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전투, 김유신 백제를 공격하다
〇 우리가 기억하는 <황산벌 전투>
- 660년 7월 9일 삼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단 하루의 전투, 황산벌에서 만난 계백과 김유신, 백제와 신라 양국의 운명을 건 승부로 어느 쪽도 물러설 수 없는 전투, 결국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김유신 장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장 김유신 보다 패장 계백이 더 기억에 남는 황산벌 전투는 많은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됐었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 ① 왜 황산벌에서 싸워야 했을까? ② 전투의 양상 등 구체적인 상황은 알려지지 않은 것?
- <살수대첩>에만 잠시 등장하는 을지문덕 장군처럼 계백장군 역시 <황산벌 전투>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의문, 황산벌의 위치? <삼국사기>에는 황산지원으로 기록하고 “황산은 일명 천호산이라고도 하는데 현 동쪽 5리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충청도 연산현> 현재 논산에 계백장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가 있고 공주와 부여에서 매년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이때 <팔충제>라는 행사를 하는데 이는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
- <황산벌 전투>는 660년 7월 9일 단 하루 동안 일어난 전투로 이 전투를 기점으로 백제는 물론이고 삼국이 막바지 항쟁의 갈림길로 접어들게 되어 이 사건은 삼국통일 전쟁의 일대 분수령이 된 것, 단 하루의 <황산벌 전투>가 1,400여 년간 기억되고 있는 것은 그 만큼 의미가 있는 전투이기 때문일 것이고 아직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은 후대에 깊이 각인이 되었다는 얘기
〇 신라, 백제를 침공하다
- 의자왕 초반에 신라를 압박했던 백제, 왜 갑자기 신라가 공격을 하게 됐나?
백제는 의자왕 즉위 후 10여 차례 신라를 공격하여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특히 <황산벌 전투> 1년 전인 659년에도 신라를 공격하게 되고, 신라는 이에 자극을 받아 국가의 운명을 건 대규모의 백제침공을 계획한 상태
- 655년 의자왕이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 북쪽 30여개의 성(城)을 획득하고 이에 고무된 의자왕은 서자 41명을 최고 관등인 좌평(佐平)에 임명시키고 국정운영의 전반에 배치하게 되는데, 이에 따른 귀족세력들의 반발로 국론이 분열되고 국력이 약화되면서 신라의 공격을 받게 되는 것
- 백제 왕실의 분열을 기회로 삼은 신라, 백제 침공을 위해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는데 단독으로는 백제를 공격할 힘이 없어 당나라의 힘을 빌려서 백제를 공격했다는 것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쉬운 점이 남는 부분
〇 <나당(羅唐) 연합군>의 탄생
- 660년 6월 소정방이 이끄는 13만의 당나라 군사는 백제의 서해에 위치한 덕물도(덕적도)에 도착하고 당나라 군대를 맞이한 신라 김춘추의 장자 김법민, 소정방과 김법민은 7월 10일 백제 남쪽에서 만나 사비성을 공격할 것을 약속, 이 소식을 들은 신라의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김유신에게 5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당(唐) 군에 합세할 것을 명하는데, 이는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한지 16년 만에 이뤄낸 쾌거로 마침내 <나당연합군>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 당나라 군 13만 + 신라군 5만의 18만 나당연합군, 백제군도 신라군과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371년 근초고왕 때 평양성 공격에 동원된 백제군은 3만 여명으로 13만 여 당나라군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상 초유의 대군과 맞닥뜨린 것을 의미 “당나라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여 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천리에 이어져 동쪽으로 내려왔다.” <삼국사기 5권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 642년 김춘추와 연개소문이 만나 군사요청을 하지만 결렬되고, 이후 줄 곧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한 신라는 16년 만에 얻은 결실로 <나당연합(羅唐聯合)>은 신라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로 외교전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것
- 당나라가 신라에 군사를 보낸 목적?
당나라의 가장 큰 목표는 고구려를 정복하는 것, 요동지역으로 진군하여 고구려 공격을 해보지만 거듭 실패한 당나라,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남쪽과 북쪽에서 고구려를 협공할 것을 제안하고 당나라는 신라의 제안이 유용하다고 판단을 했던 것
- 백제정벌을 앞두고 정보유출을 경계한 당나라, 당시 왜(倭)의 사신들이 장안에 파견되어 있었는데, 이들을 특별한 장소에 유폐시키고, 1년 동안 귀국을 시키지 않으며 백제정벌 후에 보낼 정도로 정보유출을 차단했던 것 “국가에는 내년에 반드시 해동을 정벌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 너희 왜인들은 동으로 돌아갈 수 없다··· 마침내 서경의 별처에 유폐하여 문을 폐쇄하고 막아 돌아다니지 못하게 하니···” <일본서기 권 26 제명기 5년>
〇 나당연합군의 <기만전술(欺瞞戰術)>
- 당나라 13만 대군의 이동, 백제는 정말 몰랐을까?
백제 덕물도(덕적도)에 정박한 당나라군, 덕물도는 위치상 고구려에 가까워서 고구려 공격으로 생각하고 백제를 공격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 뿐만 아니라 태종 무열왕이 지휘해 백제공격에 나선 신라군도 사비성으로 직행하지 않고 오히려 남천정(경기 이천)으로 향하게 되는데, 백제는 이를 고구려 침공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 덕물도에서 백제공격의 전략을 수립한 김법민과 당나라 수뇌부, 당나라 수군은 덕물도에서 금강 하구를 거쳐 기벌포에 상륙을 하고 신라는 육로를 통해 백제를 공격하면서 양군은 7월 10일에 사비성 남쪽에서 합류하여 사비성을 공격하기로 최종 결정을 했던 것
- 황산벌 전투는 7월 9일이고 나당연합군이 합류하기로 한 날짜는 7월 10일, 이는 백제의 저항을 계산하지 않은 촉박한 일정(?) 그 당시 백제는 성(城)이나 요새를 빼앗는 공성전을 주로 치렀는데, 나당연합군은 전통적인 공성전 대신 대군을 동원해 사비성으로 바로 진격하여 한판승부를 노린 것
- 당나라가 공격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백제, 또한 그간 당나라의 한반도 공격은 요동반도를 통한 것으로 백제의 입장에서는 해로(海路) 침략은 예상치 못했던 것으로 발상의 전환으로 백제의 허(虛)를 찌른 나당연합군, 하지만 백제만 탓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외세를 끌어들여 연합했던 선례가 없었던 것
〇 나당(羅唐) 연합군의 침공, 우왕좌왕 백제
- 나당연합군의 양방향 공격, 백제의 대응은?
신하들의 주장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의자왕, 공격에 대비하는 골든타임을 놓친 것으로 의자왕의 전략 ① 왕도 수비강화 ② 병력을 둘로 나눠서 나당연합군 방어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우왕좌왕 하던 시간에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사비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
- 좌평(佐平) 성충은 이미 4년 전(前)에 전쟁을 예측하고 육지에서는 탄현을 막고 바다에서는 기벌포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것 “좌평(佐平) 성충이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28권 백제본기 의자왕>
- 또한 비슷한 시기에 좌평(佐平) 흥수가 말했다 “기벌포와 탄현은 우리나라의 요충지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萬)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28권 백제본기 의자왕> 하지만 흥수의 말을 무시한 의자왕과 대신들
- 난맥(亂脈)은 한의학에서 어지럽게 뛰는 맥(脈)을 가리키는 말로 이리저리 흩어져서 질서나 체계가 서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데, 백제가 지금 꼭 그런 상태로 의자왕 뿐만 아니라 그 대신들조차 넋이 나간 상태로 정쟁에 휘말려 나당연합군에 제대로 대응할 골든타임을 놓친 것으로 왕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면 대신들이 적절한 조언을 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점
- 성충과 흥수의 정반대 전략을 내놓은 백제 대신들, 당시에는 강폭이 넓었던 기벌포는 수많은 함대가 동원돼 싸울 수 있는 환경이어서 의자왕의 시나리오는 일정 기간만 버티면 밀물을 타고 밀려온 당나라군 함대가 썰물 때가 되어 배가 빠져 나갈 수 없게 될 때 화공공격의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
- 또한 신라군이 탄현을 지나오면 좁은 산골짜기로 신라군을 유인해 대열이 흐트러지고 전력이 분산된 틈을 타 공격하는 전략은 좋았지만 백제군이 당해내기엔 너무 강했던 나당연합군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적은 수(數)로 많은 수를 대적하지는 못했던 것
- 국경 요충지의 함락으로 계백을 황산벌로 보낸 의자왕, 5만의 신라군이 백제의 군사 요충지 탄현을 통과하고 사비성으로 향하자 다급해진 의자왕은 계백과 5천여 명의 결사대에게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맞서게 한다.
〇 처자식을 희생시킨 계백장군
- 출정에 앞서 가족을 불러 모은 계백은 아내와 자식의 목숨을 빼앗는데 전쟁에 앞선 계백의 비장한 각오, 그의 앞에는 험난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 황산벌에 5천 명밖에 가지 못한 이유?
아무래도 위급한 상황에서는 도성방어가 최우선, 사실 기벌포에도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보내야 했던 백제는 여러 전선의 병력을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이기엔 시간이 촉박한 상황이어서 계백에게 5천 결사대의 지휘를 맡긴 것 “계백이···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잡혀 노비가 될까 염려된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어서 흔쾌한 편이 나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마침내 처자식을 모두 죽였다.“ <삼국사기 47권 열전 계백>
- 처자식을 희생시킨 계백장군
후대에도 엇갈리는 계백장군의 평가, 대표적으로 권근은 “계백이··· 먼저 그의 처자를 죽였으니 도리에 벗어남이 심하다. 비록 국난에 반드시 죽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힘껏 싸워 이길 계책은 없었던 것이니 이는 먼저 사기를 잃고 패배를 부른 일이었다.” <권근 향촌집>
※ 권근(1352~1409)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조선 개국 후 사병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움
- 또한, 안정복은 “장수가 되는 도(道)는 무엇보다도 내 집과 내 몸을 잊은 뒤에야 사졸(士卒)들의 죽을 결심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니···” <안정복, 동사강목> 권근과 안정복은 계백장군의 평가에 대하여 서로 상반된 의견을 보인 것
※ 안정복(1721~1791) : 조선 후기 역사학자이자 실학자로 역사서<동사강목>을 편찬
- 현재의 가치관으로는 계백이 가족을 죽인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황산벌 전투의 영웅으로 계백이 남아있는 것은 나라를 위해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희생시켰기 때문일 것으로 계백도 가족을 희생시키기 쉽지 않았겠지만 그 결정을 감내한 가족도 고통스러웠을 것, 계백의 각오가 헛되지 않은 것이 <황산벌 전투>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 신라군을 상대로 4번의 승리를 이끈 것
〇 계백장군과 5천여 결사대, 4번 승리의 비결
- 4번의 전투, 계백장군 승리의 비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전투상황은 알 수 없으나 다만 계백이 황산벌에서 먼저 도착해 “백제의 장군 계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삼국사기 5권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 <문안식 교수 분석>은 백제가 5천 명의 병력으로 5만의 신라군을 이기는 것은 황산벌의 평지에서는 불가능했을 것으로 산성에 진영을 세웠을 가능성이 높은데, 신라군이 통과할 수 있는 골짜기마다 목책 같은 군사방어시설을 세워서 신라군을 막았을 것, 또한 골짜기를 차단하면 대규모 공격이 불가능하여 소규모의 5천여 결사대가 신라군을 방어하기에는 최상의 전략이었던 것, 아울러 이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온 결사대로 <삼국사기>에는 계백의 각오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나오는데 “계백은 여러 사람 앞에서 맹세하며 ‘지난날 월나라 구천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지금 오늘 마땅히 각자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고 하였다” <삼국사기 47권 열전 계백>
- 신라군이 반드시 황산벌을 통과해야 했던 이유?
신라군은 7월 10일 까지 사비성 남쪽에 도착하여 당나라군과 합류해야만 했기에 다른 길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촉박한 상황, 또한 군사를 되돌리면 뒤에서 백제군의 반격으로 전군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신라군은 어떻게든 황산벌을 돌파해야만 했던 것
- 네 번씩이나 승리한 전투에서 백제가 꺾인 이유?
4전(戰) 4패(敗)를 거듭한 신라, 모범을 보이라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서 백제군 진영으로 과감하게 몸을 던진 <화랑관창> 당시 관창의 나이는 16세로 너무 어리자 계백장군은 포로로 잡힌 관창을 신라로 돌려보낸다.
- 계백장군이 관창을 살려준 이유는?
“계백이 투구를 벗게 하니 관창이 어리고 또한 용기가 있음을 아끼어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47권 열전 관창> 어떤 역사학자는 어린 관창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지상주의로 표현하기도 하는데, 전장에서 적에게 관용을 베푼 계백장군은 가족을 희생시키면서 관창을 살려준 모순?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관창을 살려준 것(?)
〇 관창의 죽음이 불러온 신라군의 승리
- 관창은 다시 백제군 진영을 공격하고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기세등등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계백도 더 이상 호의를 베풀기 어렵게 되면서 결국 목숨을 잃게 되고 관창의 수급을 실은 말이 돌려보내지면서 아들을 확인하는 아버지 김품일 장군과 신라의 군사들은 모두 망연자실한다.
- 그런데 관창이 다시 사지로 들어간 이유는?
본인의 의지인가? 외부의 압박인가? 이 때 신라 김유신 장군의 긴급입장이 발표되는데, 어린 나이의 관창을 이용해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려는 지휘부의 계획(?) 당나라군과 예정된 날까지 합류하기 위해서 신라군은 빨리 전투를 끝내야 하는 상황이지만 4전(戰) 4패(敗)를 거듭하자 전세를 뒤집을 계기로 관창을 이용한 것, 또한 화랑으로써 관창의 순수함도 영향을 미쳤을 것, 세속오계의 핵심은 임전무퇴로 교육받은 대로 실행한 것(?)
- 한편, 계백장군은 왜 관창의 목을 다시 보냈을까?
수세에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수급이 돌아가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일로 관창의 죽음 이후 사기가 올라간 신라군, 현재 전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는 난민문제로 꽁꽁 얼어있던 유럽인들의 마음을 녹인 것도 4살짜리 시리아 난민 소년의 죽음, 관창의 죽음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김유신 장군이 노린 효과는 충분히 얻어낸 것, 이를 계기로 신라군은 전세역전의 계기를 맞게 되고 결국 백제는 무릎을 꿇으면서 몰살된 계백과 5천 결사대
〇 백제 700년 역사의 몰락
- 660년 7월 11일 나당연합군은 사비성으로 진격하고 백제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에 무릎을 꿇고 마는데, 궁지에 몰린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신하고 사비성은 순식간에 함락이 되면서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몸을 피신한지 닷 세가 지난 7월 18일 의자왕은 마침내 나당연합군에 항복을 하고 700년 간 이어온 백제역사가 전쟁 열흘 만에 막을 내린다.
- 이렇게 황산벌에서 백제군이 전멸하고 있을 때, 당나라 수군도 기벌포에 상륙해서 백제군 수천 명을 살해하고 마침내 군산에 상륙하여 7월 11일 나당연합군은 합류하여 사비성으로 진격하면서 저항하던 백제군 1만여 명이 사망하게 된다.
- 사비성이 포위되자 태자와 함께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은 큰 아들만 데리고 가면서 그 동생들에게 사비성을 지키도록 했으나, 사비성 지휘권 다툼에 빠진 의자왕의 아들들은 셋째 아들 부여융이 당(唐)에 투항하면서 결국 사비성이 함락 “법민(김춘추 아들)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하기를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서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골치를 앓게 했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구나!’ 라고 했다.” <삼국사기 5권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642년 대야성 전투의 패전을 잊지 않고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사비성까지 함락시킨 신라
- 위기상황에서 백성을 두고 피신한 의자왕, 재위 초기와 후기의 모습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백제의 운명을 가른 황산벌 전투, 백제 최후의 순간까지 의자왕과 백제의 집권층은 비겁하고 나약했다.
- 계백과 5천 결사대처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충절을 지킨 사람과 백제가 멸망하고 의자왕은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킨 백성들은 660~663년 까지 4년 동안 백제 부흥운동을 펼치는데, 백제를 다시 세우기 위한 노력이 싹틀 수 있었던 것은 계백과 황산벌의 5천 결사대의 정신이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일 것
- 백제 멸망 이후 668년 동아시아의 강국 고구려마저도 멸망하게 되고 우리 역사 속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사라지면서 7세기 중반 동북아 국제정세를 뒤 흔든 계기가 된 황산벌 전투, 단 하루의 전투로 엇갈린 국가의 운명은 위기에 대처하는 리더의 판단력과 통솔력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게 하는지 되새기게 한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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