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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仁祖反正), 칼을 들던 날

mkpark2022 2015. 4. 10. 23:11

 

 

 

 

인조반정(仁祖反正), 반란의 칼을 들던 날

 

 

조선역사상 두 번째 반정(反正), 인조반정

- 1623312, 반정세력 능양군과 이귀 등은 창덕궁을 기습공격하고 조선의 정치판을 다시 쓰는데, 조선의 역사상 신하가 임금을 몰아낸 두 번째 사건인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

- 세검정 앞을 지나는 홍제천은 원래 실록(實錄)초고(草稿)를 물로 씻어 지우는 세초(洗草)를 하던 곳이었으나,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곳에 모여 칼로 맹서한 곳이라 해서 세검정이라 했다는 유래가 <궁궐지>에 기록

궁궐지(宮闕志) : 조선시대 궁궐의 각 전각(殿閣)의 명칭·위치·연혁 등을 적은 책

 

인조(仁祖), 반정의 칼을 들던 날

- 인조반정은?

반정(反正)의 출처는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되돌려 놓는다.” <중국 춘추공양전>의 기록으로 우리의 3대 반정은 1506년 연산군 폐위의 중종반정 & 1623년 광해군 폐위의 인조반정문체반정

- 성공하면 반정(反正), 실패하면 역모(逆謀)?

유교사회 최악의 불충(不忠)은 왕을 폐위시키는 것, 하지만 유교사회이기에 폐위 역시 가능했던 것은 국왕(國王)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가 존재하며 왕도(王道)에서 크게 벗어날 경우에는 왕()도 자격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를 바로잡는 것은 의거라는 맥락 또한 인조반정은 전례(前例)인 중종반정의 영향도 있었던 것

 

반정(反正) 모의부터 직접 참여·주도한 능양군(인조)은 누구?

- 조부(祖父)는 선조(宣祖), 부친(父親)은 정원군(원종), 백부(伯父)는 광해군으로 어린 시절 선조(宣祖)의 사랑을 많이 받고 왕실에서 자랐으나 말수가 적고 조용하며 치밀한 성격 말이 없어 가까이 모시는 궁녀도 임금의 말을 자주 듣지 못했으며···” & “대답하는 문서도 내시에게 베껴서 쓰게 하고···” <연려실기술>

- 아들 소현세자의 죽음 · 며느리에게 사약··· 비극적인 가족사로 얼룩진 왕 인조(仁祖)는 오른 쪽 허벅지에 다수(多數)의 사마귀 선조(宣祖)께서 기이하게 여겨 이것은 한고조(유방)와 같은 상이니 누설하지 말라 하셨다” <인조행장> 사마귀는 핑계이고 광해군(光海君)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선조(宣祖)의 마음이 드러나는 듯

- 광해군과 능양군의 사이는?

선조(宣祖)의 사랑을 받았던 두 번째 후궁 인빈 김씨, 선조(宣祖)는 광해군보다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을 총애하지만 왜란(倭亂) 때 죽고, 신성군의 동생인 정원군(원종)의 장남(長男)이 능양군(인조)으로 서로 좋아할 이유는 없었을 듯

 

인조반정의 명분, 왜 일으켰나?

- 인조반정 후 인목대비의 명으로 반정교서를 반포하는데 36가지에 달하는 광해군의 죄목, 대체로 보면 내부적으로는 효 윤리 배반외부적으로는 외교문제의 충·효 윤리의 배반으로 대부분 성리학적 명분과 관련된 죄목, 학자에 따라서는 인조반정을 조선 전·후기로 가르는 기준점으로 이를 계기로 조선이 성리학적 명분사회로 심화되는 사건

- 광해군 7년 기묘한 소문이 도는데 능양군(인조)의 부 정원군의 집인 세문동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것,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 무렵 능양군의 동생 능창군이 역모로 목숨을 잃게 되고 광해군은 이 집터에 경덕궁(, 경희궁)을 건립한다.

- 졸지에 아들과 집까지 잃은 정원군은 술로 시름을 달래다 결국 숨을 거두게 되고 순식간에 풍비박산이 난 능양군의 가문, 능양군은 빈소에서부터 이미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지 않았을까?

 

반정(反正) 핵심세력들은 누구?

- 능양군 개인적인 감정이 컸다는 점도 있지만 인조반정의 핵심세력인 김류·최명길·김자점·이귀 등은 비주류에 속하는 서인세력으로 서인반정이라고도 하는데 서인이 주도권을 잡은 것은 사실

- 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등공신인 신경진의 아버지 신립장군, 집안 대대로 북인계열로 아무리 당시 실세인 북인이지만 역모죄로 걸리면 끝장이어서 결국 북인임에도 불구하고 광해군 정권에서는 출사가 어려워지자 신경진은 반정세력들과 규합하게 된다.

- 인조반정 핵심인물들의 스캔들?

청상과부였던 이귀의 딸은 남편 친구와 야반도주 후 승려가 되고··· 당시 사대부들 입방아에 오르며 궁지에 몰린 이귀, 또한 이서과부가 있는데··· 자주 그 집에 왕래하다 마침내 서로 간통하였으니···” <광해군일기 3322> 등으로 미루어 당파를 떠나 개인적인 감정이 더 많았을 듯

- 오래 전부터 광해군 폐위를 모의해온 반정세력들, 이미 1년여 전부터 반정을 모의한 사실이 알려졌다?

 

인조반정의 미스터리

- 반정에 대한 정보가 수없이 보고가 되고, 심지어 반정 당일에도 보고가 올라오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 & “당일도 이귀와 김자점이 역모(逆謀)를 일으킨다는 고변” <광해군 일기 15312> 고변에도 불구하고 역모를 믿지 않은 광해군, 그리고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상궁 김개시(시체시에 쌀미)는 왕에게 풍문일 뿐이라며 왕의 의심을 잠재운다.

- 김개시는?

선조(宣祖)의 신임을 받았던 상궁으로 궁궐 내부정보와 동향 등을 알려주는 광해군의 소통창구였던 셈으로, 김개시는 미모로 환심을 샀다기보다는 왕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관련 내용을 제공하는 비서로서의 역할 김상궁은···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광해군일기 5811>

- 조정의 일들을 김개시와 자주 상의한 광해군, 김개시는 당시 권력의 실세 이이첨과도 추문(醜聞)이 날 정도로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김상궁이 붓을 들어 마음대로 결정하고 임금도 마음대로 못하였다” <연려실기술>

- 김개시가 끝까지 상궁으로 남은 이유?

고도의 정치적 노림수? 후궁이 되는 순간 지위는 올라가겠지만 오히려 행동반경 등에 제약이 많아지는 것 궁녀가 광해의 잠자리를 모시는 것도 김개시의 허락을 얻어야 되었기에 뇌물을 받았는데···” <연려실기술> 왕과의 친분을 이용해 돈과 권력을 휘둘렀던 것

- 김개시가 광해군을 배신했다?

반정 당일 연회를 주최한 반정세력 김자점은 김개시에게 뇌물을 주고 훗날을 약속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김개시의 최후는 밀약과는 달리 반정 당일 처형을 당하는데, 서인세력도 김개시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위험인물로 평가했던 것으로 판세는 정확히 읽었으나 자신의 앞날은 알지 못했던 김개시

 

고변문서, 진실은?

- 역모에 누구보다도 민감했던 광해군, 그는 왜! 고변을 무시했을까?

당시 광해군의 심리상태는 광해군 재위 마지막 1년은 외교문제로 대신들과 대립하며 광해군은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1622년 여름 명나라 황제의 <파병요구칙서>가 도착하는데, 사대관계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의 요구를 면전에서 거절한 광해군, 오히려 누르하치에게 서신을 쓰라고 재촉하나 이이첨(예조판서) 이하 신하들은 모두 거절하면서 이때부터 정청(庭請)이 시작된다.

정청(庭請) : 대신들이 의정활동 중단하고 궁정에 나와 자신들의 의견을 강력히 주장

- 따르는 사람도 없고 믿을 사람도 없던 광해군 말기(末期), 게다가 확실한 증거도 없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허균까지··· 이번에는 안속아··· 하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역사가들의 직업병, 과거의 사건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버릇이 있는데, 개인적인 과거의 사건에 대해서 논리정연하게 도식화시켜서 설명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는 사실

- 광해군 말기(末期), 역모에 민감하게 굴지 않은 이유?

광해군의 아킬레스건 장자와 적자가 아니라는 것 영창대군 등 정적 제거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는 것까지 완성하여 자신의 약점이었던 문제를 모두 해결한 상태였기 때문

 

인조반정의 그날

- 당시 반정군은 어떻게 궁을 장악했을까?

1623312일 밤 10시 홍제원에 반정군이 집결하는데 반정군 총대장 김류의 늦은 합류로 예정된 시간 보다 늦은 12시에 반정군 행동개시, 창의문을 거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가는데, 이때 돈화문의 훈련대장 이흥립이 반정세력과 내통하고 있어서 별 다른 저항 없이 창덕궁에 진입하여 곳곳에 불을 피워 혼란을 야기시키자 광해군도 안국신의 집으로 피신하지만 다른 의관의 고변으로 바로 체포되면서 거의 무혈입성하다시피 한 반정세력들 김류·이귀 등이··· 대궐을 침범할 것인데 훈련대장 이흥립이 안에서 호응할 것입니다” <연려실기술>

- 인조반정 세력들의 군사력 규모?

천여 명의 오합지졸 세력으로 하룻밤 만에 일사천리로 끝나버린 반정은 1,300여명의 병력 중 절반가량은 주동세력들의 노복(奴僕)이나 길거리에서 고용한 사람들이었고 장단부사 이서가 이끄는 700명 병력이 합세

- 1623313일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仁祖)가 즉위하는데, 임진왜란 끝난 지 불과 20여 년, 그리고 당시 도성궁궐을 지키는 병력들이 수천 명 있었던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쉽게 궁궐이 뚫렸나?

 

인조반정 당시, 조선의 궁궐호위 체계

- 당시 궁궐을 지키던 군대 체계?

사실은 안전장치로 5위 체계가 있어 어떤 한 부대가 역모에 가담하더라도 군 체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 되어 있었으나, 임란(壬亂) 이후 체계가 바뀌어 도성궁궐의 호위를 모두 훈련도감에서 담당하게 된 것

- 전시(戰時)가 아닌데도 병사를 움직일 수 있었나?

위화도 회군으로 이룩된 조선, 지방군이 해당지역을 벗어나는 것은 금기였으나, 지방병력 이동의 비밀은 호랑이, 당시는 호환마마가 흥행하던 시절로 백성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호환(虎患), 호랑이의 출몰은 지방 병력들의 이동을 가능케 했고 결국 반정군은 가장 큰 호랑이 광해군을 잡은 셈

- 무예청(武藝廳)의 병사들은 어떻게 선발?

조선 후기의 가장 강력한 무사집단인 무예청, 이들은 훈련도감 병사들 중 최고의 무사를 왕이 선발해 무예청의 무예별감으로 임명하고 무예를 익히는데, 18가지 무예 중 무예청의 필수 무예 월도(月刀)’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왕을 지키기 위한 무예별감들의 검술로 포위망을 뚫기 위해 사방을 공격하는 것이 특징, 삼국지에서 관우가 휘둘렀던 청룡언월도는 80(48Kg)이었으나 조선시대 병사들은 3(1.8Kg)짜리 월도를 사용

- 인조반정 당시, 호위무사들의 활약은?

인조반정 당시 광해군의 호위무사는 한 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호위무사들은 광해군 시대를 거쳐 조선 후기 최고의 무예집단인 무예청으로 거듭난다.

 

인조반정 성공, 그 후

- 인조반정 세력이 처음 한 일?

이이첨을 비롯한 북인세력의 대규모 숙청으로 북인의 영수였던 정인홍은 89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처형하여 북인정권과 단절을 선언하고 인목대비를 내세워 반정교서를 반포하고 광해군을 폐위하면서 ()과의 사대관계를 회복하는 철저한 친명배금 정책을 강조한다.

- 인조반정으로 북인세력을 몰락시킨 것은 반대세력이나 나와 생각이 다른 것 자체를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또한 임진왜란 이후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던 기회였지만 인조반정을 통해 다양성의 변화가 원천봉쇄 되면서 사문난적곧 나와 생각이 다른 것은 적()이 될 수 있다는 흑백논리의 시대로 접어든 건 아닐까?.

사문난적(斯文亂賊) : 성리학적 사상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뜻

- 광해군(光海君)을 죽이지 않은 이유?

야사(野史)에 의하면 인조(仁祖)의 비 인열왕후가 사사를 말렸다고··· 결국, 강화도로 유배를 떠난 광해군은 아들이 땅굴을 파고 탈출하다 발각돼 자결을 하면서 폐세자를 따라 며느리도 자결하고 그 충격으로 아내까지 목숨을 거두면서 홀로 남겨진 광해군은 강화도에서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왕으로 재임한 15년보다 더 긴 18년의 유배생활을 하는데 유배지에선 노복(奴僕)들의 조롱을 받기도 했다고···

-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광해군(光海君) 정권이 계속됐다면 적어도 병자호란·정묘호란은 없었을 것 & 국정(國政) 마비상태가 계속돼서 정권유지가 어려웠을 것 등으로 추정해볼 수 있지만 명()에 대한 사대의리만 중요하고 정작 자신의 정체성은 찾지 못했던 조선 사대부는 결국 14년 후 청()에게 무릎을 꿇는 수모를 겪게 되는 것

- 역사적으로는 이후 명나라는 멸망하고 후금(後金)이 청나라를 건국하는데, 북학파(北學派)가 좀 더 일찍 청()의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어서 근대사회로 조선이 좀 더 빨리 진입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근대문명으로 나라가 일찍 부강해졌다면 일제강점기도 없었을 것(?)

- 국방 · 외교 · 과학 분야에 힘썼던 광해군, 하지만 인조(仁祖)정권에서 광해군의 긍정적인 성과마저 모두 소멸되는 아쉬움은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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