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한글
〇 개요
- 뮤지컬 <뿌리 깊은 나무>는 세종대왕을 돕던 집현전 학자들의 의문의 죽음을 풀어가는 미스터리, 실제로는 그런 일은 없었고 조선 세종시대에 훈민정음을 만드는 세력과 이에 반(反)하는 세력과의 갈등을 다룬 드라마로 기록에도 세종(世宗)은 온화한 성품
- 문자탄생을 국경일로 하는 국가?
일본에 ‘가나의 날’은 있지만 문자기념일을 국경일로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고, 생일과 아버지가 있는 근본이 있는 문자, 즉 뿌리가 있는 문자인 한글
〇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
- 일제강점기인 1940년 국문학자 김태준은 제자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데, 집에 훈민정음 비슷한 책이 있다는 것, 확인 결과 그것은 1446년 간행된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으로 조선어사용이 탄압받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간송 전형필에게 전해져 공개되는데, 한글 창제 후 497년만의 쾌거이고 베일에 싸였던 한글의 원리가 드디어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 민족 문화가 말살된 시기에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며 격려하고 포기하지 말라는 힘을 실어준 훈민정음은 당시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였고 전형필 선생은 당시 1만 1천원을 주고 훈민정음을 구입하는데, 집이 몇 채 되는 가격으로 훈민정음의 가치를 알아보고 거액을 들여 구입했던 것
- 한글날과 훈민정음 해례본?
해례본에 따르면 한글이 반포된 시점은 1446년 9월 상한(상순), 당시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현재의 한글날로 정했고, 중요한 것은 한글창제는 1443년 · 한글반포는 1446년 10월 상한으로 현재의 한글날은 반포일을 기준으로 정한 것
※ 전형필(1906~1962) : 민족 문화재 수집가
〇 한글의 보물 상자,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
- 훈민정음 해례는 훈민정음 해설서?
훈민정음은 1책2권으로 어제(御製) · 예의(例儀) · 해례(解例)로 구성되었는데, 어제(御製)는 서문(序文), 예의(例儀)는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 해례(解例)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예를 설명하여 훈민정음의 교사용 지도서(해설서)로 한글 반포 시점과 한글 창제의 원리를 밝힌 소중한 자료
- 교과서뿐만 아니라 참고서까지 만들어준 친절하신 세종대왕, 창제의 주역(主役)과 창제의 동기를 분명히 밝힌 문자는 세상에 단 하나이고 지금까지 한 국가의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긍지이자 자부심
〇 한글은 누구의 작품
- 한글, 세종(世宗)과 집현전 학자들의 합작품?
기록에 의하면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었다”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 그러나 1443년 창제 이전(以前)까지는 기록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한글 창제 과정이 알려지지 않아 많은 의문이 발생하는 것
- <용재총화>에 따르면 “세종(世宗)께서 언문청을 설치하여 신고령(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한글을 만들게 하다.” 하지만 당시 그들이 25~6세 정도 나이의 학자로 보아 한글창제가 아닌 해례 편찬 작업에 참여한 것을 오해하여 집현전 학자들과 같이 만들었다 하지 않았을까?
※ 용재총화 : 성현(1439~1504)이 고려부터 조선 성종 때 까지 민간풍습이나 역사 등에 관하여 쓴 책
- 이는 창제(創製)에서 반포(頒布)까지 3여 년의 세월로 창제와 반포에 대한 혼동으로 이런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고, 3년의 기간은 집현전 학자들이 해설서를 만드는 기간으로 집현전 학자들은 반포를 준비하는 작업에만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
- 1443년 집현전의 구성원 중 책임자인 대제학은 정인지로 겸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책임자는 최만리, 하지만 그는 언문 반대 상소자로 집현전 학자들도 상당수가 반대를 했고 집현전 학자들의 참여가 있었다면 최고 책임자인 최만리가 모를 리가 없는 것
- 세종(世宗)이 비밀리에 한글을 창제한 이유?
최만리의 반대상소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는데, 세자 문종이 언문(諺文)에 빠져있음을 지적한 것, 당시 사대부들은 한자가 아닌 문자사용을 반대했으며 한자에서 벗어나면 오랑캐로 인식하고, 특히 명(明)과의 사대관계에서 한자 이 외의 사용은 자유스럽지 못했기 때문
- 비슷한 사례로 효종(孝宗)의 북벌(北伐)은 중요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실록에는 북벌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중국과의 미묘한 사항은 실록에 누락시키기도 한 것으로 한글 창제를 비밀리에 진행한 것은 명나라를 의식했기 때문
- 한글 창제, 세자 문종(文宗)의 참여 가능성?
최만리 상소에서 세자(世子) 문종이 언문(諺文)에 빠져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보아 세자도 어느 정도 훈민정음 창제에 관계가 되어있다는 증거, 한글 창제·반포 당시 세종은 병환에 시달렸고 한글 창제 1년 전(前)부터 문종(文宗)은 세종(世宗)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으로 국정을 운영했던 것
〇 한글창제의 또 다른 조력자
- 세종(世宗)도 문종(文宗)이 한글 창제에 참여했다는 단서를 남겼다?
해례본에 'ㄱ'을 설명하면서 임금 군(君), ‘ㄲ’을 설명하면서 아기용 뀨(虯), ‘ㅋ’을 설명하면서 즐거울 쾌(快), ‘ㅇ’을 설명하면서 일 업(業), ‘왕과 왕자가 즐겁게 일을 하다’. 문학적 장치를 통해 문종(文宗)의 참여를 암시한 것
- 세종(世宗)의 또 다른 자식들의 참여 가능성?
정의공주는 세종(世宗)의 둘 째 딸로 죽산 안씨 가문과 결혼하는데, 죽산 안씨의 대동보에 의하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죽산 안씨 대동보>
- 여러 가지 기록을 종합하면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 문화재 수집가 전형필이 세운 간송미술관, 이곳에는 1940년 발견된 한글해설서 훈민정음 해례가 보관 중, 1446년 세종(世宗)의 명(命)에 따라 정인지와 7명의 집현전 학자들이 펴낸 훈민정음 해례, 이 책은 한글이 만들어진 과정을 상세히 설명, 그런데 정인지는 훈민정음 해례 서문(序文)에 자방고전(字倣古篆)이라는 묘한 말을 남긴다.
〇 정인지가 남긴 한글창제의 미스터리
- 자방고전(字倣古篆), 한글이 전서(篆書)의 모방이라는 것! 진실은 무엇일까?
<뮤지컬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돼지를 해부하여 발음 기관의 모양을 파악하지만 기록에는 그런 내용은 없고 한글이 전서(篆書)를 모방했다는 것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한글의 원류(原流)가 중국 문자라고 함으로써 중국과의 마찰과 사대부의 반발을 무마하려는 의도로 해석
※ 전서(篆書) : 한자의 고대 서체의 하나로 현재는 도장 등에 주로 사용
- 사실 형태상으로 보면 전서(篆書)보다는 파스파 문자가 더 유사한데 기하학적으로 형성돼 있어 형태상으로는 한글과 유사한 모양으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논란 중에 있으나, 한글의 초성·중성·종성이 합해서 소리를 내는 원리와 파스파 문자의 운용원리는 전혀 다름
※ 파스파 문자 : 쿠빌라이 칸이 파스파를 시켜 만든 문자 & 쿠빌라이 칸(1215~1294) : 몽골 칭기즈칸의 손자로 중국을 정복하여 원나라를 세움
- 일본에도 한글과 유사한 문자가 있다?
일본의 오우찌 신사에는 전통적인 일본 문자와 전혀 다른 특이한 문자가 적혀 있는데, 그들은 이를 신대문자라고 하고 한글과 비슷한 모양으로 발음도 한글과 유사, 신대(神代)는 일본의 신화시대인 고대(古代)를 의미하고 신대문자는 주로 신사나 종교적인 곳에서 발견되는데 일본은 고대부터 신대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발견된 신대문자는 모두 18세기 이후의 것들로 훈민정음 이전에 발견된 신대문자는 없음
- 종합해서 보면 한글창제 시 다양한 문자를 참고한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기본적으로 소리를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고 우리의 소리를 28자로 디자인 한 것은 세종(世宗)의 독창성
〇 백성들을 위한 문자, 훈민정음
- 1433년 7월(세종 15년) 형조에서 세종(世宗)에게 특이한 보고가 올라오는데 곡산(진주)에 사는 ‘약노’라는 여인이 주문(呪文)을 외워 사람을 죽였다는 것! 의혹을 품은 세종(世宗)은 사건의 재조사를 명(命)하자 ‘약노’는 고문에 못 이겨 거짓 고백했다고 실토하자 백성들의 억울함은 무지(無知)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여 괴로워하는 세종(世宗)은 이듬 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편찬한다.
- 글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을 넣은 책 삼강행실도, 하지만 그림만으로는 백성을 일깨우는데 한계를 느낀 세종은 계속 고민하게 되고, 10년 후(後) 마침내 훈민정음이 탄생하는데, 백성을 향한 세종(世宗)의 마음이 담긴 문자가 탄생한 것
- <뮤지컬 뿌리 깊은 나무>의 대사 “나는 백성을 위한 글자를 만들 것이다.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새로운 글자, 법이 있어도 백성들은 어려운 문자로 쓰인 글을 몰라 죄를 저지르고, 글을 아는 사대부들은 글자를 안다는 이유로 죄를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는다. 억울한 사연은 불공평함에서 무지로부터 시작됐다. 그래서 나는 글자를 만든다.” 백성들의 법률적인 곤란을 덜어주기 위해 한글 창제
- 세종(世宗)이 한글을 만든 또 다른 목적?
왕으로서 국가를 경영해야 하는 세종(世宗), 훈민(訓民)은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으로 세종(世宗)의 국가경영철학의 한글창제는 조선왕조를 위한 세종(世宗)의 장기 프로젝트 중의 하나인 것
〇 한글 창제(創製)와 한자
- 한자문서로 인한 외교마찰과 한글 창제?
한자의 표준음이 없었던 조선 초기에는 중국과의 외교적인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한자음의 정확한 기록이 필요하여 한자사전 <동국정운>을 편찬한다.
- 한글 창제 이전의 문자?
이두(吏讀)·향찰(鄕札) 등의 문자를 사용하는데 이두는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빌려 우리말 순서로 바꾼 문자로 이두(吏讀)를 쓰려면 ①한자 ②이두자 ③한문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필요하여 일상생활의 표기가 아닌 공문서 등에 주로 사용하여 하급관리들은 1894년 갑오개혁 전(前)까지 이두를 사용
- 정인지는 해례본 서문(序文)에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前)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고 기록
- 한글의 보급?
세종(世宗)은 관리 선발시험에 한글을 활용하고, 주요한 한문서적을 한글로 번역한 <소학언해> · <두시언해>를 보급하여 백성들도 자연스럽게 성리학의 이념을 터득하게 하고, 또 사대부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문학작품을 읽힐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한글소설 등 대중문화 발전에 기여한다.
- 조선시대 한글 교육?
조선시대 아이들은 외가(外家)에서 자랐는데 이 때 외조부모님으로부터 한글을 습득하여 한자(漢字)를 배우기 전(前)에 한글을 먼저 배움
- 한글은 우리의 고유문자이기 때문에 조선의 비밀을 지키는 보안유지 수단으로 활용, 양성지는 병서(兵書)는 한자로 만든 것을 없애고 한글로만 만들자 주장하고, 중종(中宗) 때는 외인(外人)에게 한글을 가르치다 처벌받은 사건이 발생
- 세종(世宗), 문자 권력을 나눠주다?
당시 한자를 안다는 것은 권력으로 문자라는 권력을 나눠주는 것에 반발한 사대부, 시인 고은은 “세종대왕은 내 운명의 원천이었다!” 라고 극찬
- 한글에 디지털을 구현?
기본자 몇 자에 획(劃)을 더해가는 과학적 원리를 적용했기 때문에 디지털 시대에 부합할 수밖에 없는 문자, 한글.
※ 획이 가장 많은 한자 64획의 용(龍) 네 마리의 <말 많은 절>, 용 두 마리는 <두 마리 용 답>, 세 마리는 <용이 가는 모양 답>.
- 구한말 조선에 관한 책을 쓴 영국 작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 조선을 방문한 그녀는 크게 놀랐다 “한강 유역의 하층민들이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한국과 이웃 나라들(1898) 중> & “마을마다 서당이 있고 읽고 쓰지 못하는 조선인을 만나는 일이 드물었다.” 한글이 만들어진지 약 450여 년 만에 모든 백성이 글을 깨우치기 바랐던 세종(世宗)의 바람이 결실을 맺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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