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史劇) 속 인물, 제2편 <태조 왕건> 의 궁예(弓裔)
〇 드라마 <태조 왕건>의 또 다른 주인공, 궁예
- <태조 왕건>은 고려 개국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200부작 대하드라마, 드라마 제목마저 헷갈리는 드라마 속 궁예의 존재감
- 혼란스러웠던 신라 말(末), 백성들은 부처가 지상에 내려와 자신들을 구원해주기를 기원하고 스스로 부처라 칭하며 후고구려 왕이 된 궁예, 버림받은 고아소년에서 왕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평등사회를 꿈꾼 개혁군주로부터 미치광이 폭군까지! 극과 극의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 바로 궁예
- 그는 백제 땅의 마지막 왕인 후백제의 견훤과 훗날 고려를 건국한 왕건과 함께 명실상부한 후삼국의 영웅, 그러나 역사 속 어떤 지도자들과도 다른 방식으로 백성들을 현혹시켰다.
※ 미륵 하생 신앙 : 도솔천 미륵보살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제할 것이라는 믿음
- <경기대 사학과 이재범 교수>의 궁예 연구 계기는?
1981년에 접한 미국 논문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 Personalities in the Founding of the Koryo Dynasty. - G, Cameron Hurst III - “좋은 놈, 나쁜 놈, 치사한 놈” 의 논문으로 내용은 후삼국의 세 영웅을 서부 영화 <석양의 무법자>주인공에 비유하여 왕건을 좋은 놈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궁예와 견훤을 치사한 놈 · 나쁜 놈으로 격하시킨 이분법적 역사관이 한국의 역사학자로서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게 됐다는 것
- ‘Om Mani Padme hum (옴마니 반메 훔)’ 불교의 천수경에 나오는 주문으로 꾸준히 외우면 관세음보살의 맑고 깨끗한 세계로 간다는 것, 불교식으로 왕의 묘호를 붙인 신라의 법흥왕 · 진흥왕 · 진평왕 · 진덕여왕 등, 이 중 진평왕 같은 경우는 자신을 백정(白淨, 석가의 아버지) 부인은 마야부인(摩耶夫人, 석가의 어머니)으로 불교의 권위를 빌려 왕권 강화책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부처를 자처(自處)한 왕은 궁예가 유일!
〇 비범한 고아 소년, 궁예
- 드라마에서처럼 궁예는 정말로 신라의 버림을 받은 왕자일까?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왕족 출신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아닌 미스터리한 출생으로 한쪽 눈을 잃은 것은 버림받던 날의 사고 “5월 5일 태어나는 순간 지붕위에 흰 빛이 서려··· 이 아이가 5자가 거듭 들어 있는 날, 태어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합니다.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오니 기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여 아이를 던져버렸는데 “젖 먹이는 종이 몰래 받다가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삼국사기>
- 신라의 왕족인데 왜 이름은 박·석·김이 아닌 궁예일까?
궁예(弓裔)는 ‘활을 가진 자의 후예’라는 의미로 궁예는 예명이라고 추측되며 본명도 미스터리, 법명은 선종으로 10세 무렵 장난기 넘쳤던 궁예는 도가 지나쳤던지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는데 차마 어쩌지 못해 오늘 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왔다.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고 나와 너는 함께 죽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삼국사기> 이런 소리를 듣고 울면서 출가한다.
- 신라의 승려는 누구나 될 수 있었나?
당시 신라 하대의 대중적 신앙인 선종(禪宗)은 엄격한 교리를 벗어나 기도와 참선을 중시하여 누구나 주문만 외우면 극락에 간다는 것으로 백성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시기
- 당시 사원은 거대한 집단이 돼가면서 고급 승려로부터 노동을 제공하는 하급 승려까지 여러 부류의 승려가 있었고, 궁예가 절에 갔다면 수원승도(절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층계급)로 가지 않았을까?
- 출발은 생계형 승려로 미미하였지만 타고난 기질 “궁예는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며 뱃심이 있었다.”<삼국사기>
〇 천 년 신라를 부정한 지도자 궁예
- 마침내 절에서 나온 궁예는 뜻이 맞는 이들을 모아 북원의 도적 양길에게 투신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다. “892년 궁예는 북원(지금의 원주)의 도적 양길에게 투신하였다. 양길은 궁예를 우대하고··· 병사를 주었다” <삼국사기 제50권 열전 10>
- 그리고 얼마 후 놀랄만한 사건, 부석사에서 궁예가 신라왕의 초상화를 칼로 내려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어떤 이들은 궁예의 아버지로 알려진 경문왕 혹은 헌안왕이 초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 부패한 종교 · 타락하고 무능한 왕실, 무너져가는 신라를 향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에 백성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는 나라 신라, 궁예는 그런 분노가 곧 민심이라고 여겼던 것이고, 천 년 신라의 존재에 정면으로 맞선 것으로 이 칼자루의 흔적은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 궁예가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내려친 이유?
자신을 버린 신라 왕실에 대한 복수심과 반 신라적 정서를 이용해 세력을 강하게 결속시키려는 의도가 보여 진다는 것, 889년 진성여왕 시대의 기록에 등장하는 신라 사회의 혼란상 “서기 889년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 재정이 궁핍하였다. 임금이 사람을 보내 독촉하니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삼국사기 제 11권>
- 도적들 중 대표적인 <원종 · 애노의 난> 엄청난 기세에 눌려 진압하러 간 관군(官軍)마저 진압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는데 신라에게 등을 돌린 민심을 꿰뚫어 본 궁예, 자기가 나라를 세우는 정치적 계산을 했을 것
※ 원종 · 애노의 난 : 조세부담에 대한 반발로 원종과 애노가 일으킨 농민반란으로 신라 붕괴의 기폭제가 됨
※ 후삼국 시대의 정리
- 통일신라 말기인 10세기에는 중앙 귀족들의 왕위쟁탈전이 심화되면서 지방 호족 세력의 통제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 그런 틈을 타 지방 세력들이 성장하게 되는데 그들은 바로 호족으로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게 된다.
- 그래서 10세기경에는 이 호족세력들이 나라를 건국하게 되는데 900년 전라도 호족 세력인 견훤이 완산(지금의 전주)에 후백제를 건국하고, 이듬해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신라와 함께 삼국이 대립하는 이른바 후삼국 시대가 열린다.
- 당시 왕건은 궁예 휘하의 장수로 후삼국 시대의 출발은 후백제의 견훤 · 후고구려의 궁예 · 신라 경순왕, 세 인물이 서로 대립하며 쓰는 기록
〇 뛰어난 장수 궁예, 후삼국 시대를 열다.
- 연전연승뿐만 아니라 아랫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궁예, 당시 기득권 세력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평등사상 “궁예는 사졸과 고락을 같이하며 주거나 빼앗은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 ‘入 명주’의 표기는 명주 성안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어 궁예를 맞이하여 다툼 없이 정복했다는 의미로 650명의 군사로 들어가 무려 3,500 여 명으로 늘어나··· 명주지역의 하층민과 일부 호족세력을 규합하면서 빠르게 세력이 확장이 되어 가는 것
- 궁예의 성장에 날개를 달아 준 호족 왕륭(왕건의 아버지), 당시 20세의 아들 왕건을 추천하고 왕건은 승전을 거듭하며 후고구려 영토 확장에 기여한다.
- 모든 면에서 대비되는 궁예와 왕건, 궁예도 신라 왕손이긴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자수성가했으나, 엄친아인 왕건은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호족세력의 아들로 성장기부터 서로 달랐다.
- 궁예는 한 명의 처(妻)를 가지는 반면, 각 지역 유력 호족의 집안과 혼인했던 왕건은 29명의 부인을 두어 호족융합정책으로 사용하고 이는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중요한 기반이 되는 것이다.
- 왕건의 결혼을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봐서는 안 되고, 실제로 신혜왕후는 경기도 송악 근처의 호족 유천궁의 딸로 왕건이 견훤과 대립하러 가는 길에 그 곳에서 배를 만드는 것을 도와주기도 하는 등, 왕건에게는 정치적 지지기반을 만드는 수단이었던 결혼
〇 한때는 더 나은 세상을 꿈꿨던 궁예
- 연승(連勝)을 거듭하며 세력을 넓혀가는 궁예, 901년 고려를 건국 “901년 궁예가 스스로 왕이라 일컫다” <삼국사기>
- 훗날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태봉의 시작이었고, 즉위 3년 후인 904년 독자적인 국호 마진(摩震, 동방대제국의 뜻)을 사용하고 연호 무태(武泰)를 사용하며 자주성을 부각시키고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천도하고, 대규모 도성을 축조하면서 높은 성벽 대신 낮은 토성을 축조하여 궁예가 추구한 이상국가의 상징
- 아울러, 신라 멸망의 원인이 된 골품제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여 신분보다는 실력으로 임용되는 관직 임용 제도를 904년과 911년 두 번에 걸쳐서 개편한다.
※ 골품제(骨品制)
- 신라의 귀족을 등급으로 나눈 제도,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신분제로 성골 · 진골 · 6두품 · 5두품 · 4두품으로 구분되고 3등급 이하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확인은 불가
- 혼인도 같은 골품 내(內)에서만 허용하여 근친혼이 빈번하고, 집의 규모와 건축자재 · 의복까지도 골품에 따라 규제
- 골품에 따라 관직도 제약되어 왕은 성골, 진골은 이벌찬(17관등중 1등급)까지, 6두품은 아찬(6등급)까지, 5두품은 대나마(10등급)까지, 4두품은 대사(12등급)까지 승진
- 신라 사회에 골품제가 미친 영향은?
신라의 3최라 불리는 최치원 · 최승우 · 최언위로 이들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신라 최고의 엘리트들로 이들은 골품제의 한계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없는 6두품, 그래서 이들의 선택은 최치원은 은거(隱居) · 최승우는 후백제의 견훤 · 최언위는 후고구려의 왕건을 지원해서 신라를 무너뜨리는 것을 돕는 세력이 됨
- 궁예는 사회적인 혁신뿐만 아니라 자주외교도 펼쳤는데 마진(摩震)은 마하진단의 약자로 태봉으로 바꾸기 전인 904년~911년까지 사용하던 연호로 마하(크다) 진단(동방) = 대동방국 건설의 의지와 연호를 사용하면서 자주성을 부각시킨 것
- 지금은 사라졌지만 철원도성 역시 동방대제국 건설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 왜냐하면 당시 철원은 당나라 사신들이 많이 들어왔고 거대한 사찰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춘 것
- 또한 외교 면에서도 “고려에서 사신과 보검을 보내왔다” <요사, 거란족의 기록> 당시의 국력 등 여러 가지 사안을 볼 때 궁예가 오히려 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 “918년 당나라 상인 황창근이 저자에서 산 거울에 예사롭지 않은 글씨가 적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궁예에게 바쳤다”
- 당시 중국은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로 당(唐)이 멸망하고 송(宋)이 등장하기까지 약70년 간 흥망성쇠를 거듭한 다섯 왕조와 열 개 나라가 대립하던 시기였는데, 후백제가 오월(吳越)하고 통교하는 것을 막기 위해 궁예는 왕건을 시켜 배를 나포하게 하는 등, 동북아의 정세를 주도하는 역할을 했던 것
- 후고구려가 자주외교를 펼칠 수 있을 만큼 강한 나라였나?
당시 외성(外城)의 주변이 12Km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한양 도성과 비견할 정도이고 도성의 규모로 짐작할 수 있는 국력
- 정철은 강원도 일대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관동별곡에 표현을 했는데, 궁예의 웅장한 옛 성터에서 인생무상을 느끼면서 글로 표현 “궁왕 옛터에 오작(까마귀와 참새)이 지저귀니 천고의 흥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동별곡>
- 현재는 궁예의 도성터 상당부분이 비무장지대에 있어 갈 수 없고 철원군청에 <태봉국 도성도>와 국사암(안성시 삼죽면 소재)에 궁예 미륵불이 있다. “역사의 승자는 신화로 남고, 패자는 전설로 남는 것.”으로 궁예에 관한 전설과 민담이 많이 남아있다
〇 언제부터 궁예는 폭군이 되었을까?
- 처자식을 엽기적으로 죽인 충격적 사건, 915년 궁예가 왕이 되고 14년 후 간통죄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강씨와 두 아들, <관심법>으로 알았을 뿐 증거도 심문도 없는 최후를 맡는다.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였다” <삼국사기>
- 궁예는 도대체 왜 처자식을 죽여야만 했을까?
납득할 만한 이유조차 없는 궁예의 패륜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유년기의 콤플렉스 때문이라는 정신분석 연구 사례도 있지만 자기는 미륵불이고 두 아들은 천광보살과 신광보살로 삼존불을 만들어 놓을 만큼 사랑하는 두 아들까지 죽여야만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역모, 당시는 호족이 난립하던 시기로 정적(政敵)에 대한 불안이 항시 존재했을 것, 후백제의 견훤도 장남 신검의 반란으로 935년 고려에 망명했던 것
- 29명의 부인 모두를 잘 챙긴 왕건, 반면 한 명뿐인 아내를 죽인 궁예, 왕비인 강씨는 황해도 신천지역 대호족의 딸로 왕건 집안과 친밀하여 역모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 반역자를 처벌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궁예의 관심법은 신하들의 반발을 불러왔을 듯···
- 궁예는 폭정에 사치까지 극에 달했다?
기록에 의하면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여 머리에는 금 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를 입었다. 항상 백마를 탔는데, 소년소녀들로 일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고 비구 200여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하였다” <삼국사기>
- 한 나라의 왕인데 그 정도 행차는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정조(正祖)의 반차도에 등장하는 인력 2,000명과 말 800필에 비하면 규모의 면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자처하는 모습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 더하여 궁예는 직접 20권의 경전(經典)을 지어 석총에게 읽어보라 권유하나, 이를 읽은 석총이 괴설이라고 하자 철퇴로 때려죽인다.
※ 석총 : 신라 말기의 승려, 901년 궁예의 불경을 비판하다 철퇴로 맞아 죽음
- 궁예의 폭정이 극에 달하고 신하들은 새로운 왕을 추대할 은밀한 모의를 시작하여 군사를 모아 궁궐을 향해 전진하자 따르는 자들이 점차 늘어났다.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으며··· 기다리는 자도 1만 여명이나 되었다” <삼국사기> 이들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는 인물은 왕건(王建)
〇 궁예의 최후
- 드라마에서 궁예는 신하에게 자신의 목을 치게 하는 의연한 최후를 맞는데 ‘인생이 찰라인 것을 알면서 왜 그리 욕심을 부렸던가?’ 하면서 난세(亂世)에 영웅다운 죽음을 맞지만, 서기 891년 장군으로 일어나 918년 왕으로 사라진 궁예
- 실록에는 “궁예가 평복차림으로 도망해서 얼마 되지 않아 부양(斧壤)지역 주민들에게 살해 되었다.” <고려사 태조 세가> 드라마의 의연한 죽음과는 다른 궁예의 비굴한 죽음은 승자가 남긴 패자에 대한 기록의 한계일 것
- 궁예는 왜 미리 왕건을 견제하지 않았을까?
궁예의 죽음은 왕건의 입장에서 보면 폭정의 종식, 하지만 궁예의 입장에서 보면 하극상(下剋上), 이때도 왕건의 역심을 의심했던 궁예는 왕건에게 묻자 “역심을 품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자 궁예는 웃으면서 “솔직하게 대답했으니 용서한다.”라는 기록도 있음
- 이 사건을 계기로 왕건을 비롯하여 왕건을 따르던 신숭겸·복지겸·배현경·홍유 등이 결탁해서 자신들이 화를 입기 전에 먼저 궁예를 친 것, 흥미로운 것은 이들은 궁예가 발탁하여 궁예의 신뢰를 한 몸에 받던 부하로 왕건 추대에 합류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는 것
-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궁예의 정책이 호족과 등을 돌렸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중앙집권적인 왕권중심의 나라로 나아가면서 처음에는 궁예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이탈해 나갔다는 것을 의미
〇 역사의 패자, 궁예에 대한 평가
- 시대에 따라 원(願)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다르기 마련, 왕건은 호족들에게 선택된 왕으로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29명의 부인을 둔 왕건, 이에 비해 1명의 부인을 둔 궁예, 이것은 호족들과 연대하려 했던 왕건에 비해 왕권강화에 집착했던 궁예의 상징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시대적 요구에 부합한 것은 오히려 왕건이지 않았나(?)
- 동아시아의 이상국가를 꿈꿨던 왕 궁예의 재발견, 영웅호걸임에는 틀림없으나 전략적 마인드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군주로서의 미덕이 부족했다는 것
- 정치사는 선악이 있지 않고 단지 승자와 패자만 있는 것, 많은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슬픈 궁예’ 처자식도 잃고 참모들도 떠나버린 외로운 왕으로 우리 역사상 한 명의 왕으로 끝난 유일한 왕조국가 태봉이었기에··· 여기서 슬프다는 것은 궁예 자신이 슬픈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슬프다는 것으로 많은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슬픈 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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