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전쟁> 신라 문무왕, 당(唐)과의 전쟁을 선포하다.
〇 신라 VS 당(唐)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
- 최고의 군사 강국인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신라! 그런데 7년간 계속된 나당전쟁의 시작은 신라의 선제공격이었다?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통일을 이룩하기까지! 신라 삼국통일의 과정을 낱낱이 밝힌다.
- <나당전쟁>의 승리로 삼국통일(?) 고구려의 광활한 땅을 잃은 반쪽짜리 통일(?) 오죽하면 요즈음은 <통일신라시대>보다는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시대>가 맞지 않느냐? 흔히들 <나당전쟁>하면 신라와 당(唐)이 싸운 전쟁으로 생각하지만, 신라의 병사들 중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도 같이 싸운 전쟁이라는 것에 의미, 자신을 멸망시킨 적국인 신라와 손을 잡고 싸운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 신라와 당(唐)이 전쟁을 하게 된 배경?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서 그 상황을 살펴봐야 하는 것이 <나당연합>의 계기는 고구려 정벌에 번번이 실패한 당(唐)과 백제에게 끊임없이 침략을 받은 신라, 이 상황에서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밀약을 맺는 것 “평양의 이남 백제 토지는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영원토록 평안하게 하리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 하지만, 660년 백제 멸망 후 태도를 바꾼 당(唐)은 백제 땅을 독차지 하겠다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할 뿐만 아니라, 신라에도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동맹관계가 아닌 상하의 주종관계취급을 했던 것, 당시는 663년으로 아직 북방에는 고구려가 있어서 고구려 멸망 668년까지 명맥만 유지된 나당연합, 신라입장에서도 언젠가는 당(唐)과 한번 붙겠구나! 하는 생각을 이때부터 하고 있었던 것
- 665년 8월의 <취리산 회맹식> 신라 문무왕과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 융에게 당황제의 명령이라며 화친을 강요하는 당(唐)의 장수 유인원, 신라에게 백제는 아직까지 철천지원수로 마지못해 화친을 약속하는데 “665년 8월, 웅진 취리산에서 맹약을 맺었다··· 이 때 흰말을 잡아 맹세했는데··· 말의 피를 입술에 발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5년> 신라를 망국인 백제와 동격으로 끌어 내린 당나라, 문무왕에게는 매우 치욕적이었던 취리산 회맹식
※ 취리산(就利山) : 충남 공주시에 위치한 산
〇 신라의 대(對)당 전쟁 준비
- 신라는 당(唐)과의 전쟁에 어떻게 대비했나?
668년 평양성 전투를 끝으로 멸망한 고구려, 신라군도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데, 평양성이 함락되기 직전 왜(倭)로 간 신라 사신, 백제와 고구려 멸망의 주요원인은 신라와 당(唐)의 협공으로 신라의 입장에서는 곧 있을 당(唐)과의 전쟁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왜(倭)의 배후공격에 대하여 사전준비를 하기 위한 것
- 신라 VS 당나라 전쟁 준비 ① 사전에 왜(倭)와 화친해 협공예방 ② 대대적인 사면과 구휼실시 “669년 2월 21일,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 이하로써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은 죄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모두 석방하고···” & “훔친 물건을 돌려줄 재물이 없는 자에게는 징수의 기한을 두지 말라.” & “여름 5월, 백성이 굶주렸으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9년> 민심안정과 죄수의 사면은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
- 신라가 전쟁을 준비하는 사이 당(唐)은?
669년 겨울, 당 황제는 신라무기기술자 <구진천>을 보내라는 명령을 하게 되는데, 구진천은 천보노(千步弩) 제조기술자로 천보노는 방아쇠를 사용하는 활로 사정거리가 무려 1,000보나 되어 당나라에서도 탐을 냈던 것, 구진천은 당나라에 가서 천보노를 만들지만 30보밖에 날지 못하게 되고 재질 탓으로 핑계를 대지만, 신라에서 자재를 직접 가져오게 하여 다시 만들어도 60보밖에 날지 못하자 자재 이송 중 습기 탓으로 돌린다.
- 구진천은 어떻게 됐나?
당나라가 천보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끝까지 만들지 않았을 것으로 구진천은 당나라에서 죽임을 당했거나 울분 속에서 일생을 보냈을 것으로 추측, 일제강점기인 1939년 5월 28일 동아일보 특집기사로 다뤄진 신라의 구진천, 당(唐)의 압박에도 끝까지 신라에 대한 절개를 지키려다 비운의 주인공이 된 것으로 자신이 만든 천보노가 동족을 겨누게 될까봐 당 황제의 명령을 끝내 거부한 것, 만일 당(唐)에서 천보노를 만들었다면 <나당전쟁>의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
〇 신라의 당나라 선제공격, 나당전쟁의 서막이 오르다.
- 구진천이 당(唐)으로 간 때는 669년 겨울로 670년 3월 신라가 당(唐)을 선제공격하는데, 당(唐)공격을 위해 연합한 신라 <설오유>와 고구려 부흥군 <고연무>, 이들은 각각 1만 씩 총 2만의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격하여 당시 요동을 장악하고 있던 당(唐) 휘하의 말갈병과 싸워 대승을 거둔다. “670년 4월 4일 대적하여 싸워서 우리 병사가 크게 이겼으니 목을 베어 죽인 숫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 신라의 요동 선제공격, 7년(670~676년)간의 나당전쟁 서막이 오른 것이다!
-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의 연합, 어떻게 가능했나?
<나당전쟁> 1년 전 “669년 2월, 임금(고구려 보장왕)의 서자 안승이 4천여 호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보장왕> 당나라가 고구려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고구려 부흥을 위해 신라에게 협조를 요청한 것
- 고구려를 멸망시킨 나당연합의 한 축인 신라와의 연합 쉽지 않았을 텐데···
<임기환 교수의 분석> 신라와 당(唐)의 분열조짐을 읽은 고구려 부흥군, 신라의 목적은 백제의 영토를 차지하는 것, 하지만 당(唐)은 백제유민을 지원하면서 백제 쪽으로 신라세력이 확장해 오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
- 그런 입장에서는 신라는 백제 땅을 놓고 당(唐)과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하는 것 + 고구려 부흥군은 고구려 땅에서 당(唐)을 몰아내려는 의지로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의 공동목표는 당(唐)을 축출하는 것이어서 손을 잡게 되는 것
-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 연합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
요동 선제공격 이후 신라는 백제 옛 영토에 영향력을 넓혀가면서 웅진도독부를 압박하는데, 당(唐)의 입장에서는 위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 고구려 땅은 고구려 유민들이 버티고 있고 신라가 바닷길마저 끊자 백제 땅에 고립된 당군(唐軍)
- 신라 문무왕은 670년 8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674년 9월에는 안승을 보덕왕으로 재차 책봉 “안승은 은혜를 베풀어준 신라의 덕에 보답하라는 뜻”으로 보덕왕이라 쓰고 신라의 신하라 읽게 하는데, 보덕왕 책봉의 의미는 안승을 왕으로 임명해 스스로를 황제 급으로 격상시켜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격하시킨 당(唐)에 대한 교묘한 전략
- 오합지졸의 대명사 당나라 군대, 하지만 7세기 당나라는 동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국가로 당나라의 주력부대는 말갈족을 기본으로 한 기병(騎兵)으로 당나라 기병을 물리칠 신라의 대책은?
〇 신라의 장창당(長槍黨), 무찌르자 당나라 기병
- 문무왕 12년인 672년 편성된 신라의 <장창당>, 장창(長槍)은 멀리 있는 적(敵)을 공격하여 상대의 무기를 제압하는 방식으로 이 때 신라군이 쓰던 장창은 기병이 타고 있는 말을 공격하기 위한 것, 기병의 생명은 스피드로 빠른 속도로 적(敵)의 진영을 분산시키는 임무, 따라서 달려오는 말의 속도를 줄이는 것이 기병을 제압하는 주요관건으로 신라의 장창은 길이가 길어서 2인 1조로 사용하여 뒷사람이 창을 바닥에 밀착시켜 버텨주는 역할을 하고 앞사람은 달려오는 말을 조준하는 역할
- 장창당 공격법 ① 이중·삼중 장창 벽으로 선두에서 달려오는 말을 공격 ② 말들이 우왕좌왕할 때 칼이나 도끼로 제압 “당(唐)군이 말갈과 진영을 차리자··· 장창부대만이 따로··· 당병 3천여 명과 맞닥뜨려 그들을 잡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기병양성은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어 고비용의 당(唐) 기병에 맞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나 쇠로 만든 장창을 든 신라군은 장창 하나로 강력한 군사력의 당(唐)을 무찌른 것
〇 신라 VS 당(唐) 전쟁의 향방은?
- 당나라 공격대상은 고구려 부흥군이지만 672년 <백수성 전투>는 당나라 4만여 군대를 상대로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이 연합하여 백수성(황해도로 추정) 근처에서 벌인 전투로 이 전쟁에서 당(唐)은 패하고 퇴각하게 된다.
- 하지만 퇴각하는 당나라 군대를 쫓다가 석문(石門)에서는 대패하게 되는데 “672년 8월, 석문까지 뒤쫓아 싸웠으나 우리 병사가 패배하여 대아찬 효천 · 사찬 의문 등이 그 곳에서 죽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2년>
- 석문 전투관련 유명 인사인 김유신의 아들 <원술랑>, 전쟁에 패배하자 장렬한 최후를 맞고자 했으나 지금 죽어서는 안 되고 공을 세울 훗날을 도모하자는 부관의 청에 못 이겨 돌아왔지만 김유신은 <세속오계>의 임전무퇴를 어겼으니 내 아들이 아니라면서 부자절연을 하게 되는데, 그 만큼 신라의 패배에 김유신은 큰 충격을 받은 것
- 석문 전투 패배 후 김유신에게 자문을 구한 문무왕 “당나라 사람들의 계략을 예측할 수 없사오니 장졸들을 시켜 제각기 긴요한 곳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공격위주의 전략에서 수비중심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
- 실패한 작전에서 새로운 전략을 찾아냈다는 것, 게다가 김유신 같은 노장에게 지혜를 구하는 문무왕의 모습, 되는 집안은 뭐가 달라도 다른 법으로 국가 원로의 역할을 한 김유신과 원로에게 지혜를 구할 줄 아는 진정한 리더 문무왕
- 이때 김유신의 나이는?
26대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태종무열왕 · 30대 문무왕, 다섯 명의 왕과 함께한 김유신의 당시 나이는 석문전투 당시 78세
〇 문무왕의 굴욕외교
- 석문전투 패배 한 달 후인 672년 9월, 포로 170여 명을 당(唐)으로 송환하면서 당 고종에게 보낸 문무왕의 기막힌 국서 “황제폐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께서 구해주신 덕에 우리 신라가 겨우 멸망을 면했습니다. 몸과 뼈를 갈아도 큰 은혜에 보답할 수 없으며 머리가 부서져 재와 먼지가 되어도 어찌 그 은덕을 갚겠습니까? 그러나 철천지원수 백제가 우리를 멸망시키려 침입하였습니다. 파멸이 두려워 살아남으려다보니 억울하게도 폐하에게 역적이 된 것입니다. 부디 이 사정을 헤아리신 뒤에 벌을 내리신다면 종묘사직을 헐어 늪과 연못으로 만들고 제 몸을 찢어죽이더라도 달게 죽음을 받겠습니다.” 석문전투는 백제와 무관하여 앞뒤가 맞지 않는 문무왕의 사죄
- 문무왕이 굴욕적인 국서를 보낸 진짜 이유는?
이것도 문무왕의 교묘한 전략으로 봐야하는 것이 석문전투 패배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던 신라는 국서를 보내 시간을 벌고 당(唐)에게는 혼돈을 주는 효과를 노린 것, 한편으로는 신라 전역에 성(城)을 쌓을 것을 명한 문무왕, 이때 쌓은 대표적인 성(城)이 <주장성(晝長城)>으로 현재의 남한산성 옛터로 추정
- 당(唐)과의 전면전을 준비하는 신라는 고구려가 임진강에서 한강사이에 1~3차 방어선을 구축했듯이 신라도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 실제로 축성술의 대가인 고구려 유민들을 동원해 축성을 쌓아 방어선을 구축할 뿐만 아니라 공세적인 준비 “673년 9월, 임금이 대아찬 철천 등을 보내 병선(兵船) 백 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 & “674년 9월,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 설수진의 육진병법을 관람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 진(陳)을 치는 병법을 준비하는 것은 방어위주가 아니라 공격으로 적을 몰아내겠다는 뜻, 표면적으로는 당(唐)에게 굴종을 하며 실제로는 전쟁을 체계적으로 준비했던 것으로 화전양면(和戰兩面)의 전술을 펼친 것
〇 나당전쟁의 분수령 <매소성 전투>
- 드라마 <대왕의 꿈> 675년 9월, 매소성에 주둔한 당나라 20만 대군 VS 신라 군사는 3만에 불과,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결전인 매소성 전투
- 매소성은 어디?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로 추정, 구석기 유적지로도 유명하지만 <매소성 전투>가 중요한 것이 매소성이 무너지면 의정부를 통해 서울로 진격하는 것이 가능한 전략적 요충지로 반드시 이곳에서 적(敵)을 막아야만 했던 것
- 당 20만 VS 신라 3만, 선제공격(?) 무모한 짓 아닌가?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매소성 전투>의 병력 20만은 어쩌면 신라를 공격한 당군(唐軍)의 누적인원(?) 어쨌든 신라군이 당나라군에 비해 열세였던 것은 분명한 것
- 신라는 20만 당군(唐軍)을 어떻게 물리쳤나?
아쉽게도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675년 9월 29일, 이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하였는데··· 우리 병사가 공격하여 쫓아버리고 말 30,380 필을 얻었으며 그 밖에 얻은 병장기도 그 만큼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삼국사기 기록 자체가 후대에 전해오는 것들의 기록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과정이 전해지지 않고 결과만 적어야 하는 한계
- 나당전쟁은 670~676년 까지 7년 간 지속된 전쟁으로 승리와 패배가 되풀이 됐던 것이지만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인 전투가 675년 9월 29일의 <매소성 전투>로 당나라군도 더 이상 신라를 공격할 의지를 상실해 버렸다는 것으로 676년 11월 금강하구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물러날 생각을 했다는 것이 <매소성 전투>가 가지는 역사적 의의, 그러나 당 고종은 한반도에 대한 관심을 접은 것이 아니고 계속 눈독을 들이지만 당(唐)이 한반도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했던 결정적 사건
〇 나당전쟁의 숨은 공신? 토번(티베트)이라는 변수
- 한반도를 제외하고는 동아시아를 제패했던 당(唐), 그래서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더욱 공을 들이지만, 이 틈을 타고 서쪽에서 융성한 토번(티베트)
- 토번은 실크로드와 연결되는 지역으로 전략적·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어서 당(唐)에게는 한반도 보다 더 중요했던 것, 그래서 전력(戰力)을 그 쪽에 집중시키고 신라는 아쉽지만 포기를 하게 되는 것 “지난번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이래 매년 군대를 동원해 중원이 소란하니 짐은 지금까지도 이를 후회한다.” <신당서 권 216 토번전> 신라의 나당전쟁 승리의 요인은 토번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고···
〇 나당전쟁, 승리의 의의
- 지금까지 당(唐) 중심의 천하관을 완전히 좌절시킨 <나당전쟁>으로 평가를 받는데, 나당전쟁 이후 돌궐과 거란이 부흥하게 되고, 그 여파로 고구려 옛 땅에 698년 발해가 건국하게 되어 국제정세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 한편 당나라는 <나당전쟁>을 기점으로 주변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 신라를 승리로 이끈 내적 요인은?
신라는 누구와도 연합 할 수 있는 유연함과 토번의 동향을 읽어가며 국제정세를 읽는 안목을 갖추고 있었던 것, 또한 김춘추 이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면서 활력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이 시기의 신라를 보면서 격동기에 약소국이 살아남는 법을 보여주는 역사의 사례가 아닌가(?) 왜 통일의 주역이 고구려 · 백제가 아닌 신라였을까? 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는 것
- 조선 후기 안정복은 중요한 지적을 하고 있는데 “한쪽에 위치한 신라가 삼한을 통일한 것은 사실 인재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었습니다.” <안정복, 순암집> 김유신·김춘추·화랑 등의 많은 인재를 배출했기 때문에 통일의 과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것, 반면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통해 백여 명의 인재를 죽이게 되고, 백제의 의자왕도 말년에 신하들의 충언을 무시하여 나라를 잃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되는 것이어서 변화와 개혁에 유연한 대처와 인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신라의 삼한통일의 요인이었다는 것
※ 안정복(1712~1791) : 조선 후기 숙종 · 정조 대의 역사학자 · 실학자
- 신라 삼국통일의 그날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신라의 원래 목표는 삼한통일이 아니라 백제 영토를 차지하는 것, 하지만 당(唐)의 위협에 맞서 신라·고구려·백제의 유민들에게 공통의 적이 생기는 역사적 경험, 그 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를 깨닫고 삼한일통의 의식으로 확대발전하게 되고, 한편으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피정복국으로 여기지 않고 세 나라가 하나라고 인식하여 통일신라에 9주를 설치하면서 고구려·백제·신라 땅에 각각 3주씩 설치하고 고구려·백제의 지배층을 관료로 등용하여 통합의 정책으로 안정기를 구축한 것
- 이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사적 경험을 통해 그때그때 새로운 방식으로 소화해 낸 것으로 이것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배울 가치와 교훈이 아니겠는가(?) 가야출신으로 신라 최고의 권력자가 된 김유신(문무왕의 외숙)을 보며 백제와 고구려 유민을 다르게 보지 않고 포용하면서 융합한 문무왕, <톨레랑스 관용>의 정신으로 통합시스템 위에서 전쟁과 국방에 소모된 에너지를 경제·사회·문화에 투자함으로써 통일신라의 황금기를 구축한 것이 통일의 가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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