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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丙子胡亂)

mkpark2022 2015. 6. 6. 22:33

 

 

병자호란(丙子胡亂)



〇 청군(靑軍), 한양을 점령하다.

- 1636년 12월 9일 청나라 군사가 다시 압록강을 건넜다. 정묘호란 이후 9년 만으로 12만 8천여 청(淸)군은 불과 닷 세만에 도성을 점령하고, 인조(仁祖)는 가까스로 수구문을 통해 한양을 탈출하여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지만, 순식간에 쫒아오는 청(淸)군에 의해 산성은 완전히 포위되고 한 나라의 왕은 험준한 산에 고립된 것이다!

- 조선은 왜 청군이 산성을 점령한 후 남하(南下)할 것이라고 예상했나?

연(蓮)이은 전쟁 후에도 국경 · 변방수비를 재정비하지 않은 조선, 임진왜란의 경험으로 성(城)중심의 방어체계를 쓰고 있었으나 청군의 기마병은 속도전으로 승부하는 것, 그래서 한양을 먼저 점령한 후에 조선을 압박하는 전략을 썼던 것

- 하지만 조선은 산성전투에 필요한 정예 병력이 없었던 것과 결정적인 실책은 도원수 김자점이 비상봉화가 사흘 전부터 올라오고 있었으나 이를 무시하고 있다가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고 사흘이 지나고 진격하는 순간에 비로소 장계를 올려 초기대응에 실패했던 것

- 당대 최고의 지휘관이 어떻게 그렇게 대처할 수 있었는지?

엄청난 오판을 한 것이 김좌점의 생각은 이렇게 추운 겨울에 군대를 이동해 쳐들어올 리 없다는 단순한 판단, 1627년 1월 정묘호란 때도 겨울에 침략했었지만 한 지휘관의 근거 없는 안이한 판단이 나라의 재앙을 몰고 온 것

※ 도원수 : 고려 · 조선시대 전시(戰時)에 군대를 지휘하는 정2품의 임시관직


〇 인조(仁祖), 강화도 피난을 시도하다

- 얼마나 급했던지 광희문을 통해 인조(仁祖)가 피신을 하는데 광희문은 조선 도성 4소문 중 하나로 수구문(水口門) ·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리고 이괄의 난 때는 이괄이 탈출했던 문으로 인조(仁祖)가 이곳을 통해 나갔다는 것은 큰 치욕

※ 광희문 : 지금의 신당동으로 많은 시신(屍身)이 나와 굿할 일이 많아 생긴 당집마을의 신당(神堂), 갑오개혁 때 신당(新堂)으로 바뀜

- 남한산성은 임시피난처이고 원래 목적지는 전쟁준비가 되어있는 강화도, 그러나 청군이 너무 빨리 내려오는 바람에 강화도로 피(避)할 시간이 없었던 것, 남한산성에 들어가자마자 강화도로 옮겨가자는 논의가 나오는데 이들 중 반정공신 김류는 이미 가족을 강화도로 피신시킨 상태이고 그의 아들 김경징은 강화도 검찰사로 문제는 강을 건너는데 가족과 식솔(食率)을 먼저 배에 태우는 사태가 발생하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받게 된다. “김경징이 모친과 처를 옥교에 태우고 집안의 재물을 운반하기 위해 인부를 동원했다” <양구기사>

- 강화도로 가려는 이유 ① 정묘호란 당시 화친(和親)에 성공했던 장소 ② 군량과 무기 보급이 용이한 점, 하지만 피난길이 험난하여 “산길이 얼어 왕이 말에서 내려 걸어갔으나 끝내 강화도에 도착할 수 없는 것을 깨달고 산성으로 돌아왔다” <인조실록 1636.12.15> & “임금의 발에 동상이 걸려 걸을 수 없어 털방석으로 받들고 남문에 도착하니 비로소 가마가 왔다.” <일월록>

- 청군(靑軍)은 이미 강화도 피난길을 예상하고 강화도 가는 길을 봉쇄한 것이고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날은 음력 12월 15일(양력 1월 중순)로 가장 추운 시기

- 인조(仁祖)의 강화도 피신이 성공했다면?

조선 수군(水軍)이 해상전투에 우세할 것으로 판단하고 강화도를 고집하는 조선,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 청군은 이를 미리 알고 한족(漢族) 수군지휘관을 영입해 전력을 보강한 상태로 이전(以前)의 여진족 오랑캐 부대는 아니었던 것


〇 청(淸)의 조문사절단을 푸대접한 조선

- 중국 대륙의 패권을 노리고 힘을 키워가던 후금(後金)은 1636. 2. 16 조선에 인조(仁祖)의 정비(正妃)인 인혈왕후의 조문사절단을 보내는데 그들의 또 다른 목적은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를 알리고 조선의 동의를 얻는 것, 하지만 조선은 명나라와의 대의를 내세워 그들의 국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 게다가 빈전(殯殿)이 좁다는 이유로 왕비의 관을 모신 빈전 대신 격을 낮춘 임시 빈소를 설치 해 주는데, 이마저 바람이 불어 날아가고 만다. “오랑캐 장수에게 전이 좁다는 핑계로 빈 장막을 금천교 위에 베풀어 제를 행하도록 하였다” <연려실기술>

- 장막(帳幕) 뒤에는 군사들이 있었고 이를 조선 정부에서 잠복시킨 것으로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 결국 조문사절단은 화를 내며 궁을 박차고 나가 후금(後金)으로 돌아가는데 조선의 아이들은 그 뒤를 따르며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진다.

- 당시의 홍타이지는 몽골족에게 ‘징기스칸의 후예’이자 ‘중국 대륙의 지배자’를 상징하는 옥새를 받은 상태로 후금(後金)에 항복한 민족들까지 팔기군으로 편제하여 승승장구하던 상황으로 후금(後金)의 실체를 전혀 모르고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물

- 임시 빈소 뒤의 군사는?

궁(宮) 안이고 사신단은 후금(後金)의 사신만 온 것이 아니라 몽고 버일러들까지 77명의 대규모 집단으로 조선의 입장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경호의 차원에서 배치했으나 워낙 푸대접을 받다보니 죽이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를 했던 것

※ 몽고 버일러 : 홍타이지에게 굴복하고 충성을 맹세한 몽골의 왕족 우두머리

- 후금(後金)의 입장에선 이미 자신들이 중원의 패자(覇者)라고 생각하고 있는 마당에 우리를 이렇게 무시했다는 것


〇 홍타이지 황제즉위를 인정하지 않는 조선

- 홍타이지 즉위식에서도 큰 사건이 있었다?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의 사신 나덕헌 · 이확은 외국사절단이 모두 엎드려 절을 하는 상황에 절을 하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다가 죽지 않을 만큼 맞고 돌아오는데 쫓겨 오면서 홍타이지의 국서(國書)를 몰래 버려버리는데 명(明)에게 트집을 잡힐까 두려웠던 것

- 이때는 이미 명나라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두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國書)의 내용은 “조선이 어떤 잘못을 했으며 전쟁을 통해 강약(强弱)과 승부를 겨룰 뿐 사신을 죽이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 스스로 죄를 깨우쳤다면 자제(왕자)를 볼모로 보내라” 는 것, 그러나 두 신하는 조선에 가져가면 큰일 날 내용이라 스스로 판단하고 국서를 다시 쓴다.

- 당시는 불행하게도 양국의 행사가 많았는데, 인열왕후 상(1635. 12. 9), 홍타이지 즉위식(1634. 4. 11) 등 계속 갈등을 유발시킬 수 있는 큰 사건들이 발생한 것, 이는 오히려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하여 양국관계 회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으나 이를 놓친 조선


※ 청(淸)이 주장하는 조선을 침략하는 이유

- 1619년 후금이 요동을 차지 이후 도망쳐 온 한인들을 받아들여 명(明)에 넘긴 것

- 정묘년에 맹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누차 그것을 어긴 것

- 후금(後金)으로 귀순하던 공유덕과 경증명 일행을 공격한 것

- 명(明)에는 병선(兵船)을 제공했으면서 병선을 빌려 달라는 자신들의 요구는 거부한 것

- 인조(仁祖)가 평안감사 홍명구에게 유시문을 보내 자신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것


〇 인조(仁祖), 왜 추숭(追崇)에 집착했나?

-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는 연이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돌보는 것보다 더욱 관심을 쏟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인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追崇)하는 문제로 즉위 초부터 이를 고집해오는데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강한 왕권을 유지하려면 왕의 아들이라는 정통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 그러나 명분과 정통을 중시하던 신하들은 원종추숭을 강력히 반대하지만 1635년 마침내 10여 년의 논쟁 끝에 인조(仁祖)는 명(明)의 승인을 얻고 원종의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시는데 성공하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불과 1년 전(前)의 일이다.

※ 추숭 : 왕으로 오르지 못하고 죽은 이에게 임금의 칭호를 줌

- 원종 추숭(追崇)이 외교와 민생에 앞설 만큼 중요한 문제인가?

인조(仁祖)가 추숭에 집착한 이유는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광해군이 폐위되어 조부(祖父)인 선조(宣祖)에서 손자(孫子)로 왕통이 이어지는 것으로 왕통으로 보면 원종(아버지)과 인조(아들)가 형제관계가 되는 셈, 하지만 부친(父親)을 왕으로 추숭(追崇)하면 서열이 맞게 되고 종묘(宗廟)에서도 순서가 맞게 되는 것.

- 신하들은 왜 원종 추숭(追崇)에 반대했나?

성종(成宗)의 아버지 덕종(德宗)을 추숭한 선례가 있긴 하지만, 덕종(德宗)은 왕세자로 있다가 세상을 떠나 가능했지만 정원군은 세자가 아니고 단지 왕자였을 뿐이라는 것, 하지만 인조(仁祖)는 즉위 10년 동안 14번의 추숭논쟁 기록


〇 추숭논쟁으로 버려진 민생

- 정묘호란으로 굶어 죽은 시신이 넘쳐나고 (인조5년) · 돌림병과 가뭄(인조6년) · 용골대의 약탈(인조7년) · 지진(인조9년) 이런 상황에서도 추숭논쟁은 계속 되고 있었던 것

- 인조(仁祖)는 정말 민생에 관심이 없는 왕이었나?

백성을 위한다는 큰소리는 쳤지만 구체적인 대안이나 정책이 없었던 것 “인조는 요순(堯舜)의 마음은 갖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인조실록 1635년 7월 29일>

- 뿐만 아니라 정묘호란 후(後) 늘어난 명·후금의 조공(租貢)은 서로의 자존심 싸움으로 많이 받으려 했고 이 당시 명(明)은 기울 때라 칙사로 나오면 한 재산 거두려 하여 명사신이 한번 왔다 가면 나라 경제가 흔들릴 정도 “명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백성들이 길가에서 통곡하여 답답한 상황을 표했다. 이에 왕이 주동한 자를 옥에 가두고 평시서의 관원을 잡아다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인조실록 1635. 7. 29>

- 나라가 이렇게 혼란스럽게 되자 반정공신인 가평군수 유백증(1587~1646)의 상소(上訴)가 올라간다. “국가의 흥망은 전적으로 군덕의 잘잘못에 있다. 민심이 흉흉하고 뇌물꾸러미가 조정에 횡행하고 있다. 국가의 위험이 마치 끊어지려는 실끈과 같은데, 광해가 죽기 전(前)에 종사가 먼저 망해 천고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다” <인조실록 1630년 3월 26일> 하급관리임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왕을 향한 직언


〇 남한산성의 이모저모

- 2014년 6월 2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주장성 터에 세운 산성으로 인조(仁祖)의 지시로 1624~1626년 수축, 해발 480m로 바로 옆이 한강이어서 오백여 미터를 단숨에 올라야 하는 천혜의 요새로 둘레는 12Km 산성 내부는 분지로 4개의 장대(將臺)가 있고, 특히 수어장대는 영조(英祖) 때 단층을 복층으로 바꾸면서 누각 이름을 무망루(無妄樓)로 명명하면서 근심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던 곳

※ 무망루 :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孝宗)이 복수에 실패한 비통함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 후대에 증축하면서 붙인 이름

- 남한산성을 방문했던 숙종·영조·정조 등은 여주에 있는 효종(孝宗) 능에 갈 때 이곳을 거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병자호란 당시 치욕을 상기하고 부국강병을 다짐하는 행차를 했고 또한 남한산성의 독특한 기능은 산성 안에 마을이 있어 좌묘우사(左廟右社)로 유사시 임시 수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것이 특징

※ 좌묘우사 : 도성 건물 배치의 기본형식으로 궁의 왼쪽은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 남한산성내에는 사찰이 무려 10개로 이는 팔도의 스님들이 동원돼 수축을 했기 때문, 인조2년 광주 유사 이서와 벽암 각성 스님이 남한산성 개축.

- 남한산성과 의승군?

의승군의 가장 오래 된 기록은 고구려 승군의 활약으로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군사를 살수로 유인한 칠불사의 일곱 스님의 기록, 그 이후 정묘호란 · 병자호란 당시 3~4천 명의 승군이 활약을 했고, 당시 남한산성 내에는 500 여명의 승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중정남한지>에 기록

- 성곽에서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사찰은 최전방에서 산성의 수축과 수비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여 지고, 1907년에 사찰에 폭약이 저장되어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파괴·철거되고 현재는 유일하게 장경사만 복원

-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의 스님들이 승군이 된 이유?

우리나라의 불교는 대승불교로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하고 있으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생을 방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고 내 목숨을 던져서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것이 곧 불교의 정신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 많은 살생을 종식시킬 수 있는 것.

※ 대승불교(大乘佛敎) : 대승의 교리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종파의 총칭으로 자기완성 보다는 많은 사람들의 구제를 목적으로 함


〇 남한산성 47일의 기록

- 고립 2일 째, 청(淸)은 인조(仁祖)의 아우와 대신을 인질로 요구 하자, 능봉수를 능봉군으로 형조판서 심집을 정승으로 속이고 보내는데, 심집은 지나치게 진실한(?) 사람이었던지 청(淸)의 대신에게 가짜임을 실토하는데, 대의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조차 할 수 없는 투철한 준법정신(?) 청(淸)은 분노하며 역관(譯官) 박난영에게 심집의 실토에 대하여 묻자 박난영은 진짜 아우라고 대답하다 그 자리에서 죽게 된다.

※ 박난영(1575~1636) 조선 중기의 무신. 금나라 정벌출전 중에 포로가 되었다가 후금 회유에 힘씀

- 문제는 청(淸)은 이미 조선의 거짓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으로 역관(譯官) 박난영은 진실을 말할 줄 알았는데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 이 사건을 결과로 강화조건이 강화되어 2단계로 왕세자를 인질로 요구하면서 격렬하게 대립하는 조선의 조정

- 몸보신에 급급했던 반정공신 김류는 꾸준하게 주화(主和)를 주장하는 최명길을 앞세워 세자를 인질로 보내고 홍타이지를 황제로 인정하자는 여론을 조성하지만, 반대편에 있던 척화파(斥和派)의 대표 김상헌이 자살을 시도하는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 인조(仁祖)의 태도는?

이때까지도 인조(仁祖)는 한번 싸워보겠노라고 결전의 유시문을 발표하기도 하고 12월 19~23일 소규모 기습공격에서 승리를 하지만, 한겨울에 남한산성을 공격하는 것은 청군에게도 부담으로 싸움보다는 외곽을 봉쇄하는 작전을 쓴 것

- 조선 8도의 지원군은 왜 오지 못했나?

조선의 전략청군이 남한산성에 집중하는 동안 삼남지방의 근왕병이 후방을 치는 것이었으나, 청(淸)의 매복기습으로 오천여 명의 병력을 잃고 김자점은 도주를 하고 만다.

- 고립 14일 째, 김류는 술사에게 길일(吉日)을 묻는데 점괘는 다음 날 29일은 화친도 공격도 좋은 길일이라는 것, 김류가 내려다보니 한강변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길이 있는 북문에 청군(靑軍)에게 포로로 잡혀간 조선 백성이 보이자 내려가 포로들을 데려오려는 순간 뒤에서 기습공격을 하여 중견지휘관 8명과 군사 300명이 성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전멸하는데 포로들은 조선군 유인을 위해 청군이 놓은 덫

- 고립 16일 째, 12월 30일 아침 행궁 근처에 까치가 집을 짓는데 길조(吉鳥)? 그러나 1월 1일 남한산성에 도착한 비보는 청(淸)의 황제 홍타이지가 도착했다는 치명적인 소식 “청나라 한(홍타이지)이 모든 군사들을 모아 탄천에 진을 쳤는데 30만 명이라고 했다” <인조실록 1637년 1월 1일>

- 12월 17일 인조(仁祖)는 하루 동안 4번 통곡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로도 항복할 때까지 4번을 더 흘린 눈물, “중국을 섬겨 받은 은혜가 많은데 하루아침에 원수인 오랑캐의 신첩이 됐다. 윤리를 바로 잡기위해 반정을 일으켰는데, 끝내 견양(犬羊)과 금수(禽獸)와 같은 결과가 됐다.” <인조실록 1636년 12월 17일>

- 임시 피난처로 선택했던 남한산성은 항전이 길어지면서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말과 소가 모두 죽었으며 살아있는 것은 굶주림이 심하여 서로 그 꼬리를 뜯어 먹었다” <잡기 1636년 12월 30일>

- 군사들은 방한복 대신 빈 가마니를 쓰고 버티다가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얼어 죽었고, 왕인 인조(仁祖)조차 침구가 없어 옷을 입은 채로 잠을 자야하는 처참한 나날들이 계속 되는 동안, 조정에서는 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 간다.

- 고립 19일 째, 근왕병의 패전소식이 들려오는데, 경기도 이천에서 벌어진 쌍령전투에서 4만여 명의 군사가 청(淸)의 팔기군 300여 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으로 이들은 경상도 이남지역의 군사들로 보병과의 전투에서는 익숙하지만 기마병과의 전투는 처음, 전투에서 조직력이 무너지면 전력차이는 무의미한 것으로 도망가다 압사(壓死)하는 경우 · 화승을 화약상자에 떨어뜨려 폭발하는 등 자중지란을 겪게 된다.

- 연이은 근왕병의 패전 소식에 남한산성은 더욱 고립되어만 가고 고립 24일 째, 식량담당관 나만갑이 인조(仁祖)에게 남은 군량을 보고하는데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6천여 석이었던 군량미가 2,800석으로 겨우 20여 일을 버틸 수 있다는 것

※ 나만갑(1592~1642) 병자호란 당시 공조참의 · 병조참지이자 군량을 담당하는 관향사, 저서로 병자록(丙子錄)을 남김

- 식량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나?

실제로는 암문을 통해 사냥이라도 하려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청군에게 발각되는 상황.

※ 암문 : 성에서 구석지고 드나들기 편한 곳에 적이 알 수 없게 만든 작은 문

- 청군은 어떻게 식량을 조달했나?

청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사신을 통해 술과 고기를 보내지만 “이미 조선은 우리의 것인데, 너희가 어려우니 가져가라” 는 것으로 청군은 민가약탈로 식량조달을 받고 있었던 것

- 고립 33일 째인 1월 17일, 홍타이지는 조선에 최후통첩으로 살고 싶으면 인조(仁祖)가 직접 나와 항복하라고 하지만, 어떻게든 인조(仁祖)를 밖으로 보내는 것만은 막으려고 최명길이 화친의 답서를 쓰자 척화파인 김상헌이 이를 찢어버리는데 최명길이 찢어진 편지를 주워 붙이면서 “이런 상황에서 나 같은 사람도 필요하다며 우는 장면 <역사의 라이벌 중>

- 결국 항복국서에 신하의 나라로써 예(禮)를 갖춰 보내지만 끝까지 인조(仁祖)의 출성을 요구하는 청(淸)의 공식입장은 진실한 복종의 태도를 보이라는 것이고, 속내는 조선의 신하에게 받지 못한 절을 왕(王)에게 직접 받겠다는 뜻으로 지금까지 조선에 무시당했던 것의 보상심리인 셈

- 고립 37일 째, 인조(仁祖)는 홍타이지에게 애원하는 편지를 쓴다 “제가 출성할 경우 폐하의 은덕으로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신하들은 신을 임금으로 떠받들려 하지 않을 것이니 신은 이것이 두렵습니다.” <인조실록 1637. 1. 21> 더 큰 이유는 청(淸)이 인조(仁祖)를 압송해 갈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자신의 신변에 대한 걱정이 더 컸던 것

- 소설가 김훈은 그의 저서 <남한산성>에서 “척화(斥和)는 실천 불가능한 정의이고, 화친(和親)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다” <김훈의 남한산성>

- 조선 대외인식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명(明)은 영원하다”라는 인식으로 만약에 명(明)에서 청(淸)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인식을 했다면 대응방향이 바뀔 수도 있었던 상황으로 국제적 안목이 있는 외교 · 군사 전문가가 없었던 것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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