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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

mkpark2022 2015. 11. 30. 22:07

 

 

 

 

 

 

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

 

 


의자왕, 천신만고 끝에 왕이 되다

- 삼천궁녀를 거느리며 사치와 향락을 일삼다 백제를 멸망시킨 의자왕,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진실이 있다? 해동증자 · 중흥군주! 40대가 넘어서 왕이 된 의자왕의 사연은? 백제의 마지막 군주인 의자왕을 둘러싼 진실 파헤치기!

- 641년 백제 무왕(武王)의 뒤를 이어 31대 임금으로 의자왕 즉위하고 낙화암에 서린 삼천궁녀의 전설은 백제를 멸망에 이르게 한 방탕하고 무능한 군주의 상징, 어쩌다 그 에겐 이런 낙인이 찍히게 된 것일까?

- 서른이 넘은 나이에 태자에 책봉되고 왕위에 오를 때 그의 나이는 이미 40대 중반으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의자왕의 또 다른 모습, 여기엔 어떤 진실이 숨어있는 것일까?

 

백제 멸망의 상징, 낙화암의 전설 삼천궁녀

- 백제를 대표하는 이미지 <의자왕 · 삼천궁녀 · 낙화암>, 무령왕이나 무왕은 잘 몰라도 백제왕들 중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의자왕, 하지만 주색(酒色)에 빠져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무능한 왕의 상징

- 삼천궁녀와 의자왕 이야기 사실일까? <문안식, 전남문화재연구소 소장>

삼천궁녀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없고 <삼국유사>의 일부 기록, 그것도 바위에서 궁녀들이 떨어졌다는 기록만 전()해지고 여러 후궁과 죽임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이곳에 와서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태종 춘추공>

- 삼천이란 숫자는 조선 초기 문인들의 문집에 등장하기 시작 구름 같은 삼천 궁녀 바라보니···” <조선중기 문신 민재인의 백마강 부> 그런데 그 당시에도 삼천(三千)이란 숫자의 개념보다는 백제 멸망을 부채질한 의자왕을 조롱하고 비웃는 문학적인 상징에 불과한 것

 

백제 의자왕은 어떤 인물?

- 백제 31대 마지막 왕으로 아버지는 무왕(武王)이고 어머니는 선화공주(?) 아니면 익산 귀족의 딸(?), 37세 경 태자로 책봉되고 마흔 중반에 왕위에 오르며 별명은 해동증자, 증자(曾子)는 공자의 수제자이며 효()의 대명사로 ()와 신()을 도덕행위의 근본으로 삼은 의자왕 의자는 어버이 섬김에 효도를 다하고 형제간에도 우애가 깊으니 당시 해동증자로 불리었다.” <신당서> 성군(聖君)의 자질이 어릴 적부터 엿보였다는 이야기로 의자왕하면 망국(亡國)의 무능한 군주라는 느낌도 들 것 같은데, 의자는 의로울 의()에 자애로울 자()로 부정적 이미지와 달리 이름부터 남다른 의자왕

- 37세 무렵에 태자가 된 사연?

조선시대 대부분 10세 전후로 세자에 책봉하는데, 고대사회의 평균수명이 40세에서 37세경에 태자가 되다니(?)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 신라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았던 뛰어난 지략가 무왕(武王), 그의 재위기간은 42년으로 재위 33년인 무왕(武王) 말년에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는데, 늦은 나이에 태자에 책봉됐다는 것은 권력승계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는 의미당시 백제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된 사회여서 왕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차기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상황

 

의자왕 출생의 비밀, 비주류의 아들로 태어나다

- 의자왕의 어머니는 누구?

<부여의 융 묘지석>을 통해 의자는 595년에 태어나 무왕(武王)이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어 왕이 되기 전() 익산의 귀족(?) 아니면 선화공주(?)와 결혼해 의자를 낳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

- 사택적덕의 딸 사택왕비는 의자왕의 계모로 추정되고 백제 후기 대표적 귀족 가문으로 대성8족의 하나였던 사택가문의 정치적 힘은 무왕(武王)에게도 필요했을 것이어서 연결이 됐을 것

- 의자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이복형제들은 대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은 단지 장자일 뿐 나이는 들어가지 어머니 사택왕후는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고 태자책봉은 되지 않아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듯하고 만일 친모가 선화공주라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지는 것

- 당시의 태자책봉 상황을 말해주는 또 다른 기록?

“6313백제왕 의자가 왕자 풍을 들여보내 볼모로 삼았다.” <일본서기 권23 서명천황 3> 일본서기는 워낙 둔색(鈍色)이 심해서 여러 자료를 꼼꼼히 따져봐야 되겠지만 여기서 풍은 무왕(武王)과 사택왕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아닌가로 추정(?)

- 중요한 것은 풍을 왜국(倭國)으로 보낸 다음 해인 632년 태자에 책봉된 의자, 사택 왕비의 아들 풍 VS 비주류의 아들 의자 사이에서 태자책봉을 두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져 풍의 세력이 밀린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

- 한편 뒤집어 생각해 보면 무왕(武王)의 입장에서는 후계자는 선화의 아들로 생각하고 무왕(武王)의 왕권이 안정될 때까지 태자책봉을 미루지 않았는가(?) 조선시대 광해가 비슷한 처지로 당시 후궁의 소생이었지만 대안이 없었기에 선조(宣祖)의 입장에서도 다른 왕자와의 사이에서 저울질하고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 눈 밖에 나지 않으려 더욱 모범을 보였듯이 의자 역시 비주류의 아들이란 꼬리표를 없애려 철저히 해동증자로 살았을 듯

- 당시 효()의 판단 기준은 아버지 무왕을 도와 태자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가? 로 봐야할 것 같고 그 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효()로 비치는 것, 광해군의 경우 분조를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광해군의 뜻에 거슬리니 사람들은 효()로 봐주지 않았듯이···

 

백제는 지금, 백제 40인의 추방사건

- 641년 드디어 왕위에 오른 비주류의 아들 의자왕은 내좌평 · 의자왕의 이복 조카(풍의 아들 교기로 추정)4명의 누이동생까지 고급 인사가 대거 포함된 추방사건으로 그해 정월에 사택왕후는 사망한 뒤여서 더욱 충격적인 것, 의자왕은 작년에 즉위하고 올 정월에 계모인 사택왕후가 사망하고 이복 조카 등은 추방, 효의 상징인 해동증자였던 의자왕의 반전(?)

- 일각에서는 귀족들 추방사건의 배후에 의자왕이 있다는 것으로 사택 씨 제거의 신호탄이라고 제기하기도 하는데,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의자왕(?) VS 우연의 일치(?) 백제 왕실의 향후 행보에 귀추가 주목된다.

- 40인 추방사건의 진실?

641년 의자왕 즉위 11월에 대좌평인 사택지적을 권력 핵심에서 배제시키고 642년 정월 사택왕후 사망하고 이어서 이복 조카 등이 망명길에 오르게 되는데, 의자왕은 태자책봉 때부터 정적인 사택왕비 세력을 제거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추정(?)

- 권력의 핵심 사택세력 제거, 그 후?

성충·흥수·의직·윤충 등 새로운 핵심세력을 등용하는데, 이들은 후기 백제를 이끌었던 대성8족 가문이 아닌 정권에서 소외받았던 새로운 인물로 친위세력을 구축하고 40여 명 추방사건 2년 후에 왕자 융을 태자에 책봉하고 왕권강화에 박차를 가한다.

 

의자왕, 88년 만에 신라에 복수하다

- 554, 나제동맹을 깨뜨린 신라에 대한 백제의 복수전이 시작된 관산성 전투, 하지만 성왕(聖王)이 무참히 참수되며 백제는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 그 후 642년 백제 의자왕은 대() 신라 전을 감행하여 신라의 40여 개 성을 빼앗고, 이어 신라의 서쪽 방어선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대야성 공격에 나선 백제는 신라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의 목을 베고 대야성 함락에 성공하여 성왕(聖王)의 죽음 이후 88년 만에 이뤄낸 백제의 설욕전

- 백제 성왕(聖王)의 입장에서 다시 보는 <대야성 전투>, 신라에겐 위기 VS 백제에겐 설욕전 의자왕이 642년 즉위 후 가장 먼저 벌인 대 신라 전으로 아버지 무왕(武王) 때부터 끊임없이 신라를 공격하는데, <대야성 전투>가 백제의 설욕전인 이유 대야성은 합천지역으로 신라의 수도 경주를 위협 훗날 태종 무열왕이 된 김춘추의 사위였던 대야성 성주 김품석 가족의 처형방식, 백제의 성왕(聖王)은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고간(高干) 도도에게 참수당하고 두개골은 신라의 관청 내 계단아래 묻어 버리는데, 88년 뒤 김춘추의 사위가 비슷한 운명에 처하는 신세

- 어떤 사료에는 김품석이 스스로 자진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검일을 잡아··· ‘네가 대야성에서··· 품석 부부를 핍박하여 죽였으니···” <삼국사기 제15권 신라본기 제5 태종왕> 김품석이 죽임을 당한 뒤 두개골이 백제의 감옥 바닥에 묻혀 죄수들이 밟고 다니게 하여 사후에 모독을 주는 방식으로 신라가 성왕(聖王)에게 한 그대로 복수한 백제

- 고대사회에서는 중국의 대표적 고사 중 와신상담(臥薪嘗膽)을 보면 한번 당하면 끝까지 복수를 한다는 의식이 강했던 것, 한편 대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 윤충에게 말 20필과 곡식 1천석의 파격적인 포상, 이는 88년 전 관산성 전투에서의 패배를 확실하게 씻어내려는 모습을 보인 것

- 삼국시대 전쟁과 보복의 상관관계?

6~7세기 삼국시대 전투의 특징은 통일이라는 대의(大義)나 명분보다는 자신들이 당한 치욕에 대한 설욕전개념이 강했는데 고구려 온달 장군이 신라에게 빼앗겼던 고토회복전투나 백제의 무왕(武王)과 의자왕이 성왕(聖王)의 복수를 위해 벌인 무수한 전투들이 이러한 설욕전에 해당되는 것, 오늘날에는 사적(私的) 복수는 법으로 엄금하지만 고대사회의 복수는 개인의 의무이자 관습법으로 보장, 왕이 자신의 부모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서야 어찌 국가를 이끄는 왕이 될 수 있느냐?는 의구심이 끊임없이 제기될 수도 있었던 것.

- 일반전투와 설욕전에 차이가 있을까?

6세기 나제동맹이 깨진 후 감정의 골이 깊어진 백제 VS 신라이기에 유독 복수에 대한 설화가 많은데, 복수 설화에서 유래된 검법(劍法)이 지금까지 존재, 본국검(本國劍) 다른 말로 신라의 검법이라 해서 신검(新劍)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왕에게 죽임을 당한 화랑 황창랑의 아버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백제로 간 황창랑은 저자거리에서 칼춤을 추고 인기를 끌자 국왕도 궁금해 하던 차에 국왕 앞에서 칼춤을 시연하다 왕을 공격하여 살해하고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자신도 죽임을 당하는데, 신라 황창랑의 설화에서 유래된 본국검의 기록은 조선 후기 무예 훈련교범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돼 있고, 조선 후기 무예청 무사들의 필수 검법이었던 본국검

 

반전(反轉)의 사나이, 의자왕

- 무왕(武王)의 뜻을 이어 강한 백제를 꿈꾼 의자왕, () 신라 전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민심수습 차원으로 죄수를 사면하면서 애민군주로 고구려와 당나라를 오가는 실리외교를 추구하고 유교정책 실시로 왕권을 강화해 나간다.

- 무왕의 정책을 계승한 의자왕, 재위 20년 간 10여 차례 신라를 공격하는데, 주로 백제가 공격하고 신라가 밀리는 양상으로 사실상 신라보다 비교우위를 보인 백제를 이끌어나간다.

- 그동안 황음(荒淫) · 무능(無能)한 군주로만 알려졌던 의자왕, 실제로 648년 김유신은 대야성을 되찾기 위해 진덕여왕을 찾아가지만 작은 나라큰 나라를 범하려다 위태로워지면 장차 어찌하겠는가? 라고 말하니···” <삼국사기 제41권 열전1 김유신> 신라는 당시에도 백제가 크고 강한 나라로 인식했던 것

 

의자왕의 숨은 외교술?

- 당시 주변국과의 관계는?

7세기 삼국의 정세분석, 고구려와 백제는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전사하면서 철천지원수관계,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등장하면서 고구려는 당()과의 관계가 좋지 않고 ()은 백제와 신라에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던 상황에서 백제가 신라를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자칫 잘못하면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서 고립될 수도 있는 상황, 그래서 의자왕은 실리 외교를 위한 수단으로 643제려화친(濟麗和親)을 맺는다.

- 의자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은 이유?

당나라의 침공을 막아주는 역할 또한 신라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양국이 화친관계를 맺은 후 645년 고구려의 요동지방을 공격한 당나라, 이때 당()을 도와 신라군이 고구려 후방을 공격하는데, 신라의 전력이 분산된 틈을 노려 의자왕은 신라의 7개의 성을 빼앗게 된다.

- 고구려와 손잡은 백제, 고구려와 당나라는 적대관계 그럼 백제는?

()과의 외교에도 공을 들인 의자왕, 당나라를 공략한 백제의 조공품은 황칠갑옷으로 황칠을 갑옷에 칠하면 금빛이 난다고 백제가 황금색으로 칠한 갑옷을 바치니 당태종이 입고 나서니 군사들이 따랐다.” <삼국사기 제21권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당시 최첨단 기술인 황칠갑옷으로 당태종의 마음을 사로잡고 당태종은 이를 입고 고구려 침공에 나선 것, 의자왕의 실리외교 고구려와 화친 ()과 우호관계 유지

 

백제 멸망을 부른 의자왕의 변모

- 의자왕 재위 15년이 되던 해인 656임금이 승려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삼국사기> 달라진 왕의 모습에 좌평 성충이 간절히 고()하자 급기야 성충을 옥에 가둔 의자왕, 백제 멸망 4년 전()의 일이었다.

- 중흥(中興) · 강한 군주··· 지금까지 보아 온 의자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은 655년부터 갑자기 등장하는데 태자의 집을 수리하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 “궁궐 남쪽에 망해정을 세웠다.” <삼국사기>

- 역사의 기록으로 세종대왕께서도 교지를 내리는데 역사에서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취지에서 옛날 신라가 포석정에서 패하고, 백제가 낙화암에서 멸망한 것은 술 때문이다.” <세종실록 14331028> 술은 모든 화()의 근원으로 나라도 망하고 개인도 망하게 할 수 있다는 조언

- 백제 멸망의 원인, 의자왕은 정말 방탕했나?

뭔가 개연성 없는 의자왕의 변신으로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재위 15년이면 의자왕의 나이 환갑으로 연회를 즐겼던 조선의 국왕들도 연회를 즐겼지만 그렇다고 나라가 망하지는 않았는데, 백제 멸망을 초래했다는 황음 · 방탕한 의자왕의 기록은 과장(?)

- 기록으로는 반위(反胃, 위암)를 앓은 의자왕, 그동안 쉴 새 없이 달려왔지만 몸은 아프고 헛헛한 마음을 술로 달랜 것은 아닐까(?) 비주류의 아들로 수많은 스트레스를 견디며 살아온 의자왕이었기에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

 

백제 멸망, 의자왕에게도 잘 못은 있다.

- 말년에 의자왕이 질병의 고통에서 시달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의자왕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백제가 멸망한 것은 아닌 것 같고, () 신라 전에서 거둔 승리에 도취되어 자만심이 화근이었을까? 당시는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는데 고구려를 여러 번 침공하지만 연개소문에게 매번 실패한 당태종, 이를 지켜보던 의자왕은 고구려가 당()보다 세다고 판단하여 당나라 황제를 무시하고 단절한 것이 백제 멸망으로 이어진 것 아닌가 하는 추측(?)

- <7세기 국제정세 분석> 643년 무렵 백제는 고구려와 당()과의 양방외교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한 의자왕652년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게 되는데, 백제는 당()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오직 고구려와 연합하면서 왜()와의 연계를 이어갔던 것, 그러자 신라는 갇혀있는 신세로 연호·의복까지 바꾸며 당나라와 연합전선 구축에 나서는데, 이것이 7세기 동아시아의 <십자외교>로 고구려와 백제,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왜()의 관계가 구축

- 당신(唐新) 고백(高百) ()? 백제는 나당연합에 대비하지 않았을까?

당시 당나라가 바다를 건너서 백제를 공격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물론 백제의 성충과 같은 신하는 당나라의 해상공격에 대비할 것을 주장하여 백제의 수도 사비 앞의 금강입구에 방어망을 구축하자는 주장을 하지만 이를 무시한 의자왕, 사신들도 목숨을 걸고 오는 험한 서해 바닷길을 수많은 함선에 병력을 실고 바다를 건너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

- 당나라의 최종 목표는 고구려의 멸망으로 김춘추는 당()에게 백제를 먼저 치고 난 후에 양쪽에서 고구려를 협공하자는 제의를 하고 실제 6606월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군의 해상공격으로 불과 열흘 만에 막을 내린 700여 년 역사의 백제, 역사에도 기록되지 않은 백제 멸망의 진실?

- <삼국사기> 기록자체가 신라 중심으로 서술된 영향도 있지만, 역사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기본적인 역사의 기록이나 사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어떤 관점을 가지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

- 의자왕에 대한 오해 당나라에 의자왕이 포로로 끌려갈 때 백제 유민들은 유왕산에 올라 울며 다시 만나기를 기약했다.” <유왕산 설화> 만일 의자왕이 나쁜 왕()이었다면 백성들이 유왕산에 올라 울며 다시 만나기를 기약했겠는가?

- <문안식 교수>의 생각은 백제 멸망의 책임은 분명히 의자왕에게 있다지만 의자왕의 업적이나 긍정적인 측면은 제대로 평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부정적인 인식으로만 본다거나 사료(史料)에 있는 그대로를 해석하는 것은 역사의 실체에 접근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어서 나름대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 고구려 광개토대왕 · 신라 삼국통일 · 백제 의자왕과 삼천궁녀, 부정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던 백제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린 시간, 더욱이 삼천궁녀에 대한 기록은 어느 정사(正史)에도 없는 것으로 문인들의 창작이었다는 것을 이 시간을 계기로 알았으면··· <의자왕 편>을 보면서 역사는 승자가 쓰는 기록일 뿐만 아니라 기록으로도 가려질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은 분명히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