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亂)
〇 이괄, 반란(反亂)의 칼을 들다
- 이괄은 인조(仁祖) 1년 5월에 부원수겸 평안병사로 임명되어 북풍이 몰아치는 변방으로 떠나야만 했는데, 한 때 동지였던 반정세력들이 반정 당시 임시대장까지 지냈던 이괄을 1등 공신이 아닌 2등 공신으로 책봉했다 것
- 이괄은 분노를 억누르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데에 집중했으나, 결국 그들은 이괄의 목숨까지 위협하는데 이괄과 그의 아들이 역모를 준비한다는 고변(告變)으로 아들을 압송하기 위해 한양에서 금부도사와 선전관이 오고 있다는 것, 그래서 다시 칼을 들고 한양을 점령하려고··· 조선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건, 그러나 ‘이괄’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〇 이괄은 누구?
- 인조반정의 지휘자로 내정되었던 김류는 거사 당일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자 김류를 대신해서 이괄이 지휘하려던 차(次)에 김류가 늦게 등장하면서 반정을 지휘한다. “어제의 공적은 이괄의 힘이 많으니 마땅히 그를 병조판서로 삼아야 한다.” <연려실기술>
- 본(本)은 고성이고 조부 이택은 문인임에도 무인보다 무예가 능했던 인물, 반대로 이괄은 무과(武科)에 급제했지만 문장에 뛰어난 인물로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재들의 집안으로 이괄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바로 선전관에 배속되면서 빠른 나이에 출세 “형조 좌랑 이괄은 나이 어린 무관으로···.” <선조실록 39년>
※ 선전관 : 왕의 시위, 전령 등의 출납과 사졸(士卒)의 진퇴를 호령하는 무관직
- 성격이 괄괄하여 반정 당일 김류가 늦자 화를 내며 목을 치려했으나 이귀가 중재하여 말리고, 반정(反正) 성공축하연에서 이괄보다 윗자리에 앉은 김류, 이귀에게 항의 했다는 기록이 있음
○ 인조반정 후의 정국
- 명분이 약했던 인조반정, 정권안정을 위해 반대세력을 대거 숙청하지만 끊임없는 역모사건들이 발생하면서 기찰정치(箕察政治)가 등장,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광해군에 대한 충절시 ‘상부사(孀婦詞)’를 쓰고 역모혐의로 처형 “나이 일흔 가까운 늙은 홀어미, 안방 지키며 홀로 산다네. 이웃사람들 시집가라 권하며, 사나이 얼굴이 꽃 같다 하는구나. 백발에 청춘 같이 꾸미라니, 연지와 분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오.” <상부사>
- 반정세력의 권력을 등에 업은 무리들의 횡포와 혼란스러운 정국에 흉흉해진 민심과 반정 후(後)에도 사병(私兵)을 유지한 공신들, 이들은 민심수습이 우선이지만 권력 지키기에 혈안 “각 아문의 군관과 장교 중 사나운 무리가 조금도 꺼림 없이 공사(公私)의 말을 겁탈하므로 인심이 소요하고 원망이 길에 찼습니다.” <인조실록 2년 2월 12일>
- 당시 좌포도대장이었던 이괄은 신임을 받는 장수로 기찰의 핵심인물이었지만, 정작 반정세력들의 권력싸움에서 밀려 결국 자신마저 기찰의 대상이 되고 만다. “좌포도대장 이괄이 기찰한다는 명목으로 전 부사 박진장의 집에 난입해 끌고 나오게 하였는데, 노모를 때리고 모욕을 가하는가 하면 집을 부수고 재물을 탈취하였다” <인조실록 1년 5월 27일>
- 인조정권의 기찰정치
반정세력들은 역모가 불안하여 의심되는 인물들을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음모와 불신의 겨울공화국의 정국이 이어지고, 기찰을 통해 인생역전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상소가 올라오는데 “사경 임숙영이 아뢰기를 요사이 대장이 기찰하는 일로 해서 민심이 동요되는 폐단이 있다고 합니다.” <인조실록 1년 9월 5일>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역시 쿠데타로 기찰을 통해서라도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인조(仁祖) 정권
※ 겨울공화국 : 1975년에 발간된 양성우 시인의 시집
〇 이괄의 평안도 부원수 발령
- 반정 직후 인조(仁祖)가 이괄을 평안도로 보낸 이유?
이괄 개인으로서는 불만이 있을 수 있으나 국가 안보차원에서 필요했던 인사로 당시는 강성해진 후금(後金)의 위협에서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지역 평안도 인조(仁祖)가 가장 신뢰하는 신하를 보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던 것
- 당시는 후금(後金)의 누르하치가 팔기군을 이끌고 중국 대륙의 패권을 노리던 상황으로 후금(後金)과 명(明)의 대치상황은 조선에 큰 위협으로 사실 이괄은 제주부터 북방 끝까지 변방을 주로 맡았던 장수, 이괄이 현지 부임을 위해 떠날 때는 인조(仁祖)가 손수 어도(御刀)를 내려주기도 했지만 인사에 대한 불만을 품었던 이괄.
- 이괄에 대한 반정세력의 견제가 들어난 공신책봉은 반정 날 임시 대장까지 역임했음에도 불구하고 2등 공신에 책봉, 무인(武人)보다 문인(文人)을 우대하는 관례 때문? 하지만 1등 공신 10명 중 4명이 무인(武人)으로 1등 공신은 대부분은 인조(仁祖)의 친인척
〇 이괄, 고변(告變)을 당하다
- “문회·이우·권진 등이 이괄 등의 변란을 고하다” <인조실록 2년 1월 17일> 변방의 경비와 군사훈련에 집중했던 이괄, 하지만 이를 반란준비로 의심한 반정세력, 그러나 반란 직전까지 이괄을 믿었던 인조(仁祖)
- 이괄을 직접 추국해야한다고 주장한 반정세력들의 요구를 인조(仁祖)의 반대로 아들 이전만 압송하기로 결정한다. “나에게는 오직 아들 한 명밖에 없는데 애가 잡혀가서 장차 죽음을 당할 것이니 어찌 아비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잡혀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니···” <연려실기술>
- 연려실기술에는 <이괄의 변(變)>으로 기록하는데, 난(亂)은 구체적인 목적성이 있지만 변(變)은 갑작스런 상황의 대응으로 우발적 사건의 차이
○ 이괄 반란군의 전력
- 평안도 토병 + 부방군(파견병) = 12,000명 + 항왜군(130명)으로 특히 뛰어난 검술실력으로 반란군의 선봉에 섰던 항왜군
- 항왜군(降倭軍)은 항복한 일본군으로 검술능력이 뛰어났는데, 7년간 이어진 임란 중 탈영병과 일본 통일전쟁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원한관계로 일본을 떠난 왜군들을 말함
- 벼슬 받은 항왜도 있나?
중요한 기술이 있으면 우대했는데, 이들 중 조총기술을 갖고 정유재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에 공(功)을 세운 사야카(김충선)는 선조(宣祖)가 지어준 이름으로 종2품 자헌대부까지 올랐던 인물
- 검술(劍術)에 능했던 왜군, 당시 일본도를 수입해서 사용하던 명나라, 이를 임란(壬亂) 때 명나라를 통해서 조선에 들어 온 일본도
※ 검(劍)은 양(兩)날, 도(刀)는 한쪽 날
○ 이괄의 난 전개(展開)
- 아들 이전을 잡으러 온 의금부도사와 선전관을 현장에서 난자해 시신을 불태우고 세력을 규합해 1월 22일 영변에서 거병하여 20일 만에 한양에 입성, 반란군의 도성입성은 조선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이는 인조반정 경험이 도움이 됐을 것
- 관군(官軍)은 반란군의 진압은 뒷전이고 이괄의 친인척 및 공모자 색출에 주력하는데 <인조실록>에는 38명 <연려실기술>에는 49명 처형으로 기록
- 인조반정 직후 제거하지 못했던 반대파를 색출한 것?
사실은 광해군(光海君) 세력인 북인숙청에 이괄의 난을 이용하여 정권을 안정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 조선시대 붕당사(朋黨史)
- 15세기 조선의 건국세력 훈구파는 계유정난의 결과, 사림파의 탄핵으로 밀려나고
- 16세기 사림파가 지배하는데 사림파는 인원은 많고 관직 수는 한정되어 있어 이조전랑 자리와 훈구세력 처리문제로 동인·서인으로 분당
- 동인(강경파)과 서인(온건파)으로 분당하여 초기에는 동인이 정권을 장악한 듯했으나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계기로 동인세력은 약화되고 서인이 권력을 다시 접수하게 됨.
- 그러던 중 서인의 대표인물 정철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자 선조(宣祖)는 분노하여 서인세력이 약화되면서 다시 동인이 재집권하고
- 서인의 처리문제로 동인은 남·북인으로 분열하여 북인(강경파)과 남인(온건파)으로 분당하여 임진왜란 때 주전론을 주장하고 의병장을 배출한 북인이 정권장악
- 임진왜란 이후에는 광해군 지지세력인 북인의 인목대비 폐위사건에 대한 반발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남인이 등장하면서 북인은 숙청되고 또 다시 이괄의 난을 계기로 북인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 결국 남은 세력은 서·남인으로 현종 때 예송논쟁과 숙종 때 환국으로 서인과 남인은 첨예한 대립을 하게 되고 최종 승자는 서인
- 서인은 남인의 처리문제로 노론(강경파/송시열,영조지지))과 소론(온건파/윤증,경종지지)으로 분당
○ 인조(仁祖)의 몽진
-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인조(仁祖)는 공주로 몽진하게 되는데 준비 없는 초라한 피난행렬로 왜관에 있는 왜군(倭軍)에게 도움을 청할 만큼 위급한 상황
※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 · 1636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 이괄의 난 때는 공주로 인조(仁祖)는 세 번의 몽진
- 당시의 민심은?
인조(仁祖)가 강을 건너려는데 숨어버린 뱃사공, 겨우 배 한 척을 구했으나 먼저 승선하려고 아우성치는 신하들 “유학 김이를 의금부도사로 삼았다. 이는 일찍이 상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 갈 때 상을 맞이하여 뵙고 콩죽을 올렸으므로 이러한 명(命)이 있었다” <인조실록 2년 2월 12일> & 아울러 이 때 인절미가 등장, 떡의 이름은 모르고 임씨가 만든 절미(絶美, 뛰어난 맛)라는 뜻에서 유래
- 반면에 인조(仁祖)와는 다른 기록 “이괄이 한명련과 함께 도성에 들어올 때 관청의 서리와 하인들이 의관을 갖추고 나와서 맞이하였으며 백성들은 길을 닦고 황토를 깔고 맞이하였다” <연려실기술>
- 당시, 백성들에게서 전해지던 <상시가(傷時歌)>는 누가 임금을 하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는 내용으로 자연스럽게 세력이 강한 편을 지지했던 것.
- 사실 이 때도 인조(仁祖)는 명나라로 부터도 왕으로 정식책봉을 받지 못했던 상태, 명(明)은 책봉 문제를 조선 길들이기로 사용했던 것, 인조(仁祖)는 이런 상황에서 ‘상시가’라는 노래가 불리는 것은 매우 불안했던 것이고, 이괄의 난 때 왕으로 추대했던 인물이 온빈 한씨의 소생인 흥안군으로 일시적이지만 한 나라의 왕이 2명이 된 상황
○ 이괄의 난 패인
- 흥안군의 경우에는 인조(仁祖)를 따라 피난을 가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도성 백성들이 말하기를 이괄이 추대한 것이 흥안군이고 보니 사세가 오래 가지 못하겠구나.” <연려실기술> & “흥안군은 사람됨이 용렬한데다가 패악스런 행실이 있었다.” <인조실록 2년 2월 16일>
- 이괄의 입장에서도 흥안군에 대해서 신망이 별로 없던 것은 사실이지만 딱히 내세울 인물이 없었고 그릇이 되지 못하는 인물이 욕심만 앞서는 것!
- 마지막 승부, 안현 전투
안현은 인왕산에서 무악재 너머 지금의 안산으로 연세대학교 뒷산으로 관군의 전략 ① 한양 급습 ② 지원군이 올 때까지 대기하는 것, 두 가지 안(案)이 있었으나 정충신이 강력하게 ① 안을 지지하는데 이유는 ① 안현을 선점해 고지전을 벌이면 관군에 유리 ② 승리할 경우 민심을 잡을 수 있다는 것 “싸움을 구경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마치 흰 빨래를 널어놓은 듯하였다” 대부분 흰옷을 입었기 때문으로 반란군과 관군 모두 백성들에게 자신감을 보이려 했던 것
- 안현전투의 패인(敗因)은 승승장구하던 반란군이 계속된 승리를 하면서 방심한 반면, 반란군에게 처음으로 빼앗긴 도성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운 관군, 바람의 방향마저도 서북풍으로 바뀌면서 전세는 역전되는데, 안현 전투의 소식을 듣고도 불안해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 공주로 피난을 떠나는 인조(仁祖)
- 이괄의 난, 그 후?
반란군은 도성(都城) 차지 후 3일 만에 패하고 이괄은 광희문을 통해 탈출하여 광주로 퇴각하던 중 부하들이 목을 베어 투항하고, 불 탄 창경궁 대신 경덕궁으로 돌아온 인조(仁祖)는 고성(固城) 이씨에 대한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역적(逆賊) 이괄과 한명련의 족속 중 삼촌까지는 그대로 가두어 두고 사촌은 모두 극변(極邊)에 정배하라” 하자, 영의정 이원익이 “처첩의 친속까지 논죄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는 것인 듯합니다.” <인조실록 2년 2월 28일>
○ 이괄의 난 영향
- 한 집안의 몰락을 넘어 국가의 위기가 된 이괄의 난, 오랜 전쟁과 연(連)이은 반란으로 흉흉해진 민심에 후금(後金)이 성장하면서 위험지역인 서북지역을 이괄이 내려오면서 텅 빈 상태로 전력이 약화되면서 엄청난 후환을 예기했던 것
- 이괄의 난 이후에도 계속되는 기찰로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면서 혼란스러운 정국이 계속되고 인조(仁祖)는 반정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친명배금 정책을 강화
- 이괄의 난 주모자인 한명련의 아들 한윤은 후금(後金)으로 탈출하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후금(後金)의 앞잡이가 되고, 정묘호란·병자호란의 단초가 된 이괄의 난이라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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