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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暗行御史), 박문수

mkpark2022 2015. 8. 11. 21:03

 

 


암행어사, 박문수

 


백성들의 슈퍼 히어로, 어사(御使) 박문수

-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대명사! 박문수, 당시 백성들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실 만큼 열광했던 존재,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암행어사라는 기록이 없다(?)

- 영조(英祖)의 개혁정치 뒤에는 박문수가 있었다(?) 암행어사로만 알려진 박문수에 대한 진실과 오해!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이야기들까지~ 조선 판 슈퍼 히어로 박문수의 모든 것을 밝힌다.

- 박문수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얘기들이 너무 많은데 과거시험 전() 어머니의 당부 두 가지 용한 절이 있으니 가서 기도해라” & “가면서 찹쌀 유과를 먹으라는 것”, 오늘 날의 찹쌀떡의 유래이고 용한 절은 안성의 칠장사로 명소가 된 칠장사의 박문수 길.

- 박문수의 활약상이 기록에도 있는지?

조선시대 활동한 암행어사 수()는 약 600 여명, 그 중 가난한 백성들의 영웅 어사 박문수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박문수에 대하여는 구휼기록들만 존재하고 대부분 전설로 전래되어 한국구비문학대계의 인물설화 1위는 박문수(97), 오성과 한음(20~30)으로 백성들 사이 인기순위 1위인 박문수

 

어사(御使) 박문수, 키 워드(마패 · 초고속 승진 · 소금장수)

마패(馬牌)

- 말의 수()사용할 수 있는 말의 숫자로 직급에 따라 1~10마리까지 마패에 표시, 암행어사뿐만 아니라 출장을 가는 관리들이 말을 이용하기 위한 일종의 허가증

- 가짜 마패를 사용할 경우?

당연히 처벌을 받고 영조(英祖) 때에는 명패를 훼손한 자는 장 80, (유배) 2년에 처한다. 마패를 파상한 자도 이와 같다.” <속대전 형전> 뿐만 아니라 어사를 사칭하는 사건들도 많았는데 선조(宣祖) 때에는 옥에 갇힌 동료를 구하려 도적이 암행어사 행세를 하기도 하고, 고종(高宗) 때에는 심지어 가짜 암행어사가 등장을 해 수령을 파직시키는 일까지···

- 마패 외 어사의 필수품은 봉서(封書)라는 어사임명장과 유척이라는 놋쇠로 만든 자로 유척은 관아의 곤장 등 형구(形具)의 크기를 검시할 때 사용하여 부정부패 척결의 상징

- 박문수는 언제부터 암행어사로 활동했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사 박문수>로 기록 영남의 흉년도 호남과 다름이 없으니··· 백성들을 안집 시키기 위해 박문수를 어사로 천거하니···” <영조실록 1727925>

- 암행어사(暗行御史)와 어사(御使)의 차이?

어사(御使)는 왕명을 받아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러 파견되는 관리로 임무에 따라 <감진어사>는 진휼(굶주리거나 병에 걸린 이들을 구제) 업무를 감독, <별견어사>는 별도로 파견되는 어사, <암행어사>는 관리들의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되는 어사로 실록에는 박문수가 암행어사라는 공식기록은 없음

- 백성들은 왜 박문수를 암행어사로 기억하는 걸까?

일본 천리대 도서관에 소장된 봉서(封書)에 박문수를 경상도 암행어사에 임명한다는 내용이 있으나, 진위여부에 대해 살필 필요가 있고, 어쨌든 실록의 공식기록과 고문서간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이 부분에 대하여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것

- 또한 영조(英祖) 때가 되면 일반어사가 암행활동도 겸하여 일반어사의 암행어사 화()로 꼭 구분할 필요는 없으며, 어사로 파견되어 수많은 성과를 낸 박문수는 어사보다는 암행어사가 해결능력이 뛰어나다는 기대심리가 반영된 듯

 

초고속 승진(昇進)

- 1723년 소론 출신 박문수는 33세에 특별시험인 증광문과에 급제하는데, 당시 정권교체로 인해 소론만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고, 전체 합격자 41명중 26등으로 합격

- 영조(英祖)와 박문수의 만남은?

영조(英祖)가 왕 세제로 있을 때 세제시강원의 정7품 교육관으로 근무하면서 영조(英祖)와 인연을 맺게 되고 영남지역에 어사로 파견, 이후 무신란 진압에 공을 세우고 종2품 경상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5년 만에 7급에서 장·차관 까지 승진하게 되는 것

무신란 : 1728년 소론 이인좌 등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난

- 초고속 승진의 결정적 계기는 무신란 진압, 박문수는 당시 병조판서였던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무신란을 진압하고, 이후에도 혼자 마을에 남아 민심을 수습하자 영조(英祖)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힘든 시기에 반란 진압의 주역이 되자 공로를 인정하게 되는 것

- 또한 박문수는 탕평파(蕩平派)영조(英祖)가 추진했던 탕평책에 적극 호응하는 관료로 노·소론의 당파를 떠나 영조(英祖)의 개혁정치를 지지했던 신하 중의 하나로 영조(英祖)는 왕위에 오른 뒤 개혁정치를 위해 박문수 등 세제시강원 시절 관료들을 적극 기용하여 자신의 개혁정치에 활용

 

어사(御使) 박문수 백성을 위해 나서다.

- 영조(英祖)시대에도 계속되는 가뭄과 흉년, 거리는 굶어 죽는 백성으로 넘쳐나고 심지어 시체를 먹는 일까지 나타났는데, 당시 어사로 지방에 파견된 박문수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잇속만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자신의 곡간을 털어 굶주린 백성에게 나눠주는데, 당시 공무를 수행하던 관료가 사재를 내놓는 것은 흔치않은 일로 백성을 향한 박문수의 남다른 열정이 빚어낸 결과였다.

- 6개월간의 짧은 어사기간 동안 탐관오리들을 엄격하게 처벌, 백성들을 구휼(救恤)하기 위해 다양한 주장을 했던 박문수 <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인물로 박문수가 제기한 백성 진휼정책 곡식판매를 통해 전국 규모의 세금 탕감 문무백관의 녹봉을 감()할 것을 주장 자신의 사재를 털어 백성을 구휼 노처녀·노총각들 혼인 문제 해결 “30세가 지나고도 혼인하지 못한 처녀를 조사하여··· 혼수를 대주어 혼사를 시킨 수가 740여 명이나 되었다.” <박문수 연보>

- 또한, 경상도 관찰사 시절 영일만에 가재도구와 관이 바다를 덮을 정도로 떠내려 와 영일과 모포변에 쌓였는데, 박문수는 함경도에서 홍수가 나서 떠내려 온 것이라 하고 쌀 삼 천석을 당장 함경도로 보내고 북쪽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는 기록

- 원래 조정의 허락 없이 곡식을 보내는 것은 문책을 받을 사항 내가 문책을 받는 것은 작은 문제요.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 건 큰 문제이다지금도 함경도에는 박문수의 공을 기리는 <북민감은비(北民感恩碑)>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 실제로 문무백관의 녹봉이 감해졌는지?

관료들의 곡식을 백성에게 나눠주자는 박문수의 제안에 신하들이 반대하여 차선책으로 녹봉삭감을 주장 “(박문수의 청에 따라) 백관의 녹봉을 감하게 했다.” <영조실록 17321210>

- 이에 신하들은 박문수가 연석에서 주달한 것은 광란한 잠꼬대에 속되고 패려스러운 말” <영조실록 17321218> 이에 대한 박문수의 대답은 지금 교화가 행해지지 못하고 법도도 세워지지 못했는데 사대부가 염치조차 없다. 이 때문에 생민이 곤궁하고 재용이 고갈됐다고 주장한다.

- 리더십의 중요한 덕목, 용장(勇將지장(智將덕장(德將)보다 더 앞서는 것은 현장(現場)으로 현장경험의 유무에 따라 역사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법

- 구전설화가 독보적으로 많은 박문수, 백성들에게 박문수는 정의의 사도로 나쁜 사람을 벌하고 좋은 사람 도와주는 영웅으로 백성을 도운 의적은 많이 있으나 높은 관직에서 백성의 편에 선 드문 관료 박문수는 영웅적인 존재였던 것

 

소금장수

- 박문수의 또 다른 별명 소금을 구워 진휼재원을 마련하여 소금장수, 심각한 기근으로 국가적 위기상황에 처한 조선, 하지만 조정에서는 백성을 구하려 해도 백성을 구휼할 재원이 없어 쩔쩔매고 있었다. “전국에 흉년이 들어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인데··· 소금 굽는 일만이 방법” <영조실록 1733127> 당시 소금은 왕실 지배층 궁방에서 독점 관리하던 것을 나라가 직접 관리하여 백성을 위해 소금사업을 주장한 박문수 동료 대신들로부터 소금장수라는 놀림을 당했다” <승정원일기 영조 9>

- 이는 왕실의 이익에 직접 타격을 줄 수 있는 사항으로 선뜻 그 누구도 제안하지 못했던 부분을 직접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실천까지 하게 되는 박문수야 말로 진정한 관료, 숙종(肅宗) 때에도 왕실의 위상이 있어서 궁방 축소를 하지 못하는데 영조(英祖)로서는 엄청난 결단을 한 것

- 불과 6개월 만에 소금 36천석을 생산, 이를 환산하면 쌀 7만석에 달하는 엄청난 물량으로 생산된 소금의 절반은 해당 지역민에게, 1만석은 경기도로 보내 진휼재원으로 사용, 고강도 노동집약적인 소금사업의 성공 요인은 국가에서 이익을 독점하지 않고 진휼(軫恤)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열심히 일한 결과

- 박문수의 어린 시절?

8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린나이에 가장이 된 박문수, 후궁출신의 숙빈 최씨인 어머니의 콤플렉스와 사가에서 10년을 살면서 백성들의 삶을 경험할 기회를 접한 영조(英祖)성장환경이 서로 비슷했던 것으로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만이 훌륭한 목민관이 되는 것인가(?)


백성들을 괴롭힌 군역(軍役)

- 영조(英祖) 시대 기근과 더불어 군포는 백성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세금이었는데 전란과 대기근으로 급격히 줄어든 군역대상자 수, 하지만 국방강화라는 명분으로 할당된 군포는 증가하고, 설상가상으로 양반들은 군역부담에서 제외되어 양반의 빈자리는 고스란히 백성에게 돌아온 군역의 의무

- 급기야 죽은 사람에게까지 군포를 징수하는 <백골징포>, 15세 이하 어린아이에게 까지 징수하는 <황구첨정>이 발생하게 되자 영조(英祖)는 대대적인 경제개혁으로 균역법을 실시하기에 이르는데 박문수의 주장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실시한 균역법

- 균역법이란?

한자 그대로 ()을 고르게 하는 법으로 군대를 가는 대신 16~60세 남성들이 내야했던 군포를 1년에 2필로 균등하게 납부하도록 개정하는 것

1필은 폭 8(37.4Cm) 길이 16M1필 짜는데 보통 10일 소요

- 백성들이 내야 했던 군포란?

군대에 가는 대신 포목을 내는 것으로 16~60세 남성들이 내야했던 군포는 1인당 2/년을 납부하게 되는데, 부당한 군포 부담 때문에 화적(火賊)이 된 백성들도 다수

- 양반은 왜 군포를 내지 않았나?

양반도 원래는 군역의무가 있었으나 관직을 받으면서 군역 대신 직역(職域)을 수행하게 되면서 빠지게 되고, 16세기 이후 신분제가 확고해지면서 군역제외가 특권으로 인식되면서 결국 평민들만 군역의무를 지고 있었던 것

- 이순신 장군의 무과합격증에 보인(保人) 이순신으로 기록하는데 보인정군(正軍)으로 군대를 가는 대신 베나 무명 등을 대신 납부하는 자로 무과 합격 전()에는 이순신도 군포를 부담했던 것

- 언제부터 양반들은 군역(軍役)에서 면제 되었나?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양반들의 군역은 일반화 되었었는데, 16세기 이후 신분제도가 고착화되면서 양반들의 군역면제는 곧 양반의 자존심으로 여기게 된 것

- 영조(英祖) 군역 대상자는 50만호, 실제 납부자는 10만호에 불과 군역의 부담은 평균 5배 정도 가중되고 양반의 군역제외는 국가재정 악화의 원인, 박문수가 호조판서가 되면서 양반도 똑같이 군포를 내자<호포론>을 주장

호포론 : 신분에 관계없이 호단위로 군포를 징수하자는 주장으로 영조가 창경궁 홍화문에 직접 나가 여론수렴을 했으나 사대부와 양반들의 조세저항에 대한 반발로 무산

- 양반·사대부들이 강력히 반대를 하자 영조(英祖)백성은 나의 동포이니 백성과 함께 해야 한다. 너희들 처지에서 백성을 볼 때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있을지 모르나, 내가 볼 때에는 모두가 나의 적자(赤子)인 것이다라며 균역법 추진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면서 결과적으로는 절충안으로 년 2필에서 1필로 줄이게 된 것

 

드디어 시행된 반값 군포 균역법

- 균역법으로 백성의 군포 부담은 반으로 줄었고 국가재정도 그 만큼 줄어 든 상황, 박문수는 재원보충 대책으로 소금과 염세·선박세·어세 등을 국가재정으로 흡수하여 보충, 또 하나는 양반이 아닌 부유층 자제들까지 양역에서 빠져나가 있었는데 이들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내리는 대신 군포를 거둠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 균역법 시행에 맞춰 노론 홍계희의 주장으로 실시

- 균역법은 당초 영조(英祖)박문수가 계획한 대로의 대개혁은 아니지만 백성들의 부담을 절대적으로 줄여준 의미가 있는 세제개혁이었다는 것, 영조(英祖)의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끝내 양반은 군역에서 면제되고 100년이 걸려서야 실현된 박문수의 <호포론>은 흥선대원군의 주장으로 <호포법>으로 실시

호포법 : 양반들까지 포함해서 호()단위로 군포를 징수하는 법으로 1871년 흥선대원군 주장으로 실시

- 사직서를 낸 박문수?

진정한 균역법은 이게 아니야하면서 호조판서 자리를 박차고 지방관 충주목사로 내려감.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 박문수와 영조(英祖)

- 누구보다 특별했던 사이 영조(英祖)와 어사 박문수, 실록에 보면 둘은 모두 직선적인 성격으로 매우 닮아 있는데 (박문수)의 고집은 큰 병이다!” 하지만 할 말 다하는 박문수의 성격이 오히려 영조(英祖)에게는 맞았을 수도···

- 실제로 장소불문하고 다른 관료들과 의견다툼이 잦았던 박문수, 오히려 영조(英祖)는 박문수를 두둔하는데 한번은 박문수가 병조판서 시절 어전(御前)에서 훈련대장 구성임과 크게 다투게 되는데 영조(英祖)가 몇 번을 말려도 그치지 않자 이것도 당쟁(黨爭)이라면서 둘을 효수형에 처하라고 명()한다.

- 겨우 신하들의 만류로 사형은 면()하고 파직(罷職)으로 일단락 서로 자기의 견해를 내세우다··· 너니 나니 하며 소리치고 꾸짖다.” <영조실록 1742823>

 

백성을 사랑한 박문수와 영조(英祖)

- 혹시 영조(英祖)도 무늬만 서민군주?

실천하는 왕 영조(英祖), 영조(英祖)의 절용애민(節用愛民)정신은 국가의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한다. “일생토록 얇은 옷과 거친 음식을 먹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병이 없다” <영조실록 1750>

- 영조시대 사치방지법?

박문수를 주축으로 <탁지정례>·<상방정례>·<국혼정례> 등 재정관련 책을 편찬하게 되는데, 탁월한 재정전문가로서 그간 무분별하고 방만한 국가재정을 체계적으로 재정립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치에 대한 규제도 강화되는 것

- 결국 영조(英祖) 자신이 본을 보이며 궁방의 어염세 독점을 없애고 자기 살을 깎는 행위부터 행하니 양반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게다가 박문수 같은 신하가 버티고 있었으니 당시 백성들에게는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있지 않았을까(?) 대동법의 김육이 가고 호포법의 박문수가 오다! 또한 군주의 덕목으로 본인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는 것과 인재를 알아봤다는 것이 중요한 것

 

박문수 눈감다.

- 충남 천안시에 영면(永眠)하고 있으며 백성들은 박문수를 마을의 수호신 <문수신>으로 섬기며 그 은혜를 기리고자 했고 그리고 마침내 영조(英祖)는 박문수를 영의정에 추존(追尊)하고 아끼는 신하의 죽음에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영성(박문수)이다. 이제 영성이 없으니 그 누가 나의 마음을 알 것인가?” <영조실록 1756424>

- 사실은 박문수의 관직도 관직이지만 중요한 것은 소론 VS 노론의 정쟁(政爭)에 연루되지 않고 천수(天壽)를 누린 것만으로도 큰 복, 그 당시 노론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 받지만 살아남았고 영조(英祖) 후반기에는 나주괘서사건으로 소론이 완전히 숙청되지만 유일하게 박문수만은 건재한 것은 박문수에 대한 영조(英祖)의 무한신뢰가 반영이 된 것

나주괘서사건 : 1755(영조31) 소론 일파가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여 일으킨 역모사건

- 영조(英祖)와 박문수의 콤비 플레이 소금사업 · 녹봉삭감 · 균역법 시행 등, 세종(世宗) 내가 없었다면 김종서가 46진을 주장하지 못했을 것이고, 김종서가 없었다면 내가 실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가 있었기에 실행 가능했던 서민 중심 정책들

- 박문수에게 어울리는 수식어?

<호포 박문수> 대동법과 호포는 조선 후기의 중요한 개혁의 키워드! 영조(英祖)시대 경제개혁의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던 박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