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光海)
〇 광해(光海), 그는 누구인가?
- 전란(戰亂)을 딛고 일어서려 했던 개혁군주 광해, 권력에 눈멀어 형제를 죽이고 새어머니를 유폐시킨 패륜군주, 광해 과연 그는 누구인가?
- 선조(宣祖)는 왕비 2명과 후궁 8명 ① 의인왕후 박씨, 무자식 ② 공빈 김씨, 임해군(행실의 문제로 민심을 잃음) · 광해군 ③ 인빈 김씨, 의안군 · 신성군 · 의창군 ④ 의인왕후 사후(死後)의 인목왕후, 영창군
- 후궁(後宮) 소생이 세자가 될 경우, 생모(生母)와 왕비(王妃)의 서열은?
후궁의 아들이 세자가 되기 위해서는 왕비의 아들로 입적(入籍)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생모인 후궁과는 법적인 관계가 끊어진 셈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은 그 아들이 되므로 자기 친부모를 돌보지 못한다." <예기> 아들을 세자로 만들고자 법적 관계를 포기해야 하는 후궁
〇 조선시대의 후궁(後宮)
- 드라마 속 후궁 VS 실제 후궁의 차이?
드라마에서는 왕이 독단적으로 후궁을 책봉하지만 후궁은 내명부 소속이며 내명부의 인사권 · 상벌권은 왕비(王妃)에게 있음, 따라서 왕(王)이 후궁을 책봉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이나마 왕비의 동의를 얻어야 했고, 후궁은 법적으로 정해진 사무(事務)가 있었는데 정 1·2품의 후궁은 왕비 보좌, 정3품의 후궁은 내명부 제사 및 손님맞이, 정4품의 후궁은 왕과 왕비의 잠자리 준비 등으로 후궁은 왕의 관심을 끄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궐에서 맡은 역할을 해야만 했다
※ 내명부 : 조선시대 왕이나 세자의 후궁 및 궁녀 등 여관(女官) 조직을 이르는 말
- 후궁의 외모(外貌)는?
드라마에서는 주로 미인들이 맡은 후궁 역할, 실제로는 후궁에 미인은 드물었고 외모보다는 어진 품성으로 선발된 후궁, 남녀 막론하고 유능한 인재를 곁에 두고 싶은 법으로 후궁도 능력 있고 품행 좋은 사람을 선호했으며 궁중여인들이 아름답다는 환상은 드라마 탓
- 조선시대 왕의 후궁(後宮)은 어떤 존재?
왕의 여자로 여겼던 후궁은 내명부에 속해 왕비의 통제를 받는 왕(王)의 여자이기 이전(以前)에 왕비(王妃)의 여자인 셈
○ 광해군, 세자 되던 날
- 18세 늦은 나이에 세자가 된 이유?
적자(嫡子)가 없는 상태에서 후계자를 찾다보니 늦어졌고, 선조(宣祖)의 입장에서는 세자에게 권력이 분산될 것도 우려했으며 방계출신인 자신이 왕위를 후궁소생에 물려주는 것 또한 부담이었을 것
- 한편으로는 의인왕후가 언젠가는 아들을 낳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있었고, 가장 아끼는 신성군도 세자로 책봉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세자책봉이 늦어진 것
-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하고 몽진 하루 전인 4월 29일,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세자책봉 "백관이 입조하여 하례하였는데 허둥지둥하여 동·서반도 구분하지 못하고, 인장도 교서도 없었다." <기재사초>
- 조선 역사상 가장 초라한 세자 책봉의식을 치른 광해군, 세자 책봉 후 곧 바로 선조(宣祖)는 의주로 몽진한다.
○ 준비된 세자 광해군
- 선조(宣祖)의 질문에 대한 세자 광해군의 답(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반찬은? 소금, 제일 좋아 하는 것은? 다른 왕자들은 눈앞의 보물을 택했으나 광해는 붓과 벼루를 들어 질문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할 줄 알았던 것 "광해군은 행동을 조심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 4. 14>
- 또한 어린 시절 감수성이 풍부했던 광해군, 왕자들에게 너희들에게 부족한 것이 뭐냐고 묻는 선조(宣祖)의 질문에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 이라고 답하는데 광해군의 생모는 2세 때 산후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 왕실에서는 정치적 후견인이기도 한 어머니의 존재, 지지기반이 없는 광해군에게는 상실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을 것 "의인왕후는 광해군이 왕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도 말썽 없도록 중재해주었다."<계축일기> 의인왕후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돌봤다는 기록
- 광해군의 정치적 후견인인 의인왕후와 좋은 모자관계를 유지했던 광해군, 자식이 없다는 결정적 흠을 가진 의인왕후, 만일 신성군이 책봉되면 친모가 있어 실권(實權)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므로 차라리 생모가 없는 광해군의 후견인이 정치적으로도 안전했던 것으로 의인왕후와 광해군은 감성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것
○ 선조(宣祖)와 광해군, 권력의 시소게임
- 선조(宣祖)는 조정을 둘로 나누고 분조(分朝)를 세자에 맡기는데, 분조(分朝)는 임진왜란 때 세운 임시(臨時) 조정으로 1592년 5월 왕이 떠난 도성(都城)은 순식간에 무법천지로 변한다. “난민(亂民)이 크게 노략질하고 불을 질렀다” <선조수정실록>
- 광해는 전쟁터를 헤매며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조정이 건재함을 알리며 백성들의 구심점이 된 분조는 의병(義兵)들의 봉기를 불러일으키고, 심지어 명(明)에게서도 신뢰를 얻게 되는 세자 “그대는 마땅히 분발하여 마음을 다해 부왕의 실패를 만회하여 보존되도록 도모하라” <선조실록 1595년 3월 27일>
- 이를 본 선조(宣祖)는 노골적으로 광해를 견제하기 시작하고, 왕권에 위기를 느낄 때마다 선위(禪位) 소동을 수시로 일으키는데 그 횟수가 무려 21회로 광해군이 외지(外地)에 나가있는 상황 등 실질적으로 선위가 불가능한 때에만 선위 소동을 일으킨 선조, 자신과 광해군 사이에서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것.
※ 선위(禪位) : 왕이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일
- 곡기(穀氣)를 끊고 선위 전교를 거두어 달라고 빌어야 했던 광해군, 임진왜란 초기(初期) 잔병치레가 잦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었을 듯
○ 세자책봉을 거절한 명(明)의 속내
- 1595년 명(明)에 세자책봉을 청(請)하지만 적자(嫡子)가 아니다. & 장자(長子)인 임해군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하는데, 당시 명(明)도 비슷한 상황으로 조선의 세자책봉 주청(奏請)을 받아들일 경우에는 명(明)조정도 만력제의 뜻에 따라 셋째 아들의 세자 책봉을 허용해야 하는 상황
- 게다가 세자 책봉 주청(奏請)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선조(宣祖) “임해군은 왜적에게 잡혀있다 돌아온 후로는 마음의 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명 예부에 올린 글, 간이집 中> 그러나 정작 명(明)의 사신이 오면 겉이 멀쩡한 임해군을 옆에 세워둔 선조(宣祖)는 오히려 명(明)의 판단을 혼란스럽게 하여 10년 간 지속되는 명(明)의 태자 책봉 논쟁
- 임진왜란 후(後) 장자(長子) 주상락이 태자에 책봉되면서 문제가 해결 되는 듯 하여 다시 명(明)에 세자 책봉을 주청하지만 또 다시 거절당하는데, 이는 세자책봉을 빌미로 조선의 길들이기를 하려는 명(明)의 속셈
- 그러다 1600년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의인왕후가 승하(昇遐)하여 새로운 왕비가 적자(嫡子)를 낳을 경우 정치적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므로 세자 입지강화를 위해 다시 세자 책봉을 주청한 신하들, 하지만 “세자책봉보다 왕비 책봉이 먼저”라고 말하는 선조(宣祖)의 당시 나이는 50세
- 끝까지 세자 책봉 승인을 얻지 못한 광해군, 1608년 선조(宣祖)의 승하로 왕이 된 후 국왕책봉을 명에 요청하는데 이것마저도 거절당한다.
○ 영창대군의 탄생
- 1602년 7월에 19세의 인목왕후를 계비(繼妃)로 맞는 선조(宣祖), 광해군 보다 9살이나 어린 왕비(王妃)는 혼인한지 4년 만인 1606년에 영창대군을 출산한다. ① 정명공주 ② 사산(死産) ③ 영창대군
- 선조(宣祖)가 왕위에 오른 지 39년 만에 얻은 적자(嫡子), 선조(宣祖)는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홀대하기 시작하는데, 임진왜란 중에는 신성군이 사망하여 광해군을 폐세자 시킬 경우 대안이 없는 상황이었으나, 영창대군의 탄생은 새로운 대안이 생긴 것
- 영창대군의 탄생이 불러 온 조정의 변화는?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동요한 신하들은 선조 VS 광해군 파로 갈리는데, 유영경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선조(宣祖)의 마음을 읽고 원자나 원손의 탄생 때 행했던 축하의식을 제안하는데 이미 광해가 세자책봉을 마쳤기 때문에 그냥 한 명의 왕자가 태어났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1607년에는 선조(宣祖)가 유영경에게 광해군의 왕위계승 교서(敎書)를 내리지만 이를 비밀에 부쳐버린다.
※ 유영경 : 조선 중기 문신이며 선조의 총애를 받아 영의정에 오름
- 왕의 교서(敎書)를 숨긴 유영경은?
이때는 워낙 선조(宣祖)의 총애를 받던 시기로 많은 탄핵이 오갔지만 담당 사관(史官)만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데 탄핵(彈劾)과 간쟁을 맡은 대간(臺諫)마저도 유영경 세력으로 대간(臺諫)은 유영경의 처분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
※ 대간(臺諫) : 조정 내에서 언론 역할
- 하지만, 책봉한 세자를 바꾸긴 쉽지 않은 상황, 적자(嫡子)의 탄생만으로 세자를 바꾸기에는 명분이 부족하고 16세기 조선 사회에서 정해진 후계자는 바꾸지 않는 것이 대세, 세자 교체의 대표적 사례로 양녕대군이 있긴 하지만, 폐세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때만 가능했고 광해군은 세자 생활 16년간 단 한 번도 책잡힐 일을 하지 않음
-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구원투수 정인홍의 상소, 유영경의 탄핵을 요청하는데 국왕이라면 누구라도 대노할만한 내용의 상소가 올라온다.
※ 정인홍(1535~1623) 남명 조식의 수제자, 임진왜란 당시 58세 나이에 의병장 활동
- 한편, 정인홍의 상소로 사직(辭職)을 청한 유영경에 대해 모함이라며 오히려 유영경을 감싼 선조(宣祖), 이 사건으로 더욱 멀어진 왕과 세자의 관계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는데 어찌 세자라 하겠는가? 다시는 문안을 오지 말라. 광해군은 땅에 엎드려 피를 토하였다.” <당의통략>
○ 극적으로 즉위한 광해군
- 1608년 2월 1일 선조(宣祖)는 별식(別食)으로 약밥을 먹고 혼수상태에서 결국 승하, 이튿날 인목왕후(영창대군의 어머니)는 서둘러 광해를 즉위시키는데, 당시 인목왕후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으로 이미 세자는 책봉된 상태이고 자식인 영창대군을 지키려는 마음
- 선조(宣祖)가 유교(遺敎)로 광해군이 왕위를 잇도록 명을 내린 상황으로 정통성이나 정치적인 문제가 있을 경우 서둘러 즉위시키는 것, 용상(龍床)에 오르길 사양하는 광해군에게 노련한 정치인의 면모 유영경은 4번 청했다.
- 광해군 폐위 후, 선조(宣祖) 독살 가능성을 조사한 인조반정 세력은 실제 이를 입증하지 못하고 선조(宣祖) 승하 원인은 오랜 병환으로 판정한다.
- 유영경의 결말은?
신하들이 유영경의 관직을 삭탈시키자고 아뢰니 “선왕(先王)의 옛 신하는 경솔히 논할 수 없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라고 했다 <광해군 일기 1608년 2월 12일>
- 그러나 광해군의 속마음은 신하들이 유영경을 탄핵해 줄 것을 내심 기대했을 것, 이후 유영경은 실제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유배지 경흥에서 자결(自決)로 생을 마감한다.
- 반면(反面), 화려하게 부활한 왕의 남자가 된 정인홍의 당시 나이는 74세로 광해군의 정치적 조언자 역할을 하면서 막강한 권력행사를 하다가 인조반정 후(後) 89세의 나이에 처형을 당한다.
- 광해군은 어려서부터 겪었던 피해의식과 갖은 고생을 하며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계속 남아있어 즉위한 다음에도 불안감이 있고 자기의 아킬레스건인 정통성과 명분에 집착하게 된다.
- 광해군 즉위 시기의 국내·외 상황은 전후(戰後)의 황폐로 세종(世宗) 때 170만결인 왕실 토지가 임진왜란 이후(以後) 60만결로 줄어들고, 또한 대외적으로 보면 광해군을 끝없이 괴롭혔던 명(明)과의 관계, 그리고 신흥강국인 후금(後金)이 조선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조선이 가장 힘든 시기에 즉위한 광해군, 힘들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를 지키려는 집착 또한 강했을 것
〇 광해(光海)를 보는 두 가지 시선
- 교과서에 실린 광해군에 대한 평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다룰 때 언급(言及)이 되는 정도로 혼란스런 국제관계 속에서 중립외교를 통해 외교관계를 정립하려 한 왕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만, 조선시대 광해군은 폐주(廢主)·혼군(昏君)으로 기록
- 혼군(昏君)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이라는 뜻, 당시의 가치기준은 명(明)에 대한 사대의리(事大義理), 중립외교를 통해 명(明)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실리외교(實利外交)를 추구한 것이 혼(昏)이라는 것,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오히려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나하는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대한 조선시대와 현재의 엇갈린 평가
〇 광해군에 대한 소셜 미디어 분석
- 2012년 영화<광해, 왕이 된 남자>개봉 이후(以後) 광해군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 급증, 결국 광해군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문화코드’성격이 강(强)함
- 광해군에 대한 연관 검색어, 인조반정 · 연산군 · 명나라 · 실리외교 등 대외정책과 관련한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고, 시기별 연관 검색어를 분석해 보면 2011년 까지는 폭군 · 폐주 · 서자 콤플렉스였으나, 2012년은 영화 흥행으로 불운의 왕 · 극적(劇的)인 삶 등 역사 전반적인 관심이 커지다가, 2013년에는 재건(再建) 정치인 · 실리외교에서 2014년에는 지성(知性) · 추진력 있는 리더로 광해군의 인기는 현대인들이 바라는 ‘리더’의 모습을 광해군에 투영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 대중들이 열광한 영화 속 광해군은 대역(代役) 하선의 자주외교 부분에 큰 호응, 대중들의 광해군에 대한 인식에는 사실과 허구가 존재, 하지만 지성(知性)있고 추진력(推進力) 있는 리더에 대한 갈망이 광해군에 투영된 것
〇 명(明)의 파병요청
- 1618년(광해군 10년) 조선은 또 한 번 전쟁의 기운에 휩싸인다. 후금(後金)과의 전투를 위해 명(明)에서 조선의 파병을 요청한 것, 대신들은 재조지은으로 임진왜란 때 명(明)이 도와준 은혜에 보답코자 한다. “중국 조정이 우리나라를 임진년 이후, 구원해 준 은혜야말로 머리카락을 뽑아 짚신을 삼는다 하더라도 그 은혜를 갚기에 부족합니다.” <광해군 일기> 하지만 출병을 망설이는 광해군, 명(明)의 파병요구를 두고 벌어진 신료들과 광해군의 대립, 과연 광해군의 본심은 무엇일까?
- 광해군 VS 대신들, 파병갈등
명 VS 후금의 전쟁에 조선 원병을 요청한 명나라,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 임진왜란 때 자신들이 위협을 받자 조선에 파병을 했던 명나라가 당연하다는 논리로 원병을 요청하는 건 문제가 있는 것, 하지만 당시의 분위기는 파병이 압도적인 상황
- 광해군이 파병에 반대한 이유?
광해군의 세자책봉은 물론 즉위도 바로 인준하지 않았던 명나라 “온갖 구실로 뇌물을 요구하여 그 수량이 5만 냥이나 되니··· 참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광해군 일기 2년 7월>, 광해군 개인적인 감정도 있겠지만 광해군의 판단은 명 VS 후금의 전쟁에서 명나라가 분명히 질 것이라는 판단으로 인명손실과 더불어 후금의 원한을 살 수 있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것
- 하지만 신하들은 명나라가 반드시 이길 것이고 파병을 거부할 경우 명나라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데 명 VS 후금의 전쟁에서 승리에 대한 판단이 서로 달랐던 것
- 17세기 국제정세 분석, 임진왜란 이후(以後) 명(明)의 만주지역 통제력이 약화되자 여진족이 융성하게 되는데, 누루하치는 분열돼 있는 여진족을 통일하고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세력 확장의 여세를 몰아 명나라를 공격하게 되는 것
- 광해군이 후금(後金)을 위협적으로 본 이유?
당시 후금(後金)의 주력부대는 기병(騎兵), 철기병으로 불릴 만큼 위력적이어서 명(明)에서도 골치가 아팠기 때문에 조선의 정치가라면 후금의 기병대는 쉽게 막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판단 가능했을 것, 또한 광해군은 세자시절 이미 명(明)의 군사력을 알고 있는 터라 보병(步兵)으로 야전(野戰)에서 기병(騎兵)을 상대하는 것은 백전백패로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었던 광해군, 조선의 당면과제는 전후복구로 파병(派兵)은 현재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판단 “옛 사람들은 적의 형세를 잘 정탐해 그에 맞게 잘 대응하였다··· 세상물정 모르는 선비가 어떻게 군사기밀과 군사업무를 알 수 있겠는가” <광해군일기 13년 6월> 임진왜란 후 4반세기가 지나면서 임진왜란을 경험하고 수습했던 신하들은 남아있지 않고 경험자는 광해군만이 남아있던 상황
○ 신하(臣下)들의 반발과 파병결정
- 조선시대의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은 ‘후금이 아무리 강해야 오랑캐다!’라는 인식과 그간의 여진족 토벌에 대한 믿음으로 파병을 찬성하는 신하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은 파병을 결정한다.
- 명·조선 VS 후금 전쟁은?
명(明)은 10만 대군을 투입 후금(後金)의 수도 허투알라 공격을 시도, 조선군도 1619년 2월 9일 강홍립이 이끄는 13,000명의 병사가 요동에 진입하여 3월 2일 심하 지역에 도착, 조·명연합군은 후금과의 첫 전투에서는 승리하지만 3월 4일 또 다시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지는데, 여기서 명군 1만여 명이 전사(戰死)하고 조총과 포로 무장했던 조선군의 좌·우영군이 전멸하며 강홍립의 직할부대와 중영은 항복을 하고 만다.
- 조·명 연합군이 순식간에 패(敗)한 이유?
후금(後金)의 주력부대인 팔기군은 1기가 7,500여 명으로 8기는 약 6만여 명과 기타 병이 있더라도 10만의 조·명 연합군보다 많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후금의 각개격파 작전이 성공한 것으로 3월 4일 전투 이전(以前)에 명나라 주력부대 모두 패배하고 도주한다.
- 임진왜란 때와 반대로 조총부대가 패배한 이유?
① 조총의 장전 속도 ② 조총부대에 대한 보호 미흡(긴 창) ③ 후금 기병의 독특한 강점(强點) ④ 불운(不運)으로 바람의 방향, 팔기군은 군사조직이자 동시에 생활조직으로 응집력과 팀워크가 탁월했고 팔기군은 다른 기병(騎兵)과는 달리 산악전투에 강했던 것
- 당시 조선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
식량보급문제로 행군(行軍)이 지체되었던 조선군, 대외전쟁에서 군수능력은 필수요건이지만조선은 대규모 전투를 치를 능력이 없었던 것, 근본적인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 육군은 명나라 <척계광병법>을 도입하여 일본 보병을 상대로 한 병법 위주로 훈련을 하였으나 후금(後金)의 기병에 대한 전술이 마련되지 못했던 것으로 군수부족 · 전술부재로 후금(後金)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고 볼 수 있는 것
○ 심하전투 패배, 그 후
- 군사뿐만 아니라 말1천 필 · 군량미 등을 요구했던 명나라, 파병으로 인해 사회·경제적으로 피해가 컸던 조선, 광해군은 비변사에 전교를 내리는데 “이 적(敵)이 결국 어떻게 될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천하 난적(亂賊)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 <광해군 일기 11년 12월> 후금(後金)으로 중원의 세력교체 가능성을 예견했던 광해군
- 심하전투 패배 이후(以後) 신하들의 반응은?
강홍립의 싸워보지도 않은 투항사건으로 곤경에 처한 광해군, 신하들의 처벌 요구에도 불구하고 강홍립의 가족을 보호해 주는데, 광해군이 투항을 지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후금과 조선 사이의 소통역할을 했던 하세국이 강홍립을 따라 출정을 하고 전투 시작 3일 전에 강홍립의 명령을 받고 후금(後金)진영에 들어가 “전투참여의 불가피함과 후금과의 원한이 없음”을 밝히려한 듯한 정황은 있으나, 완전 포위된 상태에서 항복을 했던 것으로 보아 개연성은 있으나 사전에 항복을 전제로 전투에 참여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
※ 하세국 : 역관으로 명나라 파병군에 배속돼 통역과 길안내를 맡음
- 결국, 광해군은 항복을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후금과의 전쟁은 피하려고 했던 듯하고 광해군의 의중은 명(明)과의 전통적인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금(後金)과는 대화를 통한 평화유지를 원했던 것, 실제로 훗날 후금은 포로가 된 강홍립을 조선과의 대화창구로 활용하는데 광해군 역시 후금과의 교두보를 마련한 셈
- 그러는 사이 조정에서는 “후금이 방심하는 사이 기습을 하자”. & “후금의 국서를 되돌려 보내버리자” 라는 등 터무니없는 주장에 광해군은 기가 막혀 “적들이 말을 타고 들어와 마구 짓밟는 날에 담론으로써 막아낼 수 있겠는가, 붓으로 무찌를 수 있겠는가” <광해군일기 13년 6월> 광해군은 항변하자 이에 반발하여 파업으로 왕명을 거부한 신하들은 왕에게 보고해야 할 내용을 명나라 황제에게 직접 보낼 정도로 광해군이 고립된 상태
- 당시의 국제정세는 누루하치는 조선이 후금과 화친(和親)하려한다는 것과 지금까지 철저한 명(明)의 우방이었던 조선이 지금 우리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대외에 알리고 싶었고 반면, 명(明)은 후금과의 전쟁 중이라서 후금의 첩보를 조선을 통해 수집하게 되는 등, 명 · 후금 · 광해는 각각 현실적인 계산 아래서 행동한 것.
- 이에 반(反)해 조선의 신료들은 재조지은의 의리를 중시하여 임란 전(前)에는 군신관계인 충(忠)으로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가변적 관계였으나, 임란 후(後)에는 부자관계의 효(孝)로 절대적인 불변적 관계로 바뀌게 된다. “나라가 망하더라도 의리를 지키겠다!”
- 인조반정 세력은 폐위의 원인이 된 광해군의 외교정책, 군신 · 부자관계의 의리를 저버림으로써 성리학적 가치를 부정한 왕으로 간주한다.
○ 광해군, 과연 백성을 사랑한 군주?
- 조선을 뒤흔든 세제개혁 대동법, 가구당 특산물로 납부하던 공납을 토지결수에 따라 쌀을 부과하게 되는데, 기득권 세력인 양반들과 방납제로 부당이득을 취하는 세력들은 강력하게 반대한다.
- 광해군, 대동법 확대를 반대한다(?)
이원익이 제창한 대동법에 광해군은 미온적 태도를 보이는데,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의 결합으로 방납의 부당이득이 관료에 흘러갔을 것으로 사료되고, 유교사회의 공납(貢納)은 군신(君臣)관계 충성의 표시로 특산물을 바치는 것이 관례인 정치적인 문제
- 하지만 결국 광해군은 대동법 시행을 승인하게 되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고 대동법은 광해군의 인재등용의 산물로 즉위 초에 당파에 상관없는 인재를 등용하면서 남인이었던 이원익의 제안으로 탄생.
- 대동법은 경기지역 우선 실시로 효과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실시되지 못하고 100여년 후 숙종(肅宗) 때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된다.
- 광해군 초기에 균형을 이루던 관리의 등용으로 3정승 이원익(남인) · 이덕형(남인) · 이항복(서인), 흔히들 광해군 시절이 북인정권이라는 인식은 1613년의 계축옥사 이후 대북파가 독주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것.
○ 광해군과 폐모살제(廢母殺弟)
- 1613년 역모 사전이 발생, 뚜렷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9살인 영창대군은 강화로 유배 보내 사망하게 되고 대북파의 이이첨이 중심이 되어 인목대비를 폐할 것을 주장하여 아들 영창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가시기도 전(前)에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하게 된다.
- 세자시절 광해군의 자리를 결정적으로 위협했던 영창대군, 임해군 살해에 이어 영창대군도 살해한 이정표는 사건 이후 포도대장 · 강화부사까지 역임한 것으로 보아 영창대군의 살해는 광해군의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 임금의 의중을 헤아려 신하들이 처리할 것을 유도한 후, 극진하게 장례를 치러줘라 그리고 슬퍼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대부분의 군주가 취했던 태도
○ 광해군의 왕권에 대한 집착과 불안
- 역모(逆謀)에 민감했던 광해군, 출세를 위해 거짓 역모에 대한 고발이나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잡채상서 · 김치정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첨으로 왕의 총애를 얻는 이들이 등장하게 된다.
- 왕위에 대한 불안감이 광해군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듯··· 숨바꼭질(불안감)을 하며 몸 숨기기 연습을 했던 광해군은 역모사건에 대해서는 직접 나서서 집요하게 친국(親鞫)을 하게 되는데 그 횟수가 무려 210회.
- 스스로 48자에 이르는 존호(尊號)를 사용하였음은 왕권에 대한 불안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특정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기별(時期別) · 분야별(分野別)로 나눠서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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