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으로 본 소현세자의 죽음
〇 비운의 왕세자 소현, 의문의 죽음을 맞은 날
- 소현세자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조선에 귀국한 뒤였다 “세자가 돌아오고, 청나라 사신도 함께 칙서를 가지고 서울에 오다” <인조실록 1645년 2월 18일>
- 조선왕조실록은 소현세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자의 병을 학질(瘧疾)로 진찰하였고··· 침을 놓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인조실록 1645년 4월 23일> 기록의 처음 등장은 4월 23일로 병명은 학질(瘧疾), 인조(仁祖)의 허락으로 “4월 24일~25일 이틀간 침을 맞고 34세의 나이로 창경궁 환경당에서 죽었다” <인조실록 1645년 4월 26일>
- 병이 낫다는 기록이 등장 후 사흘 만에 세자가 사망한 것으로 34세의 건강한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 많은 의혹이 제기 됐는데 세자의 시신상태가 수상하다는 것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그 얼굴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선조실록 1645년 6월 26일> 사관(史官)조차 독살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 실록에 기록된 대로 그는 누군가에 의해 독살된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었다면 상당한 의혹, 독살에 휩싸인 왕(王) 정조·선조·고종은 구체적인 독살정황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없으나 소현세자의 죽음만이 독살로 의심되는 구체적인 정황들이 실록에 기록되어있다는 점에서 독살의 신빙성이 높이 제기되고 있는 것
- 왕족 이세관이 입관할 때 본 증언을 근거로 사관(史官)이 기록한 것으로 사관조차 독살의 의혹을 제기한 것, 사망 당일의 기록에는 의관들의 오진(誤診)과 잘못된 치료가 사망의 원인이라고 기록하는데 특채(特採)된 내의원 의관 이형익이 함부로 침을 놓다 사망, 일반적으로 내의원의 의관은 취재라는 정식시험을 거쳐서 들어오게 되는데 특별추천으로 내의원 의관이 된 이형익
〇 소현세자 ‘함부로’ 침을 맞고 죽다.
- “왕세자가 창경궁 환경당에서 죽었다··· 세자가···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醫官)들 또한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인조실록 1645년 4월 26일>
- 소현세자가 죽기 직전에 이형익이라는 의관이 두 번의 침을 놓은 후 죽게 되어서 이형익이 독살의 하수인으로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인데, 보통 의관이 내의원에 입성하려면 취재라는 정식시험을 거쳐 입성을 하게 되지만 특별 추천으로 내의원 의관이 된 이형익은 인조(仁祖)에게 번침이라는 시술을 한 후부터 인조(仁祖)의 총애를 받는다.
- 당시 이형익 벌주기를 청한 신하들 VS "이형익은 신중하지 않았던 것이 없다"는 인조(仁祖)의 변호에 처벌을 면한 이형익, 정상적으로 사망해도 왕세자이면 진상규명이 필요한 것인데 이런 식으로 사망했는데도 진상규명을 하지 않은 인조(仁祖)의 행위가 이해되지 않고, 그 외에 이해되지 않는 인조(仁祖)의 아래 행위들···
〇 이해되지 않는 인조(仁祖)의 행위
- 장례절차를 무시하다
“세자를 세자답게 모셔야 합니다.” 하는 신하들의 청, 소현세자는 인조(仁祖)의 장남으로 당연히 3년 상복을 입어야 하나, 인조(仁祖)는 실질적으로 2개월 만에 상복을 벗었고, 신하들이 1년간 상복을 입게 해 달라는 청을 거부하고 뿐만 아니라 항의하는 신하들을 해직까지 시키고, 관례를 무시하며 세자의 짧은 장례를 치른 것
- 장자승계의 원칙을 무시하다.
뿐만 아니라 “원손이 아닌 대군을 후사로 삼겠다”는 것, 소현세자에게는 석철(10세)이라는 원손이 있었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소현세자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世子)로 책봉하겠다는 것, 세자가 사망하면 세손(원손)이 계승하는 것이 원칙, 인조(仁祖)는 신하들에게 일일이 지명하면서 의사를 물어보고 대부분의 신하들은 원손이 아닌 세자책봉에 반대하지만,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압박까지 하는 인조(仁祖)에게 신하들은 최종결정은 왕께서 하는 것이라고 하여 책임에서 벗어난다.
※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英祖)도 왕위는 그 아들인 정조(正祖)에게 물려줌
- 의관 감싸기 · 짧은 장례 일정 · 차남 세자책봉 등 석연치 않은 점들은 소현세자의 독살을 더욱 의심하게 만든다.
〇 소현세자 볼모의 몸이 되던 날
- 청(淸)에 볼모로 가기를 자청한 소현세자 “내게는 동생이 있고, 아들도 있으니 어떻게든 종사를 이어갈 수 있으니 내가 가겠다.” 차기군주로써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모습, 전국의 역사 교사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라도 바꾸고 싶은 그날의 1위에 등극한 소현세자의 죽음은 다른 왕세자보다 뭔가 다른 면이 있지 않았나(?)
-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볼모의 몸이 된 소현세자, 철병(撤兵)하는 청나라 군대를 따라 심양으로 떠나던 그날, 인조(仁祖)는 도성 밖 멀리까지 나와 눈물로써 아들을 배웅했다 “서오릉(고양)까지 나와서 세자를 배웅하면서, 추위에 약한 소현세자를 온돌방에 재워 달라.”고 부탁하는 인조(仁祖) 자신에게는 최대의 시련의 순간 47일간을 남한산성에서 자신의 곁을 지켜준 장자 소현세자였기 때문.
〇 소현세자의 볼모생활
- 몇 년 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심양일기의 국역(國譯)을 완료 했는데, 너무나 많은 조선 피로인을 끌고 갔기 때문에 60여일이나 걸려 고난 속에 심양에 도착했으나 청(淸)은 황제가 있는 곳이라며 가마에서 내릴 것을 요구하여 말을 타고 입성한다.
※ 심양일기 : 시강원에서 세자의 일정을 기록한 세자의 동궁일기의 일부로 청에서 볼모생활을 기록한 것
- 볼모로서의 소현세자 심양생활은?
일반적인 인질이 아니라서 심양관(瀋陽館)에 기거를 하면서 일상 업무는 같이 갔던 시강원(侍講院)의 스승들과 토론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문제는 당시 청(淸)은 명(明)을 압박해야 하는 급박했던 상황이어서 조선에 수시로 요구조건을 내세우는데, 사실 소현세자는 결정권이 없는 세자··· 이런 세자에게 왜 이렇게 소극적이냐는 질책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게 하고, 뿐만 아니라 심양일기에 보면 청(淸)이 요구하는 행사나 전쟁·사냥 등에 불려 다니면서 힘들어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
- 심양일기에 어느 날 용골대가 명나라를 치러 가기위한 파병문제 때문에 세차게 압박을 가하자 “내가 비록 이역(異域)에 와 있지만 한 나라의 세자이다! 네가 어찌 감히 이토록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니 그 따위로 나를 협박하지 말라!” <인조실록 1640년 11월> 그러자 용골대가 한발 물러나 웃으면서 사과를 했다는 것, 소현세자를 평가하는 데는 심양생활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데, 지금 이 한 단면은 소현세자가 외교적인 압박을 견딜 수 있는 담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장면
- 청(淸)이 소현세자 일행에게 식량공급을 중단하자 식량을 마련하고자 시작한 농사는 필요량의 3배 이상을 수확하고, 부인 강빈은 청(淸)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심양관의 살림을 꾸려 나갔다.
- 소현세자는 농사와 교역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조선에서 끌려 온 사람들을 사서 농사를 짓게 했고 그렇게 해방시킨 사람만 어느 덧 수백 명에 달했다. “재물을 늘려 잡혀간 우리나라 남녀를 상환한 것이 수백 인에 달했다” <인조실록> 소현세자는 심양관의 재력을 바탕으로 청나라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기 시작했고 무역이 곧 정치력으로 이어진 것이다.
- 1644년 청나라가 마침내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에 입성하고 명(明)이 멸망하면서 소현세자도 청(淸)을 따라 거처를 심양에서 북경으로 옮기는데 북경에 온 소현세자는 전혀 다른 세상과 만나게 된다.
- 당시 북경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신부 아담 샬을 만나 천주교와 서양 과학을 접하게 되는데, 두 사람의 만남을 기록한 <정교봉포> “순치 원년(1644년) 조선 국왕 이종(인조)의 세자가 북경에 인질로 와서 아담 샬의 명성을 듣고 자주 천주당에 왔다.”
※ 아담 샬(1591~1666) 독일 출신 예수회 선교사, 천문학자로 1622년 중국으로 건너가 서양과학을 전달
- 아담 샬은 명·청 시대 국립천문대인 흠천관의 최고책임자로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학자인 아담 샬은 소현세자에게 천주교와 서양과학에 관한 많은 지식과 물건을 선물했다. “제가 조선으로 돌아갈 때 이것들을 궁으로 갖고 갈 뿐 아니라 인쇄하고 복사해서 선비들에게 널리 알리겠습니다. 선비들은 마치 사막에 살다가 학문의 전당으로 옮겨 가는 양 기뻐할 것입니다.” <아담 샬 회고록 중 소현세자 편지>
〇 소현세자, 심양 주재 조선대사가 되다
- 청(淸)에서 8년간의 오랜 기간을 머물게 되는데, 심양관과 주변에는 세자부부와 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거기에 소속되어 있는 신하·궁녀·노비 등 500여명이 상주, 이는 조선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현상, 청(淸)은 계속 상주인원을 줄이라고 요구하던 차(次)에 때 마침 흉년까지 겹쳐 청(淸)에서도 비용에 부담을 느끼면서 양곡 조달을 제한했던 것.
- 피로인을 통해 경작을 하게하는 것도 고민의 결과, 당시 심양에는 조선인 피로인 매매시장이 있었는데, 그 참상을 확인하면서 어떻게든 이 피로인에게 도움을 주어야겠구나 하는 애민정신의 산물이었을 것
- 때마침 누르하치의 12번 째 아들 파랑은 명나라와의 교역이 자주 끊기자 소현세자에게 은(銀)을 주면서 조선과의 무역을 요청하고 이에 응하면서 경제적 부를 축적한다.
- 그러나 심양관의 무역활동을 실록에는 부정적으로 기록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두고는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 <인조실록 1645년 6월 27일>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는 것
- 소현세자의 심양관 무역활동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고, 게다가 조선에서 사신이 오거나 군병이나 군량이 들어오고 또한 조선과 청(淸) 사이 외교문제의 현황에 대처해야 했던 소현세자는 외교의 최전선에서 고위급 외교관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되는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청(淸)도 현안이 생기면 원래는 청황제와 조선의 국왕 사이의 현안문제인데 가까이에 소현세자가 있으니 청(淸)은 조선과의 현안을 소현세자를 찾게 되는 것
- 하지만 사실 조선의 세자는 정사(政事)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전결권이 없거나 재량권이 제한되었던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淸)의 눈치를 보며 조선의 국익(國益)을 위해 노력했던 것.
〇 소현세자, 새로운 세계를 만나다
- 당시 청나라가 대단했던 것이 아담 샬은 원래 명나라에 온 신부로 명(明)이 멸망하고 난 후(後)에도 서양문물 도입에 적극 활용하는 것은 개방적인 청(淸)의 모습을 보여 주는 단면
- 소현세자도 아담 샬을 통해 적극적으로 서구문명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는 것, 로마에서 간행된 기록을 보면 “아담 샬과의 만남은 진정 하늘의 이끄심일 것입니다” 아담 샬<회고록> 소현세자 편지 中
- 명(明)이 멸망하는 현장을 목격한 소현세자, 그래서 기존의 이데올로기였던 숭명대의(崇明大義)가 아니라, 청(淸) 중심의 현실외교를 해야 한다는 확신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것은 소현세자가 이러한 속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숭명반청의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공공연하게 표출하기에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일 것
〇 <연려실기술>이 전하는 소현세자의 귀국
- 청나라에서 영구 귀국한 소현세자와 강빈, 생사의 고비를 넘어 8년 만에 돌아온 이들의 귀국에 인조(仁祖)의 반응은 싸늘했다.
- 소현은 각종 서책과 과학기기 · 천주상 등 진귀한 물건을 가져와서 청 황제로부터 받은 벼루를 인조(仁祖)에게 바치지만 크게 화(火)를 내며 소현세자에게 벼루를 집어던지는 인조(仁祖), 청나라 문물을 전(傳)하는 아들에게 인조(仁祖)는 왜 그리 화를 냈을까?
- 비록 야사(野史)의 기록일지라도 기록에 있다는 것은 당대의 민심에서 부자의 관계가 나빴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
〇 인조(仁祖), 아들을 의심하다
- 인조(仁祖)와 소현세자 사이에는 무슨 일이?
병자호란 이후 청(淸)은 조선통제수단으로 소현세자를 활용하고 인조(仁祖)를 길들이기 위해 인조(仁祖)가 말을 듣지 않으면 왕위교체론을 언급하여 인조(仁祖)를 긴장시키는 것
- 인조(仁祖)의 삼전도 굴욕은 반청(反淸)의 명분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집권한 인조(仁祖) 자신에게는 스스로의 모순에 빠지게 되고, 누구든지 광해군을 몰아낸 친명배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다시 인조(仁祖)를 몰아내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
- 게다가 소현세자 장인 강석기는 척화파의 지지와 신망을 받던 인물로 반정세력의 주요인물, 정치적 구도가 이렇게 짜여진 이상, 부자간의 정이 아무리 애틋하다 하더라도 인조(仁祖)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아주 작은 오해와 불씨에도 큰 분란으로 악화될 소지가 다분했던 것
- 인조(仁祖)가 벼루를 던진 것은 청(淸)을 싫어한다는 일종의 퍼포먼스로 인조(仁祖)가 원하는 답은 “저 오랑캐들 무지막지합니다!” 였지만 소현세자의 대답은 “저 사람들 괜찮은데요.” 였던 것으로 인조(仁祖)의 입장에서 보면 그 벼루를 버리고 왔어야···
- 소현세자가 청(淸)과 가깝다는 것은 언젠가 청(淸)과 손잡고 자신의 왕위를 내려 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을 가졌을 수도 있는 것, 이런 불안감을 증폭시킨 것은 실제로 왕을 교체한 전례가 있었던 것으로 고려 말 원(元)의 간섭기 북경에 볼모로 있던 세자를 충선왕(1년)으로 추대한 사례가 있었고, 청(淸)도 이런 원(元)의 사례를 들어 수시로 인조를 압박했던 것
- 종합적으로 볼 때 인조(仁祖)에게 소현은 잠재적으로 최대의 정적이 될 수 있는 구도가 설정된 셈, 게다가 소현은 볼모생활 중 두 차례 고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처음은 인조(仁祖)의 병간호를 위해 귀국을 하려는 송별연에서 “용골대가 세자를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먼저 안마를 해주고 다음으로 의복을 내어 주었는데 대흥망룡의를 입게 하였습니다.” <인조실록 1640년 2월 18일>
- 대흥망룡의는 왕만이 입는 옷으로 소현세자는 이를 강하게 거부를 하지만 강권(强權)으로 입게 하였고, 이 소문은 인조(仁祖)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인조(仁祖)는 왕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게 된다.
- 1643년 말(末)에 두 번째 귀국을 하게 되는데 강빈의 아버지가 사망했기 때문으로 인조(仁祖)는 세자 내외가 오기 전의 반응을 보면, 세자가 청(淸)과 결탁해서 자신의 왕위를 도모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게 되는 상태까지 오게 된 것 “전일(前日)에는 세자에 대한 대우를 지나치게 박(薄)하게 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지나치게 후(厚)하게 한다 하니 나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저들이 만약 좋은 뜻으로 보낸다면 세자와 대군을 다 돌려보낼 것인데, 중한 것을 포기하고 가벼운 것을 취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조실록 1643년 10월 11일>
- 공교롭게 세자가 돌아간 직후에 반정공신인 심기원의 역모사건이 드러나 체포가 되는데, 들리는 소문에는 소현세자를 추대하려 했다는 것, 결국 인조(仁祖)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축적한 부(富)를 이용해 거사자금으로 쓰려 하지 않는가하는 의심의 꼬리를 물게 된다.
〇 인조(仁祖), 소현세자 죽음의 배후?
- 행동대장 격 의관이 존재 · 시신상태 · 장례일정의 간소화를 보면 수미일관하고 일목요연하게 인조(仁祖)가 독살했다고 의심할 수 있는 정황(?)
- 소현세자는 1644년 11월 심양을 출발해 이듬해 2월에 조선에 들어오는데, 출발할 때부터 사실은 몸이 아파서 치료와 회복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아마도 기록상의 문제일 것인데 우리가 흔히 접하던 <조선왕조실록에>는 병과 죽음에 대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최근 세자의 심양생활을 기록한 <심양일기>를 번역한 결과, 병증과 치료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의학적 관점으로 볼 때 독살로 보기에는 무리라는 것.
- 소현은 심양으로 끌려갔을 때부터 산증(疝症)을 계속 앓게 되는데, 산증은 아랫배에 생긴 병으로 한의학에서는 한기(寒氣)가 뭉쳐 생긴 병으로 보는데, 증세가 학질과 비슷해 오인(誤認)할 수 있다는 것
- 추우면서 열이 나는 것은 가짜 열이고 더우면서 열이 나는 것은 진짜 열로 진짜 열은 내려주는 약(藥)을 쓰고, 가짜 열은 오히려 몸을 따뜻하게 하는 약(藥)을 써야 하는 것이 치료법으로 소현세자는 가짜 열인데, 진짜 열 치료를 하여 사망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한 것
- 당대 최고의 의관이 오진(誤診)을?
심양에 같이 있었던 기존의 주치의들이 소현세자 귀국 직후 원인 모르게 일제히 교체되고, 새로운 의료진들은 산증(疝症)을 증상이 비슷한 학질로 오진(誤診)하여 열을 내리는 처방을 쓰게 되지만, 음기(淫氣)가 허해서 열이 날 때 열을 낮추는 치료를 하면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의학적 기록
- 그러면 시신(屍身)에 나타난 검은 빛과 선혈은?
당시 기록에 의하면 소현은 정신을 잃을 만큼 열이 올라 땀을 많이 흘리고 궁녀들이 놀랐을 정도, 소현의 병 증세의 과정에서는 몸이 검게 변할 수 있다는 것, 목격자 이세완의 증언에 의하면 7구멍에 선혈이 보였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 피가 흘렀다면 입관 전(前)에 시신을 닦았을 것, 열이 오르내리면서 고생을 하다 보면 피부에 반점이 생기는데 이를 선혈 자국으로 오해했던 것이 아닌가? 로 추정
- 의학적인 소견으로 볼 때 타살이 아닌 것으로 결론은 내렸으나, 소현세자 사후 인조(仁祖)의 행태 때문에 타살의혹이 더해지고 있는 것, 마치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진도가 나간다는 것
〇 인조(仁祖)를 향한 사그라지지 않는 의혹
- 한편으로 보면 청(淸)이 소현을 우호적으로 지지해주는 상황에서 소현의 독살은 외교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 수 있어서 독살의 가능성은 희박, 그러나 주치의가 원인 모르게 바뀐 것과 처방이 잘 못된 것은 개연성이 있는 계획살인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 것
-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면 소현세자가 심양에 끌려갔는데 기후·음식·풍토 어느 것 하나 맞는 것이 없는 곳에서 8년을 체류하면서 잦은 병치레를 겪는 육체적상황과 정신적으로는 청(淸)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제일 먼저 윽박을 지르는 곳이 소현세자
- 그런데 본국에서는 오히려 세자가 청(淸)의 요구에 너무 쉽게 수용한다고 잦은 비난하기 일수였고 게다가 왕위교체설로 인조의 의심이 점점 심해지는 상황이었으니까 소현세자의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했을 것, 이와 관련한 심양일기의 기록 “세자가 낮에 신하들을 접견하다가 책상에 기대어 한숨을 쉬고 눈물을 흘리니 신하들이 차마 우러러 볼 수가 없었다.” <심양일기 1638년 5월>
- 종합해서 보면 소현세자는 심양에서부터 정신적 · 육체적으로 지친 상태인 것은 사실, 그렇지만 소현세자 사후 인조(仁祖)의 행위에 대해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던 것, 특히 소현세자가 사후 인조(仁祖)가 자신의 손자와 며느리를 죽이지 않았다면 인조(仁祖)를 동정해 줄 수도 있지만 그 후의 행동들이 너무나 개연성이 많은 것
〇 인조(仁祖), 소현세자 일가를 멸(滅)하다
- 강빈은 소현이 죽고 아들 원빈이 세자책봉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머리를 풀어헤치고 인조(仁祖)의 침실로 달려 들어가 하소연을 했으나, 화가 난 인조(仁祖)는 강빈을 유폐시킨다.
- 이듬 해, 인조(仁祖)의 수라상에 독(毒)이 든 전복이 올려 지는데, 그 사건의 배후인물로 강빈이 지목되면서 결국 역모로 몰려 인조(仁祖)에 의해 강빈과 그 일가가 사사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되고 귀양간지 1년 만에 큰아들 석철(12세)은 사망하고 실록에는 풍토병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당시 민심은 인조(仁祖)가 석철을 죽였다고 의심을 했고, 3개월 후 둘째 석린(8세)도 잇달아 사망하며 막내 석견(4세)만 남게 된다.
- 소현세자 사후에 용골대가 장남 석철을 데려다 키우려 했으나 의심 많은 인조(仁祖)는 청이 자신을 폐위하고 석철을 왕위에 올릴까 두려워하여 석철을 죽였다는 추정도 있다는 것
○ KBS 드라마 <추노> 소현세자 독살을 배경으로 한 역사드라마
- 죽기 전(前) 신하들에게 자신의 아들들을 부탁하는 소현
- 숨을 거두자마자 소현 집안에 몰아치는 피바람, 강빈은 사사(되고, 세 아들은 제 주도로 귀향 보내진 뒤, 두 아들이 역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 민심은 인조(仁祖)를 의심하면서 노비와 도망간 노비를 쫒는 추노의 끝.
-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죽을 위기에 처한 마지막 남은 소현세자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제주도로 나선다.
- 소현세자, 그는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그의 아들이라면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으리라 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〇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仁祖)의 본심
- 소현세자의 죽음이 독살의 진위여부를 떠나 인조(仁祖)는 소현의 죽음을 호재로 이용하여 마치 원했던 것처럼, 서둘러 봉림대군을 지명하는 등 일련의 과정을 보면 결국 소현과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것은 절대불가하다는 인조(仁祖)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것
- 소현세자 어떻게 볼 것인가?
전국의 역사 교사들이 부활시키고 싶은 인물의 순위 1위에 오른 것을 보면 훌륭한 군주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것, 또 한편으로 보면 당시 소현세자는 세자의 입장이라서 정책 입안자가 아니므로 실체는 없고, 단지 몇 가지의 행적으로 그를 추천한 것은 당시 절망적인 시대상황 속에서 희망의 단초를 보고자 하는 마음이 소현에 투영되어 부활시키고 싶은 1위에 오른 것이 아닌가(?)
- 각도(角度)를 달리해서 보면은 소현세자를 선진문물과 서구사상을 받아들이고 근대적인 개혁의 선구자로 보는 시각은 그 시대와 대중의 열망이 학계에 반영된 측면도 있다는 것, 일제 강점기의 식민주의 사학자들의 측면에서 보면 병자호란 전후의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선 역사를 부정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큰 먹이 감인 셈.
-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해방 이후 민족주의 사관학자들은 이러한 인식을 극복하기 위해 광해군·최명길 등을 부각시키려 했고, 이 계보에 소현과 강빈도 동일선상에 위치시키면서 조선의 부정적 인식을 극복하려 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
〇 소현세자 어떻게 볼 것인가?
- 소현을 평가할 때, 볼모를 자청(自請)했던 희생정신 · 용골대에게 호통을 친 담력 · 서양 과학과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방성과 심양관의 사업수완을 보면 소현세자가 왕(王)이 되고, 봉림대군이 뒤에서 받쳐줬다면 좀 더 나은 조선의 역사가 쓰여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 결국 우리 역사 속에서 소현세자와 같은 인물이 존재했고, 또 그런 활동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지표라는 것
- 조선 왕릉 중의 하나인 서삼릉, 조금 떨어진 곳에 소현세자의 무덤이 있는데 수년 전(前) 목축시험장이 들어서면서 다른 왕족과 능역이 분리되어 이제는 이곳을 찾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 서삼릉 : 고양시에 소재,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 능인 ‘희릉’ 인종과 인성왕후의 능인 ‘효릉’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인 ‘예릉’ 등 3개의 능이 있음
- 소경원(소현세자의 무덤)은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전탑마저 불타 없어졌고 원래는 일반 묘처럼 소현묘라고 불렀으나 고종(高宗) 때에서야 소경원으로 격상되어 살아있을 때나 죽음을 맞이해서도 외로웠을 소현세자, 지금까지도 그는 다른 왕족들과 떨어져 어느 산자락에서 외로운 세월을 보내고 있다
- 남편 소현세자 곁에 묻히지 못한 아내 강빈, 영회원(강빈의 무덤으로 광명시 소재)은 현재 상주하는 관리인도 없이 외부와 단절되어 있고, 세자빈의 지위를 잃었던 강빈 묘 역시, 고종(高宗) 때에야 격에 맞는 무덤으로 격상되어 조성되었다.
※ 소현세자의 생애(生涯)
- 1612년, 인조(仁祖)의 큰 아들로 출생
- 1623년, 소현세자(昭顯世子)로 책봉되다
- 1637년, 볼모가 되어 강빈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가다.
- 1644년, 북경에서 아담 샬을 만나다.
- 1645년, 8년 만에 귀국, 그리고 두 달 후 사망
- 1646년, 부인 강빈 · 인조(仁祖)에 의해 사사(死事)되다.
- 1648년, 소현의 두 아들 제주에서 유배 중 사망하다. 인조(仁祖)는 단 한 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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