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 아들을 낳다
〇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 숙종(肅宗)은 1688년 10월에 왕이 된지 14년 만에 첫 아들을 보았지만 오랫동안 기다려 온 왕실의 경사를 기뻐할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숙종(肅宗)의 비(妃) 인현왕후였다.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숙종실록 1688년 10월 27일>
- 왕자를 낳은 옥정은 빈(嬪)에 책봉되어 장희빈이라 부르게 되고 왕자의 탄생은 장희빈과 인현왕후 두 여인의 모진 운명의 서막(序幕)이었다.
※ 빈(嬪) : 조선시대 후궁에게 내리는 정일품 내명부의 품계로 귀인(貴人)의 상(上)
- 남인과 서인의 두 정치 세력의 대리자로 숙종(肅宗)의 사랑을 놓고 첨예한 대립을 펼쳐야 했기 때문이다.
〇 숙종(肅宗), 14년만의 득남
- 정치의 후폭풍을 겪어야 했던 숙종(肅宗)의 여인들, 숙종(肅宗) 즉위 14년만의 득남으로 인현왕후는 15세 결혼하여 그간 7년 동안 후사(後嗣)가 없었고, 장희빈의 왕자 출산을 두고 유독 기뻐했던 숙종(肅宗), 인현왕후에게는 후사가 없다가 장희빈의 출산은 숙종(肅宗)의 말할 수 없었던 걱정을 해소시켜준 것으로 장희빈의 아들은 훗날 경종(景宗)으로 즉위한다.
- 호산청이란?
왕실에서 출산을 하는 경우 출산을 돕는 임시관청이 설립이 되는데 왕비가 출산하는 경우에는 산실청 VS 후궁(後宮)이 출산하는 경우에는 호산청에서 담당, 원칙적으로 후궁은 궁 밖에서 출산을 했지만 선조(宣祖)의 후궁 공빈 김씨가 광해군 출산 후(後) 사망하고, 3년 후(後) 후궁 정씨가 출산후유증으로 다시 사망하자 후궁도 궁 안에서 출산키로 한 것
〇 장희빈에 대한 편견
- 장희빈의 팜므파탈 이미지를 각인시킨 원인은?
소설이긴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인현왕후전>에서 너무 사악(邪惡)하게 묘사된 것이 드라마를 통해서 극대화가 되고 장희빈역의 배우들도 누가 더 악랄한 연기를 하느냐에 초점을 둔 것이 원인
※ 인현왕후전 : 인현왕후의 생애를 소설체로 엮은 작자와 연대 미상의 작품으로 원제는 <인현성후덕행록>이다.
- <인현왕후전>은 서인 중심의 시각에서 쓰인 소설이라서 장희빈은 악녀(惡女) VS 인현왕후는 착한 여인으로 묘사되는 선악의 이분법적인 구도로 자리를 잡게 된 것
〇 역사의 라이벌, 장희빈 VS 인현왕후
- 인현왕후의 부(父) 민유중은 당대 최고의 권력가로 송시열의 절친이었고, 모친 역시 은진 송씨도 서인의 핵심인사 송준길의 딸로 당대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인현왕후
- 숙종(肅宗)보다 2살 연상인 장희빈은 실록에 언급 될 만큼 뛰어난 미모로 출신성분을 뛰어넘은 장희빈 “사간원의 한성우가 궁인 장씨를 염려하며 왕에게 미인(美人)을 경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숙종실록 1686년 12월 14일> & “김창협이 장씨의 미색(美色)에 마음이 현혹되어 은총을 열어준다는 비난을 없게 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숙종실록 1686년 9월 13일>
- “명성왕후(숙종 모)가 말하길 궁인 장씨는 매우 간사(奸邪)하고 악독(惡毒)하고, 국가의 화(禍)가 될 것이다” <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 결국,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 장희빈
〇 장희빈의 출궁(出宮)
- 당시의 당파와 관련된 중요한 사항으로 명성왕후 입장에서는 같은 서인 출신의 인현왕후가 마음에 드는데, 장희빈은 남인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근본도 없는 여인이라는 것
- 장희빈의 배경은?
어떤 책에는 종의 딸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실제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유명한 역관(譯官) 집안의 출신 “역관 장현은 국중(國中)의 거부다” <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 역관은 통역 이외에 무역활동도 겸하여 많은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고 장현은 장희빈의 5촌 당숙으로 장희빈의 후견인 역할, 뛰어난 미모에 든든한 재력까지 뒷받침됐던 것
〇 조선시대 갑부 역관
- 그들은 어떻게 재산을 모았나? <정승혜 수원여대 교수>
역관(譯官)하면 대표적으로 변승업, 역관은 통역 이외에 무역활동도 겸하고 외국어를 못하는 사대부를 대신해 외교활동을 수행한다.
- 특히, 사절단 행차시에는 청(淸)과 조선의 거리는 총 2천리로 왕복 6개월이 걸리는 대장정의 기간 동안의 경비를 국가에서 직접 지급하지 않고 여행 경비 대신 사행단에게 인삼무역권을 제공했고 이를 주관하는 사람이 역관이며 수행원들도 한 사람당 팔포(八包)의 인삼무역이 허용된다.
※ 팔포무역 : 한 사람당 주어진 무역 허용량으로 인삼 10근씩 담은 8개의 꾸러미, 총 인삼 80근으로 쌀 2천 여석을 살 수 있는 큰 돈
- 역관에게 사무역권이 주어지며 거상이 됐나?
중국 역관들은 우리나라 특산물을 가져다 팔고 조선역관들은 청(淸)에 인삼을 팔고 비단·문방구·가죽을 구입해 왜관(倭館)을 통해 일본과의 중계무역으로 부(富)를 축적하는데, 당시 청(淸)은 일본과의 모든 교역을 단절하고 있는 상태라서 가능했던 것
- 역관(譯官)이 되려면?
역관 양성기관인 사역원에 입학을 해야 하는데, 사역원은 10대 이하로 입학을 제한했고 입학으로 모두 역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과(譯科)에 합격해야 <역과합격증서>를 부여했던 것, 역관 집안에서는 부와 명예가 따랐기 때문에 이의 세습을 원한 역관 가문은 어릴 때부터 조기(早期) 외국어 교육을 시킨 것.
※ 역과합격증서 : 조선시대 역관이 되려면 ‘역과’라는 시험을 치러야 했음
- 변승업(1623~1709)은 조선 후기 사역원 소속 일본어 역관으로 장현 · 김근행과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거부역관 중 한 명
〇 궁녀가 된 장옥정
- 재벌의 조카 딸 장옥정, 궁녀가 된 이유는?
재미있는 것은 장현의 딸도 효종(孝宗) 때 궁녀로 입궁하게 되는데, 딸과 조카를 입궁시킨 이유는 당시, 장현은 남인들과 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던 차에 1680년 남인의 실세였던 허적의 서자 허견이 반란을 일으키며 <삼복의 옥(獄)>으로 남인은 대거 실각이 되고 장씨 집안도 정치적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것.
※ 삼복의 옥 : 1680년 남인 허견이 복선군을 내세워 역모를 꾀한다는 서인의 고변으로 비롯된 옥사(獄死)
- 장희빈과 숙종(肅宗)의 첫 만남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야사(野史)에 따르면 첫 번째 왕비(王妃)인 인경왕후시절에는 엄격한 왕후가 있어 한 눈을 팔지 못했으나, 1680년 인경왕후는 결혼9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인현왕후와 재혼하기 전(前) 약 6개월의 공백 기간에 장희빈을 만난 것으로 추정
- 장옥정은 어떻게 다시 궁에 들어갔나?
출궁 3년 뒤에 명성왕후가 사망한 뒤 다시 들어오게 되는데, 극(劇)적인 것이 숙종(肅宗)이 너무 장희빈을 잊지 못하자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데려왔다는 것
〇 장희빈의 출궁과 재입궁
- 숙종(肅宗)은 장희빈의 거처였던 취선당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 서인들도 장희빈에 대한 숙종(肅宗)의 총애를 경계하며 민감하게 받아들이는데 남인들이 주동해서 자신들이 어떻게 되는 정국의 풍파가 이를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했던 것, 이징명이 숙종(肅宗)에게 상소로 여색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 “이징명은 장희빈은 복선군에게 빌붙었던 장현의 친척으로 가까이 한다면 걱정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상소했다” <숙종실록 1686년 7월 6일>
- 일개 궁녀가 총애를 받는다고 해서 이렇게 상소를 한다는 것은 황당한 일, 이런 논란은 장희빈 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장희빈을 단순한 숙종의 후궁이 아닌 남인의 선봉으로 바라본 서인들의 복심이 깔려있는 것
〇 숙종(肅宗)의 총애를 받은 장희빈
- 숙종(肅宗)은 장희빈을 폐출할 것을 상소한 이징명을 파직시키는데 그 만큼 장희빈에게 마음이 기울었음을 의미 “숙종이 궁인 장씨를 숙원으로 봉하고 노비 100명을 하사했다.” <숙종실록 1686년 12월 14일>
- 이어지는 경사는 왕자(경종)의 출산으로 입지를 굳힌 장희빈, 출산한 딸을 만나러 간 어머니 윤씨는 옥교(玉轎)를 타고 간다.
- 옥교(玉轎)는 정3품 이상(以上)의 여인만이 탈수 있는 가마로 이를 지적하는 사헌부 관리들에게 숙종(肅宗)은 오히려 호되게 꾸짖으며 일부는 사형을 시켜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옥교사건은 정치적 구상의 서막일 뿐
- 신하들을 불러놓고 생후 2달 만에 원자책봉을 선언하는 숙종(肅宗), 원자로 정한다는 것은 적장자로 만들겠다는 의미, 그러나 서인은 아직 인현왕후의 나이 22세로 충분히 후사를 볼 수 있는데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것.
- 원자책봉을 위해 숙종(肅宗)이 내세운 근거는?
빨리 원자가 정해져야 국가가 안정 된다는 것으로 명분에 불과한 이유를 대면서 생후 3개월 만에 원자책봉하고 3세에 세자로 책봉하게 되며 장희빈은 후궁 최고 품계인 정1품인 빈(嬪)에 책봉된다. “국본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안정되지 않으니 이제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로 정하려 한다.” <숙종실록 1689년 1월 10일>
- 이렇게 되다보니 서인의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을 리 없고 서인의 맹장(猛將)이 상소를 올리는데 “송시열이 송나라 신종은 철종이 10살이 된 후에야 태자로 삼았다며 여유 있게 천천히 함을 귀하게 여기라 상소했다.” <숙종실록 1689년 2월 1일>
- 이에 숙종(肅宗)은 격노하며 송시열을 삭탈관직 시키고 제주도로 유배시키면서 송시열을 필두로 서인세력 100여명을 삭탈관직과 파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는 <기사환국>
※ 기사환국 : 1689년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이 재집권한 사건
- 숙종(肅宗)을 두고 갈등해야 했던 두 여인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서 장희빈을 선택한 숙종(肅宗), 두 여인의 운명이 일순간에 바뀐 것. “인현왕후는 투기가 심하여 반드시 종사에 화를 미칠 것이다. 희빈 장씨는 인효공검하여 덕이 후궁에 드러나··· 인현왕후는 하루도 국모노릇을 할 수 없겠으므로··· 장희빈 일국의 모의(母儀)가 될 만하니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도록 명하는 바이다.”
〇 장옥정, 중전이 되다.
- 창덕궁에 거처한 숙종(肅宗), 왕의 침전은 대조전으로 주인이 인현왕후에서 장희빈으로 일순간에 바뀐 것이고 궁녀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대조전의 주인이 된 장희빈, 후궁을 아무리 총애한다고 해도 중전을 내친 일은 없었기 때문에 인현왕후를 내칠 명분이 없었던 숙종(肅宗)은 인현왕후의 꿈 이야기를 저주라는 명분으로 폐출시키는데 “인현왕후가 꿈에서 선왕(先王)을 만났는데 장희빈은 팔자에 아들이 없다고 했다” <숙종실록 1689년 5월 2일>
- 이것 말고는 인현왕후를 내칠 명분이 없었던 숙종(肅宗), 경종이 태어나니 봐라 아들이 없을 것이라더니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느냐며 이것은 분명 저주라고 하면서 장희빈의 편에 섰던 남인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중전을 폐출시킨다.
- 서인들 중 소론인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강하게 반발을 하는데 박태보 · 오두인 등 86명이 연명하여 인현왕후 폐출반대를 상소. “인현왕후는 명성왕후가 선택한 사람이고 명성왕후의 상(喪)을 치룬 사람이니 중전폐출을 다시 생각해달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숙종실록 1689년 4월 25일>
- 숙종(肅宗)은 화(火)를 내며 “내가 무죄(無罪)한 사람을 폐출하라고 한다니 과연 이럴 수가 있는가?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차라리 나를 폐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숙종실록 1689년 4월 25일>
- 다혈질의 숙종(肅宗)은 반대상소를 읽다 찢어버리기도 하고 나중에는 국청(鞠廳)을 열어 중전폐출을 밀어붙이고, 상소를 올린 박태보와 오두인은 <압슬>과<낙형>의 모진 고문으로 유배길에서 사망하게 되는데, 이는 왕권(王權)을 과시하고 싶은 의도가 강했을 것
※ 압슬 : 사기조각 위에 무릎을 꿇리고 짓누르는 고문 방법 & 낙형 : 불에 달군 쇠붙이로 피부를 지지는 고문방법
- 중전폐출을 밀어붙인 숙종(肅宗), 이를 지켜본 인현왕후의 심정은?
가혹한 것은 인현왕후 생일에 폐출을 공표한 숙종(肅宗), 이후 안국동 친정집으로 쫓겨 난 인현왕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도 생일날 폐출
- 중전이 된 장옥정 가문의 변화?
장옥정 가족의 중직(重職), 증조부 좌의정 · 조부 우의정 · 부친 영의정으로 3대 중직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고, 오빠 장희재도 5군영 중의 하나인 총융청의 장(長)으로 임명되면서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최고의 가문으로 성장한다.
〇 숙종(肅宗)의 변심
- 중전의 자리에 걸맞지 않게 투기를 부린 장희빈,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숙종(肅宗)의 눈에 띈 무수리 최씨, 이 사실을 알게 된 장희빈은 최씨를 불러 매질을 하지만 찾아가 이를 말리는 숙종(肅宗).
- 그 날 이후, 숙종(肅宗)의 승은(承恩)을 입고 후궁이 된 숙빈 최씨, 투기에 눈먼 장희빈은 숙빈 최씨를 독살하려하지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숙종(肅宗)의 마음은 희빈에게서 돌아서기 시작한다.
- 장희빈은 정말 악독했나?
대부분 서인에 의한 기록으로 과장된 측면은 없지 않을 것이나, 중요한 것은 숙종(肅宗) 마음이 움직인 것은 사실,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 “숙종(肅宗)은 인현왕후 폐위를 자못 후회하면서 매번 혼자 있을 때면 문득 한숨을 길게 쉬면서 서쪽의 안국동을 바라보며 흐느꼈다.” <단암만록>
※ 단암만록 : 민진원이 경신환국부터 영조 즉위 초까지 주요사건을 기록한 책
- 인현왕후는 사가(私家)에서 몇 년을 머물렀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폐출되고 5년 만인 1694년 갑술환국으로 복위, 인현왕후 폐위 후(後) 민가에 떠도는 동요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 철이다” 당시 민심이기도 했겠지만 서인들이 재집권을 염원하며 유포한 노래(?)
〇 숙종(肅宗)의 새로운 여인, 숙빈 최씨
- 장희빈이 독살하려 했던 숙빈 최씨는 영조(英祖)의 생모, 기록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나 최근 <동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알려지는데 숙빈 최씨도 장희빈보다는 극적이지 않지만 7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17년을 보내다 숙종(肅宗)을 만나고 후궁이 되어 이듬해 영조(英祖)를 낳은 입지전적인 인물, 숙빈 최씨는 숙종(肅宗)의 사랑을 얼마나 받았던지 1693년 10월 첫아들 ‘영수’를 출산하고 이듬해 9월 둘째 아들 ‘영조’를 출산한다.
※ 숙종은 세 여인을 드라마 주인공으로 등극시킴(장희빈·인현왕후·동이) & 드라마 동이는숙빈 최씨와 관련된 드라마
- 숙종(肅宗)과 숙빈 최씨는 어떻게 만났나?
야사(野史)에 따르면, 숙종(肅宗)이 우연히 촛불이 켜져 있는 무수리 방안을 들려다 봤는데 “숙종(肅宗)은 폐비가 된 인현왕후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기도하던 최씨를 우연히 보고 총애하게 됐다” <수문록>
※ 조선시대 전문직 여성, 궁녀 <김종성 동아시아 역사연구가 · ‘왕의 여자’ 저자>
- 다양한 궁녀의 명칭 그 차이점은?
법전상의 명칭은 궁녀였고 궁인(宮人)은 궁에 사는 사람, 나인(內人)은 내명부에 속한 여성을 일컫는 말, 항아(姮娥)는 달에 사는 선녀라는 말로 평생노동·결혼금지·이성과의 만남금지 등 힘든 궁녀의 긍지를 고취시키기 위한 호칭
- 후궁이 되기 위해 입궁하는 궁녀도 있었나?
궁녀가 왕을 만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 왜냐하면 궁녀의 행동반경은 제한적인 것으로 평생 왕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도 많았다고 하고 어떤 경우에는 궁녀가 왕(王)의 눈길을 받으면 다음날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함.
- 궁녀의 업무 공간, 지밀(왕족의 시녀) · 수방(자수 제작) · 침방(의복 제작) · 소주방(음식준비) 그밖에 궁녀는 아니면서 궁녀 비슷한 일을 한 비자(글월비자, 궁 밖의 문안편지를 전달하는 종)와 의녀(궁중의 내의원, 혜민서에 소속되어 병을 진료하는 여자)가 있었다.
- 궁녀, 나이 제한이 있었는가?
보통 4~10세 처녀만 입궁하고 앵무새 피로 처녀성 확인하여 피가 흘러내리지 않으면 처녀이고 흘러내리면 처녀가 아닌 것으로 판정
〇 당(黨)의 대리자였던 왕의 여인들
- 서인이 당(黨)의 새로운 대리자로 숙빈 최씨를 끌어들였나?
기사환국으로 권력을 다시 잡은 남인들은 또 다른 환국(換局)에 대한 불안으로 확고한 자리를 굳히기 위한 궁리를 하는 중에 고변이 올라오는데, 서인의 명문가 자제들이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한다는 것, 그래서 이 기회에 서인을 일망타진시켜버리겠다고 계획을 하고 있던 차(次)에 또 다른 역고변 사건이 올라온 것.
-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중심이 되어 숙빈 최씨를 독살하려 한다는 역고변이 동시에 올라오면서 두 고변 사이에서 숙종(肅宗)의 선택은?
항상 여자와 함께 당(黨)을 선택하는 숙종(肅宗), 새로운 여자를 선택하는 것은 집권당을 바꾼다는 의미, 이 기회로 남인이 실각되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갑술환국을 맞는다.
※ 갑술환국(1694년) 남인이 실각(失脚)되고 서인이 재집권
〇 복위된 인현왕후
- 서인과 함께 5년 만에 복위 된 인현왕후, 숙종(肅宗)은 “인현왕후 복위문제를 제기하는 자는 가만히 두지 않겠다.” 며 인현왕후를 별궁으로 부르는데, 복위를 앞두고 편지를 주고받은 숙종(肅宗)과 인현왕후 “중전 보시오. 처음에는 권간에게 조롱당해 잘못 처분하였으나, 곧 깨달아서 그대의 억울한 마음을 알 것 같으오. 때로 꿈에 만나면 그대가 내 옷을 잡고 비 오듯 눈물을 흘리오.”
- 인현왕후의 회신 “첩의 죄는 죽어 마땅한데 목숨을 보전한 것은 성은에서 나왔사옵니다. 천만 뜻밖에 옥찰이 내려지니 감격에 눈물만 흘릴 뿐 다시 무슨 말씀을 하리이까.” & 숙종의 회신 “내 답찰을 보니 기쁘고 위로되는 것이 후련하여 열 번이나 펴보고 절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지 못하였소.”
- “임금이 상궁에게 어제 내린 의대를 인현왕후가 입지 않으면 너희들에게 중죄를 내릴 것이라고 하교했다” <숙종실록 1694년 4월 12일> & “임금이 먼저 경복당에서 기다리니, 옥교가 이르렀다. 임금이 옥교 앞에 서서 궁인에게 명(命)하여 발을 걷게 해··· 임금이 붙들어 일으켰다.” <숙종실록 1694년 4월 12일>
-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는 환궁하게 되고 장희빈은 별당(別堂)으로 쫓겨나는 하루아침에 비참한 처지에 빠지고 만다. “임금이 장형의 부원군 교지와 그 아내의 부부인 교지를 불사르라 명(命)하고, 또 장씨의 왕후 옥보(玉寶)를 부수라고 명(命)하였다” <숙종실록 1694년 4월 12일> 한 집안의 정실부인을 들이거나 내치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한 나라의 국모의 권위를 복위시키고 강등시키는 것이 너무 무상하게 진행이 되는 것
〇 장희빈의 저주(詛呪)
- 별당으로 쫓겨난 장희빈은 중전복위의 의지를 불태우며 중전인 인현왕후가 죽기를 빌며 신당(神堂)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리는데, 저주가 통하기라도 한 듯 인현왕후는 원인 모를 병마에 시달리고 장희빈의 저주는 날이 갈수록 더 포악해진다.
- 죽음의 그림자가 인현왕후에게 점점 드리워지고 숙종(肅宗)의 사랑과 중전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장희빈의 질투와 원망은 끝이 없었다.
- 과연 장희빈의 저주가 통했을까?
저주가 통했다고 보는 것이 17개월간 투병생활을 한 인현왕후의 병세는 날로 악화 “인현왕후가 승하할 때 종기로 허리와 다리의 피부가 완연한 곳이 없어 차마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단암만록> 공교롭게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일로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던 것
- 남인들은 내심 장희빈의 복위를 기대했을 텐데?
이런 기대에 찬물을 끼 얻는 사람이 숙빈 최씨, 희빈의 이러한 행동들이 인현왕후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숙종(肅宗)에게 일러바친 것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인현왕후가 베푼 은혜를 추모(追慕)하여 임금에게 몰래 장희빈의 저주(詛呪)를 고(告)하였다” <숙종실록 1701년 9월 23일>
- 때마침 장희빈의 생일에 처소를 찾아간 숙종(肅宗)은 저주와 관련된 물건을 발견하고 노발대발, 게다가 “인현왕후가 병에 걸린 2년 동안 단 한 번도 문안을 하지 않았으며 인현왕후를 궁중전이라 하지 않고 민씨라 일컬었다.” <숙종실록 1701년 9월 23일>
〇 장희빈의 죽음
- 드라마에서 장희빈의 죽음은 숙종(肅宗)이 끝내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어명을 내리지만 장희빈은 혼자서는 죽지 않고 세자를 죽이고 죽겠다며 사약을 거부, 분노한 숙종은 직접 취선당을 찾아가 죄를 뉘우치지 않는 장희빈에게 실망하며 자신이 보는 앞에서 강제로 사약을 마시게 하고, 일개의 궁녀에서 한때는 왕비의 지위에 까지 올랐던 장희빈은 43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아들의 품에서 마감하고 만다.<드라마 장희빈>
- 역사의 기록과는 다른 드라마 속 장희빈의 죽음, 실록에는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숙종(肅宗)이 장희빈에게 자진(自盡)할 것을 명(命)하지만 순순히 응하지 않는 장희빈, 또한 신하들도 세자의 어머니를 죽게 하면 안 된다고 반대를 하는데, 숙종(肅宗)은 자진을 하지 않으면 사약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하여 결국 “임금이 장씨가 이미 자진하였다고 하교했다.” <숙종실록 1401년 10월 10일> 이렇게 기록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했는가는 공식기록에 없다
- <숙종실록>과<승정원일기>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최후를 맞이했는가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장희빈의 최후가 모호하게 기록, 숙종(肅宗)은 장희빈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컸든지 “임금이 첩에서 왕비로 승격되는 일을 금지시키는 법을 만들었다”.<숙종실록1701년 10월 7일> 이후 후궁출신의 왕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 실록에 등장하는 저주 사례 ① 인조(仁祖)의 후궁 귀인 조씨 ② 성종(成宗)의 후궁 폐비 윤씨 ③ 중종(中宗)의 후궁 경빈 박씨, 경빈 박씨만 폐서인이 되고 나머지는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
〇 숙종(肅宗)의 정치적 의도?
- 판례도 있고 총애했던 여자였으며 세자의 어머니를 사약까지 먹였어야만 했나?
숙종(肅宗)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던 것으로 인현왕후 승하 후(後) 남인들은 장희빈을 복위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나는데 숙종(肅宗)의 생각은 더 이상의 환국정치는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고 이미 왕권은 안정된 상황으로 장희빈이 살아있으면 언제든지 당쟁의 불씨가 될 수 있었기에 과감하게 장희빈을 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조선 후기 치열하게 전개된 당쟁의 시대에 남인의 대표주자로 활동하다 결국 사약을 받은 것으로 해석.
- 숙종(肅宗)의 환국정치 어떻게 봐야하나?
환국정치라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당파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고, 서인과 남인 모두 정권을 잡기위해 절치부심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현왕후·장희빈·숙빈 최씨를 이용했던 상황이 초래, 결국 정권이 교체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 백성들의 혜택과 국익(國益),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환국정치는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이 많다고 볼 수 있는 것
- 환국(換局)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가 보면 유일한 수혜자는 숙종(肅宗) 뿐으로 권력·여자·자식도 얻었지만 신하들은 주기적으로 일망타진되고, 여성들도 불행해진 것을 보면 환국(換局)의 핵심은 왕권강화를 위한 숙종(肅宗)의 의지이며 정치적 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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