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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표류기

mkpark2022 2015. 7. 15. 17:29

 

 

하멜 표류기



하멜, 조선에 표류(漂流)하다

- 하멜 표류기의 기록 “1653년 여름, 나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상선(商船)인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순조로운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우리 배는 강한 폭풍우를 만났고, 나와 내 동료들은 생사를 건 사투를 벌였습니다. 거센 파도에 배가 부서지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36명만이 낯선 섬 해안가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 막막해진 우리 앞에 중국식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말을 걸 틈도 없이 도망쳐 버렸습니다.

- 그 다음날 아침 천()여 명의 무장을 한 군사들이 우리를 에워쌌습니다. 그들은 겁에 질려 땅에 납작 엎드린 우리를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은 대체 어디이며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하멜표류기 에서>

 

조선에 표류(漂流)한 하멜은 어떤 인물인가?

- 서양인이 쓴 최초의 조선보고서 <하멜표류기> 23세의 네덜란드 청년인 하멜은 1653(효종4) ~ 1666(현종7)까지 무려 1328일간을 조선에서 체류하게 된다.

- 하멜이 항해에 나선 이유는?

스페르베르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상선으로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직원이었으며 네덜란드를 출발해서 일본으로 가는 도중 표류하게 되는데 당시는 대항해 시대로 서양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게 되는 시대, 하멜도 무역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며 항해에 나선 것

대항해시대(對航海時代) : 항해술 발달로 유럽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시기로 신대륙과 같은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전 세계 교역이 시작 됨

- 16세기 전반까지 대항해 시대의 선두주자는 포르투칼·스페인, 발주자로 신생국가인 네덜란드가 등장, 특히 네덜란드는 영국과 협력하여 1588년 카디스에서 벌어진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를 하면서 네덜란드는 전성기를 누리고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를 설립하는데 이는 곧 네덜란드 번영의 상징

스페인 무적함대의 패배(1580년대) :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이 카디스 항에서 거둔 승리를 시작으로 해상패권을 장악하던 스페인이 쇠퇴하고 네덜란드가 급부상

- 하멜은 조선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었나?

17세기 중반의 요안 블라외 세계지도에는 조선은 단지 나라이름만 기록된 미지의 세계, 반면 중국과 일본은 각() 지역의 이름까지 상세히 표기

요안 블라외 세계지도 : 네덜란드 요안 블라외가 수백 장의 지도를 합쳐 만든 세계지도

 

서양인 하멜과 조선의 첫 만남

- 조선에 대한 하멜 일행의 첫 인상은?

<하멜 표류기>의 기록 그들은 중국식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머리엔 말총으로 짠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해적이나 본토에서 추방된 중국인들이 사는 곳에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는 모두 겁을 먹었습니다.”

- 제주 목사 이원진의 장계 이 사람들은 눈이 파랗고, 코가 높고, 머리가 노랗고, 수염이 짧습니다.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여인들이나 입는 알록달록하고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것이 우리와는 풍습이 크게 다른 것 같습니다.” <효종 486>

장계(狀啓) : 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관하의 주요 일에 대하여 왕에게 보고

- 하멜 일행의 임시 거처는 광해군이 살던 곳으로 광해군 사후 12년 만에 그 집에 머무르게 되는데 하멜표류기의 오류(誤謬) 이곳이 효종(孝宗)의 숙부가 살았던 곳이라고 기록하지만 광해군은 효종(孝宗)의 조부(祖父) 광해군이 역모(逆謀)를 일으켜 제주에 유배됐다고 기록하는데, 이는 광해군과 인조(仁祖)를 거꾸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

- 하멜과 조선인들은 의사소통을 어떻게 했을까?

조정에서 통역겸 조사원으로 박연(벨테브레)이 파견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 발생, 박연은 조선에서 26년간의 세월에 모국어를 잊어버린 것 오십대 후반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의 이름은 얀 얀스 벨테브레, 26년 전() 조선에 왔다는 그는 고국의 말조차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같은 네덜란드 사람을 만나서 기뻤던 마음은 금세 슬픔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이곳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되는 게 아닌지 생각만 해도 나는 너무 두렵습니다.” <하멜표류기>

박연 : 1627(인조5) 제주도에 표류됐다가 조선에 귀화한 최초의 서양인(네덜란드)

 

하멜 일행 36명과 표류선

- 서툰 말솜씨로 박연이 조사를 통해 알아낸 것은 36명 중 19명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주목할 것은 이들의 직업이 다양한 기술자들이라는 것으로 조선에게는 선진 서양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좋은 기회

- 하멜이 표류선에 실고 온 물품은 대포·중포·소포·소총 등 무기류와 은() 600·유리루(모래시계천리경(망원경유리경(거울) 등으로 당시 선진 서양문물의 종합 세트인 셈

- 하멜 일행에게 친절했던 제주 목사 이원진, 하지만 제주 목사가 바뀌면서 신임 제주목사가 부식지급을 중단하자 하멜 일행은 소금과 물만 가지고 밥을 먹어야 했던 처지로 제주에서부터 탈출을 꿈꾸게 되는 것

- 제주도에서의 탈출시도

결국 제주도 탈출을 시도한 하멜 일행은 고을 외곽의 배를 훔치려다 개가 짖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가 나가지 못하고 볼기짝을 맞으면서 한 달을 보냈다고 하는데 몸 고생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마음에 고생이 더 심했을 듯

- 하멜일행을 억류한 이유?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以後)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 효종(孝宗)은 청나라의 견제 속에서 몰래 북벌(北伐)을 추진하던 상황, 또한 일본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하멜 일행의 존재는 자칫 외교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내포되어 일단 억류시키고 보자는 취지였던 것

 

효종(孝宗)의 북벌계획과 하멜 일행

- 서울로 압송한 하멜 일행에 우호적이었던 효종(孝宗)은 북벌 추진 중심기구인 훈련도감에 이들을 배속하여 호위병사로 임명 화승총 한 자루·화약·총알을 지급받았다” <하멜표류기>

- 효종(孝宗)은 당시 서양의 화포술과 총포술은 북벌정책에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군사들은 봄에 3개월, 가을에 3개월 훈련을 받는다. 매달 3번 씩 사격 훈련과 그 밖의 전술 훈련을 하러 다녀온다. 그들은 연습이 행해지면 세상의 모든 책임이 그들 어깨에 달려 있는 듯 했다” <하멜표류기>

- 효율적인 군역관리를 위해 호패보급에 힘 쓴 효종(孝宗)은 하멜 일행에게도 호패를 지급하는데 남만인(남쪽에서 온 오랑캐)이라고 불렀던 이들에게 남씨 성을 부여

 

하멜 일행의 한양생활

- 환영잔치를 베풀어 준 효종(孝宗), 네덜란드식 노래와 춤을 선보인 하멜과 그 일행의 낯선 용모와 관습은 조선인들에게는 구경거리로 권세가 집안에 초청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골목길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조차 구경꾼들 때문에 편하게 쉬지 못했다” <하멜표류기>

- 서울에서 이들이 처음 거처한 곳은 중국 귀화인들의 집, 이들과 더부살이를 했던 하멜 일행은 겨울이 되면 땔감을 위한 장작을 구해오라는 주인의 성화로 추위 속에 5Km를 걸어 나무를 해오는 고생을 겪었다고···

- 청나라와 하멜 일행 조선 탈출시도 사건

16553, 청나라로 돌아가려던 사신 행렬에 뛰어든 뜻밖의 두 사람은 네덜란드로 보내줄 것을 간청하지만, 이들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수감되고 남은 일행은 집밖 출입이 금지된 채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되는데, 조선에 억류된 서양인이 청나라 사신 앞에서 벌인 탈출시도 사건으로 조선 조정은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 탈출시도 사건이 조선조정을 난처하게 만든 이유는?

()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은 중국을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황으로 조선과 명()과의 관계를 계속 주시하여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감시하고 동시에 무리한 조공(租貢)을 요구해 경제력을 피폐시키면서 군대를 조성할 틈을 주지 않는 예민한 시기로 이 사실이 청()에 알려지면 조선 내() 서양인들의 존재는 서양의 선진무기를 통한 군사력 확충의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는 민감한 상황.

- 조정은 신속하게 대응하여 박연을 보내 탈출 시도했던 두 사람을 체포 수감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주고 사건 무마(撫摩)를 청탁하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16558월에 두 죄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그들이 자연사(自然死)했는지 참수(斬首)되었는지 분명히 알지 못했다” <하멜표류기>

- 나머지 하멜 일행은 어떻게 되었나?

당시는 감시목적의 청나라 사신의 잦은 방문으로 불안해진 조선 조정, 사흘간 열린 어전회의에서 조정의 대신들은 처형을 주장하지만 청()의 볼모생활을 겪었던 효종(孝宗)은 처형 대신 () 사신을 만날 수 없는 지방으로 유배를 보내는데, 유배지는 전라 병영(강진)으로 실제 하멜일행이 가장 오래 살았던 곳

 

전라도에서의 험난한 유배생활

- 전라병영에서 고된 잡역(雜役)에 시달린 하멜 일행, 과중한 잡역에 시달리거나 일종의 행상(行商)과 나무를 해다 팔기도하여 옷이 다 헤어졌다는 기록.

- 하멜 일행 중 결혼한 사람은 없었나?

조선 여인과 결혼한 박연과는 달리 그들이 결혼했다는 기록은 없음, 박연은 훈련도감 소속 의 출세한 관료이지만 하멜 일행은 잡역(雜役)에 시달리는 죄인 신분으로 장가가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

- 전라도로 내려온 하멜 일행의 생활은 눅눅치가 않았던 것 우리는 밥과 함께 먹는 소금 한 줌을 구하려고 3Km 이상을 걸어야 했다” <하멜표류기> 이 기록은 1657년 표류 5년 후()의 기록, 결국 탁발승과 함께 구걸까지 했던 유배생활이 이어지는데 당시는 대기근으로 일반 백성들도 몹시 궁핍했던 시기

 

하멜, 조선의 대기근을 겪다

- 지난 천년의 역사를 보면 16~7세기는 가장 심한 소빙기, 그 중 가장 추웠던 시기는 효종(孝宗) 대로 하멜표류기에 추위에 대한 기록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데, 표류 당시의 1653년의 기록을 보면 4월에 경기도와 황해도에 서리, 6월에는 강원도에 서리, 심지어 1655년 봄에는 동해가 얼어붙고 하멜의 체류기간 동안 동해(東海)가 두 번을 얼어붙는다. “1662년 우리가 산간에 있는 사찰(寺刹)을 갔을 때는 어찌나 눈이 많이 왔던지 집과 나무가 다 파묻혀 사람들이 눈 속에 굴을 뚫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다니는 것을 본 일이 있다” <하멜표류기>

- 이상한파로 인한 가뭄은 얼마나 심각했나?

하멜은 1662년 기록에 수천 명의 사람이 기근으로 굶어 죽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고 도로에 군사들을 배치했는데 아사(餓死)한 사람들을 매장하고 매일같이 일어나는 살인사건이나 강도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하멜표류기>

- 현종(顯宗)의 재위기간은 15년이란 긴 세월이나 그의 업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은 당시 유난히 심각했던 자연재해 때문에 제대로 된 정책을 펼칠 수 없었던 것

- 당시 하멜은 조선에 표류하지 않았다 해도 혹한(酷寒)은 피할 수 없던 것이 전 세계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낯선 땅 이방인이 겪는 추위는 더 큰 고통이었을 듯

- 대기근으로 이방인을 챙길 여력이 없었던 조선, 전라도에 33명이 유배 갔으나 7년 만에 11명이 사망하고 22명만 생존, 이들을 먹여 살리는 전라병영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이들을 전라도 각() 고을로 분산 배치하여 여수에 12· 순천에 5· 남원에 5명을 분산

- 하멜 일행의 삶이 팍팍해진 또 다른 이유는 우호적이었던 효종(孝宗)이 승하하고 현종(顯宗)이 즉위하면서 이들의 대우가 달라지는 것.

 

효종(孝宗)이 승하하고 현종(顯宗)이 즉위, 하멜 일행은?

- 현종(顯宗)은 즉위와 동시에 예송논쟁에 휘말리는데, 대기근 하()에 민생에 상관없는 정치적 논쟁에만 매몰된 아쉬움

예송논쟁 : 현종 대는 1659년 기해예송과 1674년 갑인예송, 효종·효종 비 승하 시() 조대비(인조의 계비이며 효종의 계모)의 복상기간을 두고 3(남인) VS 1(서인)으로 정치적·사상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한 논쟁

- 이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국가 지배층의 권위가 추락하여 나라의 근간을 바로 세우기 위한 명분으로 주자성리학을 강조하게 되고, 특히 예()를 중시하는 문화국가임을 보여주면서 왕실에서부터 스스로의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 이런 상황이다 보니 하멜일행은 자연스럽게 관심에서 멀어진 것

 

하멜 13년 만에 조선을 탈출하다

- 166694일 여수 해안, 조선에 표착한지 13년 만에 또 다시 탈출을 시도, 탈출에 동참한 일행은 생존자 16명 중 8

- 조선 해역을 벗어나 나가사키로 향하던 이들은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곳은 나가사키 인접의 작은 섬 고토, 일본 정부는 즉시 수군을 파견해 그들을 나가사키 지방 관청으로 보내지고 하루 만에 이루어진 체계적인 심문으로 표류민을 통한 국제정세를 파악한 일본은 심문 후() 이들을 데지마 상관으로 옮기게 한다.

데지마 : 서양과의 교역을 위해 나가사키에 건설한 인공 섬으로 네덜란드와의 독점 무역이 유일하게 허용되었던 곳

- 일본 막부는 천주교 유입을 막기 위해 제한된 지역에서만 서양과 교역을 하게 한 것, 그렇지만 이를 통해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외국 서적 수입을 허용하면서 소위 난학으로 일본과 유럽이 가까이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난학(蘭學) : 일본 에도 시대에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전래된 서양의 기술과 지식을 연구한 학문

- 조선에서 탈출한 서양인들의 출현, 이것은 조·일 양국 간의 외교적 마찰로 이어지는 파장을 몰고 오는데 하멜 일행의 탈출이 조·일간 외교문제로 비화된 이유?

인조(仁祖) 22년 갑신표류사건 이후(以後) 맺은 표류민 상호통보협약때문, 게다가 네덜란드는 일본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屬國)이라고 주장하면서 표류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야 했지 않느냐는 트집을 잡아 문제화 시킨 것.

- 하멜 일행의 억류를 외교문제로 비화시킨 일본 막부의 속셈은?

일본 막부의 속셈은 교역, 임란 후() 일본과 무역을 엄격히 제한했던 조선은 대표적으로 왜관 한 곳에서만 무역활동을 허용하고 교역선도 년 간 21척으로 제한했는데, 하멜 일행의 억류를 문제 삼아 교역량을 늘려달라는 요구를 한 것

 

<하멜표류기> 출판의 배경

- 하멜이 표류기를 쓴 이유는 13년 간 체류하면서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증거자료로 쓰게 되는데, 구체적이고 상세한 묘사는 당시 절박함의 산물이고 하멜표류기는 미지의 나라 조선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

- 하멜표류기는 유럽에서 얼마나 화제가 됐나?

대항해 시대 탐험에 관심이 많았던 유럽인들, 출판사에서도 탐험이야기를 선호하여 하멜이 귀국한 직후인 1668년 유럽 각국에서 불··영어판이 동시출간

- 17세기 네덜란드 대외무역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네덜란드는 1568년부터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을 하는데 군사전쟁 뿐만 아니라 경제전쟁도 함께하면서 지구 어디든지 무역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독점무역을 하려했던 것, 당시 세계 은() 산출량의 1/3을 차지한 일본, 동남아에서 확보한 향신료를 일본의 은()과 교환하고, ()으로 인도에서 면직물을 구입하여 이를 인도네시아에 되팔아 막대한 중계이익을 취득했던 것

- 네덜란드는 하멜표류기 출간 전()에도 조선의 존재를 알고 있었나?

조선의 위치는 알고 있어 1610년부터 조선과의 무역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던 대마도 지방영주의 방해로 무산되고, 1622년에는 조선 탐험을 시도하다 조선 군함 36척의 공격을 받고 포기, 실제로 1639년 네덜란드의 보물섬 원정대가 출항하지만 태평양에서 좌초되고 조선에는 오지 못하게 되는 것

보물섬 원정대 : 1639년 조선의 금과 은을 찾기 위해 출발한 네덜란드 원정대, 태평양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됨

- 하멜표류기 출간 이후(以後) 조선에 대한 관심이 커졌나?

17세기 초반까지 조선은 유럽인들에게는 미지(未知)의 땅, 하멜표류기 출간 이후 네덜란드는 다시 한 번 조선과의 무역가능성을 검토하고 1669년 조선과의 직교역을 위해 코리아호를 출항시킨다.

- 코리아호의 운명?

결국은 조선까지 오지 못한 코리아호, 네덜란드와 조선 사이의 독점중계무역으로 큰 이득을 보고 있던 일본 막부는 네덜란드에게 조선과 직교역을 하면 거래를 끊겠다고 협박한 것, 네덜란드의 판단도 불확실한 조선과의 교역을 시도하기보다는 일본과의 무역을 안전하게 이어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결국 무산이 되고 만다.

 

17세기 조선의 대외 인식

- 훌륭한 지도자라면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고 변화를 위한 대응책을 마련했어야 하지만, 당시 조선은 왕()부터 사대부까지 총체적인 리더십 부재의 시대였다

- 조선이 변화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한 근본적 이유?

불안정한 국내의 정세로 현종(顯宗) 시대의 극심한 대기근과 첨예한 예송논쟁에 현종(顯宗)의 건강마저 악화되는 등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 또한 효종(孝宗)이념에 치우친 북벌론에 매몰되어 국제적인 변화의 흐름 수용에 소홀했던 것

- 만약 소현세자가 하멜 일행을 만났다면?

사실 명나라 말기는 혼란을 틈타 명 사신들은 많은 뇌물을 요구는 하지만, 서양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개방된 사회가 되는 조선은 명나라를 통해 세계와 간접적으로나마 만나게 되지만, ()이 집권하면서 청()은 조선이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완전히 차단했던 것, 당시는 ()이 중국을 아직 완전하게 장악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으로 하멜 일행이 100년만 늦게 영·정조 시대에 왔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다시 쓰여 질 수도 있었을 것

- 조선시대에 제작된 두 개의 세계지도, 15세기의 혼일강리역대국지도에는 중국은 물론 인도와 아프리카까지 인식되고 있으나, 17세기의 천하여지도에는 중국이 중심이 되고 아프리카와 인도가 사라지는 등 당시의 조선인들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는 것

- ‘혼일강리역대국지도는 건국세력들이 그린 지도로 조선 초기(初期)의 개방적인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는데, 동유럽까지 정복했던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이 당시가 동서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

- ‘천하여지도에는 15세기 지도에 비()하여 인도나 아프리카는 빠져나가고 중국만 크게 그려지는 실질적 감각이 없는 17세기 조선의 중화주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 두 개의 지도는 믿고 싶은 세계믿지 않는 세계로 나눠진 것.

- “단언컨대 하멜표류기는 조선의 대외관계 표류기이다.” 숭명반청·소중화주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 않고 좀 더 넓은 세계를 수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 & “하멜표류기는 버려진 초대장이다.” 세계에서 조선에 보내진 초청장이었는데 세계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하고 그냥 버려진··· & “조선인의 기록과는 달리 서양인이 목격한 17세기의 조선의 실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