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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薩水大捷)
〇 수나라 100만 대군, 고구려를 침공하다.
- 612년 정월, 중국 북경 근처 탁군에 거대한 병력이 운집한다. 총 113만 3천 8백명 “고구려의 하찮은 것들이 어리석게도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에 오기를 꺼려한다. 지금 군율을 내려 출정하니 천둥같이 떨치고 번개같이 쓸어버려라!” 5년 동안 고구려의 원정을 준비한 수양제의 지휘아래 이들이 노린 곳은 바로 고구려로 출병에만 40일이 걸린 수나라 100만 대군, 동아시아 최강대국 수나라와 고구려의 대격전이 지금 시작된다.
- 모든 병사가 출병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40일로 7세기 동아시아의 판도를 뒤바꾼 대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는 정확한 숫자 “군사의 총수는 113만 3,800명이었는데··· 깃발은 960리에 뻗쳤다.” 깃발의 행렬이 서울에서 부산보다 먼 거리의 군사는 당시 한 나라의 규모
- 수양제(隋煬帝)가 직접 전쟁에 나선 이유?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혐의를 받은 수양제는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취약한 상황에서 고구려를 침공하여 반대세력을 잠재우고 왕권강화 목적을 위하여 직접 나선 것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유사한 상황
〇 수나라의 전력과 무기
- 수나라 병사 100만 명, 무슨 일을 했을까?
<삼국사기>에 구체적으로 기록된 숫자 1,133,800명, 좌·우군에 각각 12군으로 총 24군으로 구성되고 1군은 기병 4천명 · 보졸 1만 6천명 · 고취대(군악대)과 취중융기산병(보급품 운반) 및 친위대가 1만 7천 명 정도 (37,000 × 24군 = 88만 8천명) 여기에 황제를 지키는 어영군 22만 2천 명까지 약 111만여 명으로 구성, 수군은 제외된 숫자로 100만여 대군은 1차 세계대전 전까지 세계최대규모
- 수나라에 맞선 고구려의 전력은?
고구려 병력은 평상시에는 전체 인구의 1/20이 군사력으로 동원됐으나 고구려 VS 수나라와의 전쟁에서는 전체인구의 1/10이 징집된 것으로 추정되어 고구려 멸망 668년 당시 약 69만여 호로 5인 기준하면 약 34만 5천여 명의 병력
- 120만 VS 35만여 명의 전쟁, 수나라 군사의 1/4에 불과했던 고구려 병력은 당시 고구려가 수비하는 입장으로 병력을 분산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10배가 넘는 병력의 차이 정도로 추정해볼 수 있을 것
- 수양제(隋煬帝)는 병력만 동원한 것이 아니라 무기제작을 위해 기술자를 동원하여 부교(浮橋)를 만들어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만들어 건너고 특히 요동성을 공략할 때 썼던 <소차>는 엘리베이터처럼 상하로 움직이면서 성안을 정찰할 수 있는 차량, <포차(抛車)>는 수백 가닥의 고무줄을 한꺼번에 잡아당겨 돌을 성안으로 던지는 무기, <운제(雲梯)>는 긴 사다리를 차에 부착해 성벽을 올라가거나 정찰하는 무기, <당차(撞車)>는 거대한 쇠망치를 앞뒤로 흔들어 성벽이나 성문을 파괴하는 무기 등이 총동원 됐던 것으로 당시 세계최강의 전력으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맞서 싸웠던 것
- 100만 대군을 가능하게 한 수나라의 경제력?
수문제(수양제의 부친)가 50년을 소비할 재정을 비축했던 것, 하지만 전쟁의 그늘로 고통을 받았던 백성들 “물속에서 잠시도 쉬지 못하고 작업을 하다가 허리 아래에 구더기가 생겨 죽은 자가 열에 서넛이었다.” <자치통감>
- 심지어 전쟁 발발 1년 전(前)인 611년에는 내란까지 일어나고 <무향요동랑사가>라는 수나라 백성들이 고구려 침략을 반대하면서 입영을 거부하며 부른 노래가 유행하여 반전(反戰) 가요의 효시(?) 요즘도 Why do they always send the poor? 그들은 왜 불쌍한 사람들을 (전쟁터에) 보내는가? 하는 Bring your own bomb. <(B.Y.O.B) 수익자 부담 원칙>라는 2005년에 발표된 반전(反戰)가요가 인기
〇 수양제(隋煬帝)가 고구려를 침공한 이유
- 수양제가 침략한 이유?
당시 수나라는 5호16국 시대와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약 270여 년간 지속된 중국의 혼란기, 589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베트남 지역까지 복속시키며 자부심이 엄청났지만 고구려만이 수나라에 맞섰던 것
- 고조되는 긴장감 고구려는 왜 외교적 해결을 택하지 않았나?
수나라 건국 초기에는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던 것이 고구려도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남북조 혼란기까지는 중국과 형식적인 조공-책봉관계였으나,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급변한 관계는 고구려에게 신하로서의 의무를 요구하지만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 고구려도 수나라의 침공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는 것으로 광개토대왕·장수왕 때부터 쌓아온 고구려의 자신감이 있었던 것.
- 고구려가 대제국 수나라에 맞선 이유?
중국통일 초강대국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 없었던 고구려, 영양왕도 설마 100만 명이나 오겠어? 수양제의 입장에서도 이 정도면 한방에 항복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양쪽 모두 역사적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미숙한 결정들을 하지 않았을까(?)
-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한 직접적인 계기는?
결정적인 것은 607년 수양제가 복속지역을 순회하다가 돌궐 추장의 처소에서 고구려 사신을 만나게 되는데, 수양제에게는 깜짝 놀랄 대사건으로 수나라가 가장 어렵게 복속시킨 돌궐이 고구려와 사신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 당시 고구려는 온달을 출정시켰던 영양왕으로 고구려 전성기의 부활을 꿈꾸던 시기
※ 영양왕(590~618년) : 수나라 침략을 모두 물리친 고구려 26대 왕
〇 요동성 100만 대군을 저지하다.
- 612년 2월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 1차 방어선인 요하(遼河)에 다다르고 고구려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수나라 군대는 부교(浮橋)를 설치해 요하(遼河)를 건너고 1만여 명이 사망한 고구려군은 요동성(遼東城)으로 퇴각, 요동성을 둘러싸고 집중 공격한 100만 수나라 군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요동성, 이 전투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 100만 대군(大軍)에 맞선 고구려군의 전략은?
일단 강한 저항으로 맞서다가 전세가 불리해지면 항복하는 전략으로 고구려군은 허점이 있었던 수나라의 지휘체계를 역(易) 이용한 것 “수양제는 모든 군대가 나아가고 물라날 때 반드시 나에게 보고하고 나의 지시를 기다릴 것이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3년> 일일이 수양제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던 수나라 군, 기다리는 사이에 전력(戰力)을 회복해 다시 반격하는 고구려 군은 <기만전술>로 3달 가까이 요동성을 사수하게 된다.
- 어떻게 고립된 상태에서 3개월이나 버틸 수 있었나?
요동성(遼東城)은 요동지역의 최대 전략적 거점지로 수나라 침공에 대비해 미리 수십만 석의 군량을 준비하고 충분한 방어시설을 확보했던 것, 결과적으로도 100만 수나라군의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요동성 자체가 수(隋)의 공격을 견뎌낼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던 것.
- 또한 요동성주의 뛰어난 리더십이 있었기에 고구려군이 3개월 동안 항전했을 것이지만 애석하게도 역사의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은 요동성주, 고구려 VS 당(唐)과의 전투인 안시성 전투의 주인공인 양만춘도 당대의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고 후대의 기록으로 고구려 역사가 재조명되면서 복원된 기록
〇 고구려 산성과 방어체계
- 고구려 성(城)의 특징과 장점은? <양시은,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아쉽게도 현재 남아있지 않은 요동성, 현존하는 고구려의 성들을 통해 유추해보면 ① 지대가 높고 험준한 곳에 위치 ② 치(雉)같은 방어 구조물을 설치, 옹성과 어긋문을 등으로 대군이 성문 앞으로 집결할 수 없게 만들어 공격을 위한 공간 확보 자체를 차단한 것
※ 치(雉) :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쌓은 구조물로 적을 측면에서 공격 가능
- 고구려군의 공성무기 대비책은?
공성무기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성벽 축조로 고구려 성벽의 특징 ① 바깥쪽에 쐐기형 성돌 겉 쌓기 ② 안쪽에 북꼴형 성돌 채워 넣기를 하여 바깥쪽이 무너져도 안쪽 성 돌은 유지되면서 공격에도 끄떡없이 지탱할 수 있었던 것
- 요동성 함락 시 평양성까지 진격은 수월?
그렇지 않은 것이 철통같은 방어체계를 갖춘 고구려는 평양성으로 가는 길목 험준한 산마다 고구려의 주요 성(城)을 구축, 고구려의 1차 방어선인 요하(遼河)일대에 요동성을 구축, 2차 방어선인 압록강으로 가는 교통로에 수많은 성(城)을 구축, 3차 방어선인 서해안을 따라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둘레가 3Km 이상인 산성이 여러 개가 있고, 고구려의 최종 방어선인 평양성으로는 무려 4차까지 구축한 고구려의 방어체계
- 1차 방어선인 요동성조차 함락시키지 못한 수나라 군, 오랜 세월 방어체계를 구축해 왔기에 위기상황에서 빛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다시 한 번 박수 받아 마땅한 요동성주와 고구려 백성들
〇 평양성 전투, 수나라 해군을 격파하다
- 수나라 해군은 어떻게 됐나?
육군의 보급품 수송을 담당한 수나라 해군은 육군이 평양성에 도착하면 협공할 계획이었으나 육군이 도착하지 않자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 고구려군은 이를 이용하여 평양성 깊숙이 유인하여 차단하고 섬멸하는 작전을 구사 “대장군 내호아가 크게 패하고··· 겨우 살아 돌아가는 자가 불과 수천 명이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23년>
- 아무리 외성이라 해도 평양성은 도성으로 적(敵)을 끌어들인 것은 큰 모험?
그 정도의 작전을 할 때는 승리를 자신할 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전략, 당시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 해서 북성·내성·중성·나성 네 개의 성(城)으로 구성된 엄청난 규모, 그리고 해자(垓子) 역할을 한 대동강과 보통강이 가로막고 있고, 장안성 외성(나성)은 바둑판 모양으로 시가지가 조성되어 군사작전이 어려웠던 것으로 유인작전으로 도성의 특수한 구조를 이용해 수나라 군사를 격파시킨 것
- <평양성 전투>로 병장기와 군량을 잃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수나라 해군, 평양성 전투는 요동성 전투와 함께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전투, 육군은 요동성에 발목 잡혀있고 해군은 격파 당하자 수양제는 평양성으로 30만 5천명의 별동부대를 급파하게 되는데, 요동성이 계속 대치중이어서 별동부대는 보급부대 없이 각자 100일 동안 먹을 군량을 짊어지고 진격하면서 자신의 말먹이까지 챙겨야 하는 상황으로 별동부대 1인당 짐의 무게는 무려 3섬으로 80Kg의 물량이어서 군량을 막사 밑에 버리는 병사가 속출했다고···
〇 30만 별동부대 VS 을지문덕
- 을지문덕, 수나라에 투항(?)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을지문덕 장군의 항복, 이는 일종의 <기만전술>로 수나라의 새로운 전략에 대한 실체파악을 위해 영양왕의 명령으로 거짓 항복을 하고 수나라 진영에 들어가지만 실제 목적은 수나라 진영정탐이 목적
- 한 나라의 총사령관이 단독으로 적진에 들어가는 것은 무모한 행동(?) “우중문은 고구려의 왕이나 문덕을 만나거든 붙잡아 두라는 밀지를 받은바 있었다.”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그래서 을지문덕을 잡으려는 별동부대 대장군, 우중문에게 그건 좀 아닌 것 같다고 말린 위무사 덕분에 수나라 진영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
- 우중문이 황제의 명을 어긴 이유?
공식적인 항복사절로 찾아간 을지문덕을 잡기위해서는 합당한 명분이 필요했을 것으로 앗차! 아니다 싶어 다시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을 부르지만 수나라군 요청을 무시하고 압록강을 건너간 을지문덕, 이 모든 것들은 고구려의 전략으로 만일 을지문덕이 사로 잡혔을 경우 별동부대를 평양성까지 유인하는 전략을 구사했을 것, 을지문덕을 보낸 후 다시 추격에 나선 수나라 별동부대 하지만 잡힐 듯 해주다가 다시 도주하는 전력을 써가며 수나라 군사를 지치게 한다.
- 수나라 별동부대가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하지 못한 이유?
고구려의 전술에 <청야전술(淸野戰術)>이라고 적(敵)이 사용할만한 군사물자를 모두 성안으로 가져오거나 없애버리는 전술로 보급품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
-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맹획을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놓아준 데에서 유래하여 남을 쥐락펴락하는 것을 뜻하는 <칠종칠금(七縱七擒)> 을지문덕 장군은 칠종칠금을 역이용한 것, 바로 이때 을지문덕 장군이 우중문에 보내는 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신책구천문(神策究天文) 묘산궁지리(妙算窮地理) 전승공기고(戰勝功旣高)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오묘한 계책은 땅의 이치를 다했다. 전쟁에 이겨서 그 공(功)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만 두기를 바라노라> 과유불급이라는 뜻으로 좋은 말로 찬양과 훈계를 동시에 한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무모한 진군을 훈계한 것
- 많은 사람들의 오해는 시를 받고 우중문이 퇴각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고구려에 항복을 요구한 우중문, 어려운 을지문덕의 시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 을지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면서 철군을 하면 수양제에게 가서 항복을 하겠다고 하자 그때서야 철군을 하게 되는데, 그 말을 믿고 철군 했다기보다는 그냥 믿고 싶었던 것으로 수나라군에게도 철군의 명분이 필요했던 것, 수나라 별동부대의 철군 이유 ① 공략하기 어려운 평양성 ② 해군의 패배로 보급에 차질 ③ 을지문덕의 항복의사, 수나라 군사들에게는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격
〇 살수대첩(薩水大捷)
- 612년 7월 살수는 청천강으로 추정하는 것이 학계의 정설, 을지문덕은 철군하는 수나라 별동부대를 추격하고 수세에 몰린 별동부대는 살수에 다다르자 강을 건너는 별동부대의 후미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살수대첩> “장졸들이 급히 달아나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압록강에 이르니 이날 간 거리가 450리였다.”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 출정 당시 30만 5천명의 대군이 2,700여 명만 생존하여 중원을 통일한 대제국 수나라의 참담한 패배, 정상적인 행군은 하루 30~40 Km로 180Km의 행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거리, 상대의 병력까지 정확하게 기록된 살수대첩은 일반적으로 <죽일 살(殺)>로 알려지고 있으나 죽일 살이 아닌 <보살 살(薩)>로 살수는 지명
- 또한 둑을 이용했다는 기록은 당대의 기록에는 없고 둑 이야기는 한말(韓末) 민족주의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등장하는데 적은 수(數)의 병력으로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데는 특별한 전략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나온 것
- <둑 이야기>가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유 ① 당시의 기술로는 쉽지 않았던 둑 건설 ② 통신이 발달하지 않아 제 시간에 둑을 터트리기 힘들었을 것 ③ 한 번에 둑을 터트릴 폭약도 발명되지 않은 상황, 또한 당대의 기록에 둑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전해진 이야기가 채록(採錄)됐을 가능성이 높고 실제로 살수로 추정되는 청천강은 30만여 명이 동시에 수장(水葬)되기에는 좁은 강이라는 점
- 전쟁의 영웅이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을지문덕, 이 정도의 장군이면 뭔가 스토리가 있어야 하지만, 살수대첩에 잠시 등장하고 <삼국사기> 열전에도 심지어 언제 태어났는지 조차 기록에 없어서 부족한 기록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역사적 인물
〇 살수대첩 이후 고구려 VS 수(隋)의 전쟁
- 살수대첩 후(後) 고구려 VS 수나라의 전쟁은?
613년과 614년 두 차례 더 고구려를 침공한 수양제, 613년 2차 침공 때에는 고구려 원정 중에 반란이 일어나고 수나라 병부시랑(국방부 차관)이 고구려에 투항하면서 다급해진 수나라 군사는 공성무기까지 그대로 두고 다급하게 퇴각, 614년 3차로 다시 고구려를 침공한 수양제, 하지만 전쟁의 피로감에 <화의>를 택한 고구려는 투항했던 병부시랑을 수나라에 송환하고 큰 전투 없이 전쟁을 마무리한다.
- 전쟁 이후 고구려와 수나라에 생긴 변화?
대제국 수나라에 맞서 승리를 거둔 고구려는 국제적으로의 위상은 높아졌지만 영토 내에서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많은 타격을 입게 되고 VS 수나라는 3번의 무리한 고구려의 침공으로 내부반란이 일어나 618년 왕조가 멸망하면서 다시 격변의 시대로 접어들 동아시아를 암시하게 된다.
-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을지문덕이 갈아놓은 밭에 당태종 이세민이 수확을 거뒀다!” 로 표현, 등장 300여 년 만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불과 29년 만에 멸망하게 되는데, 수나라 멸망의 결정적 원인은 고구려 원정, 한편 수나라와의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한 고구려와 이에 비해 급부상하게 되는 신라
- 중국 강소성 양주의 수양제릉 묘비의 기록 “요동 땅에서 일을 벌이다 천하를 잃었다.” 수양제에게 이 말이 꼭 맞는 것 같은 것은 을지문덕이 말한 과유불급이라는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가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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