 준 영조(英祖)

- 실제로 <목호령 고변사건>으로 노론을 숙청한 후에도 경종(景宗)은 연잉군을 오히려 후계자로 공식화하면서 정치가 점점 안정기로 접어들게 하는 현명한 왕위계승을 이끌어 낸 공로를 인정해야 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