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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삼전도 굴욕

mkpark2022 2015. 6. 20. 21:20

 

 



치욕의 삼전도 굴욕



〇 고립 48일 째인 1637년 1월 30일

- 치욕의 삼전도 굴욕 “결박(結縛)은 면하게 해주겠다. 관(棺)은 끌고 나오지 않아도 좋다. 단 죄인은 정문(남문)으로 나올 수 없다” 하급관리의 의복인 남색 옷을 입고 서문을 나서는 죄인은 조선 16대 임금 인조(仁祖)

- 인조(仁祖) 일행이 도착한 곳은 청 황제 홍타이지가 조선의 항복을 받기위해 기다리던 삼전도 나루로 인조(仁祖)는 청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 는 조선과 청(淸)이 군신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

- 중국의 고대 항복의식 절차?

죄인의 몸을 묶는다든지 · 관(棺)을 등에 짊어진다든지 · 헤진 옷을 입는다든지 다양했지만 인조(仁祖)에게 적용된 조건은 비교적 가벼운 것.


〇 47일만의 항복

- 오랑캐로 여기던 청(淸) 황제 앞에 무릎을 꿇은 인조(仁祖), 반정(反正)은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가문의 모든 것을 걸고 하는 것으로 광해군에 대한 증오와 권력욕 외(外)에 국왕으로서의 포부가 인조(仁祖)에게도 있었을 것.

- 하지만 즉위 15년 만에 병자호란으로 참담하게 무너진 왕권, 당시 인조(仁祖)가 서문을 나설 때 “백관 중에 뒤에 남은 자들은 나열해 서서 가슴을 치며 곡용(통곡)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1월 30일>

- 항복 의식 2일 전(前)에 용골대와 좌의정 홍서봉이 미리 항복절차를 협의하는데, 가장 쟁점이 된 것은 인조(仁祖)의 복식(服飾)과 출성통로, 청(靑)측의 입장은 인조(仁祖)는 죄인이라서 곤룡포도 입을 수 없고 정문(南門)으로도 나올 수 없다는 것 “임금과 세자가 입을 푸른 색 옷을 밤새도록 꿰매 올렸다” <연려실기술>

- 조선 국왕이 삼배를 했던 대상은 종묘사직 · 문묘 · 명황제와 황태자 등으로 국한, 명황제와 황태자에 대한 삼배는 실제로 마주보며 한 것이 아니고 형식적인 것으로 대상을 보고 직접 삼배를 한 것은 청 태종이 유일


〇 조선과 청(淸)의 관계변화

- 왜 청(淸)은 항복의식 절차에 집착했나?

국제질서에서 병자호란은 조선과 청(淸)이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국 간의 힘의 변화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삼배구고두례>는 이의 증명을 재삼 확인하는 것

- 인조(仁祖)가 삼배구고두례 시(時) 이마에 피가 났나?

인조(仁祖)의 이마에서 피가 났다는 기록은 없고 정황으로 봐서 조선의 입장에서는 포석(鋪席)하기를 원했지만 이를 거부한 것 “여러 신하들이 포석을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황제 앞에서는 스스로 높힐 수 없다’” <병자록>

- 항복 의식 후에는 인조(仁祖)를 한 나라의 왕으로 예우했던 청 태종, 그러나 당하는 입장에서는 힘든 일 “얼마 뒤 갑자기 일어나 단을 내려가 오줌을 누었으므로 상 또한 일어나 단을 내려가 진 밖의 동쪽 모퉁이로 나가서 휴식하였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1월 30일>

- 항복의식에 걸린 시간?

거의 해 질 무렵까지 계속되어 유시(酉時, 오후 5시~7시)에 환도(還都)를 허락받은 인조(仁祖), 인조뿐만 아니라 소현세자와 신료들 모두 <삼배구고두례>로 바닥에 떨어진 인조(仁祖)의 권위, 의식이 끝난 후(後) 궁으로 돌아 가기위해 “강가에 다다르자 백관들이 앞 다투어 어의(御衣)를 잡아당기면서 배에 올랐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1월 30일>

- 병자호란 직전 강한 모습을 보였던 인조(仁祖)의 속내?

인조(仁祖)는 요행을 바랐던 것이 아닐까? 청(淸)이 정말로 쳐들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쳐들어오지 않을 경우 자신의 행동이 후대(後代)에 멋있게 보여 지고 싶었던 것으로 그야말로 도박과 같은 행위

- 그날의 기록, “30일에 안개가 짙고 햇볕이 없었다.” <병자록> 승정원일기에는 당일이 날씨를 ‘맑음’이라고 기록됐는데도 불구하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햇빛에 광채가 없었다.” <승정원일기 인조 15년 1월 30일> 해는 임금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가 빛이 없다는 것은 많은 함축적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것으로 당시 비참했던 조선인들의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 메타포(Metaphor) : 은유(隱喩)로 속성이 유사한 표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〇 굴욕의 삼전도 비(대청황제공덕비)

- 청 태종이 공덕비를 세우게 한 이유?

병자호란 이후 청 태종이 조선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삼전나루(석촌호수 주변)에 세운 비, 약 4m의 높이에 앞면 오른쪽엔 만주어 · 왼쪽엔 몽골어 · 뒷면엔 한문으로 똑같은 문장이 쓰여 졌는데 병자호란 당시 참전 민족들의 언어

- 삼전도 비의 내용?

조선이 청(淸)과의 맹약을 먼저 어겼고 청 태종은 그런 조선을 너그러운 은혜로 항복을 받아들였다는 내용 “내가 혼미하여 스스로 천토(天討)를 불러··· 황제가 이에 예로써 우대하고 은혜로 어루만졌다” <인조 16년 2월 8일>

- 전 근대에서 비(碑)에 새긴다는 것은 영원히 잊지 말라는 의미로 병자호란 후 청(淸)의 사신들이 자주 찾았던 삼전도비, 사실은 조선의 군사 요충지인 남한산성의 군비 확충을 감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 당시 글 좀 쓴다는 문사 네 사람에게 비문작성을 명령하지만 이경전은 신병을 핑계로 빠지고, 조희일은 글을 졸렬하고 거칠게 써서 빠졌으며, 장유는 인용글로 빠지고 결국 이경석의 글이 채택 “옛날에 익혀두었던 문자를 백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신처럼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 그 사이에 끼워 넣겠습니까?···” <장유의 계곡집>

- 한 지식인이 자신의 주관과 가치관이 전혀 다른 글을 쓴다는 것은 큰 고통, 후대에 정약용도 시(詩)로써 그 아픔을 노래 “천운이 기구했던 병자년 겨울에는··· 다만 지금 가랑비 속의 삼전도에는 화각속의 큰 비석이 글자마다 붉구려···” <정약용의 다산 시문집 중>


〇 강화도 함락

- 고려 때부터 왕실의 피난처 역할을 했던 강화도가 외적 방어에 유리한 점은 사면이 바다이고, 경작이 가능하며, 특히 겨울에는 유빙(遊氷) 때문에 접근이 어려워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천혜요새 “강화도는 우리에게 편리하고 저들에게는 침범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인조실록 14년 12월 14일>

※ 금성탕지(金城湯池) : 쇠로 만든 성과 끓는 물을 채운 못이라는 뜻, 매우 견고한 요새

- 조선의 조정은 해전에 익숙하지 못한 청군이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을 뒤엎고 강화도 공략을 철저하게 준비한 청군

- 1637년 1월 22일 강화도에 상륙하고 조선군은 저항해 보지만 엄청난 병력 차(次)에 무릎을 꿇고 강화도에 상륙한지 한 나절 만에 강화산성이 함락되고 오랜 세월 외적의 침입을 막아주었던 강화도는 청군의 발아래 처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 강화도가 함락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청군이 강화도 공략을 철저하게 준비했던 것, 조선에서 배를 만들 계획으로 심양에서 기술자까지 데려오고 조선 현지에서 사로잡은 포로 중 배 만드는 장인을 활용하고 한강 일대에 버려진 선박이나 목재를 활용하여 조선 자체에서 병선(兵船)을 만들고 또한 물길이 얼어붙어 병선(兵船)이 이동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으로 병선을 작게 만들어 육로로 이동해서 강화도 앞까지 운반한 후 상륙을 시도한 것

- 조선의 판옥선으로 충파할 수는 없었는가?

“판옥전함은 강화도 같은 급류에선 결코 운용하기 어렵다” <광해군 일기 11년 7월 3일>

※ 충파 : 큰 판옥선이 작은 배를 들이 받아 공격하는 전술.

- 또 하나의 변수는 청(靑)의 홍이포 공격, 조선군이 가지고 있던 불랑기보다 사정거리도 길고 위력도 강했던 홍이포, 상륙 직전 맹렬한 공격을 하여 홍이포 위력에 조선 수군은 사기를 잃고 도주하고 마는데, 과거 수군(水軍)과 병선(兵船)이 없었던 청이 병선제작 기술까지 확보한 치밀함은 그 만큼 준비가 철저했다는 의미

※ 홍이포(紅吏砲) : 명(明)이 네덜란드 화포를 모방해 만든 무기로 불랑기보다 화력이 월등함 VS 불랑기(佛狼機) : 임진왜란 당시 명(明) 군대에 의해 도입된 서양식 청동기 화포

- 그럼 청(淸)이 명(明)의 수군(水軍)을 흡수한 건가요?

원래 청(淸)은 수군이 없었으나 가도 모문룡의 심각한 부패로 명(明) 장군 원숭환에게 불려가 처단되고 그의 부하인 공유덕 · 경중명이 수 백 척의 함대와 홍이포를 들고 투항하자 이 홍이포가 강화도와 남한산성을 함락시키는데 유효하게 쓰인 것

- 청(淸)의 수군확보, 조선의 대응은?

조정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를 하고 나름대로 대비책을 세우면서 병자호란 1년 전(前)부터 강화도에 수군병력을 배치

- 조선의 대비에도 불구하고 강화도가 함락된 이유?

청군이 얼음이 풀리는 짧은 시간을 틈타서 갑곶으로 침투를 시도하는데, 청군의 침투 하루 전날에야 위기를 파악하고 허둥지둥 광성진의 주력 함대를 갑곶으로 이동 명령을 하지만 때마침 바닷물이 조금 때라서 조수 간만의 차(差)가 작아 배의 이동이 더뎠던 것으로 조선 조정의 잘못된 정세판단으로 이튿날 새벽에야 갑곶에 도착.

- 정묘호란에서 청(淸)에게 굴욕적으로 패배한 조선, 그것이 신의(信義) 관계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면 그에 걸 맞는 행보가 이어졌어야 하는 것, 예를 들어 대외적으로 문제를 푼다든가 그러지도 못하면서 큰소리는 큰 소리대로 치고 군비확충에는 신경 쓰지 않은 당시 조정의 무능함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한 단면

- 이런 상황에서 정말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외교력으로 고려 때 서희가 외교력을 발휘해 강동 6주의 땅을 얻어냈던 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탈출을 위한 외교적 노력조차 전무했던 것이 안타까운 점

※ 서희(942~998) : 고려시대 문신·외교가로 거란 침입 시 협상만으로 강동6주를 확보

- 강화도의 피해 상황은?

강화성이 함락되고 전세가 워낙 불리해지자 자결을 택한 사람들, 대표적 인물 김상용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을 선택 “두건이 물에 떠있는 것이 마치 연못 위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 같았다” & “죽은 어머니의 젖을 여전히 빨고 있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연려실기술>

※ 김상용(1561~1637) : 대표적 척화신 김상헌의 형으로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자 자폭

- 강화도 함락 당시 남한산성의 상황은?

강화도 함락 4일 뒤에야 소식이 전해진 남한산성, 당시 식량은 바닥나고 격파당한 구원군의 소식에다 점점 맹렬해지는 홍이포 공격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 군사들은 반란의 조짐까지 보이는 상황

- 그러나 청(淸)은 반드시 인조(仁祖)의 출성항복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그래야만 화친이 성립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강화도 함락 소식을 전(傳)해준다.

- 강화도에 들어간 인물 중 주목할 만한 인물은 세자빈과 원손(元孫) 그리고 봉림대군까지 왕통을 이어갈 사람이 모두 인질이 된 상태이므로 인조(仁祖)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강화함락이 남한산성을 무너뜨린 격

- 사실 인조(仁祖)도 남한산성에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으로 명분이 없어 나가지 못하고 있는 터에 강화도 함락은 인조(仁祖)의 출성 명분이 된 것

- 인조(仁祖)가 끝까지 출성을 반대한 이유는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 것을 우려한 것, 즉 인조(仁祖)가 없더라도 왕통을 이을 세자가 있는 상황, 비록 인조(仁祖) 자신은 청에 끌려가더라도 이 모든 책임은 내가 지고 가겠다고 나섰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자신의 안위를 위해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항복한

 

〇 청(淸)의 항복조건, 정축화약

- 1637년 1월 28일, 청(淸)은 조선에 11가지 항복조건을 보내오는데, 명(明) 대신 청(淸)을 섬기라는 조건으로 명(明)의 연호(年號)와 책인을 반납하고 명(明)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라는 것,

- 청(淸)은 조선을 철저히 길들이기를 하며 수많은 조선인들을 청(淸)으로 끌어갔는데 청 태종이 강조한 것은 바로 ‘재조지은’으로 이는 조선이 임란 후 명(明)에 대한 의리를 쫒는 명분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인조 15년 1월 28일>

- 청(淸)이 교역을 요청할 때 조선은 명(明)과의 재조지은의 의리를 내세워 계속 반대를 했었는데, 이제 청나라 황제는 우리도 너희를 다시 살려 주었으니 재조지은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것으로 일종의 역공(逆攻)을 펼친 것.

- 어떠한 조약이든 협상과 조정은 있는 것인데 정축화약의 조건만 보면 인조(仁祖)가 청(靑)에 항복하면서 조선을 살린 것인지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


〇 인조(仁祖)의 사과

- 인조(仁祖)도 이런 분위기를 느꼈던지 실제로 삼전도 굴욕 20일 뒤 <교유문>을 발표하는데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의 도를 잃은 나머지 나 한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 <인조 15년 2월 9일>

-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자기변명에 급급한 문구 “외부의 군사를 기다렸는데··· 호남과 영남의 5개의 진이 잇따라 패배하고 서북의 제군은 전연 소식조차 없었다” & “팔도의 사민과 진신 대부들은 나의 어쩔 수 없었던 까닭을 양해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이미 지나간 잘못을 가지고 나를 멀리 버리지 말고···” <인조 15년 2월 19일>

- 뿐만 아니라 전쟁 후(後)에도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고 자신의 정권유지에만 급급했던 인조(仁祖)를 보면 이때의 사과는 진정한 사과가 아닌 듯하고 인조(仁祖)에게 일관성이 있는 것은 반성은 있는데 개선이 없다는 것으로 반성에 진정성이 없다는 것

- 삼전도 굴욕 후 어떻게 인조정권이 유지가 됐나?

인조정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가의 명맥을 유지하는 단 한 가지의 방법은 이전(以前)과는 달리 청(淸)의 요구에 순응하는 노선을 취하는 것, 그렇지만 척화(斥和)라는 것이 강고한 담론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상황으로 조정의 일부 신료들은 인조(仁祖)가 항복한 뒤에는 사직(辭職)을 하거나 아니면 인조(仁祖)가 불러도 조정에 올라오지 않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풍조도 생기는데 이는 청 황제의 신하가 된 인조(仁祖)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 본인도 청 황제의 신하가 된다는 생각

- 이러한 상황에서 인조(仁祖)는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따르던 최명길을 대표로 하는 주화파(主和波) 세력에 의지해서 정국을 수습하려 하고 최명길도 척화(斥和)파와 등을 완전히 돌리지는 않으면서 계속 그들을 정권 내부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한다.

- 이쯤 되면 조선시대는 인조(仁祖) 때 끝났어야···(?) 200년이면 한 왕조로서의 수명은 다 했다 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그 모순들도 모두 나타나 두 번이나 전쟁에 패하면서 이제는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 새로운 시대를 이끌었어야···(?)

- 당시, 인조(仁祖)와 서인세력을 대체할 정치세력은?

이러한 상황이 오면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다든지 아니면 기존의 사대부 내에서 개혁세력이 나온다든지 하는 것으로 전쟁 후(後) 개혁세력의 등장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조선(朝鮮)의 아픔이 아니었나···.


〇 청(淸)의 조선 길들이기

- 대부분 척화파였던 당시 조선의 조정, 정축화약은 잘 지켜졌을까?

문제는 청(淸)이 인조(仁祖)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 ‘조선이 여전히 명(明)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여 수시로 화약조건을 점검하고 인조(仁祖)를 입조(入朝, 청 조정에 불러들임)시키겠다는 말로 압박한다.

- 하지만 소극적인 저항은 많이 하는 인조(仁祖) ① 성 복구를 금지한다. VS 남한산성 · 평양성 복구 ② 명의 책인을 반납한다. VS 청(淸) 몰래 계속 명(明)과 통교한다는 것, 당시 횡의(橫議)는 사회적 문제가 되어 척화파의 거수(居首)로 알려진 김상헌이 청(淸)으로 끌려가게 된다.

※ 횡의(橫議) : 빗나간 의논이라는 뜻으로 조선이 청(淸) 몰래 명(明)과 통교한 것을 의미

- 청(淸)으로 압송되면서 쓴 김상헌의 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만은 시절이 하 수상하여 올동말동하여라.” 병자호란 이후에도 척화론을 계승한 서인의 노론세력이 주류를 이루면서 김상헌 · 김상용 형제가 충절의 대표로 인식

※ 김상헌(1570~1652) 인조 때 대표적인 척화신, 1640년 청으로 압송 1645년 귀국 &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은 강화도 함락 시 자폭


〇 척화론(斥和論)의 성격

- 조선에서 척화론이 그대로 계승됐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는 행위(?), 당시 척화론은 명(明)에 대한 재조지은의 의리를 지키자는 주장과 맞닿는 이론인데 이 의리라는 것은 현대에서 보는 의리가 아닌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1644년에 이미 명(明)은 멸망하여 지구상에서 사라진 상황이므로 이는 명(明)에 대한 사대주의의 심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보편적 문명의식, 그러니까 명(明)으로 대표하는 중화문명에 대한 조선의 자발적인 신념에서 주장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이후의 역사전개과정을 이해하는데 좀 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

- 하지만 그 당시 선비들을 이해하는 면에서는 그와 같은 접근이 합당할 줄 모르나 척화론이 불러온 폐해는 비판받아야 마땅한 것, “조정에 가득한 모든 사람들이 나라가 무너질지언정 차마 대의를 저버리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광해군일기 13년 2월 11일>

- 사대의리를 위해선 나라가 망해도 된다는 것에 대해 광해군은 “어떻게 의리가 나라와 백성의 안위보다 중요하냐?” 며 노발대발하지만 전쟁 후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지 않고 탁상공론에 빠져 있다는 것은 큰 문제이고 척화론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의 여부를 따지기 전에 백성들이 입었던 피해는 당시의 위정자들이 책임을 져야 할 역사의 그늘


〇 전쟁의 피해자, 피로인

- 병자호란 기간 동안 청군은 조선 곳곳에서 인간사냥을 일삼는데 전쟁에서 적에게 사로잡힌 민간인을 가리키는 피로인, 병자호란 당시 청(淸)에 끌려간 피로인은 적어도 수만 명에 이른다. “적진 가운데 조선인 피로인이 절반인데 그들이 무엇인가를 호소하면 청군이 철퇴로 때려 참혹한 정상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 “어떤 이는 화살을 맞았는데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어떤 이는 전하를 쫓아오다 적에게 잡혀가고···” <나만갑> 청으로 끌려간 백성에게 전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청(淸)이 조선인을 끌고 간 이유?

임진왜란 때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인을 상품으로 생각한 청군, 병자호란 이후 심양에서는 조선인을 매매하는 인간시장이 서게 되고, 속환(贖還)이라고 해서 일종의 몸값을 지불하고 이들을 데려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값이 폭등하여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한다.

- 전쟁 직후 은(銀) 10냥(200만원)이었던 속환가가 사대부들이 자식을 데려오면서 폭등을 하게 되는 것. “좌의정 이성구는 아들을 속환할 때 1천 5백 냥이나 주어 이때부터 속가가 매우 비싸져서 가난한 백성이 속하고 돌아올 희망이 아주 없어졌다” <인조실록 15년 7월 7일> 현재 금액으로 약 1억 원

※ 속환(贖還) : 피로인들의 몸값을 내고 데려오는 것

- 설령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피로인의 속환 문제는 국가가 나섰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애시 당초 협상과정에서 조선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정축화약 조건을 거부할 수는 없었겠지만, 정축화약 조건에 ‘도망쳐온 조선인을 돌려보낸다.’ 는 조항이 있었기에 나라에서 송환노력을 기울이거나 적어도 속환가의 상한선을 두어 넘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이를 무시한 조선의 조정

- 임진왜란 시에는 “유정(惟正)이 일본에서 돌아오면서 우리나라 남녀 3천 여 명을 쇄환(刷還)하였다” <선조수정실록 38년 4월 1일> 하지만 당시에는 피로인을 매매하는 조선인 중간상까지 등장하여 나쁜 정부 밑에 추악한 인간까지··· 전쟁이 만들어 낸 인간의 밑바닥을 완전히 보여주고 있는 상황.


〇 문학으로 본 17세기 백성의 삶, <한양대 기초융합교육원 서신혜 교수>

-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임경업전> <박씨전>, 여성 피로인의 모습을 그린 <유록전>, 당시 백성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김영철전> 등이 있다.

- 문학작품에 나타난 백성들의 삶?

첫 번째 키워드 포로, 최명길의 <지천집>에 의하면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50만 명, 병자호란 직후 조선의 인구는 약 850만 명으로 당시 조선의 얼마나 많은 백성이 포로의 아픔을 겪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

- 두 번째 키워드 징집, 17세기 초에 살았던 남성은 거의 평생 전쟁과 함께 살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1600년생 남자의 경우 10대에 심화전투(1619년), 20~30대에 두 번의 호란, 40대 청(淸)이 징집한 개주전투에 참여하게 되는 것으로 평생의 삶이 전쟁이고 징집

- <김영철 전>을 예로 보면 김영철은 19세의 미혼의 나이로 심하전투에 참여하여 포로가 되고 건주에서 6년 간 살다 탈출하여 등주를 거쳐 평양으로 오게 되지만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을 맞게 되고 몇 년 후에도 개주전투와 금주전투에 참여하여 늙어 죽을 때까지 수비군으로 살았어야 했다.

- 세 번째 키워드 피폐한 삶,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다 하더라도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황금 빛 삶이 아니었던 것, 김영철 같은 경우에도 10여 년을 타국에서 헤매다가 돌아왔지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길바닥에서 통곡했다는 기록


〇 여성 피로인의 아픔

- 병자호란의 대표 소설 <박씨전>은 가상의 세계에서나마 승리를 꿈꾼 백성들의 열망이 담긴 작품으로 재미있는 것은 <박씨전> 같은 경우는 영웅설화적인 분위기가 있지만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것

※ 박씨전 : 추녀였던 박씨 부인이 허물을 벗고 병자호란 당시 영웅으로서 나라를 구한다.

- 왜? 여성일까? 를 생각해보면 병자호란 때 많은 여성들이 끌려갔다가 엄청난 고생 끝에 힘들게 돌아왔지만 당시 정조를 잃었다고 냉대를 받았던 조선 여성들, 그런 억울함이 <박씨전>으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 청나라 장수의 첩으로 끌려갔던 조선 여성들의 경우에는 본처의 시기로 고통을 겪어야 했고, 당시 사회문제가 된 여성 피로인의 학대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한 청(淸)의 각오 ‘이런 짓하는 만주족은 남편 죽을 때 순사(殉死)시킨다’고 홍타이지는 엄포하기도···

- 환향녀의 어원?

병자호란 후 돌아온 여성을 이르는 말이지만 공식 기록인 <실록> · <연려실기술> · <승정원일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전쟁에서 진 것은 남자들의 책임으로 청(淸)에 항복하는 것 자체가 절의를 잃은 것이고 그로 인해 여인들이 끌려가 정조를 잃은 것에 대하여 며느리나 아내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배척한 것은 부끄러운 이야기

- 1638년에 조정에 상소가 올라오는데 “신풍 부원군 장유가 외아들의 처가 잡혀갔다가 속환되어 왔는데···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인조 16년 3월 11일> & “전(前) 승지 한이겸은 자기 딸이 사로잡혀 갔다가 속환되었는데, 사위가 다시 장가들려 한다고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인조 16년 3월 11일>

- 인조(仁祖)가 난처해하자 당시 영의정 최명길이 나서게 되는데 최명길의 논리는 두 가지, 하나는 책임이 남자에게 있는데 인정상 못할 짓이다. 또 하나는 끌려갔다고 해서 모두 정조를 잃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는 것으로 끝까지 이혼은 허락되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아내를 버리고 재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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