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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반란의 칼 끝 탕평(蕩平)으로 맞서다

mkpark2022 2015. 7. 22. 17:13

 

 

 

영조(英祖), 반란의 칼 끝 탕평으로 맞서다

 


영조(英祖)를 위협한 괘서사건

- 1728년 무신년, 영조(英祖)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의 주모자인 이인좌의 이름을 따서 <이인좌의 난> 으로 불렸지만 무신년에 일어난 반란이란 의미로 <무신란>이라 불리기도 하는 반란

-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왕! 재위 초기에 닥친 위기, 무신란을 영조(英祖)는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사건의 명칭조차 낯설지만 영조(英祖)의 새로운 리더십이 발휘되었던 무신란에 대해서 알아본다.

- 172712(영조3) 전주시장에서 괘서(掛書)가 발견된다. 이틀 뒤 남원에서도 발견된 괘서는 몇 달 사이 전국 각지에서 나타나고, 필체로 보아 같은 사람의 글씨로 밝혀진다.

괘서(掛書) : 반역을 도모하거나 남을 모험하기 위해 써 붙이는 글

- 괘서의 내용은?

역사서인 실록에 조차 차마 옮기지 못할 만큼의 흉언(凶言)으로 당시 형률에 따르면, 이를 거는 것과 보는 것도 처벌되어 괘서의 내용은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못하고 흉서(凶書) · 괘서(掛書)로만 표현

- 전국에서 일어난 괘서사건은 영조(英祖)의 정치생명을 흔드는 엄청난 사건, 영조(英祖)도 괘서의 내용을 파악을 하고 사관에게 올리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영조(英祖)의 왕위계승에 대한 문제로 영조(英祖)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내용으로 추정, 당시 유언비어 영조(英祖)는 경종(景宗)을 독살했고, 숙종(肅宗)의 친 아들이 아니다’ & ‘영조(英祖)가 이()씨가 아니다라는 것

- 괘서(掛書)를 퍼트린 세력은?

김일경을 대표로 하는 소론 강경파인 <급소>가 반란을 일으키고자 유포한 것, 당시는 경종(景宗)을 지지하던 소론세력과 당시 왕세제로 있던 연잉군(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세력이 맞서고 있었는데, 영조(英祖)가 즉위하면서 노론세상이 되자 권력에서 밀려난 소론의 급진세력이 괘서를 유포한 것

- 이건창이 쓴 <당의통략>에 보면 반란군이 군중(軍中)에 경종(景宗)의 위패를 설치해 놓고 조석으로 곡()을 했으며, 잡혀와 문초를 받을 때도 부도한 말을 많이 하였다

- 영조(英祖) 자체를 부정할 만큼 경종(景宗)을 지지했던 반대 세력, 게장과 생감을 먹은 뒤 병세가 악화되어 승하했기 때문에 일파만파 확산된 것

- 반란(反亂)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무신란의 원인

- 반란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영조(英祖)는 노론에게 상당한 정치적 빚을 지고 있어 즉위하자마자 왕세제 시절 자신을 역적으로 몰았던 김일경과 목호령 등 이들을 처형하고, 자신을 지지하다 죽은 노론 4대신을 복권시키는데, 이에 소론 강경파는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

- 반란세력이 임금으로 추대한 인물은?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으로 명분은 소현세자는 장남 출신의 혈족이라는 것

- 반란의 주모자들은 누구?

충청도에서는 이인좌(남인) · 경상도에서는 정희량(남인) · 전라도에서는 태인 현감 박필현(소론)과 담양부사 심유현(소론) · 평안도에서는 평안병사 이사성 등 각 지방의 세력들이 서울의 이유익(소론)과 합세할 구상을 한 것

- 성공한 반란이라고 할 수 있는 <인조반정>의 경우에도 서울과 황해도의 일부 병력을 동원했고, <이괄의 난>도 평안도 병력만을 동원 했으나, <무신난>은 전국적으로 조직된 대규모 반란으로 영남에 7만여 명, 전국에서 20만 명이 가담하게 되는데 이인좌의 신념은 내가 평생 술을 좋아했지만 이 일을 도모 이후로 8년 동안이나 술을 끊었다” <남정일록>

 

고려시대 : 정중부 이의민 등 무신(武臣)들이 일으킨 정변, 요즘은 무신정변(武臣政變)

    조선시대 : 무신년(戊申年)에 일어난 무신란(戊申亂)가장 먼저 거병을 일으킨 대표성으로 이인좌의 난이라고도 함


무신란의 전개

- 지방 공직자들까지 가담한 무신란?

무신년(1728) 새해에 담양의 화약고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담양부사 심유현은 화재로 화약과 무기가 소실되었다고 보고하지만, 사실은 무신란의 무기로 사용하면서 서울의 도성문을 부술 때 사용하기 위해 빼돌린 것

심유현 : 경종(景宗)의 첫 번째 왕비인 단의왕후의 동생으로 경종독살설 유포의 주인공

- 다른 지역에서의 반란 준비는?

충청지역의 이인좌는 개인의 사재(私財)를 털어 반란 준비로 말과 군복을 사고, 영남의 정희량은 사재를 털어 군사모집에 사용하고 특히 <무신란> 1년 전에는 서울에서 비단장수와 거래를 하는데 혼수용 비단을 구입한다면서 비단의 품질을 시험해보겠다고 은 궤짝을 담보로 비단을 가져갔으나 나중에 보니 은 궤짝은 모두 돌덩어리였다고··· 비단은 반란군을 상징하는 깃발을 만들기 위한 것

- 반란에 가담한 계층은?

소론의 강경파와 남인 주도로 알려진 <무신란>은 참여계층을 보면 향리·관군·노비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던 사건

- 하층민들이 <무신란>에 가담한 이유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영조(英祖)시대에도 기상이변이 잦아 전염병과 기근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과 혹독한 춘궁기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이 세금을 독촉하던 상황에서 반란군들이 관아를 점령하여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기록에는 소를 잡고 술을 주어 배부르게 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본심을 잃고 반란군에 들어가게 되었다

- 곤궁했던 18세기 백성들의 삶, 민간에는 비기(秘記도참(圖讖)과 같은 예언서가 유행했는데, 그 만큼 살기가 힘들었기에 뭔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고, 반란세력은 정감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민심을 선동한 것.

- 조선 후기, 모반사건의 사상적 배경인 정감록(鄭鑑錄)을 조정에서는 금서(禁書)로 지정하여 유통을 못하게 하였으나, 19세기 후반에는 각 가정에 정감록이 없는 집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고···

 

민중의 바람이 깃든 예언서, 정감록(鄭鑑錄) <고성훈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정감록은 어떤 책?

조선 후기에 유행한 풍수(風水도참(圖讖)의 예언서, 이러한 정감록은 정본(正本)이라고 할 수 있는 감결(甘結)과 같은 단행본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조선 후기에 유행한 풍수·도참사상을 아우르는 예언서를 총칭하기도 하는 것

- 정감록은 언제부터 유행했나?

정감록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계기는 영조(英祖) 4년의 <무신란>, 반란세력들은 정감록을 괘서·역모사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면서 이의 영향으로 정감록이 확산되게 되는데, <무신란>의 재판기록에 자주 언급되는 변산적은 정감록에 등장하는 정도령을 믿었던 세력으로 흉년(凶年기근(饑饉)으로 고향을 떠난 유랑민이 증가하던 시절 변산 지역의 유랑민을 일컫는 말로 무신란의 반란세력은 이들과 결합하게 되고 이들은 정도령의 출현을 믿었던 것

- 정감록의 정도령, ()씨인 이유는?

고려 말(), 조선왕조 개국을 반대하다 죽임을 당한 정몽주의 영향, 뿐만 아니라 조선건국의 주역(主役)인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제거당하고, 선조(宣祖) 때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역모혐의를 받았던 사건 등으로 이()씨 왕조 대체 세력은 정()씨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동의가 된 것.

- 정감록에 예언을 기록한 방식?

파자(破字), 깨뜨린 글자라는 뜻으로 한자의 자획을 풀어서 나누어 쓰는 것으로 李亡鄭興木子亡奠邑興으로 파자를 써서 이씨 왕조가 망하고 정씨 왕조가 흥한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또한 임진왜란의 키워드인 왜()를 직접 왜라고 쓰지 않고, “여인이 벼를 이고 있다고 쓴다든지 병자호란을 상기하는 눈 설()비우() 아래 산이 옆으로 누웠다(雨下橫山)”라고 쓰는 것

 

<무신란>에 대한 해석

일부 소론과 남인에 의한 정치적 반란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의식의 성장이 반영된 민중 저항 운동의 흐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음, 18세기 이후 농민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무신란>정감록의 사상적 배경 + 하층민의 의식성장 = 체계적인 농민운동으로 조직화 될 수 있었던 것


영조(英祖)<()의 한수> 정미환국

- 반란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백성들의 호응까지 얻으며 때를 기다리던 차()에 반란군을 당황시키는 사건이 발생, 조정은 늘 시끄러웠는데 172712(영조3), 집권세력인 노론과 가까스로 잡았던 정권을 되찾으려는 소론의 끝나지 않는 정쟁을 차마 볼 수 없었던 영조(英祖)는 마침내 집권세력인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을 등용하는 조치를 단행한다.

- 이른바 정미환국(丁未換局), 노론 영수 민진원을 비롯해 노론의 주요인사 100여 명을 대거 파면시키고 소론 영수 이광좌를 영의정에 임명하는데, 하루아침에 바뀐 정권으로 반란군은 반란을 일으킬 명분이 없어진 셈이고 자신을 지지하던 노론을 버리고 환국(換局)을 택한 영조(英祖)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 영조(英祖)가 환국(換局)을 결심한 이유?

환국 전(), 노론이 집권을 하면서 정치적 요구 경종(景宗) 때 연잉군(영조)를 지지하다 죽은 노론 4대신 복권 노론 4대신 처벌을 요구한 소론에 대한 복수의 처분을 집요하게 요구하는 노론세력에 대한 실망감과 노론 독주에 대한 견제를 단행한 것

- 노론의 입장에서는 영조(英祖)는 자신들이 세운 왕조, 그러나 영조(英祖)의 입장에서는 나는 노론의 왕이 아니고 백성의 왕이라는 인식, 영조(英祖) 즉위 초 노론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면서 탕평(蕩平)을 추구하지만 계속 소론에 대한 복수정책만 일삼다보니 한 번 보라는 의도도 있었던 것

탕평(蕩平) :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하며 당파를 초월한 화합의 정치

- 숙종(肅宗)과 영조(英祖), 환국정치의 차이점?

숙종(肅宗)의 환국은 하나의 당파가 집권하면 반대당은 실각되고 숙청 VS 영조(英祖)의 환국은 각 당파의 온건세력인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한 것의 차이

 

<무신란>의 발발

- 1728315, 이인좌의 청주성 공격으로 반란 시작, 장례행렬로 위장해 상여를 이용해 무기를 운반하고 성안의 내응 세력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청주성 점령

- 반란군이 청주에서 가장 먼저 거병한 이유?

복합적인 이유가 있는데, 청주는 호남대로와 영남대로가 겹치는 지역으로 서울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이며, 청주는 노론계에 속하지 않는 양반들이 많았던 지역으로 실제로 청주성 점령 이후 반란에 가담하는 양반들의 수가 증가하여 거병 초기 경기·충청지역에 모인 반란군은 양반 300여명이었지만, 안성으로 진격할 무렵 양반 500여 명으로 증가하여 노비까지 포함하면 반란 규모는 더 컸을 것

 

<무신란> 조정의 대응

- 17283, 반란군에 의해 청주성이 점령됐다는 소식에 병조판서 오명항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토벌군에게 반란진압을 맡기고, 오명항은 안성에서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는 이인좌와 반란군을 기다리다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는 반란군을 일제히 공격하고 수적(數的)열세에 몰린 반란군은 무너지면서 오명항이 이끄는 토벌군의 압승으로 반란은 진압된다.

- 소론과 남인이 주도한 반란의 진압을 소론계 인물에게 맡긴 영조(英祖), 정미환국의 처분이 ()의 한 수라고 하는 이유는 정미처분 후 소론은 급소·완소로 나뉜 상태로 반란세력은 강경파인 급소이고 온건파인 완소는 정미환국으로 등용이 된 상태

- 노론은 불안했을 텐데?

실제로 노론계 신하는 소론계의 반란 진압에 반대하지만, 영조(英祖)의 생각은 소론이 일으킨 반란을 소론이 진압해야만 소론의 명분도 약해지고, 아울러 영조(英祖) 즉위를 반대했던 소론세력에게도 이렇게 함으로써 영조(英祖)를 받드는 세력이 되는 것이고, 이는 곧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판단을 했던 것

- 영조(英祖)를 위기에서 구한 오명항은 누구?

당시 영조(英祖)는 훈련대장 김중기에게 반란진압을 명하지만 핑계를 대면서 출정을 머뭇거리자 병조판서였던 오명항이 박문수·조현명과 함께 출정을 자처하며 <무신란>을 진압한 새로운 명장이 탄생한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합니다. 신이 스스로 가서 적()을 토벌하기를 청합니다.” <영조 4317>

- 영조(英祖)는 기뻐하며 오명항에게 도순무사의 직책을 맡기며 상방검을 하사하게 되는데, 이는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

도순무사(都巡撫使) : 국가 비상시 왕명에 따라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직책

- 이인좌를 능가하는 오명항의 지략, 반란군의 첩자를 역이용하여 유인전술을 펼쳐 사정거리 안에 반란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코를 골고 잤다는 기록, 적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일제히 공격하고 토벌군의 파상공세에 밀려 대패한 반란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며 도망을 치고, 안성에 이어 죽산에서도 패한 이인좌는 사찰로 도망갔는데 결국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영조(英祖)가 친국(親鞫)을 하게 되고 결국은 참수형 나에게 술을 한 사발 주시오하면서 뭔가 말할 듯 하다 술을 받아 마시고 빨리 나를 죽이라고 소리쳤다” <남정일록>

- 무분별한 살생을 최소화하려 했던 명장 오명항은 반란군을 사로 잡아오는 자에게만 상()을 주겠다고 명을 내리는데, 인명 피해를 최소화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

 

<무신란> 진압되다

- 경상도 반란세력 정희량이 팔량치 고개를 넘지 못하고 관군(官軍)에 패배하고 다른 지역 반란군의 지도부들도 모두 체포되어 처형되고, 무신란 이후에 거병이 많았던 지역이 강등을 당하는데, 안음은 정희량이 거병했던 곳이라 하여 혁파되고, 관군의 거점지역인 용인·이천은 고을 명칭이 강등되며 전라도는 전광도로 호칭이 바뀌지만, 박팔현의 봉기가 일어난 태인이 패현 되지 않은 이유는 영조(英祖)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고향

- 조정은 <무신란>을 어떻게 수습했나?

영조(英祖)도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하고 민심 등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하여 사태수습을 최소화하고 주동자만 처벌하기 위해 직접 나선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부득이 해서 적을 따른 경우는 그 정상이 애처로우니 죄를 용서 할만하다.” <영조 4325>

- 이를 계기로 영조(英祖)는 정통성 확보를 위한 방안으로 <감란록(戡亂錄)>을 편찬 심유영의 경종(景宗) 독살설은 모함이고 사실이 아니다” & “무신란은 급소세력에 의해 일어났지만 근본 원인은 당쟁(黨爭)에서 비록된 것이라면서 탕평(蕩平)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감란록(戡亂錄) : 무신란 진압과정을 기록하고 영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편찬한 책

 

영조(英祖)의 아킬레스 건, 정통성

- 영조(英祖)의 정통성 문제는 해결되나?

무신란 이후에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영조(英祖)의 정통성 문제, 재위 기간에 15번의 괘서사건이 발생하는데, 8번이 <무신란>과 직·간접으로 관련된 사건으로 영조(英祖) 인내의 한계라고나 할까 1755년에 또 한 번의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특히 이때 가담했던 사람들 중의 일부는 갑진년 이후로는 게장과 생감을 먹지 않는다!.”고 주장할 정도, 재위 30년 내내 정통성 문제에 시달렸던 영조(英祖)

- <무신란>의 충격, 영조(英祖)의 생각은?

영조(英祖)의 독백 나는 역모의 혐의를 받고도 살아남았다. 종사부터 생각한 형님은 이복동생인 나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눈을 감으셨다.

그러나, 형님이 남긴 그림자는 매우 컸다. 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소론 대신들과 나를 위한다고 죽어갔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 했던 노론 대신들.

노론은 내가 자신들의 임금이 될 것이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노론이 세운 임금이 아니라 모든 신하와 백성의 임금이다.

권력에서 밀려난 자들은 내가 선왕(先王)을 죽였다거나 친자가 아니라는 괴담을 퍼뜨리고 결국 반란까지 일으키지 않았던가?

오랜 기근(饑饉)으로 백성들은 굶어죽는 마당에 오로지 당쟁(黨爭)만 일삼다니···

역적(逆賊)의 혐의까지 받았던 나, 당쟁(黨爭)의 폐해가 무엇인지 실감하지 않았던가?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바로잡는 방법은 오로지 탕평(蕩平), 나라와 백성을 보존하는 길은 탕평(蕩平)뿐이다.”

 

탕탕평평(蕩蕩平平), 영조(英祖)의 탕평책

- 영조(英祖)의 탕평 정국 운영은?

<무신란> 이후, 영조(英祖)가 직접 정교를 내린다. “반란의 원인은 조정에서 오직 붕당만을 일삼아 재능 있는 자의 등용을 생각하지 않는다.” & “기근(饑饉)이 들어 백성들은 죽을 지경에 처해 있는데도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당쟁만을 일삼는 것이 문제다그러다 보니 백성들이 조정이 있음을 모른 지 오래 되었다. 그들이 와해되어 적도에게 투입한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요 실로 조정의 허물이다” <영조4325>

- 결국, <무신란>은 붕당(朋黨)에 의한 것으로 정치적 갈등을 해소시키기 위해 탕평책을 쓰게 되고, 또 하나는 반란군이 일어났을 때 백성들이 너무 쉽게 동조를 했다는 것으로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백성을 직접 만나 민원을 청취하는 모습을 보인다.

- 피의 숙청이 아닌 탕평(蕩平)을 추진한 영조(英祖), 수차례의 정권교체에도 해결되지 않는 당쟁에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제시한 것

  무신란의 교훈 정치적 갈등을 극복하고 탕평의 길을 열다.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백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 영조(英祖)가 당시 쓴 인사원칙, <쌍거호대(雙擧互對)> 탕평을 위한 인사원칙으로 한쪽 당()의 인물을 등용하면 대등한 직위에 상대당의 인물을 기용하여 당파간의 견제와 균형으로 양() 당파의 불만을 최소화한 것

- 이러한 영조(英祖)의 탕평정치에도 불구하고 노론은 소론을 계속 탄압하는데, 보다 못한 영조(英祖)노론 영수 민진원소론 영수 이광좌를 불러 황형께 후사가 있었다면 나는 내 분수대로 산야에 살아야 했을 것이다. 허나 경종(景宗)께서 시종 나를 보호했으니 경들은 부디 옛 버릇을 버리고 한마음을 갖도록 하시오.” 하면서 서로 손을 잡으라 하나 쉽게 손을 내밀지 못하자 그것을 가져오라 명한다.

- 그것은 탕평채미나리는 청룡(동인으로 푸른색) · 창포묵은 백호(서인으로 흰색) · 소고기는 주작(남인으로 붉은색) · 김은 현무(북인으로 검은색)으로 각 당()을 상징하는 4색의 재료로 만들어 이를 섞어 먹으면 당파 간에 화합을 한다는 염원

- 탕평채(蕩平菜)의 유래?

공식적인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고 19세기 전반기 <송남잡지>에 탕평채라는 기록이 등장하고 영조(英祖) 이후에 상당히 일반화된 음식이고, 영조(英祖)가 탕평을 논하는 자리에서 먹은 음식이라 해서 탕평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인식

- 자신의 정통성마저 뒤흔드는 반대세력을 정치적으로 보복하지 않고 탕평(蕩平)으로 끌어안았다는 것이 영조(英祖)의 위대함이 아니겠는가? 기존의 정치 행적을 보면, ()이 발생하면 다음은 환국(換局)인데, 발상의 전환으로 환국보다는 화합의 정치, 즉 탕평(蕩平)의 시대를 준비했던 영조(英祖)

- 영조(英祖)에게 <무신란>이란?

‘2인자의 난일등(一等)만 기억하는 사회가 건강하지 않듯이 노론만 독주하는 조정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 그래서 2인자인 소론이 난()을 일으킨 것이고, 그런 2인자들의 요구에 탕평채라는 공존의 요리를 만들어낸 영조(英祖)는 시대의 요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