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온달, 고구려의 전쟁 영웅이 되다.
〇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 바보와 공주의 신분을 뛰어넘은 세기의 로맨스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그런데 바보 온달의 또 다른 얼굴, 온달은 고구려의 전쟁 영웅이다!? 심지어 열전에 오르는 충신이라는데··· 역사적 사실과 설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온달전>의 숨은 진실은?
- 때는 6세기 고구려에 위기가 오는데 서북방에서 밀려오는 돌궐의 위협과 신라의 북진, 여기에 나라 안의 권력싸움으로 고구려는 혼란 그 자체, 하지만 고구려의 옛 영광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니 그 중심에 바보로 놀림 받던 온달장군이 있었다.
- 평강공주를 만나 왕의 부마가 되고 고토(故土) 회복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장을 누린 바보 온달, 그는 어떻게 고구려의 전쟁 영웅이 됐던 것일까?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된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 평강공주는 고구려 25대 평원왕(평강왕)의 공주라는 뜻.
-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의 유래?
동화 속의 이야기로만 알았던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 <삼국사기 열전, 온달전>에는 고구려의 충신으로 기록하고 있고 온달전의 특징은 역사적 사실과 설화가 섞여있다는 것으로 <삼국사기 열전>은 김부식이 신라를 중심적으로 썼기 때문에 고구려 인물은 많지 않지만 온달이 들어갔다는 것은 그 만큼 중요 인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
※ 삼국사기 열전 : 김유신 · 을파소 · 온달 등 69명의 인물 전기를 기록
〇 바보 온달의 또 다른 얼굴, 전쟁 영웅
- 바보 온달이 활약한 전쟁은?
① 후주(後周) 무제의 요동 침입을 막아냄 ② 신라에 빼앗긴 한강유역 회복전쟁, 두 번의 전쟁에서 온달은 혁혁한 공을 세운다.
- 평원왕 재위기간인 559~590년, 당시의 6세기 중후반 무렵은 북쪽의 돌궐과 서쪽에는 북주(北周)와 북제(北齊)가 남쪽에서는 신라의 진흥왕이 북진하면서 고구려를 압박한 것으로 5세기 최전성기 → 6세기 국력이 약화되면서 위기의 고구려를 구할 영웅 온달 장군, 역대로는 광개토대왕 → 장수왕 → 온달 → 을지문덕 순(順)
〇 온달의 실체 분석
- 온달은 정말 바보였을까?
온달은 지적능력이 낮은 바보가 아니고 왕이 알정도로 고구려에서 유명한 인물이란 점을 주목하면 오히려 순수하고 착해서 바보라 불렸을 듯 “용모가 못생겨서 우스울 정도였지만 속마음은 아주 맑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음식을 구걸해서 어머니를 봉양··· 찢어진 옷과 해진 신발을 신은채로 저잣거리를 오가니 사람들이 그를 보고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전> 실제 삼국사기에는 愚(어리석을 우) 온달로 기록된 것을 보면 가난한 살림에 자기 잇속도 못 챙기는 모습이 남들 눈에는 어리석게 보인 듯
- 바보 온달과 공주의 결혼, 가능한가?
신분제 사회이긴 하지만 당시 고구려는 신라의 골품제도의 관계는 아닌 듯 “고구려 사람들은 풍속이 음란하여 밤이면 남녀가 모여 가무를 즐기고 함께 어울렸다.” <위서, 고구려전> 고구려의 남·여 자유연애는 가능했으나 왕실에서는 결혼도 정치적 행위인 점을 감안하면 왕실과 결혼할 수 있는 대상은 한정되어있는 것으로 고구려 대표 귀족만이 통혼권을 가졌을 것이고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의 온달이 공주와의 결혼은 사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것
※ 통혼권 : 결혼할 때 배우자를 선택하는 범위 영역
- <임기환 교수>가 보는 바보 온달의 실체는 하급귀족 · 몰락귀족 또는 신흥세력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고 일반인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 주체적인 여인상을 보여주는 평강공주의 의지로 조선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 “고구려왕이 딸 하나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방종케 하였으니 나라를 욕되게 하고 윤리를 어지럽히고···” <동사강목 제3상>
- 평원왕인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온달과 결혼한 평강공주, 이후 내조의 여왕으로 변신···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말을 사게 하는데 시장에서 구입하지 말고 나라 말 중에서 병들어 쫓겨난 말을 사게 한다.
〇 고구려는 지금
- 내조의 여왕 평강공주, 경제관념이 없어 원성이 자자한데 문제는 그 황금들이 아버지 평원왕과 말다툼을 한 후 가출할 때 몰래 가져온 황금이라는 사실, 평강공주는 황금을 팔아 집·노비·밭을 사고 평강공주는 말도 사게 하는데 병든 말을 사게 한다.
- <온달전> 다시보기, 평강공주는 왜?
<온달전>의 특징은 고구려 사회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는 것, 고대 사회에서 황금의 쓰임은 주로 왕족들만이 사용 가능했으며 황금은 최고의 신분과 권위의 상징, 온달전에서는 황금을 팔아서 물건을 사는 모습이 등장하여 재물로써의 교환가치를 갖게 되어 고구려 사회의 시장경제 형성을 암시, 기록에는 평강공주의 황금팔찌로 온달의 생활기반을 마련하지만 어쩌면 온달 집안 자체가 당시 신흥부호로 추론할 수도 있는 것
- 병든 말을 사게 한 평강공주의 의도는?
“시장 사람의 말을 사지 말고 반드시 나라의 말 중에서 병들고 쇠약해 내놓은 말을 사오세요···” <삼국사기 열전, 온달전> 나라 말은 일단 검증이 된 것으로 천리마와 백락(伯樂)의 관계를 연상할 수 있는 것.
※ 천리마와 백락(伯樂) : 세유백락연후유천리마(世有伯樂然後有千里馬), 말을 고르는 뛰어난 안목으로 숨은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에 비유
- 병든 말을 명마로 키워낸 평강공주와 그 말을 타고 사냥대회에 출전한 온달 “온달이 기른 말을 타고 달리는데 언제나 남보다 앞서고 포획하는 짐승도 많아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전>
〇 온달, 장인을 만나다.
- 평소에 좋아하는 사냥대회에 참석한 평강공주의 아버지 평원왕, 사위와 장인의 강렬한 첫 만남으로 또 한 번의 빛을 발하는 평강공주의 지혜, 눈 밖에 난 사위를 장인에게 점수를 딸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냥대회에서 멋진 사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 낮은 신분의 온달, 어떤 사냥 대회에 참여했나?
매년 3월 3일 낙랑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개최한 고구려, 사냥대회에서 잡은 산돼지·사슴으로 제천의식을 거행하고 사냥대회의 특징은 ① 왕과 귀족들이 참여 ② 군사 기동훈련의 일환 ③ 무예가 출중한 인재를 뽑을 기회
- 사냥대회는 몰이를 하는 방식, 사방으로 날뛰는 짐승을 잡아야 하는 것으로 통제 불능의 사냥감을 명중시키는 궁술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활 속에서 군사훈련과 같은 놀이를 즐긴 고구려인의 전통무예는 수박 · 씨름의 각저 · 석전 등등이 있으며 특히 석전은 정월 · 단오에 석전(石戰)으로 한해의 풍년을 점쳤던 것이고 신라에는 석투당 · 조선에는 척석군이라는 석전(石戰) 전문부대가 존재하기도 했다.
〇 온달, 왕의 사위로 인정받다.
- 사냥대회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 온달은 이후 평원왕과 함께 전장에 나선다. “이산의 들에서 싸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수십여 명을 베고··· 크게 이겼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전>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고구려의 영웅이 된 온달은 마침내 왕의 사위로 인정을 받게 되고 온달에게 대형의 관등을 수여한 평원왕과 상급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된 온달
※ 대형(大兄) : 고구려 관등 중 7위에 있는 관등으로 일정 규모의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장수에 해당
- 실제 평원왕은 어떤 인물?
“평원왕은 담력이 있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삼국사기> 온달과 취향이 비슷했던 평원왕은 군사적인 취향뿐만 아니라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는 “궁실을 중수하다 가뭄의 재해가 있자 왕이 공사를 그만 두고··· 평상시의 반찬을 줄였다.” <삼국사기> 백성을 사랑하는 따뜻한 측면도 있었던 듯
- 평원왕 즉위 당시 안팎으로 혼란스러웠던 고구려, 평강공주의 증조부인 23대 안원왕 대에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외척간의 세력다툼으로 2,000여 명이 제거되고 24대 양원왕 대에는 귀족 간주리가 국내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며 귀족세력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혼란스러운 상황
- 조선시대 사화 중 가장 많은 선비가 희생된 1589년의 <기축옥사>로 정치적 혼란과 국력이 약화되어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당시 보다 희생규모가 더 큰 상황으로 고구려 역시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
- 평원왕의 첫 번째 과업인 왕권강화를 위해서는 새로운 세력이 필요했던 것, 온달은 새로운 신진 무인세력의 아이콘으로 일반인이 아니고 금(경제력) · 말(군사력)을 갖추고 있는 신흥 귀족세력으로 기존의 귀족세력을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결혼은 평원왕의 정치적 승부수로 해석할 수 있는 것
〇 온달이 다시 전쟁에 나선 까닭은?
- 평원왕이 승하하고 그의 아들이 26대 영양왕이 즉위하고 온달은 왕을 찾아가 신라에게 빼앗긴 옛 영토 회복을 위해 출병할 군대를 요청 “계립현과 죽령 이서의 땅을 확보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노라” 고구려 최전성기 시절 영토를 되찾겠다던 다짐을 하며 출정하게 되는데 과연 그 결과는?
- 왕의 부마로 이미 인정을 받은 온달, 굳이 다시 전쟁에?
평원왕 사후 영양왕이 즉위한 상황에서 전쟁 영웅 온달 VS 새로 즉위한 왕,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위협적인 세력을 제거하기 마련, 왕실의 권력싸움으로 영양왕이 전쟁영웅이자 부마인 온달을 제거하기 위한 것?!
-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 것이 평원왕의 정치적 기반을 아들 영양왕은 그대로 물려받았을 것, 영양왕이 즉위하자마자 출정을 한 것은 둘의 합의가 이미 있었을 것이고 이는 곧 고구려를 위한 선택이었을 것(?) 기록상으로는 온달의 출정은 어디까지나 자청한 것으로 기록 “대왕께서 저에게 군사를 주신다면··· 반드시 우리의 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 온달전>
- 또한 당시 고구려는 내부적으로 정치싸움을 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 서쪽에는 중국의 새로운 세력으로 수나라가 등장하여 고구려를 압박하고 있어서 서북방과 남쪽의 신라를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서도 옛 영토회복을 위해 온달이 출정하고 영양왕은 이를 지원했을 것이 낭만적일지는 모르지만 좀 더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 온달이 되찾으려 한 곳은 어디이며 전쟁의 결과는?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고토는 남한강유역 전체이고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맞서 싸운 온달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면서 한강유역을 되찾고자 하는 고구려의 꿈도 좌절되고 만다.
〇 온달산성(충북 단양) VS 아차산성(서울)
- 온달의 전사지는?
온달의 전사지는 학계에서도 아직도 설왕설래 중으로 앞으로 계속 연구가 필요한 상황으로 온달산성과 아차산성의 공통점은 한강유역을 끼고 있는 교통의 요지라는 것
- 움직이지 않는 관(棺), 온달의 최후
전사한 온달을 장사지내려는데 관(棺)이 꼼짝도 하지 않자 평강공주가 나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어 있으니 돌아갑시다!” 하자 겨우 관이 움직였다는 것, 온달의 죽음과 함께 좌절된 고토회복의 꿈
- 온달 장군 이대로 허무하게 죽고 마는가?
온달의 전쟁터인 요동과 한강유역은 북과 남으로 옛 영토를 회복하려 했던 고구려의 열망을 상징하는 것, 재미있는 것은 아차산성과 온달산성은 모두 신라의 성으로 설화 상으로는 온달이 성을 빼앗지는 못했지만 온달산성의 이름으로 남아 죽어서 꿈을 이룬 온달
- 설화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이야기로 온달을 통해 이어진 고구려의 꿈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삼국사기> 온달전의 주인공은 온달이지만 시작과 끝은 평강공주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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