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과 김춘추, 삼국통일의 주역이 만난 그날
〇 킹메이커 김유신, 김춘추를 택하다.
- 제 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 그가 왕이 되기까지에는 김유신이 있었다! 장군 김유신의 또 다른 얼굴 ‘킹메이커’ 귀족사회의 비주류 김춘추를 왕으로 만든 지략가 김유신, 신라의 운명을 바꾼 ‘킹메이커’ 김유신의 삶을 들여다본다.
- 총망 받는 화랑(花郞) 김유신은 어느 날 김춘추를 불러 함께 축구시합을 펼친다. 경기 도중 김유신이 김춘추의 옷을 밟아 옷고름이 찢어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찢어진 옷고름을 고쳐주겠다며 김춘추를 집안으로 들인 김유신은 두 여동생을 불러 김춘추의 옷을 고쳐 달라고 부탁한다. 언니 보희는 사소한 일로 귀공자와 가까이 할 수 없다며 거절하자 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옷을 고쳐주고 이를 계기로 인연을 맺은 김춘추와 문희, 김유신은 왜 김춘추를 선택했던 것일까?
- 왜 김춘추였을까?
<일본서기>의 기록 “김춘추는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담소를 잘했다.” 그러나 외모뿐만 아니라 김춘추가 왕이 될 가능성을 예감했고 김유신의 야망에 부합했었기에 김춘추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 왕위에 오를 재목을 알아본 김유신의 의도적 접근(?)
골품제 사회에서는 성골(聖骨)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덕만·승만 공주 뿐, <성골 남진>상태였기 때문에 김춘추의 왕위 가능성을 예감한 김유신
※ 성골 남진 : 성골신분의 남자들이 모두 없어진 상태를 의미
〇 김유신에 관해 전해지는 수많은 일화
- 김유신이 말목을 자른 이유?
술에 취한 김유신을 태운 말이 스스로 천관녀의 집으로 향한 것, 눈을 떠보니 천관녀의 집인 것을 알고 단칼에 말의 목을 벤 김유신의 비장함(?) 말이 스스로 향할 만큼 자주 천관녀의 집에 들른 김유신과 천관녀가 그 만큼 뜨겁게 사랑했다는 의미
- 사랑했던 천관녀와 헤어진 이유?
진부한 드라마의 소재인 ‘어머니의 반대’로 기록에 보면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은 엄하게 자식들을 가르쳤는데 “김유신은 젊었을 때 기생 천관녀를 가까이 해 그 집에 자주 드나들곤 했는데 어머니 만명부인이 이를 꾸짖자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파한집 중권>
- 천관녀의 정체는?
<파한집·동경잡기·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천관녀를 기녀(妓女)로 기록하지만 어떤 학자는 천관녀는 천문(天門)을 관리하는 여사제로 주장하기도 하여 기녀인지 여사제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김유신이 열렬히 사랑한 것은 사실, 그런데 어머니는 미천한 여자와의 결혼은 안 된다고 강력히 반대하지 않았을까(?)
〇 금관가야 왕의 후손, 김유신
- 금관가야 구형왕의 후손, 김유신
금관가야의 구형왕은 김유신의 증조부로 532년에 신라 법흥왕에게 투항한다. “법흥왕 19년에 금관국 왕인 김구해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의 벼슬을 주었다.”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투항해 온 구형왕에게 김씨 성을 하사하고 진골로 대우하며 신라 지배층에 편입
-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유신의 조부 김무력 장군, 진흥왕의 영토 확장사업에도 활약하며 당시 진골(眞骨)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관등인 5관등을 넘어 3관등인 잡찬(迊湌)의 관직을 받게 된다.
- 하지만 당시 김유신의 집안은 진골 귀족으로부터 차별을 당하는데 이유는 편입진골이라는 것, 이런 상황에서 김유신이 태어나게 되는데,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萬明)부인은 진흥왕의 동생 숙흘종의 딸 “김서현이 길에서 숙흘종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눈짓으로 꾀어 중매를 기다리지도 않고 정을 통하였다.” & “숙흘종이 비로소 딸이 김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고서 별채에 가두고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벼락이 쳤고 지키던 자가 놀라 우왕좌왕하자 만명은 뚫린 구멍을 따라 빠져나와 마침내 김서현과 함께 만노군(진천)에 다다랐다.”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 지금도 진천에는 김유신 장군의 태실(胎室) 사적 414호가 있다.
- 신라 왕족이 편입진골을 만났으니 만명부인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을 듯, 당시 신라 귀족들의 일반적인 결혼형태는 중매로 <삼국사기>에는 둘의 만남을 야합으로 기록하는데 당시의 야합은 자유연애를 의미하는 것
-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으로 선발되어 낭도(郎徒)들과 수련을 하면서 18세에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國仙)이 되면서 촉망받는 인재로 성장하는데 스스로 성공을 위해 사랑 천관녀를 버린 김유신.
- 김유신 자택 마당의 대소동(?)
김유신이 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이려는 <대소동>이 일어나는데 화형(火刑)의 이유는 동생 문희의 혼전임신, 한편 덕만공주는 남산을 오르다가 솟아오른 화염을 보고 달려와 보고서 이를 말리지만 김유신은 공주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화형을 감행하는데, 위기일발의 순간에 김춘추가 나타나 불길 속의 문희를 구하고 자신이 문희의 정인(情人)임을 스스로 밝히자 덕만공주는 대왕께 고하여 두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한다.
〇 처남매부 사이 김유신과 김춘추
- 서라벌 주민들은 김유신의 자작극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상황, 동생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화형식(?) 역사에 길이 남을 퍼포먼스로 <백년전쟁> 때 잔 다르크보다 800여 년이나 앞선 문희의 화형식 장면, 김유신의 집은 월성에서 남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덕만공주(선덕여왕)의 남산행차를 미리 알았던 김유신의 철저하게 계산된 화형식이었던 것
- 김춘추는 어떻게 알고 왔나?
실제로 덕만공주가 김춘추에게 문희를 구하도록 한 것 “왕이 그것은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었다. 마침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색이 붉게 변했다. 그것을 보고 왕이 이는 너의 소행이니 속히 가서 그녀를 구하도록 해라! 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태종 춘추공> 결과적으로는 덕만공주의 중매로 김춘추와 문희는 결혼을 하게 되고 덕만공주가 김유신을 후원하게 되는 것
〇 김춘추의 가문, 폐위된 왕의 손자
- 김춘추의 조부(祖父)는 25대 진지왕(금륜)으로 정사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재위 4년 만에 폐위당하고 그의 아들이 왕위를 잇지 못하면서 조카가 26대 진평왕(백정)으로 왕위를 이어받아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자연스럽게 왕위계승에서 밀려난 김춘추
- 신라 귀족사회의 비주류였던 김춘추였기에 <가야계 김유신 집안>과의 혼인을 꺼렸을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진지왕을 폐위시킨 진골귀족들은 폐위된 진지왕의 후손이 권력을 잡는 것은 위험한 일로 진골귀족들은 계속 김춘추를 정치적으로 견제했을 것
- 본인 스스로도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있는 상황에서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의 결혼을 주저했을 수도 있지만 김춘추가 결혼을 결정한 이유 ① 강력한 왕 후보 덕만공주와 호의적인 관계 ② 김유신의 부 김무력의 활약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군사력 ③ 화랑의 우두머리로 두각(頭角)을 나타낸 김유신, 비주류끼리의 결합인 김유신과 김춘추
〇 위기의 김춘추, 김유신의 손을 잡다.
- 어느덧 세월은 흐르고 김춘추에게 김유신이 필요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642년 백제는 신라 대야성을 공격해 온다. 백제군의 끈질긴 공세에 성주 김품석은 성문을 열게 되고 참패한 신라군, 성이 함락되면서 대야성 성주 김품석과 아내 고타소랑도 사망하게 되는데 패배한 성주 김품석은 바로 김춘추의 사위, <대야성 함락>으로 정치적 비난을 받는 김춘추는 위기에서 김유신을 찾아간다.
- 한편 김품석은 부하 장수 검일의 아내를 탐하자 앙심을 품은 검일이 백제군과 내통하여 백제군이 공격을 할 때 성안의 창고에 불을 질러 신라군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고, 이것이 결정적인 전쟁의 패인이 된다.
- 용서받기 힘든 김품석의 행동, 또한 김춘추의 조부(祖父)인 진지왕은 도화랑이라는 여인을 탐했던 것이 원인이 되어 부도덕한 왕이라고 폐위됐던 것으로 김춘추는 부도덕한 행동에 대하여 거부감이 있던 차에 사위마저 비슷한 행동을 한 것, 뿐만 아니라 제대로 항전해 보지도 않고 백제에 항복한 김품석 “대야성이 패했을 때 도덕인 김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김춘추의 딸이었다. 김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서서 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개인적 감정과 정치적 위기로 인한 충격이 컸을 김춘추는 관계가 역전되어 처남 김유신에게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 된 것
- <대야성 함락> 이전까지는 둘이서 교류한 기록이 거의 없고, 629년 낭비성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김유신이지만 행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을 것(?) 그 이후로도 둘의 관계는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도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던 듯
- 김춘추가 김유신을 찾아온 이유?
적국 고구려에 군사요청을 계획한 김춘추,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함께 신라의 <당항성(경기도 화성)>을 뺏기 위해 압박하던 상황, 김춘추가 김유신을 찾아가 상황을 말하자 “공께서 만일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말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 두 왕의 궁정을 짓밟을 것입니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이 나라 사람을 볼 수 있겠습니까?” & “김춘추는 감격하였고 김유신과 함께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였다.”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
- 김춘추는 백제를 치기위해서는 고구려와의 협상이 최우선이라 여기고 고구려의 보장왕과 연개소문을 만난다. 하지만 고구려 보장왕은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니 만일 이를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김춘추는 “국가의 영토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니 신은 감히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김춘추는 감금이 되지만, 당시 가져간 재물을 뇌물로 주고 탈출하게 되는데, 실제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3,000여 명의 결사대와 고구려 국경에 주둔한 김유신
〇 신라 총사령관, 김유신
- 김춘추의 외교활동 중 김유신의 국내활동?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압량성(경산)군주>로 임명하는데, 대야성 함락 이후 낙동강 서쪽의 옛 가야지역은 모두 빼앗긴 신라에게 압량성은 최전방이 된 상황으로 최전방 사령관이 된 김유신의 당시 나이는 48세
- <대야성 전투> 이후 김유신의 연전연승으로 그 이전까지 백제에게 잃었던 영토를 회복하게 되는데 심지어 개선(凱旋)행진 중 또 다른 침략 소식을 들은 김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곧 바로 전장으로 향하면서 부하에게 자신의 집 우물물을 떠오라하여 마시며 가족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장군의 모습에 감탄하는 군사들
〇 비담의 난
- 647년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 반란의 주동자는 비담(상대등)과 염종(대아찬)으로 진덕여왕의 왕위계승에 불만을 가진 귀족세력의 신라를 흔든 <비담의 난>으로 선덕여왕은 궁지에 몰리게 되고 이들의 싸움은 열흘이 넘게 이어진다.
- <비담이 난>을 일으킨 이유?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여자 임금은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 선덕여왕 재위 16년으로 이 당시에는 선덕여왕이 병환으로 위독했을 듯, 후계문제로 신흥세력인 김춘추·김유신 VS 구 귀족세력인 비담·염종의 갈등, 신흥세력들은 승만공주(진덕여왕)를 왕위 계승자로 적극 지지하지만 구 귀족세력들은 또 다시 여왕이냐고 맞섰던 것
- 특히 <비담의 난> 명분을 준 계기는 당 태종 “신라는 여자가 왕이라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 여왕을 업신여기는 주변국의 정세에 힘을 얻은 비담, 상대등은 신라 최고의 관직으로 요즘의 국회의장이 반란을 일으킨 것, 또한 정당한 계승자가 없을 때 왕위에 오르기도 했던 상대등, 왕위계승권에 가까이 가있는 상태인데 승만공주에게 기울자 비담이 난을 일으킨 것.
- 이 무렵인 645년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게 되면서 신라는 당나라에 3만 여 병력을 원조하여 협공하자 이틈을 타서 백제가 신라를 급습하여 신라 서쪽의 7개의 성을 함락시키자 신라는 당과 협공하는 군사에게 회군(回軍)을 명령해야 하는 상황으로 여주불능선리의 여지를 준 사건으로 반란의 원인은 여왕의 집권에 대한 불안감이었던 것
- 이러한 결정적 순간에 반란을 진압하는 김유신, 열흘간의 치열한 공방 중에 하늘에서 큰 별이 선덕여왕이 있는 월성 쪽으로 떨어지자 비담은 큰 별이 월성 쪽으로 떨어졌으니 여왕이 지겠다고 반란군의 사기를 북돋는다.
- 떨어진 별에 군사들이 흔들리자 김유신의 대응(?)
연을 이용해 상황을 정리하는데 연 꼬리에 불을 달아 띄워 올리면서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으니 우리가 이긴다는 뜻이라면서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반란군을 진압한다.
〇 <시사평론가 김성완>이 본 김유신의 반란진압
- <프레임이론> “다르게 생각하려면 우선 다르게 말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에게 옷고름에 대하여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는 순간 여러분들은 옷고름에 대한 무한한 상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정치프레임으로 만일 김유신이 <비담의 난>을 진압할 때 “여성은 왜 왕이 될 수 없어?”하고 반박을 했더라면 아마 비담의 논리에 끌려가다 패배했을 것, 그러나 김유신은 그렇게 하지 않고 가짜별을 쏘아 올린 뒤에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다.” 는 것으로 임금의 권위에 아무도 도전할 수 없다는 프레임을 내세우게 된 것, 비담의 여성 자격론 프레임을 중국의 천자관 프레임으로 제압한 것으로 1,300여 년 전 현대정치의 프레임이론을 활용한 정치가 김유신
※ 프레임이론 : 정치·사회적 의제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본질과 의미, 사건과 사실 사이의 관계를 정하는 직관적 틀
- 프레임은 곧 언어의 힘으로 요즈음은 흔히 <기후변화>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온난화>라는 용어를 사용, 지구온난화의 이미지 ① 지구가 뜨거워진다. ②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기후변화>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 프레임이 달라진 것으로 탄소배출권을 두고 선진국에서 여러 가지 논쟁이 있는 것처럼 <기후변화>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환경을 위해서 지구의 에너지를 아껴야 한다는 이미지에서 이제는 좀 더 중립적이면서 반대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프레임 변화의 사례, 다르게 생각하려면 다르게 말해야 한다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꼭 필요한 말인 듯
〇 차기(次期) 왕위 계승자 김춘추의 행보
- 강력한 언어의 힘 “프레임을 장악한 자가 권력을 장악한다.” 프레임을 장악한 김유신이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비담과 연루된 반란세력을 제거하면서 확실한 실권자가 된다.
- 김춘추가 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은 이유?
성골(聖骨)만이 왕이 되는 시대에서 명분이 부족했던 것, 당시 성골(聖骨)은 선덕여왕의 사촌 동생 승만공주가 있었기 때문에 김춘추의 입장에서는 진덕여왕(승만공주)을 즉위시켜 차기에 왕이 될 명분을 갖추기 위한 것
- 진덕여왕을 왕으로 옹립시키고 실질적으로 막후에서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유교적 정치이념을 도입하여 새로운 정치를 내세우며 중국 문물을 수용하고 새로운 신라를 만들기 위한 세력을 확보해 나간다.
〇 킹메이커 김유신
- 654년 진덕여왕이 후계자 없이 승하, 마침내 김춘추는 신라 제 29대왕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하는데, 폐위된 왕의 손자로 오랜 기다림 끝에 왕좌(王座)를 차지한 김춘추는 가야국 김유신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신라 최초로 진골 출신의 왕이 된다.
- 비주류 김유신과 김춘추가 신라의 역사를 바꾼 것으로 김춘추의 입장에서는 폐위된 왕의 손자로 자신의 왕위계승을 반신반의했을 듯, 김유신의 입장에서 보면 왕위에 오른 김춘추를 보며 만감(萬感)이 교차했을 듯, 축국·말목 자르기·화형식·연날리기 등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그 숱한 퍼포먼스 때문에···
- 폐쇄적 신라 왕실을 극복하고 폐위된 왕의 손자를 왕위에 올린 김유신은 왕재(王才)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있지 않았을까? <삼국유사>의 기록에 국가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갑자기 큰 호랑이가 뛰어들자 알천(상대등)이 호랑이 꼬리를 잡아 휘둘러 쳐 잡는 상황이 발생하는데, 호랑이를 잡은 알천의 담력보다 모든 공들은 김유신의 위엄에 복종했다는 기록으로 호랑이를 잡은 알천을 넘어서는 김유신의 대단한 카리스마, 김춘추의 강력한 힘 뒤에는 김유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 킹메이커 김유신이 받은 특혜?
기록상에는 나오지 않고 실질적으로 2인자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상대등의 자리에 금강이라는 사람이 임명하고 660년인 무열왕 7년에 금강이 죽게 되자 최고 관직 상대등에 임명된 김유신은 이때부터 정치적으로 1인자 역할을 하게 된다.
- 김유신이 왕실의 일원으로 자리를 굳히게 하는 사건, 김춘추의 딸인 지소와 김유신이 결혼을 하게 되는데, 환갑의 나이에 조카와 결혼하게 되는 것으로 왕의 사위로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김유신
- 김유신의 꿈은 다 이뤄졌을까?
김유신 사후 160년이 지난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존(追尊), 신하로서 왕으로 추존된 특별한 사례로 원래 장군묘였으나 추존 후 왕릉으로 모습을 갖춘 김유신 묘, 우리 역사상 역성혁명 아니면서 왕족이 아닌 백성으로서 왕이 된 유일한 사례
-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김유신, 그 이유는?
김춘추의 경우에는 내치와 외교를 아우르는 정치인이었지만 김유신의 경우에는 오직 국방에 전념하고 백전백승의 장군이자 충신이었던 점,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소정방이 의자왕을 데리고 당나라에 갔는데 당 고종 왈(曰) 왜 신라를 치지 못했느냐고 묻자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섬기기를 마치 아버지나 형을 섬기듯 하여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삼국사기 제42권 열전 제2> 김유신이 국민 대통합을 이끈 것이고 후대의 이미지도 김춘추는 당나라를 끌어들였지만, 김유신은 다시 당나라를 쫒아낸 이미지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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