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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왕도(王都) 세계유산이 되다

mkpark2022 2015. 10. 22. 23:10

 

 

백제의 왕도(王都) 세계유산이 되다

 


백제의 왕도(王都),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 공주와 부여, 익산을 소재로 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에 등재, 대한민국 12번째 세계문화유산이 되다. 백제 후기 200년간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 수도 한성을 잃은 아픔과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담겨있는 백제역사유적지구 이름마저 조금은 낯선 그 땅에 세계는 왜 주목했을까? 200년 동안 백제 역사의 중심지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백제의 왕도(王都) 공주 · 부여 · 익산2015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 백제 역사 유적지구란?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백제의 역사와 문화가 동아시아의 범위를 벗어나 세계무대에 당당하게 서서 한반도의 역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문화사적으로 평가를 받게 되는 것

-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해당되는 지역은?

시기적으로 말한다면 백제 후기(475~660) 200여 년 간의 역사가 남아있는 세 개 왕도의 유적으로 부여의 관북리 유적인 부소산성 · 능산리 고분군 · 나성 · 정림사지, 익산의 왕궁리 유적 · 미륵사지,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 · 공산성 등이 해당 되는 것

- 백제의 역사는 수도의 변천에 따라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한성시대(서울, 기원전 18~475) 웅진시대(공주, 475~538) 사비시대(부여, 538~660)로 익산의 경우는 사비시대 제2의 수도로 신라의 왕도 경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

 

위기의 백제, 웅진으로 천도하다

- 고구려는 정복전쟁으로 연이은 승리를 하면서 5세기 광개토대왕~장수왕으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맞으면서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정책을 펼친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여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된 한성, 백제의 개로왕(蓋鹵王)마저 고구려 군사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백제의 개로왕, 을묘년(475) 왕성이 항복하여 위례성을 잃었다. 국왕과 태후, 왕자들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일본서기>

-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과 백제 내부의 분열로 혼란 속에 왕위를 물려받은 백제 문주왕은 부랴부랴 한성을 떠나 선택한 백제의 새로운 수도는 웅진으로 오늘날의 공주, 위기의 백제는 웅진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다.

- 공주는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계룡산이 둘러싸인 지역으로 고구려와 신라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천혜의 요새, 이를 거점으로 백제가 새로운 수도를 경영했다고 볼 수 있는 것, 특히 공산성은 산성안에 왕궁이 있는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조선 16대 왕 인조(仁祖)1624<이괄의 난> 때 이곳 공산성으로 피신, 특이하게 인조(仁祖)가 피신한 남한산성과 공산성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공산성 : 백제의 도읍지 공주를 방어하기 위한 산성으로 백제시대에는 웅진성으로 불림

- 고구려에 대패한 백제는 웅진 천도 후에도 국내의 혼란을 극복하기 어려웠고, 천도 2년 후인 477년에 문주왕은 신하 해구에게 시해당하고 정치적 혼란기를 겪는데, 이를 안정기로 바꾼 왕이 무령왕(武寧王)

 

백제 제 2의 부흥기, 무령왕(武寧王)

- <공주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을 포함 7기의 무덤이 위치 무령왕은 키가 8척이고 눈썹과 눈이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관대하여 민심이 그를 따랐다” <삼국사기>

무령왕 : 501~523년 백제 25대 왕으로 웅진 천도 후 백제 제2의 부흥기를 이끈 왕

- 무령왕의 업적?

무령왕은 한성이 함락될 당시 14세의 사춘기 소년으로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수도를 빼앗기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에 마음속 깊이 한()을 품었을 것, 실제로 즉위 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으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한다. “백제가 여러 번 고구려를 격파하여 우호관계를 맺었고 다시 강국이 되었다.(更爲强國)” <삼국사기>

- 대외적인 영토 확장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도 민생을 보살피는 것에 힘을 쓴 무령왕, 전쟁과 기근으로 고생하던 백성들을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하여 농업생산성을 확보하고 분배를 잘하여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했다” <삼국사기> 농업생산성 증가 + 효율적 분배 = 세수국력

 

동아시아의 대 발견, 무령왕릉

- 동 아시아를 통틀어 구조·축조시기·부장품·장례절차까지 정확히 기록된 유일한 고대 왕릉인 무령왕릉, 발굴된 무령왕릉에 대한 기록 매지권(買地券)은 무령왕이 토지신에게 돈 1만 문()에 왕릉을 샀다는 토지매매계약서로 왕()이라도 지하의 세계를 관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돈으로 구입한다는 얘기

- 197175일 송산리 고분군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왕릉 입구, 그리고 그 날 밤에 공주에 약 200mm의 폭우가 쏟아졌는데 임금무덤을 잘 못 건드려서 비가 오는 게 아닌가하는 유언비어까지 돌았다고···, 비가 그치자 다시 발굴 작업이 시작되고 드디어 1971781,400여 년 만에 열린 왕의 무덤은 기록에만 존재하던 고대왕의 무덤으로 고대 동 아시아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비밀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대 특종을 하는구나, 감격해서 벌벌 떨렸어요. 이런 거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허영환, 발굴 당시 한국일보 기자>

 

백제 비밀의 문이 열리다, 무령왕릉

- 천운(天運)으로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지 않은 무령왕릉, 발굴당시 장맛비가 200mm 이상 내리고 발굴에 얽힌 흉흉한 소문으로 발굴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일어난 교통사고 · 집안의 우환은 피라미드의 저주 같은 무령왕의 저주?

- 무령왕릉의 발굴 작업을 12시간 만에 끝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짧은 시간, 마치 이삿짐을 나르듯 정신없이 진행된 발굴로 시간에 쫒기다 보니 부장품을 훼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그 당시 미성숙했던 고고학 발굴 수준과 광복 후 첫 대규모 발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던 안타까운 사례 몇 달이 걸렸어도 그 나무뿌리들을 가위로 하나하나 베어내고 장신구들을 들어냈어야 했다. 고고학 발굴의 ABC가 미쳐 생각이 안 난 것이다.” <당시 발굴단장 고() 김원룡의 회고록>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고백을 한 것으로 현재는 실물 유적 보호를 위해 모형(模型)만 공개

 

동 아시아의 대 발견, 무령왕릉 발굴

- 1,500년 전 무령왕릉을 만나다.

바닥의 벽돌에 새겨진 백제사마왕(百濟斯麻王)” 사마왕은 무령왕의 생전이름으로 무덤의 주인을 알려준 <매지권>, 등잔(燈盞)으로 사용된 백자는 동아시아 최초의 백자로 추정, 섬세하고 우아한 아치형의 벽돌무덤과 벽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연꽃문양, 등잔 아래 사각 모양의 문()은 영혼의 통로를 상징하는 창문이고 ()과 함께 묻힌 부장품은 있는데 관()이 없다? 산산조각 난 나무 조각이 관의 흔적? 모든 부장품은 완벽한데 목관이 부서진 원인은 미스터리

-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은 백제의 미()” 하지만 부서진 관의 진실은? 학계에서도 해결되지 않은 미스터리, 형태로 봐서는 부식(腐蝕)된 것은 아니고 인위적인 훼손이라는 결론이고 주목할 점은 목관에 쓰인 나무가 일본산이라는 점

- 무령왕릉에는 해외에서 들어온 부장품이 다수로 목관은 일본산 금송 · 주황색 유리구슬은 인도의 퍼시픽 유리인 동남아산 · 중국 양나라의 청자와 오수전 등은 백제가 국제교류의 중심이었다는 증거 그 자체, 웅진에서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한 백제 하지만, 또 다시 천도(遷都)를 결심하는데···

 

성왕(聖王)이 선택한 계획도시, 사비(泗沘)

- 무령왕에 이어 백제 26대 왕이 된 성왕(聖王)의 중대발표, 백제부흥의 중요한 결단으로 수도를 사비로 천도(遷都)한다는 것, 한성에서 적군에 쫓기 듯 옮겨온 수도 웅진을 떠나 538년 백제 재도약의 발판이 될 새로운 땅인 오늘날의 부여인 사비로 천도, 부여는 바다와 맞닿은 백마강과 광활한 평야가 펼쳐진 곳으로 백제의 세 번째 왕도가 되면서 동 아시아의 국제도시로 새로운 사비시대가 열린다.

- 성왕(聖王)은 사후에 결정된 묘호가 아닌 생전에 불린 이름으로 그 만큼 칭송과 명성을 한 몸에 받았다는 뜻, 일본에서는 밝을 명()을 넣어 성명왕(聖名王)으로 호칭 성명왕은 천도 지리에 통달해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 <일본서기> 그 당시 성왕이 여러 지역을 둘러 봤겠지만 사비지역만한 곳이 없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계획도시로 상당한 시간을 투자해서 사비 도성을 건설한 것

- 실제로 웅진이 수도로 존속했던 기간이 60여 년, 그러다가 무령왕이 나오고 그의 아들 성왕이 나오면서 체제가 정비되자 이제 제대로 된 수도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에서 부여라는 도시가 선정이 되는데, 드넓은 평야지대에 바둑판식으로 설계된 계획도시로 백마강을 통해 서해로 연결되는 수운(水運)확보로 중국이나 일본 등 해외 진출에 유리한 개방적 입지

- <관북리 유적>은 왕궁으로 추정되고, 부소산성은 후원 겸 도성방어 역할, 정림사지는 사찰, 나성은 도시외곽의 성으로 옆에는 능산리 고분이 있어 왕과 귀족의 무덤으로 고대 동 아시아 도성의 여러 요소를 완벽하게 구현한 사비성

- 관북리 유적만 95,000평방미터, 발굴 작업을 통해 왕궁으로 추정되는 동서35m 남북 18m에 달하는 대형건물터가 확인, 지금까지 밝혀진 백제 건물 중 가장 큰 규모로 계획도시의 증거물인 정비된 도로와 배수시설이 발견되어 웅장한 사비의 면모를 알 수 있는 것

 

사비(泗沘), 국제 교역의 중심이 되다.

- 사비시대 전성기를 상징하는 대표적 유물 <능산리 고분군>에서 발견된 금동대향로는 국보 제287호로 조형미가 빼어난 균형과 조화가 완벽한 작품으로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데, 진품(眞品)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

- 꼭대기에는 상서롭고 고귀한 상상의 새 봉황(鳳凰), 받침은 힘차게 솟아오르는 용으로 60여 마리의 동물 · 10여 개의 식물 · 30여 명의 사람이 조각된 금동대향로, 재미있는 것이 코끼리·악어·원숭이·머리감는 여인까지 생동감 있게 표현되고 천상계의 음악을 연주하는 다섯 악사들, 사람이 타고 있는 코끼리의 모습은 백제 인들에게 코끼리는 상상의 동물이 아닌 운송수단으로 인식했다는 증거

- 당시 중국 · 동남아시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희귀한 동물들이 등장하여 백제는 한반도의 소국(小國)에 불과하다는 편견을 깨뜨리게 하는 금동대향로는 백제가 활발한 해외교역을 했다는 증거!

- 중국을 통해 들어온 정보로 상상해서 만든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543년 백제가 부남(캄보디아)국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보냈다” <일본서기> 이를 중국(양나라)을 통해 부남국의 재물을 가져온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당시 부남국과 중국(양나라)과의 국교는 단절된 상태이므로 백제는 543년에 이미 부남국과 단독으로 교역을 했다는 증거

- 또 다른 <일본서기>의 기록 “9월 계해삭(1)에 백제가 낙타 1마리·당나귀 1마리·양 두 마리·흰 꿩 한 마리를 주었다” <일본서기> 어떤 이는 백제에 무슨 낙타가 있느냐는 의문을 가지지만, 바둑판에 그려져 있고 두 차례나 일본에 보냈다는 것은 이미 교역을 통해 낙타를 가질 수 있었다는 증거

- 백제 의자왕이 선물했다는 현존하는 일본 최고(最古)의 바둑판 <목화자단기국> 바둑판 자단목의 원산지는 스리랑카, 상아 바둑돌의 원산지는 인도로 백제를 통해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한 신기한 문물을 접하게 되는 왜인들, 백제가 왜()에 해외문물을 선물한 이유는 국력을 과시하고 왜()를 백제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정치적 의도

- 비근한 예로 제1차 만국박람회인 1851년 런던만국박람회, 식민지에서 가져온 진귀한 문물을 보고 영국 국민들은 우리의 국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구나!’하고 자부심을 느꼈다는 것처럼 백제 역시 왜인들에게 경외감을 얻기 위해 문화적 시위를 한 것(?)

- 새롭게 알게 된 백제의 진면목 개방성, ()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세계와 교류했던 백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기준인 인류가치에 중요한 교류의 증거로 15세기 후반 유럽의 대() 항해시대보다 천 년이나 앞선 6세기 백제의 국제교역

 

관산성 전투의 패배, 성왕(聖王)의 죽음

- 고구려에 복수하고 옛 영토를 되찾고자 했던 성왕(聖王)551년 고구려를 공격한다. 신라와 연합해 거침없이 북진하는 백제군은 빼앗겼던 한강하류를 되찾아 적국에 복수하고 영토를 되찾는 오랜 숙원을 이룬 것이다.

-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한강을 탐낸 신라가 백제를 배신하고 554년 적이 된 신라와 맞붙은 관산성전투에서 성왕(聖王)은 신라의 칼날 앞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다.

- 약화된 왕권으로 혼돈에 빠진 백제에서 왕들은 연이어 죽음을 맞고 권력을 잡는 귀족들은 정치적 기반이 없는 뜻밖의 인물을 왕으로 추대하는데, 30대 무왕(600~641)이었다.

 

무왕(武王), 2의 수도 익산에서 승부수를 던지다.

- 관산성 전투는 백제의 입장에서는 뼈아픈 전투, 성왕(聖王)은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 진흥왕과 함께 고구려를 침공하여 한강상류는 신라가 한강 하류는 백제가 주둔키로 협정을 맺었으나, 한강 하류를 탐낸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벌어진 관산성 전투

- 결국 120여 년간 이어져온 나제동맹이 결렬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삼국동맹의 구도 변화와 함께 신라와 철천지원수가 된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를 견제한다.

- 새롭게 즉위한 무왕은 서동요(薯童謠)의 주인공 무왕은 풍채가 빼어나고, 뜻과 기개가 호걸스러웠다” <삼국사기> 마를 캐던 청년에서 든든한 배경인 신라왕실의 사위이자 백제의 임금이 된 무왕, 세력의 기반이 없는 사비(泗沘)대신 새로운 정치적 승부수가 될 제2의 수도를 원했던 것

서동요 : 백제 서동(무왕의 아명)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지는 향가

- 한성 · 공주 · 부여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백제의 왕도 익산, 사비와 익산은 두 개의 왕도로서 유네스코 등재로 제2의 왕도로서 국제적 인정을 받은 셈, 그동안 학계에서도 별궁설? 미완의 왕도설? 논란이 있었지만 당시 사비인 부여와 익산은 두 개의 왕도로써 자리매김하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 당나라의 경우 장안과 낙양을 동도와 서도로 그리고 재정러시아 때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두 개의 수도였던 관점으로 보면 이해

- 무왕(武王)은 왜 익산을 제2의 수도로 선택했을까?

익산은 무왕의 고향이라는 견해도 있고 다양한 입지적 장점을 가진 곳으로 부여보다 남쪽에 위치해 대() 신라전쟁의 전략적 거점이 될 수 있고 수원(水源)도 금강과 만경강을 통한 해로(海路)가 확보된 지역

- 익산의 궁전 터인 왕궁리 유적, 남쪽에는 왕궁(王宮)과 정전(正殿) 북쪽에는 후원(後苑)이 있는데 빼어난 조경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고 과학적 설계로 자동정화시설을 갖춘 최첨단 화장실200년 후()8세기에 일본에서 같은 구조의 화장실이 등장, <발굴 당시의 에피소드> 곡물저장창고로 추측하고 구덩이에 들어간 발굴단은 극심한 악취 속에 작업을 진행하여 토양시료를 채취해 분석을 해본 결과 각종 기생충 알이 발견되어 화장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 익산하면 미륵사지 석탑, 아파트 7층의 높이로 미륵사의 웅장한 규모는 무왕의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사찰,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의 모습으로 고대 석탑양식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자료,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보다 더 오래된 것인지 학계에서는 논란 중에 있지만 가장 오래된 탑 중의 하나라는 것은 분명

- 미륵사지 석탑에 시멘트를 발랐다?

일제강점 초기에 붕괴를 막기 위해 당시에는 처음 시멘트가 등장하여 최신의 공법을 사용한 것으로 현재의 수준으로만 이야기 할 수 없는 것, 탑의 반쪽만 남아있는 안타까운 모습이지만 현재는 유네스코 권고방침에 따라 해체 후 복원 준비 중

 

멸망한 백제, 훼손된 역사

- 낙화암의 삼천 궁녀의 전설은 진실일까?

무왕(武王)의 뒤를 이은 백제 31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의자왕, 부소산성 낙화암 현장에 가보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 비좁은 장소와 백마강에 투신하기는 어려운 지형으로 백제 멸망의 비장함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전설로 받아들여야···

- 백제의 유적은 신라나 고구려에 비해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다?

실제로 <부여정림사지5층석탑>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석탑에 기록을 남겼는데 <대당평(大唐平) 백제국비명(百濟國碑銘)> 당나라가 백제 국을 평정했음을 비에 새기다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전승기념으로 기록한 것.

- 이러한 것을 보더라도 백제가 패망한 나라가 되다보니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망국의 숙명으로 많은 유적이 약탈 · 도굴되는 피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는 것, 백제 유적이 가장 피해를 입은 일제강점기, 대표적 도굴꾼 <가루베 지온>은 공주일대 백제고분 1,000여 기()를 무단으로 발굴하여 부장품을 반출해 간 것이고 기와 4점만 국립공주박물관에 반환

가루베 지온(1897~1970) 일본인 교사로 1927년 공주에 부임

- 식민역사를 숨기고 포장해 관광 상품화한 일본 군함도, 일본의 얄팍한 면도 없진 않지만, 정작 백제 천년의 역사에 대해 자랑만 해왔지 우리의 유물과 유적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었나? 하는 반성과 함께 대한민국의 소중한 역사의 문화유산을 반환받고 복원하며 보호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