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丁卯胡亂)
〇 후금(後金), 압록강을 건너다
- 1627년 1월 얼어붙은 압록강에 나타난 기마병(騎馬兵) 36,000명, 압록강을 건너 온 거침없는 후금군의 전력(戰力)에 의주성이 하루 만에 함락되는데, 임진왜란 후(後) 29년 만의 전쟁이다.
- 정묘호란 발발 소식을 들은 조정(朝廷)의 반응은 후금(後金)이 왜 쳐들어 왔지? 우리가 뭘 잘 못했지? 하며 당황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황당하다는 입장, 정묘호란의 발발 원인 ① <친명배금(親明拜金)> 인조반정의 주도세력인 서인들이 표방한 대외 외교정책으로 친명(親明)은 철저히 실천했으나, 군사가 없는 탓에 배금(拜金)의 실천을 위한 군사적 행동은 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인조(仁祖)정부 입장에서는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
- 정묘호란의 발발 원인 ② 후금(後金)의 통치자 교체로 후금(後金)을 세운 누르하치가 1626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조선을 공격하자는 강경론자인 홍타이지(8째 아들)가 정권을 잡았던 것
- 여기에다 이괄의 난(亂) 때 후금(後金)에 투항했던 한윤·정매는 홍타이지에게 조선의 친명배금정책을 고자질하여 조선 침략의 명분을 만들어 주고, 또한 누르하치 사망 시 조문단을 보내지 않는 것도 침략의 빌미
〇 정묘호란 전개
- 후금군(後金軍)의 조선 침공, 어떻게 시작됐나?
1627년 1월 8일 심양 출발하여 14일에 의주성을 함락시키고, 이튿날 정주를 함락하여 21일 안주성 함락하고, 23일 평양에 도착하는데, 도강(渡江)장비 없이 강을 건널 수 있는 날씨를 기다려 전쟁 발발, 열흘 만에 평안도·황해도 점령 “철기(鐵騎)로 거침없이 쳐들어온다면 하루에 7~8식(息)의 길을 달릴 수가 있습니다.” <인조실록 1627년 1월 17일>
※ 1식(息) = 대략 30리(里), 하루에 7~8식은 100여 Km
-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후금군 조선관군의 대응은?
후금군과 조선군의 첫 접전지인 의주성, 성안에 잠입한 후금군은 무기고와 민가에 방화를 하고 조선군이 당황하는 사이에 성 밖의 후금군이 성(城)을 공격하는데, 이는 한윤이 변복(變服)을 하고 의주성에 잠입하여 길잡이 역할을 한 것
※ 한윤 : 이괄의 난 때 처형된 한명련의 아들
- 당시 의주부윤은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이완으로 이 전투에서 사망하고 의주성을 장악한 후금군은 이후 8일 만에 안주성에 이르게 되는데, 당시 안주성은 3,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이홍 장군이 맡고 있었는데 군사와 백성을 동원해 싸워보지만 안주성은 함락되고 만다.
- 속수무책의 조선관군, 대응할 실력이 없었나?
<이괄의 난>으로 평안도 전력이 와해되어 후금(後金)에 맞설 군대가 없었고, 역모(逆謀)에 대한 우려로 기찰(譏察)에 혈안이 되어 있어 병력을 거느린 무장들이 제대로 군사훈련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인조정권유지를 위해 나라를 망(亡)하게 한 꼴 “남이홍이 죽음에 이르러 말하기를 지휘관이 되어 한 번도 습진(習陣)을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애통하다” <동계집> 임진왜란 시 하루 전날 거북선에서 총포 실전연습을 마친 이순신 장군, 철저한 준비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것!
- 정묘호란의 의병(義兵)활동은?
연전연승의 후금(後金)도 이기지 못한 정봉수의 평안도 의병(義兵)은 용천·의주·철산에서 의병을 모아 후금군과 맞서게 되는데 후금군도 끝까지 함락시키지 못한 용골산성!
- 임진왜란과는 달리 활발하지 못한 의병의 활약, 곽재우등 주요 의병은 북인세력으로 <인조반정> 때 북인세력을 대거 숙청한 인조(仁祖)에 대한 반감으로 의병봉기가 주춤했던 것, 또 하나는 임진왜란 후, 선조(宣祖)가 의병장들을 역적으로 몰아 숙청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킬 충성심이 사라졌던 것
- 파죽지세의 후금군에 대한 조정(朝廷)의 대책은?
정묘호란 발발 나흘 만에 조정에서 알 만큼 보고체계도 엉망인 인조정권은 백성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했던 정권으로 임진왜란을 겪고도 국방(國防)에 대한 대책이 미흡했던 것
〇 인조(仁祖)의 두 번째 몽진
- 전란수습은 뒤로 한 채 몽진을 떠나는 인조(仁祖), 이괄의 난(亂) 때 이미 공주로 몽진을 했었고, 두 번째 몽진이 미안했던지 강화도 몽진을 백성들에게 사과하는 죄기교서(罪己敎書, 나 에게 죄를 주는 글)를 내린다.
- 과실(過失)이 있다면 백 번이라도 사과를 해야 마땅하지만, 인조(仁祖)에게 얼마나 진정성이 있으며 국난(國難)에 대한 대안이 있느냐의 문제로 형식적인 교서일 뿐, 인조(仁祖)의 행동은 무책임하여 강화도로 피신하는 인조(仁祖)는 자신의 보위를 위해 삼남지방의 만 여 명의 병력을 차출한다.
- 당시에 임진강 방어를 맡은 장만장군은 임진강 방어를 위해 포수 100여명의 차출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仁祖)에게 거절당하는데, 장만장군은 호란을 예견하여 국방대책 마련을 주장하지만 국제정세 파악에 어두운 조정은 이를 거부했던 것
※ 장만 : 선조·광해군·인조시대에 걸쳐 활약한 국방 전문가로 이괄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움
- 북방 이민족(移民族)의 침입 시 비슷한 양상 ① 겨울에 침략 ② 적(敵)이 수전(水戰)에 약하기 때문에 섬으로 피신 ③ 불리할 경우 화친(和親)을 제의 ④ 철수할 때 공격하는데 명(明)과의 사대의리에 눈 먼 조선은 후금(後金)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
〇 당시 270여 년간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
- 만주족은 1635년 홍타이지(청태종)가 만든 이름으로 그 이전(以前)에는 ‘주션’으로 불렸고, 춘추전국시대는 숙신 · 한 대에는 읍루 · 남북조시대에는 물길 · 당나라 시대에는 말갈 · 송나라 이후(以後)에는 여진으로 같은 민족이 시기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렸고, 서로 다른 민족이 요·금·원 시대를 거치면서 여진으로 융합되는데 당시 한족(漢族)과 만주족(滿洲族)의 인구비는 350 : 1 정도
- 중원·티벳·신강·몽골까지 지배한 만주족의 급성장 저력은?
일찍이 북방에서는 여진족(만주족)이 1만 명 뭉치면 대적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한 여진족, 후금(後金)이 급속도로 팽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군사력으로 이들의 독자조직이었던 팔기군의 팔기제는 군사조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조직으로 이후 청대(淸代)까지 나라의 핵심조직이 되는데, 팔기군에는 만주족뿐만 아니라 몽골인·한인까지 팔기제로 편입하여 융화정책으로 특수한 지배계층이 된다.
※ 팔기제 : 기병 중심의 군사조직 겸 행정조직으로 여덟 종류의 깃발로 편성한 데서 유래
- 중국의 사학자 곽말약(1892~1978)은 “청(淸)이 중국에 들어와서 200년 이상(以上) 통치한 것은 기적이다”라고 말할 정도
- 현재도 만주족(滿洲族)의 자취를 엿볼 수 있나?
오늘 날 ‘중국’ 하면 떠오르는 변발 · 치파오, 현대 중국의 원형을 만든 만주족, 치파오는 만주 귀족 부인(기인)들이 입었던 전통의상으로 청나라는 기인(其人)과 한인(漢人)을 엄격히 구분하여 한인(漢人)은 입을 수 없었던 옷이었으나 동경심의 유발인지 중화민국 성립 이후(以後) 대중적으로 유행했고, 변발(辮髮)은 1644년 全 중국민에게 변발을 강요한 변발령으로 청나라를 통해 일반적인 풍습으로 정착한 것이며 <황비홍> <천장지구> 등에 출연한 대표 미녀 관지림은 만주족 8대 성씨의 하나인 구왈갸 후손
〇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
- 팽창하는 후금(後金)과 명(明)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 결정적 충돌은 샤르후 전투, 1619년 후금(後金)은 10만의 명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심양과 요녕지역을 확보하고 다음 목표는 중원, 하지만 중원을 치기 전(前)에 조선을 후금(後金)의 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던 차(次)에 조선의 친명정책을 빌미 삼았고, 아울러 평안도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군 격파는 급선무였던 것
- 가도의 모문룡은 명(明)의 요양성 장수로 후금(後金)이 요동을 차지하자 잔당(殘黨)을 이끌고 평안도 가도를 점령하여 동강진을 설치하고, 조선정부로 부터는 군량을 제공받고, 요동정벌을 외치자 명(明)은 총병좌도독 관직을 제수하여 후금(後金)을 배후에서 공격토록 명령했던 것
- 가도는 조선에서 명나라로 진입하는 해상요충지로 명나라는 모문룡을 통해 조선과 후금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으니 후금(後金)의 입장에서 모문룡은 당연히 신경 쓰이는 존재
- 실제로 모문룡은 후금(後金)을 칠 만한 세력이었나?
사실 모문룡은 후금(後金)을 공격할만한 의지도 능력도 없었던 사람, 명(明)과 후금·조선 사이의 중개무역을 통해 이익을 추구한 전쟁 브로커로 명나라 사신이 오면 요동을 치겠다며 연출하고 조선으로 부터는 군량미를 공급받고 · 수군(水軍)이 없는 후금(後金)으로 부터는 안전하여 명·조선·후금 삼국을 아우르는 희대의 사기꾼 역할을 했던 것
- 조선을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식량을 요구하는 모문룡에게 바치는 양곡을 ‘모량’이라 하였고 모문룡의 행태는 가도가 함락될 때까지 지속 “모문룡의 군사들이 평안도에 두루 차서 화가 닭이나 개에까지 미쳤다” <인조실록 1624년 1월 7일>
- 요동지역의 한족(漢族)들이 가도와 조선으로 망명(요민), 이들의 존재 자체가 후금(後金)에게는 위협이었고 자신의 포로였던 요민을 잡기위해서도 조선 침략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가도 문제가 단순한 섬의 문제가 아니고 전쟁을 불러온 커다란 요인이 됐던 것
〇 정묘호란의 발발 원인
- 당시 후금(後金)은 사르후 전투 이후 조선과 명(明)과의 경제교역 중단으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서 후금(後金)의 지배를 피해 요동 농경지를 버리고 모문룡에게 간 사람들에 대기근까지 덮친 상황, 후금의 입장에서는 요동은 확보했으나 농사지을 사람은 부족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조선과의 교역이 절실했으나 조선은 오랑캐라 여기고 철저히 배척했던 것 - 조선은 왜 모문룡을 치지 못했나?
인조(仁祖)가 책봉을 받는 문제로 위충현에게 청탁을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 모문룡을 조선 조정은 은인으로 여겨 명나라 사신이 다니는 안주에 송덕비까지 세움
※ 위충현 : 명나라 말기 환관으로 권력의 실세
〇 화친(和親)을 요구한 후금(後金)
- 후금(後金)의 뜻밖의 제안은 전쟁 발발 2일 만에 사신을 보내 화친(和親) 제의하는데 홍타이지의 사촌인 총사령관 아민이 명(明)과의 국교단절이라는 화친조건을 내세운다.
- 명(明)과 후금(後金) 사이에서 조선은 난감한 상황 “당시 신하들은 나라가 망하더라도 안 되는 일이다.” 라고 외치는데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되어야 할 국가이념에 이건 무슨 말인가?
- 후금(後金)의 제안에 대한 인조(仁祖)의 생각은?
인조(仁祖) 생각은 화친(和親)으로 위기국면을 타계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도 고구려 VS 수 · 고려 VS 거란,몽골의 화친으로 위기국면을 타개한 사례가 있고 뿐만 아니라 화친을 맺고 퇴각을 하는 적(敵)을 뒤에서 쳐서 승리한 적도 있어서 인조(仁祖)도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 하지만 오랑캐와 화친했다는 구실로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반정(仁祖反正), 후금(後金)과의 화친은 반정(反正)의 명분을 스스로 거스르는 일로 진퇴양난에 빠져있는 인조(仁祖)
- 한 발짝 물러선 후금(後金), 명(明)과 국교를 단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조선의 명분인 종사를 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화친으로 친명외교를 유지하면서 후금(後金)과 형제관계를 맺어 실리추구를 한다는 조선의 명분을 세워주기 위한 것, 정묘화약의 2대 쟁점 ① 조선과 후금은 형제관계를 맺는다. ② 조선과 명(明)의 국교를 단절하지 않는다.
- 후금(後金)과 형제의 나라가 된다는 것에 반발이 있었을 듯?
성균관 유생들은 강하게 반발하는데, 인조반정은 오랑캐와 화친했다는 구실로 광해군을 폐위시킨 것, 후금(後金)과의 화친은 반정의 명분을 스스로 거스르는 일 “적(敵)의 사신을 목 베어 함에 담아 명(明)에 보내지 않으면 중국을 배신하는 결과를 면하지 못합니다.” <인조실록 1627년 7월 1일>
- 후금(後金)이 거듭 화친을 제의한 까닭은?
정묘호란의 목적은 조선의 완전 점령이 아니고, 명(明)을 치기 위해 후방인 조선다지기, 조선과의 전쟁이 길어진다면 명나라의 배후공격 가능성과 군수품 보급의 곤란으로 조선의 반격이 예상되어 후금(後金)의 전략상 화친이 시급했던 것
※ 병자호란 시(時) 후금(後金)의 병력은 10만 여명 VS 정묘호란 후금(後金)의 병력은 36,000명 & 오랑캐 호(胡), 호차(胡差)는 오랑캐가 보낸 사신(使臣) · 호주머니 · 호떡 · 호종자(胡種子, 호로자식) · 호밀 등은 오랑캐 호에서 유래
〇 멀고 먼 화친(和親)의 길
- 조선은 답서에 200년간 명(明)과의 관계를 이어왔고, 임란(壬亂) 때 도움으로 관계를 끊을 수 없다고 답하며, 게다가 명(明)의 연호(年號) ‘천계’를 써서 보냈으므로 후금(後金)의 입장에선 좋을 리 없었던 것.
- 당시 후금(後金)의 연호는 ‘천총’으로 아민은 한 글자만 바꾸라하고 바꾸지 않으면 철군(撤軍)하지 않겠다고 협박하여 결국 타협하기를 명(明)과 후금(後金)의 연호 사용하지 않기로 함
- 정묘화약 합의안 ①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 맹세 ② 후금은 화약(和約)이 성립되면 군사를 철수 ③ 양국은 서로 영토를 지켜 압록강을 넘지 않는다. ④ 조선은 명(明)과 단교하지 않는다. ⑤ 조선 임금의 동생을 인질로 보낸다. ⑥ 매년(每年) 사신을 교환하고 개시하여 무역을 한다.
- 임금의 동생을 후금(後金)으로 보내라?
후금(後金)이 조선을 친 것은 명(明)과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의 왕제를 인질로 삼아 조선의 변심을 막으려는 것, 조선도 그 정도의 상황은 예상하고 있었던 듯 종실인 원창령을 원창군으로 둔갑시켜 인조(仁祖)의 동생이라고 속여 후금(後金)에 보낸다.
- 자칫하면 외교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문제를 눈앞의 일처리에만 급급한 조선은 언젠가는 밝혀질 술책들이 나중에 큰 비극을 가져온 원인이 된다.
〇 후금(後金)의 아우가 된 조선
- 검은 옷을 입은 인조(仁祖)가 대청으로 나서고 오랑캐와 형제가 된 조선, 후금(後金)과의 회맹의식과 함께 전쟁도 종결되고, 항복을 하면서도 끝까지 후금을 짐승 취급하여 당시 현장에 있었던 정온이 남긴 시(詩) “검은 소에다 흰말을 겸했다. 비린내 나는 피 쟁반에 가득. 상국은 배알이 뒤틀리지도 않는지. 모신의 얼굴에는 기쁨이어라. 망나니들이 예식을 말하고. 짐승들 속에 사람이 섞였어라”
※ 회맹 : 제물을 잡아 피를 마시고 하늘에 맹세하는 것
- 후금군(後金軍)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은 이유?
후금(後金)의 조선침략 명분 중 하나인 가도의 모문룡 제거, 모문룡을 잡지 못한 후금은 조선 주둔의 명분이 되어 의주에 4천여 명이 주둔하게 된다.
〇 백성에게는 끝나지 않은 전쟁
- 전쟁의 또 다른 비극은 모문룡의 조선인 학살, 모문룡은 후금(後金)에 가담한 일부 백성들에 대한 보복으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조선 백성을 죽여 머리를 깍은 뒤 변발을 하여 후금군으로 보고하여 명(明)으로부터 포상을 받는 모문룡, 이는 명나라 말기(末期)의 부패한 정권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
- 후금군이 철수하면서 황해도 지역 백성들에게는 큰 피해 “적병(賊兵)이 백성들의 자녀와 재산을 모조리 빼앗았다. 화친(和親)이 백성을 위한 것인데 백성을 어육(魚肉)이 되게 하는 결과가 됐다” <인조실록 1627년 3월 10일>
- 병자호란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인을 죽이기보다 많이 끌고 갔는데, 나중에 ‘속량’이라고 해서 조선에 팔아먹게 되는 것, 끌려가던 피로인의 상당수는 압록강에 투신··· 끌려가 죽느니 고향에서 죽겠다는 각오, 압록강이 시신(屍身)으로 뒤덮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 국가(國家)가 국민들을 져버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역력하게 보여주는 장면
※ 속량(贖良) : 대가를 지불하고 조선인 포로를 해방시키는 것 & 피로인 : 왜란과 호란 때 적(敵)에게 끌려간 사람들
- 임진왜란 발발 29년 만으로 20대(代)에 임진왜란을 겪은 백성은 50대(代)에 정묘호란을 맞은 운명
〇 정묘호란의 역사적 평가
- 후금(後金)의 호전적인 인물 홍타이지(청태종)의 등장으로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자주국방이 필요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반정(인조반정)과 반란(이괄의 난)으로 자주국방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결국 쓰라린 전쟁으로 이어진 것
- 인조(仁祖)가 실리외교를 펼쳐서 정묘호란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나, 청(淸)과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 왜냐하면 이민족(異民族)이 중원을 장악할 경우 반드시 조선을 침략했었고, 따라서 인조(仁祖)는 실리외교를 펼치면서 시간을 벌어 국방력을 강화했다면 10년 후 병자호란의 치욕을 피(避)할 수 있지 않았을까?
- 인조(仁祖)의 입장에서 훗날을 얘기한다면 정묘호란은 양호한 상황, 정묘호란의 뼈아픈 상황에 대한 반성이 없었던 결과가 머리를 땅에 찧으며 청(淸)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하는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비극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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