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죄인(大逆罪人) 허균
〇 대역죄인 허균, 능지처참 당한 날
- 1618년 8월 24일(광해군 10년 8월) 허균을 능지처사하는데 죄목 “세상의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케 굴어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없다” <광해군일기>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명망 높았던 그의 사형집행은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 허균은 왜 죄인이 되어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는가?
허균의 죄목은 역모(逆謀), 허균이 처형된 그 해에는 허균 관련 기록이 185건으로 허균문제로 조정이 들끓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허균 사후 3개월 까지 진상을 조사한 엄청난 사건, 이에 반(反)해, 역모죄임에도 불구하고 판결문도 없고 피의자 신문조서도 작성하지 않고 일사천리로 집행된 상식 밖의 사형집행과정
- 허균은 광해군의 최측근?
영화에서는 도승지(청와대 비서실장)역(易)으로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정3품 동부승지(청와대 수석비서관)를 지냈고, 최고 관직으로는 정2품 형조판서(법무부 장관)
- 공식 죄목은 역모 “역적 허균을 서쪽 저잣거리에서 정형하였다” <광해군일기 1618년 8월 24일> & “허균은 천지간의 괴물이다. 그 몸뚱이는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일생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 <광해군일기 1618년 윤 4월 29일>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죽음
○ 실록 속 허균에 대한 평가
- 역사 속에는 괴물(怪物) · 금수(禽獸) · 요망(妖妄) · 적인(敵人) 이라고 기록하지만 허균의 글재주와 천재성은 극찬했고 실제로 20대 초반에 지은 허균의 시를 표절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
- 그의 뛰어난 문장은 임란 때 외교력으로 발휘되어 수창외교에서는 명나라의 사신들도 허균의 천재성에 감탄할 정도, 이에 사신들을 잘 접대한 공로로 선조(宣祖)는 삼척부사의 벼슬을 내린다.
※ 수창외교(酬唱外交) :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뜻을 통하는 조선시대의 외교로 학식이 뛰어나고 시를 잘 짓는 문사(文士)들이 담당함
- 허균의 가계도
부친 초당 허엽은 서경덕의 수제자로 동인의 영수(領受), 형 허성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의 1인으로 병조판서(국방부 장관)까지 역임하고, 형 허봉은 해동야언의 저자이며, 누이 허초희(허난설헌)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류문인 중 하나, 그리고 막내 허균까지 ‘허씨 오문장가’로 불릴 정도로 당대 최고의 가문
※ 유교칠신(遺敎七臣) : 선조가 유언으로 어린 영창의 보필을 부탁한 신임하는 신하 7명
○ 조선시대 이단아(異端兒) 허균
- 조선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 허균을 왜 비난했을까?
“허균은 밥을 먹을 때면 식경을 외우고, 항상 작은 부처를 모시고 절하면서, 스스로 부처의 제자라고 하니, 승려가 아니고 무엇인가?”. <선조실록 40년 5월 5일> 성리학의 지배사회에서 불교를 신봉했다는 것, 부처를 섬긴다는 이유로 삼척부사 부임 43일 만에 파직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쓰시게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이루려 하네.” <‘벼슬에서 파직됐다는 소리를 듣고서’ 中>
- 자신의 소신(小信)을 굽히지 않은 당당함, 뿐만 아니라 천주교에도 관심이 많아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곤여만국전도를 그린 마테오리치가 세운 중국 최초의 성당에서 기도문 게십이장(偈十二章)과 찬송가를 들여오면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을 보임
※ 곤여만국전도 : 1602년 서양식 세계지도
- 당시 조선사신단에게 인기품목은 비단과 골동품이었으나, 허균은 고서(古書) 4천여 점을 가져왔으며 그 안에는 양명학자로 유교적 역사관을 비판하고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해 당대 이단(異端)으로 금기시 되던 인물 이탁오의 책도···
- 1599년 31살이 되던 해 황해도사 부임 6개월 만에 첫 파직을 당하는데 한양기생을 황해도까지 데려왔다는 이유이고 세상은 그를 경망한 인물이라 멸시했다. “허균은 행실도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이다” <선조실록 32년 5월 25일> 성리학적 질서가 지배하는 조선에서 허균의 자유분방함은 결코 용납 받지 못했으나, 허균은 세간(世間)의 비난에 개의치 않았다.
〇 양반들의 기피인물, 허균
- “상중(모친)에도 기생을 끼고 놀아서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선조실록 1604년 9월 6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덕적으로 용납받기 힘들어 도무지 믿기 어려운 허균에 대한 기록, 체통과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로 양반사회에서는 그를 기피인물로 낙인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상중에 이렇게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킨 허균은 파문의 중심에 서다 결국은 파직된다.
- <조관기행>에는 당시 가까이 하던 기생들을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를 상세히 기록 “광산월이 와서 위로하였는데 평생의 즐거움을 나누며 밤을 새웠다” <조관기행 1601년 7월 28일>
※ 조관기행(漕官紀行) : 허균이 해운판관 시절 쓴 6개월의 일기
- 경박 · 경망하다는 기록과는 달리 매창 이계랑과는 정신적 교감을 나눈 기록도 있고, 기생 · 천민시인과 함께 신분을 뛰어넘어 교류
※ 매창 이계랑(1573~1610) 전북 부안의 명기로 허난설헌 · 황진이 등과 조선의 3대 여류 시인으로 꼽힘
○ 적자(嫡子) 출신인 허균, 특히 서자출신과 친했다?
- 1607년 39세의 나이로 공주 목사 부임 시, 관아에 서자(庶子) 친구들을 거둔다. “관아에 삼영을 설치했다”고 비난, 심지어 이재영 같은 경우에는 어머니와 첩(妾)까지 데려와 같이 살았다고···
※ 삼영 : 서자 친구 이재영 · 심우영 · 윤계영
- 이 때문에 결국 8개월 만에 공주목사에서 파직되는 등 20여 년의 관직생활 중 6번의 파직을 당하는데, 이러한 교류는 서자출신인 스승 이달의 영향으로 스승을 통해 서얼차별의 문제를 실감했던 것
※ 이달(손곡) : 조선의 이태백으로 불린 조선 중기의 시인, 특히 당(唐)시를 잘 지어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이름 떨침
〇 허균의 심리학적 분석
- 허균은 어떤 심리유형으로 추정되나?
허균이 남긴 글과 기록을 추론해 볼 때 언변능숙형(ENFJ)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외향적이고 낙천적성격의 소유자, 실례로 허균은 임란(壬亂)의 피난길에도 시를 평하는 여유를 즐길 정도로 감정이 풍부한 직관적 · 감정형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성격이 타고난 천재성과 결합되며 문학·예술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 허균은 남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은 듯한데?
선조실록의 기록에 보면 “허균은 행실도 수치도 없는 사람이다. 오직 문장의 재주가 있어 세상에 용납되었는데 식자들은 더불어 한 조정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선조실록 1599년 5월 25일> 그러나 허균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개의치 않는 외향적 직관형성격, 실제로도 이런 사람들은 주변사람들과 마찰 없이 지내려는 노력 같은 것은 거의 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는 것
- 허균이 스스로를 표현한 말은 <불여세합(不與世合)> 으로 나는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허균의 언행이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외향적 직관형이다 보니 주변에 적(敵)을 많이 만드는 유형이라는 것
- 허균의 여성편력(女性遍歷)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못한 경우 여성편력이 나타나는데 여성편력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여 지는 증상은 애정결핍증, 이런 것들이 무의식적으로 간직되어 있다가 자신을 추켜 세워주는 여성들과 같이 있는 것을 즐겼다고 볼 수 있는 것
- 게다가 임진왜란 때 아내를 잃은 허균은 위로받을 대상이 없었던 것이고, 기생들의 이름을 기록했다는 것은 여성으로부터 사랑받길 원하는 잠재된 무의식이 작용했을 것, 이를 종합해 보면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는 애정결핍형 천재
- 당시는 전쟁 후(後) 경제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 전란(戰亂)의 후유증으로 인해 사회적 모순(矛盾)이 분출됐던 시기, 그렇지만 나라는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고,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허균
※ 소설 돈키호테도 근대사회의 과도기(過渡期)를 살았던 작가의 산물
○ ‘칠서(七庶)의 난’과 허균
- 1613년 봄(광해군 재위 5년) 문경세제에서 은(銀) 700냥을 강탈하는 은상 살해사건이 발생하는데, 사건의 주모자는 여주 남한강변의 강변칠우(江邊七友)라 불리던 일곱 명의 서자들로 밝혀진다.
- 모두 고관(高官)의 자제들로 재능은 있지만 서자(첩의 아들)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힌 강변칠우(江邊七友), 이들은 선조(宣祖)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거사자금을 모으기 위해 사건을 벌였다고 자백하고 평소에 서자들과 친하게 지내온 허균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 칠서의 난이 일어난 계기?
서얼차별로 출셋길이 막힌 사람들이 1608년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 철폐를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벼슬길이 막힌 서자들이 적서차별(嫡庶差別)에 대한 불만에서 의기투합하여 강변칠우를 결성한 것에 비롯된다.
※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 : 1415년 태종이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제한한 법, 임진왜란 전후(前後)로 재정이 부족하여 벼슬을 돈으로 파는 모습을 보이다가 다시 관직을 빼앗는 과정이 전개 됨
- 서얼금고법이 다소 풀리는 듯 했으나, 서자 출신인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면서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강화된 서얼금고법으로 서자들은 기대가 큰 만큼 실망 또한 컷을 것
- ‘칠서의 난’ 이 시기에 홍길동전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칠서의 난 무대나 홍길동전의 활빈당의 주요무대는 문경새재로 일치하며, 홍길동전은 허균의 사상이 집약된 소설, 허균은 유재론에서 “귀(貴)한 집 자식이라 해서 재능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며, 천(踐)한 집 자식이라 해서 인색하게 주는 것도 아니다” <유재론 中>
- 유재론(遺才論)은 모순된 제도에 의한 인간 차별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차별 없는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로 유재론의 핵심내용을 200년 후 정약용이 계승하여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는 근대적 사상의 개혁논리로 이어진다.
○ 홍길동전과 허균의 개혁사상
- 허균의 개혁사상을 핵심으로 담은 글 <호민론>에서 “천하에 두려워 할 것은 백성뿐이다” & “국왕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백성을 위해 군림하지 않는다.” 라고 기록하여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민본주의적 개혁사상
- 허균에 대하여 개혁가다 혁명가다 논란은 있지만, 혁명가라고 보았을 때 가장 가까운 것으로 보는 것이 <호민론> 중에서 백성을 셋으로 분류하는데 평소에 시키는 대로 체제에 순응하는 항민(恒民), 뭔가 불만이 있고 원망하는 원민(怨民), 울분과 원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나서는 호민(豪民)으로 홍길동전은 바로 호민(豪民)을 형상화한 것, 400여 년 전에 민주주의의 정신을 제시한 허균의 선구적 사상, 실제로 허균 사후(死後) 30년 경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이 발생한다.
※ 청교도 혁명 : 1649년 영국에서 청교도가 중심이 되어 일어난 최초의 시민혁명으로 당시 독재를 펼치던 찰스 I세를 시민들이 죽이는 사건
- 동(同)시대를 살았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지배질서에 도전한 동·서양의 이단아들
○ 칠서의 난, 계축옥사로 확대되다
- 칠서의 난은 어떻게 정치적 문제로 커졌나?
은상 살해사건은 단순사건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으나, 대북파의 실세 이이첨이 이 사건은 허균이 역모자금 마련을 위해 일으켰다고 정치적인 사건으로 확대시키는데, 결국은 고문에 의거 박응서라는 사람이 은상 살해동기를 거사자금을 마련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고 그 중심에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이 있다는 놀라운 진술을 하게 한다.
※ 계축옥사 : 1613년 대북파가 영창대군과 반대세력을 숙청한 사건
- 결국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영창대군 외조부)이 사사(死事)되고 선조(宣祖)의 유일한 적자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뜨거운 방에 갇혀 죽임을 당한다.
- 이로써 서인·남인·소북파들은 모두 축출되고, 대북파 독점체제가 구축되며 그 중심에 이이첨이 서게 되는데, 결국은 광해군(光海君)의 지지를 얻어 이이첨이 자신의 세(勢)를 유지하려는 의도도 보이고, 당시 광해군은 명나라 사신에게 은(銀)을 뇌물로 주고 책봉을 받을 만큼 정통성에 민감했던 시기에 일어난 역모사건이라서 ‘칠서의 난’을 크게 키운 것
○ 위기(危機)에 처한 허균의 변신
- ‘칠서의 난’이 계축옥사로 확대되면서 칠서들과 가깝게 지내던 허균은 자신에게 미칠 파장을 예감했던지 글방 동문(同文)인 이이첨을 정치적 방패막이로 선택한다.
※ 이이첨 : 대북파의 실세로 세자 책봉에 광해를 지지하면서 왕으로 옹립시킨 광해 정권 핵심 인물.
- 당시 광해군의 최대 관심은 인목대비의 폐모(廢母)로 폐모론의 여론몰이가 필요하던 차에 이이첨에게도 문장가 허균의 능력이 필요했던 것이고 허균은 유생을 동원해 폐모론 확산에 적극 개입하여 광해군의 신임을 받는 계기가 된다.
※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 : 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마음속으로 바라다.
- 인목대비(광해군 계모)를 폐위시킨다는 것은 인륜을 끊는 행위로 폐모론에 대한 반대세력의 거센 반발, 심지어 대북파인 영의정 기자헌도 폐모론에 반대하고 결국 허균은 기자헌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을 맞는다.
○ 허균의 변신! 변심인가? 위장인가?
- 허균이 권력중심에 들어간 까닭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수단, 최선의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라고 자칫 역모에 휘말릴 수 있는 위기상황에서 최대의 정치적 이슈였던 폐모론을 이용해 입지를 확고히 하려한 것(?) 하지만 당시의 위기만 벗어나면 됐지 왜 광해군의 측근까지 되려고 했을까? 원래 권력욕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 권력은 가까이 할수록 빠져나오기 쉽지 않은 속성 “정치하는 사람에게는 권력보다 우선하는 건 없다. 하루 먼저 죽는 것보다 권력 없이 하루를 더 사는 것. 그것이 난 더 두렵다” <드라마 정도전> 中 이인임의 대사
- 허균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허균이 정도전을 흠모했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 “허균은 한평생 정도전을 흠모하며 항상 현인이라고 칭송했으며 동인시문을 뽑을 때에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다” <광해군일기 1617년 12월 24일>
- 정도전은 혁명에 성공한 사람, 실제로 허균의 백성중심 사상은 정도전의 민본사상과 유사, 허균이 가진 개혁사상을 시현(示現)하기 위해서는 우선 힘이 필요했고 그 힘을 얻기 위해서는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 우선 권력을 쥐겠다는 생각이었을 것
○ 허균을 최후(最後)로 이끈 남대문 흉방사건
- 계축옥사 5년 뒤인 1618년 8월 10일 새벽 남대문에 흉방이 붙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흉방의 내용은 “백성을 구하고 죄를 벌하려 장차 하남대장군이 이를 것이다” <광해군 일기 10년 8월 10일>
- 흉방사건은 허균의 조카이자 심복이었던 하인준의 소행으로 밝혀지고 주변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진상조사가 이뤄지는데, 허균이 역모를 꿰했다는 자백이 나오면서 역모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투옥되고, 정세(情勢)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급변한다.
- 남대문 흉방은 허균이 쓴 것이 사실일까?
허균은 끝까지 부인했으나 심복들에 의해 주동자로 지목되고, 결정적인 증거로 황경필의 자백 “허균이 애초에는 의창군(선조의 아들)을 추대하는 것으로 계책을 삼았는데 나중에 허균이 스스로 하고자 하여 결정하지 못했다” <광해군일기 1618년 8월 25일>
- 또한, 허균이 역모를 주동했다는 결정적 증언인 ‘기준격의 비밀 상소’ 상소의 내용은 허균이 인목대비 아버지인 김제남을 이용해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군권(軍權)을 장악한 후 김제남을 제거하고 조카사위인 의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고, 또한 ‘칠서의 난’을 일으킨 인물이라는 내용
※ 기준격 : 폐모론에 대해 허균과 대립각을 세우던 영의정 기자헌의 아들
- 허균의 투옥에 분노해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의금부로 달려가 항의를 하는 이들은 사회 각층에서 소외(疏外)된 계층들
○ 의혹에 싸인 허균의 죽음
- 일사천리로 진행한 허균의 처형, 많은 의문을 남기는데?
역모죄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진상조사 없이 3일 만에 일사천리로 끝낸 처형, 당시 조선은 삼복계였으나 사건의 진실파악의지가 결여된 것 “허균은 아직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결안 할 수 없다면서 붓을 던지고 서명하지 않으니 좌우의 사람들이 핍박하여 서명하게 하였다” <광해군일기 1618년 8월 24일>
- 내면적으로는 사대부들의 강(强)한 반발에 부딪힌 허균의 강경한 폐모론 주장, 이이첨은 패륜(悖倫)이라는 비난을 뒤집어 쓸 것을 우려하여 허균을 희생양으로 하여 자신의 권력유지 수단으로 삼으려는 의도도 없진 않았을 것.
- 나아가 광해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허균은 그의 딸이 세자(世子)의 후궁(後宮)으로 간택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으로 이이첨은 정치적 라이벌로 급부상한 허균을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 실제로 옥사(獄舍)에 갇힌 허균을 찾아와 계속 안정시키며, 허균에게 대책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형(刑)을 집행해 버리는 것
- 천여 명의 선비가 목숨을 잃은 기축옥사의 중심에 섰던 송강 정철, 선조(宣祖)는 결국 참극의 모든 책임을 정철에게 돌리고, 허균 역시 노회한 정치인들에게 희생당한 셈
- 당시 광해군의 입장도 대외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로 명(明)·청(淸) 교체기로 후금의 누르하치가 전쟁을 일으키면서 명(明)은 구원병을 요청하고, 조선도 전쟁에 휘말릴 분위기로 민심이 술렁이던 시기
- 그런데다가 폐모론에 대한 입장차이로 이이첨과 허균이 등을 지고 있던 상황에서 광해군의 선택은 허균이냐? 이이첨이냐? 에서 결국 이이첨을 선택한 것
- 허균 사후(死後)에 광해군은 반교문(나라 경사의 사실을 알리는 글)을 내림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의 도리가 전혀 없었다. 죄인을 동쪽의 저잣거리에서 베어 죽이고 다시 기쁨을 누리고자 대사령을 베푸노라” <광해군 반교문>
○ 허균, 혁명가인가? 개혁가인가?
- 과연 허균은 역사에 기록된 대로 역성혁명을 도모했을까?
역성혁명을 꿈꿨을 것, 호민론 · 홍길동전 등 저술을 통해 표현된 혁명적 사상, 허균은 역성혁명을 꿈꿨던 낭만적 혁명가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역성혁명이 아닌 개혁을 꿈꿨을 것이라면 개혁의 대상은 왕이 아닌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소수 집권세력(?)
- 조선시대 기피인물 1호인 허균, 사후(死後) 5년 뒤에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역모사건에 관련된 인물 대부분은 복권되지만, 허균은 제외되어 조선왕조 내내 역적으로 남아 300여 년 이상(以上)을 다른 가문의 족보에 숨어 살아야 했던 허균의 후손들
- 정치가로서의 허균은 미숙하고 불완전하였으나, 사상가로서의 허균은 성리학 외(外)에 다양한 학문을 수용하는 개방적 사고로 진취적이고 넓은 세상을 지향했던 선구적사상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고 이러한 사상을 글로 표현한 것이 <홍길동전>
- 형장(刑場)으로 끌려가며 마지막으로 한 말 “할 말이 있다!”라고 외친 한 마디, 과연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 허균의 호 : 교산(이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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