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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이순신 장군을 천거(薦擧)하던 날

mkpark2022 2015. 8. 12. 23:07

 

 


류성룡, 이순신 장군을 천거(薦擧)하던 날

 

 


개요(槪要)

- 임진왜란 기간 동안 무너져가는 조선을 지켜낸 류성룡! 전란으로 흔들리는 가운데서도 효과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해 부족한 병력과 군량을 확보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백성들의 삶까지도 보살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명재상, 위기를 읽고 그에 대처할 뿐만 아니라 위기를 기회로 삼을 줄 알았던 류성룡,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 류성룡, 이순신 장군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던 날

15916월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 6품의 정읍현감에서 정3품의 전라좌수사로 7단계나 뛰어오른 전례없는 파격적인 인사로 조정은 발칵 뒤집힌다.

- 이순신 장군을 천거한 사람은 우의정 류성룡으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류성룡을 깊이 신뢰한 선조(宣祖)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파격적인 인사, 류성룡의 이순신 천거는 다가올 국면에 대비한 신의 한 수였다.

- 임진왜란 시 전라좌수영은 여수의 이순신 · 경상우수영은 거제도의 원균으로 지역구가 겹치다 보니 둘의 갈등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교과서에는 존재감이 없는 류성룡, 행주대첩의 권율 장군도 임진왜란 직전 의주목사로 천거한 인물이 류성룡

 

류성룡, 그 사람이 알고 싶다. <정진영 안동대학교 사학과 교수>

- 한마디로 류성룡은 어떤 인물?

정치가이며 당대 최고의 학자일 뿐만 아니라 실무에까지 능통하여 백성들의 삶을 이롭게 한 경세가(輕世家).

- 유성룡 VS 류성룡?

2006년도 국가가 한자 성 한글 표기 시 일방적으로 두음법칙을 강제로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법원의 판결로 쓸 수 있게 되었고 한자 자체도 다름 <(), ()()()>

- 고향은 안동,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안동 하회마을, 하회(河回)의 순 우리말은 물이 굽이돌아 나간다하여 물돌이 동 이라고도 부르며, 류성룡의 호 서애(西厓)도 하회마을의 서쪽 단애(斷崖)에서 유래

- 징비록을 집필한 옥연정사와 반대편에 위치한 형 류운룡의 겸암정사, 우애가 깊었던 형제는 단애(斷崖)를 깍아 우애의 길을 만들어 왕래

-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제자20세에 도산서원에서 수학하며 근사록(近思錄)을 배우는데 이 선생(이황)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늘이 내린 자이다. 반드시 훗날 큰일을 할 것이다하였다.” <허목기언 서애유사>

근사록(近思錄) : 송나라 때 주자(朱子) 등이 집필한 성리학의 입문서

- 바둑을 잘 두어 선조(宣祖)와 명() 장수 이여송과의 대전에서 양산에 구멍을 뚫어 빛으로 훈수를 하였다 하고 실제로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대신해 명()을 상대한 류성룡

- 류성룡과 이순신의 우정은 어느 정도였으며, 류성룡과 이순신의 첫 만남?

어린 시절부터 관계가 있는 것으로 기록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30127>

- 사실은 이순신 장군보다 3세 위인 류성룡, 이순신 장군의 형과 친구이고, 그의 형제들의 이름은 중국 고대 제왕의 이름 순()으로 희신·요신·순신·우신, 제왕의 신하가 된 네 아들의 이름은 태평성대를 희망한 이순신 장군 부모님의 작명 의지


류성룡, 이순신 장군을 만나다.

- 류성룡와 이순신이 친하게 된 계기?

보통 5살 까지는 허교(許交)가 가능했고 제일 중요한 것은 어린 시절에 각각 종로의 묵사동과 건천동에서 거리상 1Km도 안 되는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는 것

허교(許交) : 벗으로 마음을 터놓고 사귐

- 류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한 이유는?

친분 때문에 중요한 직책에 천거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일찍이 이순신은 함경도 지역의 만호(각 도의 군사지역인 진에서 근무하는 무관) 부대장의 역할을 하였고, 그 이후에는 전라감사 이광희라는 분의 군관으로서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런 전후의 사정을 살피다가 이순신 장군의 능력을 눈여겨 본 것

- 류성룡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기대는 매우 컸던 듯 좌의정 류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책을 보내왔다··· 참으로 만고(萬古)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전술서다” <난중일기 159235>

- 병서(兵書)를 충분히 활용할 것으로 믿고 보낸 류성룡과 그 뜻을 이해한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류정승이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이 왔다. 류정승이 만약 돌아가신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할까?” <난중일기 1594712> 오보(誤報)였고 이순신 장군의 승리는 후방에서 적극 지원해준 류성룡의 덕분으로 이순신 장군 하면 떠오르는 거북선,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필요했던 거북선 건조에는 류성룡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일.

 

류성룡, 선조(宣祖)의 신임을 받다.

- 1592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7년간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선조(宣祖)는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향하고, 임진왜란 기간 중에 선조(宣祖)는 류성룡에게 영의정(국무총리), 도체찰사(전시 군사총지휘관), 훈련도감 도제(국방부장관) 등 다양한 임무를 맡기면서 전란극복의 모든 책임이 류성룡의 양 어깨에 지워진다.

- 선조(宣祖)와 류성룡의 각별한 인연, 류성룡의 부인이 세종대왕의 아들인 광평대군의 5대 손으로 왕실의 인척인 류성룡을 선조(宣祖)는 남다르게 생각했고, 류성룡이 1566년 문과급제(당시 25)하고 이듬 해인 1567년에 선조(宣祖)가 즉위(당시 16)하여 서로가 의욕이 넘쳐 있을 때 만나게 되는 것 류성룡이 강관(講官)이었을 때에 진설이 정밀하고 절실하므로 강관 중에서 첫째라고 하였는데···” <선조실록 6816>

- 육군(陸軍)이 속수무책으로 패한 원인은?

건국 이래 200년간 큰 전쟁 없이 평화가 지속된 조선 16세기 이후, 성리학의 정착으로 문치를 강조<숭문천무(崇文賤武)> 15세기 진관체제에서 16세기 이후 제승방략체제로 전환되어 초기 진압에 실패한 것

 

조선 전기 지방방어 체제, 진관체제 VS 제승방략체제

- <진관체제>는 각 지역에 군사방어 단위인 진을 설치하고 각각의 진이 독자적으로 군사를 관장해서 외적을 방어하여 담당 지역만을 방어하는 수동적 군사체제, 소규모로 약탈을 일삼는 왜구방어에는 적합하지만 임진왜란처럼 다수의 적이 한 곳을 집중공격하면 쉽게 격파당하는 허점을 가지고 있음

- <제승방략체제>외적의 침입을 받은 진이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인근 진들의 병력이 모여 공동 대응하는 체제로 한 곳에 집결한 병력이 파견된 지휘관의 지시를 받음

- 그런데 임진왜란 초기 제승방략체제가 쉽게 격파된 이유?

침입을 받은 진이 선제공격을 하고 주변 진의 병력이 한 곳에 집결하여 한양에서 파견된 군사 전문가인 지휘관의 지시를 따르게 되는데, 문제는 부산진 함락 이후 빠르게 북상한 일본군은 한양에서 지휘관이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과 맞닥뜨린 조선군은 장수가 없어 우왕좌왕하다 패배한 것

- 만일 류성룡의 건의대로 진관체제로 복귀했다면 효과가 있었을까?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군사력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에 진관체제로 복귀했어도 힘들었을 것이나, 최소한 지휘관의 부재로 병력이 흩어지진 않았을 것

- 류성룡, 인재를 천거하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진주대첩 · 한산도 대첩 · 행주대첩>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 도원수가 된 권율도 임진왜란 직전 류성룡이 천거한 인물, 권율은 원래 문신으로 정5품 호조정랑직에 있다가 류성룡이 발탁하여 정3품 의주목사로 천거하여 군사 요충지인 의주에서 군사적 역량을 쌓은 뒤에 임진왜란 당시에는 광주목사로 재직하면서 전라도 사수에 기여함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의 진실

- 류성룡은 십만양병설에 반대했나?

당대의 기록인 <선조실록>·<이이문집>·<류성룡 문집>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십만양병설, 율곡 사후 이이의 제자 김장생이 행장을 쓰면서 처음 등장 미리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하니 정승 류성룡이 아무 일이 없는데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화근을 만드는 것입니다하였다” <김장생의 율곡 행장 >

-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난 다음에 이를 근거로 하여 다시 쓴 선조수정실록에 그 부분을 삽입하여 추가로 등재하여 진위여부에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이의 십만양병설 임진왜란 이후, 이이의 제자들이 스승을 높이기 위해 반대 당파인 류성룡을 이용한 듯

 

류성룡, 이순신 장군을 비판하다?

- 류성룡은 왜 선조(宣祖)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비판에 동조했을까?

선조(宣祖)의 명을 어기고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하여 <명령불복종죄>로 백의종군하게 되는데, 일본군이 이순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가토 기요마사가 언제 어디로 간다고 거짓정보를 흘린 것을 조정에서는 그대로 믿고 이순신에게 가서 치라고 명하지만, 이순신이 보니 이것은 분명히 함정(으로 가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나가지 않았던 것이 명령불복종죄, 류성룡까지 이순신 장군을 비호하면 이순신에게 더 큰 화가 미치지 않을까 우려했을 듯 내가 이순신을 천거했기 때문에 나와 사이가 나쁜 사람들은 원균의 편을 들어 이순신을 몹시 모함했다.” <징비록> 이는 당파적 입장에서 보면 반대 당파의 정치공세에 이순신 장군이 휘말리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 취한 엑션(?)

- 그런 상황에서도 이순신 장군을 옹호한 정탁을 사형시키려 했으나, 이순신 이라면 분명히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것이니 현장의 사정을 감안하라는 정탁의 설득으로 백의종군으로 감형하게 된다.

정탁(1526~1605) 호는 약포(藥圃) 임진왜란 전후 우의정과 판중추부사를 역임

- 친분이 있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옹호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같은 당파인 정탁에게 류성룡이 부탁한 것은 아니었을까(?)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 장군이 41일 풀려나오는데 다음 날의 기록에 보면 류성룡을 찾아가는데 어두워질 무렵 성으로 들어가 영의정(류성룡)과 이야기하다 닭이 울어서야 헤어졌다” <난중일기 159742>

 

류성룡, 개혁으로 전란을 극복하다

-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다양한 개혁정책을 추진한 류성룡, 직업군인 양성을 위한 훈련도감 설치, 무력강화를 위한 새로운 화포의 무기제작, 그리고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한 면천법을 실시하여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비록 천인이라도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 군량과 식량 확보를 위한 대책으로 소금생산을 장려하고 곡식과 바꾸게 한 것, 7년이나 이어진 참혹한 전쟁, 류성룡은 흔들리는 조선을 지탱하게 한 기둥으로 민심수습과 전쟁물자 공급은 전쟁 승패의 핵심으로 당시의 현상을 직시했던 것

- 류성룡은 부족한 군량과 식량을 어떻게 조달했을까?

압록강 연안 국경지역 중강진에 시장을 개설해 요동 지역의 곡식을 수입(輸入)하여 대체를 했고 곡식 대신 구황식물 생산을 장려하여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 면천법에 대한 양반들의 반발은 없었나?

사유재산인 사노비(私奴婢)의 군대차출에 크게 반발했던 사대부들, 자신의 노비를 되찾고자 소송까지 제기하는 상황에 이르자 류성룡은 양반들에게도 군역을 부담할 것을 주장한다.

- 전공(戰功)을 세운 노비의 신분상승을 정책으로 입안하여 시행한 류성룡, 확실한 동기부여로 군사들의 사기를 높인 면천법을 실시

- 류성룡의 개혁정책은 전쟁 이후에도 유지되나?

<면천법>·<중강개시>·<공물작미법, 특산물을 쌀로 대신하는 대동법의 원조격>을 주장하지만, 제도화되지 못해 지속되지 못하고 임진왜란 이후에도 유지되는 것은 훈련도감인 직업군인제 뿐

 

류성룡, 선조(宣祖)에게 버림받다.

- 서애 류성룡이 아니었다면 당시 한강 이북은 명나라가 이남은 왜()가 차지하여 지금의 대한민국도 없을 수도 있는데, 그런 큰 업적을 남긴 류성룡을 선조(宣祖)는 왜 내쳤을까?

1598년 명나라 장수 양호는 울산성 전투 결과를 승리했다고 거짓 보고하고, 양호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는 명 황제에게 양호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린다.

- 조선 조정은 양호를 돕기 위해 나섰다가 정응태의 모함을 받게 된다. “조선이 옛 고구려 땅을 되찾기 위해 일본과 결탁해 명()을 속였다는 것선조(宣祖)는 결백을 밝히려 ()에 사신으로 류성룡을 보내려 하지만 선조(宣祖)의 의중을 알면서도 여러 이유를 대며 선뜻 나서지 않는 류성룡.

- 류성룡은 왜 사신으로 가는 것을 주저했을까?

전쟁이 끝날 무렵 명()조정과 조선에 파견된 일선 지휘부 입장과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난 것, 선조(宣祖)는 류성룡이 명()에 사신으로 가서 이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지만 류성룡은 명()의 입장을 잘 아는 윤두수나 이항복에게 미루는데, 이는 명나라 내부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류성룡은 명분도 실리도 없는 사행(使行)을 끝내 거부한다.

- 재위기간 내내 권력이 편중(偏重)되는 것을 경계한 선조(宣祖), 전시(戰時)라는 특수상황 때문에 류성룡에게 권력을 집중시킨 선조(宣祖)는 전후 정국운영에 류성룡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 이러한 선조(宣祖)의 의중을 파악하고 류성룡을 맹렬하게 탄핵한 반대 세력 북인은 류성룡을 공격하게 되고 주화오국의 탄핵을 상소하게 된다.

주화오국 : ()과의 화친을 주장해 나라를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

- 당시 북인들이 올린 류성룡의 탄핵상소를 보면 당시 사대부들이 할 수 있는 욕은 모두 들어있는데 일본과 강화를 하는 류성룡을 남송시대의 진회(秦檜)로 비유하여 류성룡을 매국노로 매도를 한 것 성룡은 서신과 패물을 끝내 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는 또한 진회(秦檜)의 죄인입니다” <선조 31126>

진회(秦檜) : 금나라와 굴욕적 강화를 맺은 남송의 정치가로 간신의 대명사

- 결국, 탄핵을 받아들여 류성룡을 파직한 선조(宣祖), 7년 전쟁의 승리를 불명예로 파직시키는 조치를 취한 선조(宣祖), 류성룡이 파직 당하던 그 날인 15981119() 또 하나의 사건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戰死)한 날로 문학적 표현으로는 슬픈 운명의 연대적 동지

- 류성룡이 파직당하고 낙향할 때 강을 건널 여비조차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거의 역적급의 욕을 먹으면서 숙청을 당한 것

- 낙향 후 류성룡은 조정에 복귀했나?

시간이 지나면서 선조(宣祖)는 마지못해 류성룡을 재 등용시키려 하지만 응하지 않자 호성공신 2등에 책봉하고, 공신각에 걸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안동에 화공(畵工)을 보내지만, 선조(宣祖)가 보낸 화공까지 돌려보낸 류성룡은 옥연정사에서 외부와 단절하고 후대가 경계(警戒)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징비록(懲毖錄)을 집필한다

호성공신 :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송한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준 칭호

- 리더와 보스의 차이, 리더는 가라! 하지 않고 같이 가자! 고 끌고 가는 사람 그리고 보스는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지려하지 않지만 올바른 리더는 책임을 지려한다. & 인재천거로 전쟁을 대비하여 비전(備戰), 징비록 집필로 미래를 준비하여 비전(Vi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