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폭에 가려진 카리스마 숙종(肅宗), 왕이 되다
〇 숙종(肅宗)의 이미지
- 조선 19대 임금 숙종(肅宗)의 무덤 명릉, 곁에는 첫 번째 계비(繼妃) 인현왕후와 좀 떨어진 곳에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가 묻혀있고,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정비(正妃)인 인경왕후와 장희빈의 묘도 있는데, 장희빈의 묘는 1969년 광주(廣州)에서 발견되어 이장해 온 것으로 숙종(肅宗)의 생전에 함께했던 네 명의 왕비가 같은 경역 내에 묻힌 건 명릉이 유일
※ 정비(正妃) : 정실인 왕비를 후궁(後宮)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 한 때 전국을 뒤흔들었던 희빈 장씨와의 사랑, 인현왕후와 숙빈 최씨 그리고 인원왕후, 숙종(肅宗)과 그를 둘러싼 굴곡 많은 사랑 이야기는 수많은 작품으로 재탄생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아 왔지만,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못한 숙종(肅宗)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 숙종(肅宗)의 여인들?
인현왕후가 왕비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인현왕후를 숙종의 정비로 알고 있지만, 정비(正妃) 인경왕후는 20살 때 천연두로 사망하고, 두 번째 인현왕후도 30대 중반 사망하여 세 번째 인원왕후를 맞이하면서 세 명의 왕비(王妃)와 희빈 장씨를 포함하여 여섯 명의 후궁(後宮)을 두어 총 아홉 명의 부인.
- 숙종(肅宗)의 가장 큰 업적이라면 무엇보다도 영조(英祖)를 낳은 것, 영조를 낳지 않았다면 조선의 문예중흥기라 말하는 영·정조시대가 가능했겠는가? 이것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이고 교과서 속의 숙종(肅宗)도 영·정조 시대 탕평책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으로 환곡(還穀)을 서술하며 영·정조의 장점을 설명하기 위해 숙종(肅宗)의 단점을 끄집어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이 시간을 통해 숙종(肅宗)의 평가를 다시 해보는 시간으로 숙종(肅宗)의 업적을 바로 보는 계기가 됐으면···
※ 영조(英祖, 1694~1776) : 조선 21대 왕으로 숙종(肅宗)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출생
〇 키워드로 알아본 숙종(肅宗).
- 조선에서 두 번째로 오래 재위한 왕, 순위 ① 21대 영조(51년 7월) ② 19대 숙종(45년 10월) ③ 26대 고종(43년 7월) ④ 14대 선조(40년 7월) ⑤ 11대 중종 (38년 2월)
- 숙종(肅宗)은 단종(端宗)을 복권했다?
숙종(肅宗)을 재평가 할 수 있는 여럿 중 하나인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이 벌어지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단종(端宗)과 사육신을 복권, 폐위 후 노산군으로 불린 단종(端宗)의 묘호를 지어주고 폐위 242년 만에 복권시킴
- 뿐만 아니라 강빈(소현세자 빈으로 인조 수라에 독을 탄 혐의로 사사)을 복권시키는데, 이것은 조부인 효종(孝宗)의 정통성을 위협할 수도 있는 민감한 문제이지만 과감한 결단력을 보인 숙종(肅宗)
※ 소현세자 사후 왕위에 오른 효종(孝宗)
- 조선시대 여섯 번째 적장자 출신 왕, 완벽한 정통성을 갖추고 태어나 왕다운 왕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숙종(肅宗) 뿐, 조선의 적장자 출신 왕은 총 일곱 명으로 ① 문종, 재위기간 짧음 ② 단종, 12세에 삼촌에게 희생 ③ 연산군, 폭정으로 폐위 ④ 인종, 8개월 재위 ⑤ 현종, 7세 (심양 출생) ⑥ 숙종, 14세 ⑦ 순조, 11세
- 숙종(肅宗)은 수렴청정을 받지 않았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여성은 정치를 하지 못하니까 대비가 어린 왕을 도와 발(簾)을 치고 정사를 돌보는 것, 대리청정(代理聽政)은 왕이 왕세자에게 왕 대신 정사를 돌보게 하는 것 & 섭정(攝政)은 왕이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 대신 정사를 돌보게 하는 것 (대원군)
- 숙종(肅宗)이 수렴청정을 받지 않은 이유?
어린 왕이 즉위하면 결국은 수렴청정을 받게 되는데, 숙종(肅宗)이 수렴청정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왕으로써의 정통성이 강(强)했고, 1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왕권을 행사할 능력을 인정받은 것
※ 예종 19세 · 성종 13세 · 명종 12세 · 선조 16세 · 순조 11세 · 헌종 1세에 즉위하면서 수렴청정을 받음
- 조선에서 왕비가 되는 길은 세자와 혼인하면 세자빈, 남편이 왕으로 즉위하면 왕비, 아들이 왕이 되면 왕대비로 조선시대 유일한 삼관왕인 현종(顯宗)의 비(妃) 명성왕후
- 숙종(肅宗)의 아버지인 현종(顯宗)은 후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숙종(肅宗)의 수렴청정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는 그 만큼 숙종(肅宗)이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강했다는 것의 상징
〇 14세의 소년 군주 숙종(肅宗), 왕위에 오르다
- 실제 14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숙종(肅宗) 즉위 한 달 후, 숙종(肅宗)은 아버지 현종(顯宗)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행장을 짓게 하지만 완성된 행장을 보고 화가 난 숙종(肅宗)
- 문제가 된 부분은 당대의 정치적 거물이었던 송시열에 관한 것으로 숙종(肅宗)은 집요하게 송시열의 잘못을 지적하는데, 14살 숙종(肅宗)과 68살 송시열의 기싸움, 숙종(肅宗)이 말하는 송시열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 송시열(1607~1689) 주자학의 대가로서 서인의 영수이며 인조(증조부) · 효종(조부) · 현종(부) 3대에 걸쳐 정계와 사상계의 중심에 있었고, 효종과 현종의 스승으로 공자 맹자와 함께 송자(宋子)라 불리며 성인으로 추송
- 14살 숙종(肅宗) VS 68살 송시열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숙종의 나이가 14살이었는데 온 조정에서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의통략> 숙종(肅宗)이 송시열과 맞설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것은 왕위의 정통성, 영조(英祖)의 경우 능력이 뛰어났어도 출신의 한계(궁녀인 숙빈 최씨의 아들)때문에 반란이 자주 일어나고, 또 정조(正祖)의 경우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숙종(肅宗)의 경우는 정통성 확보에 공들일 필요가 없었던 것.
- 숙종(肅宗)에게는 정통성이라는 힘이 있었지만 사실은 단종(端宗)도 연배(年輩)와 정통성면에서 비슷한 것으로 보면 숙종(肅宗)은 정통성뿐만 아니라 나름대로의 뛰어난 능력도 갖췄기에 막강한 카리스마를 보일 수 있었던 것.
- 정치 거물, 송시열의 잘못은?
핵심은 <기해예송>으로 1659년 효종(孝宗) 승하 시, 자의대비(인조의 계비)의 상복을 두고 남인은 왕의 정통성을 중시하여 3년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과 서인(송시열)의 주장은 소현세자 상(喪) 때 이미 3년을 입었고, 또 효종(孝宗)은 차남이므로 1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립하다가 결국, 현종(顯宗)은 당시 조정을 장악한 서인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 자의대비는 법적으로는 효종의 어머니이지만 효종보다 5살 어림
- 이번에는 <갑인예송>으로 1674년 효종(孝宗)의 비(妃)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자의대비 상복을 두고 여전히 효종(孝宗)이 차남이라는 입장을 강조한 서인, 현종(顯宗)은 송시열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정리하면서 서인들이 실각하는 단서가 되는 사건으로 상복 때문에 정권이 바뀌게 된다.
- 즉위하자마자 50년의 서인정권을 뒤집은 숙종(肅宗), 예송논쟁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대립으로 효종(孝宗)의 정통성을 빌미로 신권(臣權)을 강화시키려는 서인의 의지가 반영된 사건이 예송논쟁
-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자의대비의 심경?
법적으로는 효종(孝宗)의 어머니이지만 실제로는 효종(孝宗)보다 5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효종(孝宗)이 세상을 떠났을 때 36살의 나이로 아들과 며느리의 상복을 입게 되면서 본의는 아니었지만 입장이 난처했던 것은 사실
〇 정치거물, 송시열의 잘못은?
- 숙종(肅宗)이 다시 예송 문제를 꺼낸 이유?
현종(顯宗)이 이미 정리한 예송논쟁의 문제를 숙종(肅宗)이 다시 꺼낸 이유는 현종(顯宗)의 행장에 들어가게 되는 예송논쟁, 공교롭게 행장을 담당하는 사람은 송시열의 제자 이단하로 송시열에 대한 좋지 않은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 하지만 숙종(肅宗)은 강압적으로 “송시열이 예를 잘못 이끌었다”고 공식적 기록하게 한다.
- 나중에 이단하는 스승을 욕한 것이 부끄러웠던지 숙종(肅宗)의 요구 때문에 할 수 없이 이렇게 기록했다고 하지만 숙종(肅宗)이 정색을 하며 “스승만 알고 군명(君命)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고 꾸짖는다.
- 송시열을 내친 숙종(肅宗)의 속내는?
즉위 초, 숙종(肅宗)은 정치 거물인 송시열을 부르지만 송시열은 오히려 부담이 된다고 거절을 하고 사직하며 내려가 버린 사건이 발생하고, 숙종(肅宗)의 입장에서는 송시열에 대하여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터에 할아버지의 왕통을 깎아 내리려는 조처들로 송시열과 숙종(肅宗)은 귀환한 왕권(王權) VS 수십 년의 신권대표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형국.
〇 당쟁의 상징, 수정실록(修正實錄)
- <현종실록>에 보면 둘의 관계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듯 “원자의 탄생을 모두 들어와 축하드리고 있는데, 시열이 홀로 축하하지 않고 있으니 실로 알 수 없다” <현종실록> & “원자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을 때··· 신은 때마침 대죄할 일이 있어서··· 여러 신하들처럼 작은 정성이나마 나타내지 못하였으니···”<현종개수실록>
- 조선 후기의 당쟁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수정실록, <현종실록>은 숙종 초(初) 남인집권 시기에 남인들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 <현종개수실록>은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은 때에 서인들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으로 수정실록이란 집권세력에게 명분상 약점이 있었다는 것으로 어떻게든 자신의 약점을 재평가를 받아야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 하지만 기록을 조작하거나 폐기하는 수준까지 갔더라면 조선왕조 500년은 버텨나기 힘들었을 것
- 즉위하자마자 50년의 서인정권을 뒤집은 숙종(肅宗), 행장(行狀)사건으로 결국 남인의 요구를 받아들여 송시열을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를 보낸다.
〇 어부지리(漁父之利), 남인의 득세
- 1680년 10월 26일, 숙종(肅宗)의 정비(正妃) 인경왕후가 숨을 거두는데 사인은 천연두, 다음 해 5월 새로운 왕비 인현왕후가 간택되는데, 서인의 핵심인물 병조판서 민유중의 딸로 철저히 서인의 주도아래 이루어진 국혼, 정치적 계산으로 성립된 국혼은 불안한 정국을 예고한다.
- 서인(西人)의 무실국혼(無失國婚)은 1623년 인조반정 이후(以後) 서인이 내세운 슬로건중의 하나로 국혼을 잃지 말자는 뜻, 인조반정 이후 왕비는 모두 서인 집안 규수이고 예외의 단 한사람인 장희빈은 남인의 지원 속에서 왕비가 된다.
- 남인 집권기에 남인의 왕비가 나오지 않은 이유?
운(運)이 없었던 것이 남인 집권기인 1674년~1680년에는 왕실에 혼사가 없었던 것으로 집권 6년 만에 서인에게 정권을 내준 남인은 환국(換局)이 되면서 그 기회를 놓친 것.
※ 환국(換局) : 급작스럽게 정권이 교체되는 국면이라는 뜻으로 조선 숙종 때의 정치적 상황 & 사화(士禍) : 사림파(재야 선비)가 훈구파(외척·공신)로부터 화(禍)를 입었다는 의미에서 사화, cf) 사화(士禍) : 사림 대 훈구의 권력투쟁 VS 환국(換局) : 사림 대 사림의 권력투쟁
〇 남인의 몰락
- 인조반정 이후, 50년 만에 정권을 잡은 남인이 6년 만에 실각한 이유?
결정적인 것은 1680년 남인의 실세인 영의정 허적이 축하연을 베풀게 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자 숙종(肅宗)은 비가 내리니 왕실에서 쓰는 천막을 허적에게 가져다주라고 명(命)을 하는데, 허적이 이미 가져갔다는 전갈을 받고 크게 화(火)를 내는 숙종(肅宗) “한명회도 감히 이런 일은 하지 못했다”
※ 한명회 : 성종 12년에 장막(帳幕) 때문에 역풍을 맞게 된 처세의 달인
- 단순 천막 사건으로 정권을 교체한 건 과도한 처사?
남인에게 새로운 정치를 기대했던 숙종(肅宗), 하지만 의견차로 분열한 남인은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잔치가 남인세력의 규합 목적이라는 소리를 듣고 본때를 보여 주려했던 것.
- 장막사건이 터지고 나서 허적이 하는 이야기 “10월 중순부터 성상께서 나를 싫어하고 박대하는 기색이 있었다.” <연려실기술> 사실은 장막사건과는 별개로 숙종이 나를 좋지 않게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은 남인들이 자신의 세력에 대한 자신감 내지는 자만감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결국, 천막사건을 계기로 주요관직의 남인세력을 모두 서인세력으로 교체
- 이러한 사건들을 보면 숙종(肅宗)의 패턴은 일관성이 있는 것이 행장사건으로 건수를 잡아 집요하게 서인을 공격하고 이번에는 천막사건을 계기로 남인을 잡는 것은 강한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의 약점을 놓치지 않았던 정치적인 왕이 아니었나(?)
- 호시탐탐 정권탈환을 꿈꾼 서인은 대표적으로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의 사촌 동생 김석주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김석주는 공작정치의 달인으로 이때부터 이미 정보원을 동원해 남인의 동태를 살피게 하는데 여기에 포착된 사건이 영의정 허적의 서자 허견이라는 인물이 인평대군의 아들 복성군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진술이 나오도록 꾸미는데 역모는 왕조사회에서 최고의 범죄
- 외척(外戚) 김석주의 정치 공작에 대한 숙종(肅宗)의 반응은?
숙종(肅宗)은 기본적으로 왕권을 강화한다는 것이 지상과제였기 때문에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남인·서인·외척을 가리지 않고 필요한 세력과 손을 잡는데, 남인이 결정적으로 발목이 잡힌 이유는 병권을 탐낸 것으로 북벌(北伐)을 하기위해 도체찰사부 설치를 주장하는데, 숙종(肅宗)은 이것을 병권까지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〇 남인의 병권장악, 도체찰사부
- 도체찰사부는 전시 또는 준전시 체제에서 총사령관 역할을 한 도체찰사의 직속 예하부대로 당시는 영의정이 도체찰사부를 겸임하여 영의정의 군권을 대폭적으로 강화시켜주는 것
- 병력확장이 국가재정에 미치는 부담은?
당시의 재정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로 특히 국가재정에 부담을 준 것은 군사 전원이 도성(都城)에 상주하여 큰 부담이 된 훈련도감이 문제, 그래서 남인 측의 주장으로 훈련도감의 군사를 줄이고 교대로 근무하는 훈련별대의 신설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훈련도감 감축 없이 훈련별대만 새로이 만들어져 명분상으로는 백성들의 군역을 줄이자고 한 것이 오히려 백성들의 부담만 가중된 것.
- 도체찰사부의 설치는?
1675년 신설된 도체찰사부의 인사가 단행되고, 개성에 대흥산성을 축조 후(後) 매일 무예훈련과 열흘에 한번 진법훈련을 실시하는 고도의 훈련이 실시되는데, 이러한 정황들은 나중에 허견의 옥사 때 남인세력들이 대흥산성의 병력을 이용하여 역모(逆謀)를 꾀하려했다는 구실이 되기도 하여 결국 도체찰사부는 남인의 실각과 함께 혁파가 된다.
- 병권의 행방은?
숙종(肅宗)은 병권을 외척(外戚)인 병조판서 김석주에게 맡기고 이를 통해 중앙 군영통제를 확립한다.
〇 카리스마, 숙종(肅宗)
- 1695년, 최악의 가뭄이 조선을 덮치고 때 아닌 추운 기후가 계속됐던 소빙하기, 이상기후로 농작물 수확이 어려워지면서 조선에는 대기근이 발생하고 가뭄·우박과 같은 재해가 잇따르자 흉년은 몇 년이나 이어지고 오랜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는 백성들,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아 민심은 더욱 흉흉해진다. “한발·수재·풍재·상(霜)재 등으로 기근(饑饉)이 잇달아 들고 남와의 계절에 불볕이 내려 쬐고 유화월에 서리가 내리는 등 3년 동안 큰 흉년에 똑같은 재해가 발생하다” <숙종 24년 1월 8일>
- 대기근을 해결하기 위한 숙종의 대처?
청(淸)의 쌀 수입을 주장하는 숙종 VS 철천지원수 오랑캐의 쌀을 먹을 수 없다는 신하들, 결국 숙종(肅宗)은 강한 의지로 쌀 수입을 관철시킨다. “이 일은 본시 즐겨서 한 일이 아니라 온 나라의 백성을 위하여 만부득이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1698년 4월 29일 숙종실록> 기근이 심한 평안도 지방 주민을 위해 수입한 쌀, 막상 쌀이 들어오니 대신들은 정치적 기반인 서울에 풀자고 주장을 한다.
- 숙종(肅宗)의 강력한 외교적 측면, 세종 15년에 개척한 4군 6진의 땅이 척박하다 보니 이곳을 떠나는 백성들, 이 자리를 오랑캐들이 들어오고 그들은 마침 백두산도 관심이 있던 터, 숙종은 “처음부터 준엄하게 막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청(淸)에게 단호한 협상을 하도록 하고 ‘백두산정계비’를 통해 국경문제를 해결하라고 명(命)한다.
-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결정적 근거를 제공한 안용복도 숙종(肅宗) 때 인물로 어부(漁夫)로 울릉도에 갔다가 일본어선(漁船)을 발견하고 이를 문책하여 사과를 받고 돌아 옴
- 세종(世宗)이 조선의 기틀을 만든 국왕이라고 한다면 숙종(肅宗)은 전란(戰亂)으로 무너진 그 기틀을 다시 세운 왕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 같다는 생각, 병자호란 이후 뭔가 안팎으로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인 숙종(肅宗) 대는 경제적인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진 시기로 농업사회에서 상공업사회로 발전이 시작하는 시기로 상공업 사회로 나갈 수 있는 사회·경제적 시스템을 마련한 숙종(肅宗), 대표적으로 대동법 시행, 100년 만에 전국 확대 실시하면서 그동안 국민에게 가장 고역중의 하나인 공납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공인(貢人)을 통해 물건을 바치게 하여 화폐가 유통 될 수 있는 배경을 만들고, 상평통보를 유통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 공인(貢人) : 대동법으로 거둬들인 쌀로 조정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중간 상인
- 숙종(肅宗) 시대는 당쟁이 치열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각 당파의 사이에서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숙종(肅宗)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성과를 낸다.
- 서인과 남인, 정책의 변별성은?
그 당시 사대부라는 것도 백성을 위한 정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호패법 · 호포법 · 주전론 · 화폐유통론 등 각(各) 정파마다 대안들은 많이 나오지만, 숙종(肅宗)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은 당파의 이익을 우선한 정책이라 판단하고, 당파에 맡겨두느니 차라리 내가 나서겠다는 생각으로 왕권강화를 하는 것, 이것이 숙종(肅宗) 후반 탕평정치로 이어지면서 이를 완성한 임금이 영조(英祖)
- 숙종(肅宗)의 신하들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주는 <주수도(舟水圖)> 배를 임금에 비유하고 물을 백성에 비유하여 백성의 민심이 이반(離反)되면 배가 뒤집혀 임금도 잘못된다는 의미로 내가 문제가 되는 것은 너희들의 책임이 있다는 것, 그만큼 숙종(肅宗)은 신권을 견제하면서 신권(臣權)을 왕권(王權) 밑에 복속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임금
- 숙종(肅宗)은 휘둘린 왕이 아닌 휘두른 왕이었다. & 학생들이 조선 후기를 매우 어려워하는 것은 예송·환국이니··· 숙종(肅宗)이라는 인물을 가지고 조선 후기를 보게 되면, 어린 임금이 즉위를 해서 왕권강화를 위해 그렇게 신권(臣權)과 갈등을 벌이면서 왕권(王權)을 주도한 이미지와 수많은 여인들과의 로멘스··· 따라서 이런 인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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