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쿠데타를 일으키다.
〇 개요(槪要)
- 642년 고구려에 피바람이 몰아치면서 100여 명의 귀족들이 살해되고 영류왕마저 토막 난 시신으로 버려지는 사건으로 우리에게 위대한 장수로 알려진 연개소문과 잔인한 쿠데타의 기록, 과연 그는 역적 VS 영웅 어떤 모습이 진짜 연개소문일까?
- 642년 연개소문이 천리장성 축성 총감독으로 임명되고 요동으로 떠나기 전(前) 열린 대규모 사열식, 그런데 그 자리에서 연개소문이 칼을 들었다! 그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100여 명의 귀족들을 살해하고 그 길로 궁(宮)으로 향하는 연개소문, 결국 영류왕까지 연개소문에게 죽임을 당한다. “말을 달려 궁궐로 들어가 왕을 시해하고 시신을 여러 토막으로 잘라 도랑에 버렸다.” <삼국사기>
〇 연개소문 그는 누구인가?
- 교과서에도 등장하지 않는 연개소문의 <쿠데타>, 연개소문 하면 당(唐)에 맞서 싸워 고구려를 지켜낸 장수로만 알았는데, 과연 그는 역적인가? 영웅인가? 드라마 속의 진실은? ① 드라마 <대조영>에서 대조영의 등을 밟고 말에서 내리는 연개소문 ② 드라마 <칼과 꽃>에서 영류왕의 조카 장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하는 연개소문 ③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신라 김춘추의 동맹제의를 거절하는 연개소문, 이 상황들은 모두 사실로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 존재 “연개소문은 매번 말을 타고 내릴 때마다 항상 귀족 출신의 무장(武將)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발판으로 삼았다.” &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장(훗날 보장왕)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 642년 신라 김춘추가 백제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구려에 동맹을 제의 “김춘추를 가두고 죽이고자 하였으나 미처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삼국사기>
- 쿠데타 이후는 권력을 잡았으니 최고 통치자이지만 관련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연개소문, 중국의 사료에는 종종 등장하지만 부정적인 기록들이 많고 멸망한 고구려 장수 연개소문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은 <삼국사기>, 생사 일자조차 1~2년의 차이로 이설이 전해질 정도로 확실하게 알 수 없다보니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도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것, 사실 연개소문의 실상을 추적해가는 과정자체가 고구려 말기인 7세기 정치적인 격동의 모습을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것
-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바라본 연개소문은 부정적 “연개소문은 바른 도리로 나라를 받들지 못하였고 잔인하고 포악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동하였으니 대역죄를 짓기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 비난을 받았던 것은 연개소문이 성리학적 기준에서의 충에 반하는 행위를 했다는 것 ① 쿠데타를 일으킨 역적 ② 중국에 사대하지 않고 전쟁을 벌였다는 것
- 연개소문의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의 대 정치가이자 대 장군”으로 박은식 선생은 “국가의 존엄을 지키고 대륙을 호령했던 절세의 영웅”으로 표현하는데 당시는 일제강점기로 연개소문처럼 당나라에 맞서 끝까지 싸운 불굴의 민족정신을 담고 있는 인물이 필요했던 시기
-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시대가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연개소문, 조선시대 · 일제강점기의 평가에서 벗어나 오늘 날 우리의 가치기준에서 보는 연개소문은?
〇 연개소문, 왜 쿠데타를 일으켰나?
-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대대로, 세습사회의 고구려에서는 아버지의 대대로의 직책을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연개소문의 관직세습을 반대하고 나선 귀족들 “나라 사람들이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고 연개소문을 미워하였으므로 그 직위에 오를 수 없었다.” <삼국사기> 또한 정치적인 이유로 연개소문 집안의 권력독점을 경계한 귀족들
※ 대대로 : 고구려 제1위의 관등으로서 국정을 총괄하는 총리직
- 연개소문의 조부(祖父)도 막리지 부친(父親)도 막리지, <삼국사기>에는 대대로로 기록하지만 누대에 걸쳐서 최고의 권력을 차지하게 되는데, 사실은 7세기 고구려 후기에 형성된 귀족연립체제에서는 대대로의 직책은 통상 3년 임기가 원칙이어서 세력균형이 맞지 않으면 “귀족들이 서로 싸워 가장 강한 자가 대대로가 되었다.” <한원, 고려기> 연개소문의 가문에서 귀족연립체제의 원칙을 무시하고 권력을 독점으로 운영했던 것
- 연개소문도 이를 인식했던지 그간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귀족들에게 사과하면서 그 지위를 이어받게 되지만, 여전히 연개소문을 경계한 영류왕과 귀족세력 “왕이 서부대인 연개소문에게 명령하여 천리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연개소문을 중앙정계에서 배제하려는 정치적 노림수로 천리장성 축조책임자의 직책을 맡긴 것 “여러 귀족과 영류왕은 몰래 연개소문을 죽이려고 논의하였는데, 일이 새어나갔다.” <삼국사기> 결국 연개소문은 가문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영류왕의 조카 장(훗날 보장왕)을 내세워 왕위계승을 하게하고 실질적으로는 자신이 인사권과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선을 건국했던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성공시킨 이후에 공양왕을 허수아비 왕으로 옹위한 뒤 자신의 실권을 행사 하듯이 권력을 보장받기 위한 방법으로 <보장왕>을 내세운 연개소문
※ 위화도 회군 :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〇 연개소문, 당(唐)에 맞서다.
- <드라마 칼과 꽃> 642년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그 날, 대당(對唐) 강경파 연개소문 VS 대당(對唐) 온건파 영류왕의 대결, 수(隋)나라가 멸망 후 중원을 통일한 당(唐)나라, 수(隨)와의 전쟁은 고구려 지배층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훈이었기에 또 다른 전쟁을 피하기 위해 당(唐)에 유화책을 취하는 영류왕과 귀족들, 당(唐) 역시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
- 영류왕의 유화책 ① 수나라의 포로 만여 명을 당으로 보냄 ② 세자를 당에 보내 조공 ③ 고구려의 지도 강역도를 바침, 영류왕의 입장에서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은 거두었지만 고구려가 입은 피해 역시 심각했던 것, 게다가 수(隨)는 적이었지만 당(唐)은 아직은 적은 아니라는 것으로 전쟁은 싸워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
- 연개소문 VS 당(唐) 태종?
고구려에 우호적이었던 당 고조(高祖), 그러나 그의 아들 당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에 적대적 태도, 대표적인 사례로 사신을 보내서 고구려에서 세운 중국 전승(戰勝) 기념탑을 무너뜨려 버리는 것 “631년 당(唐)이 수(隨)나라 전사자의 해골을 묻은 곳에 와서 제사지내고 당시에 세운 경관을 허물어 버렸다.” <삼국사기>
-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의 명분 ① 수나라의 복수 ② 신라 공격에 대한 징벌 ③ 가장 핵심적인 것은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의 제거, 그래서 연개소문이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이고 침공의 결정적 사건은 당나라 사신을 토굴에 가둔 것이 전쟁으로 비화된 것
- 사실 당 태종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것이 당 고조와 함께 수(隨)를 무너뜨리고 당(唐)을 건설한 혁혁한 공은 세웠지만 당 태종은 원래 왕위를 이을 세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626년 형과 아우를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당 태종으로 아무리 봐도 허술한 전쟁명분, 당 태종의 야심은 동북아에서 유일한 강국 고구려를 복속시켜야 진정한 동북아의 패자라는 생각이 고구려 침략의 결정적 배경, 당시 당나라는 중국 대륙을 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북쪽의 돌궐을 복속시키면서 동북아의 최강자로 부상했는데, 당나라의 유일한 걸림돌이 있다면 고구려였다는 것
〇 고당(高唐)전쟁, 연개소문에게는 기회였다?
- 645년 결국 고당(高唐)전쟁이 발발하면서 당 태종 이세민이 직접 정예부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불과 열흘 만에 요동성이 함락되고 연개소문이 보낸 지원군마저 참패하고 만다.
- 고당(高唐)전쟁 당시 당나라 군대는 오합지졸이 아니었나?
당시 당나라 군대는 ① 실전경험이 풍부한 병사 ② 최고의 전략가 당 태종 ③ 뛰어난 장수로 구성된 참모진, 당시 당나라 군대는 세계 전쟁사에서 손꼽히는 최강의 병력으로 한반도의 최강 고구려 VS 중국 대륙의 최강 당(唐) 군의 대결
- 연개소문의 입장에서는 64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645년 고당전쟁으로 위태롭고 당황했을 것, 하지만 연개소문의 입장에서는 고당전쟁은 승패를 떠나 쿠데타 직후 불안정했던 자신의 집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는 기회로 고당전쟁이 연개소문에게 미치는 영향 ① 총지휘권 장악 ② 요동지역의 반대세력을 소진시킬 수 있는 것, 고당전쟁의 발발이 연개소문에게는 오히려 기회(?)
- <고당전쟁>에서 당(唐)은 안시성을 최후의 결전지로 선택하고 싸우고 있으나 대반전의 드라마, 당 태종의 전군 후퇴명령을 한 것인데 요동성 함락 이후 당군(唐軍)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첫 째는 오골성을 격파하고 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는 것이지만 주변의 안시성이나 건안성에서 보급로를 차단시킬 수 있는 위험이 존재, 두 번째 방법은 안시성과 건안성을 격파하고 보급로를 안전하게 확보한 후 평양성으로 진격하는 것인데 이 방법을 택했던 것
〇 당(唐), 연개소문의 전략에 무너지다
- <안시성 전투>에서 당(唐)의 전략은?
당시의 전략은 안시성 벽 앞에 성벽보다 높은 흙산을 쌓아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흙산의 규모는 컸지만 튼튼하지가 않아 흙산이 거의 완성될 무렵에 갑작스런 폭우로 흙산이 무너지며 하루아침에 고구려의 기지가 되어 당(唐)군을 공격하게 되고 가을에 출격하여 겨울이 짙어지면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지친 병사들에게 당 태종은 후퇴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코너에 몰린 연개소문에게는 하늘이 도운 것
- 하늘뿐만 아니라 사람도 도운 것이 68일 간 성(城)을 지켰던 안시성의 성주는 연개소문의 쿠데타에 반대하던 대표적인 인물, 하지만 전쟁의 승리로 아이러니하게도 연개소문에게는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켜준 셈
- 평양에 있던 연개소문, 과연 고당전쟁 승리에 공이 있나?
연개소문은 중앙에서 고당전쟁의 총지휘자로 안시성 전투에서 설연타의 칸에게 당(唐)을 치도록 설득하고 실제로 당나라 장안에 근접한 하주지역을 공격한 설연타, 수도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당황한 당 태종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세마저 불리하게 돌아가자 전군 후퇴명령을 내렸던 것, 당(唐)은 건국 이후 줄곧 주변 이민족의 침입을 경계했는데, 당(唐)의 약점을 제대로 공략한 연개소문
- 당(唐)군의 퇴로는 얼마나 고생스러웠을까?
퇴로의 상황 “요택은 진흙과 바닥에 고인 물로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었다.” &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삼국사기> 심지어 당 태종이 직접 장작까지 짊어졌다는 위급한 상황, 그 후 고려 말에 이색은 <정관음유림관작>에서 “검은 꽃이 흰 것에 박혀 외눈박이 될 줄이야.”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러 왔다가 화살을 맞아서 눈을 잃었다는 것,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그 만큼 당 태종이 고구려에 참패한 후 병을 얻게 되고 자존심도 상하여 마음의 병도 생겼을 것이라는 것
- 우여곡절 끝에 당 태종은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사실 당나라 사람들이 고구려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멸망을 했지만, 당 태종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나라만은 보존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 하지만 중국 사료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 그런데 중국의 경극(京劇)에 연개소문이 등장
〇 중국 경극(京劇) 속의 연개소문
- 경극(京劇) 속의 연개소문은 당 태종을 쫒는 악역으로 자신들의 위대한 군주인 당 태종에 맞설 만큼 위협적인 장수였다는 뜻으로 중국에서도 연개소문의 용맹함을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로 주인공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연개소문을 강한 악역을 선택한 것
- 1996년 7월 경극 <독목관>에서 사용되었던 경극이 의상은 삼국지의 관우와 비슷한 검고 긴 수염과 잔혹하고 사나운 인상을 주는 파란색 얼굴, 연개소문은 화려하면서도 무서운 존재로 등장하고 사용하는 무기도 다섯 개의 칼로 비도술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 연개소문에 대하여 시종일관 비판적인 <삼국사기>에도 송나라 신종이 묻기를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기지 못했는가?” 하자 왕안석이 대답하기를 “개소문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의 재주와 용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
- 결국 당 태종은 649년 죽게 되는데 유언으로 “나의 자식들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 너희들이 이길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고구려를 공격하다 오히려 당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긴다.
〇 연개소문, 영웅이 되다
- 당 태종의 유언에서 보듯이 중국인들에게 고구려를 침략한 수(隨) · 당(唐)의 연이은 패배는 큰 상처로 트라우마가 생겼을 것, 연개소문은 고당전쟁 승리 후에 정치적 입지는 더욱 견고해지고 일반적으로 연개소문하면 안시성 전투를 떠올리지만, 안시성 전투 이후에도 연개소문이 직접 지휘해 승리를 거둔 전투는 백제 멸망 이후에 평양성 전투에서 당(唐)은 계속 압박을 하고 연개소문은 수성하고 있다가 당(唐)의 군량이 떨어지는 틈을 타 대승을 거두게 되는 <사수전투>
※ 사수전투 : 662년 제2차 고당전쟁, 당나라군이 몰살하고 고구려가 크게 승리한 싸움
- 조선시대 인조(仁祖) 때의 <승정원일기>의 기록 “연개소문이 비록 찬역한 도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적수가 없는 효웅(梟雄)입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도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을 장수로서의 능력은 인정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
- 쿠데타를 일으킨 역적이기는 하지만 당나라에 맞서 고구려를 지켜낸 영웅이라고 보기에는 충분한 인물, 문제는 연개소문이 죽고 불과 몇 년 후에 고구려가 멸망했다는 것은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흔한 말로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영국 역사학자 액트>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아니면 오히려 연개소문이라는 절대적 카리스마를 지닌 권력자를 잃어버린 것이 고구려에 치명타는 아니었을까?
- 개인적인 카리스마로 형성된 권력독점의 패해가 아니냐는 지적을 아니 할 수 없는 것이 한 인물의 죽음이 나라에 지나친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 자체가 국가운영이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증거로 시스템 구축이 안됐다는 것
〇 연개소문의 죽음, 그 후
- 고당전쟁의 승리로 명실상부 고구려 최고의 권력자가 된 연개소문, 스스로 태(太)대대로라는 초법적인 관직에 올라 강력한 힘을 휘두르면서 생전에 여러 아들들에게 높은 관직을 주어 권력을 자신의 가문에 집중시킨다.
- 그런데 연개소문이 죽고 몇 년 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순식간에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는 멸망하는데, 한때는 요동 땅을 호령했던 대제국이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
- 중국에서 발견된 연개소문 아들인 후계자 <남생>의 무덤, 연개소문 사후 남생이 권력을 이어받지만 그의 아우들인 남건·남산이 반기를 들고 이어지는 권력다툼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병력을 내어 남생을 토벌하니 남생이 달아나 국내성에 웅거하면서··· 그 아들 헌성으로 하여금 당(唐)에 나아가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당(唐)의 앞잡이가 되어 쳐들어오는 남생은 아버지 연개소문의 이름에 먹칠을 한 셈
- 연개소문의 자식 간의 분쟁이 일어나자 연개소문이 살아 버티고 있을 때에는 결집해 있던 중앙과 지방의 세력들도 남생이 당(唐)에 투항한 이후 요동·만주지역의 세력들이 고구려를 이탈하여 당(唐)에 투항하게 되는 것
- 가문의 권력 독점을 위해 자질을 갖추지 못한 아들에게 지위를 세습한 연개소문의 과오는 자유스러울 수 없는 것, 이를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 큰 아들 남생은 18세에 중리대형으로 이는 온달장군이 맡았던 직책으로 23세에 위두대형으로 요동성주 급, 그리고 28세에 막리지+삼군대장군으로 이때 싸운 기록이 있는데 참전한 전쟁마다 패배한 남생, 이런 식으로 연개소문이 어린 자식들에게 최고의 권력을 부여해주고 있었던 것
- 연개소문에 대한 민심은 어땠나?
연개소문이 행차하면 사람들이 모두 피했을 정도로 독재정치와 전쟁영웅에게 등을 돌린 민심으로 이 정도의 공을 세웠으면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외면당하는 신세, 하지만 한 개인에게 국가의 흥망성쇠의 책임을 묻는다는 건 지나친 것 아닌가(?)
- 고구려가 멸망한 결정적 이유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당시 최고의 책임자였고 국가를 이끌어갔던 사람이 연개소문이었기 때문에 멸망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 국제정세에서 보는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원인은 <나당연합>으로 김춘추가 고구려를 방문했을 때 현명하게 대처했다면 나당연합을 막았을 수도 있었고 또한 나당연합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에 뚜렷한 대응을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연개소문은 국제정세를 읽고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지 않았나(?)
- <나당연합>이 이뤄지면서 백제를 멸망시키고 한반도 남쪽에 당나라 군대가 진주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고 이를 통해 당(唐)은 북쪽 요동에서 신라는 남쪽에서 고구려를 협공할 수 있는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
-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데에 집착하는 지도자는 한 국가의 미래를 이끌 수 없는 것이고 쿠데타를 일으켜 백여 명의 귀족들을 살해한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운영할 인적자원을 몰살시킨 것으로 1589년 선조(宣祖) 때 <기축옥사>로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 1,000여 명이 모반혐의로 화를 입은 사건을 맞으면서 국가를 운영할 인재를 잃게 되면서 임진왜란이라는 위기를 맞게 되는 것
- <임기환 교수>의 분석은 역사를 보면서 국가최고지도자가 나라를 이끌면서 가져야 할 최고의 덕목은 공공성으로 공적인 기반 속에서 국가를 운영해야 백성도 따르고 국가 시스템도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되지만, 지금까지 봐왔듯이 연개소문의 사적 권력독점은 고구려의 정상적인 국가운영시스템을 파탄시킨 것, 그런 점에서 연개소문은 진정한 영웅도 아니고,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이유만으로 역적으로도 볼 수 없는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치가(?) 더욱이 연개소문의 실패가 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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