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 발해를 꿈꾸다
〇 발해, 어디까지 알고 있나? <김종복, 안동대 사학과 교수>
- 698년 고구려를 계승한 새로운 나라의 탄생 발해! 해동성국으로 불리며 가장 넓은 영토를 호령했던 나라! 하지만 건국 228년 만에 갑자기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나라? 그때 만주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 668년 고구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3만여 명을 영주 등 당나라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당(唐)의 감시망 아래 살아야 했던 영주지역 고구려 유민들, 그러던 696년 어느 날 폭정을 견디다 못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순식간에 당(唐)의 감시망이 무너지자 그 틈을 이용해 고구려 유민은 말갈족과 함께 탈출을 감행하고 그 속에는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이 있었다.
- 고구려에 이어 광활한 만주벌판을 누볐던 발해(渤海), 영토의 크기?
<구당서>에는 사방 2천리(약 800Km)로 초창기에는 고구려와 비슷한 영토, <신당서>에는 사방 5천리(약 2천 Km) “남쪽으로는 신라와 잇닿아 니하를 경계로 하고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에는 거란이 있다.” 한반도 역사상 영토가 가장 넓었던 발해
- 영주로 고구려 유민을 끌고 간 이유?
고구려 유민의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 강제 이주시키는데 고구려의 중심지는 요동과 평양으로 평양지역 주민들은 바닷길을 이용하여 산둥반도로 집결시키고, 요동지역 주민들은 육로를 이용하여 영주로 강제 이주시켰던 것
- 당시 고구려 마지막 임금 보장왕은 요동지역에 있었는데, 말갈족과 모의해 반란을 도모하다 발각되고 주로 반란을 일으킬만한 힘을 가진 유민들을 영주로 끌어가 그 곳에서 황무지를 개간하며 노예처럼 살게 했던 것
- 영주로 끌려간 대조영의 실체?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장수로 나오는데 영주로 이주된 것으로 보아 저급(低級) 장수는 아닌 듯하지만, 출신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서로 달라 발해사의 논란거리 중 하나 <구당서>에는 고구려의 별종(別種)으로 기록하여 원고구려인과는 좀 다른 고구려인으로 기록, <신당서>에는 속말말갈 출신으로 고구려에 복속된 자로 기록
- 당시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말갈족은 7개의 별칭으로 불렸는데, 송화강 지역은 속말말갈 · 흑룡강 주변은 흑수말갈 · 백두산 지역은 백산말갈··· 특히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은 고구려지역에 거주하여 대조영은 말갈계 고구려인(?), 원래 고구려 자체가 다(多) 종족 국가
〇 대조영, 영주에서 탈출하다
- 영주에서 민란이 일어난 이유?
당시 영주지역에 기근이 들어 굶주림에 지친 거란족 추장 이진충과 손만영은 진휼을 요청하지만 영주도독 조문홰는 곡식은커녕 멸시와 폭정을 일삼자 분노한 거란족이 반란을 일으킨 것
- 영주지역에서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노렸던 곳은 서쪽으로는 북경지역으로 남하를 하고 동쪽으로는 안동도호부를 공격하는 것, 여기에서 재미있게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거란족의 주 근거지는 요서지역이어서 요동지역의 지리를 잘 모르기 때문에 대조영의 무리들에게 안동도호부 공격을 맡겼을 것(?)
- 발해를 건국하기 위해 작정하고 탈출한 게 아닐까?
당시 고구려 유민의 리더는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으로 조영은 아버지를 따라간 것이고 당시에는 성(姓)이 없고 이름만 있어서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은 발해 나라를 세운 후 새롭게 만든 성(姓)씨 일 듯
- 당시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시대로 무자비한 공포정치로 악명이 높았던 측천무후는 영주민란으로 당나라 북방의 지배체제가 붕괴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되면서 상황이 여의치 않자 요동으로 도망친 대조영의 무리에게 작위를 내리면서 회유를 시도하지만 거절당하고, 회유에 실패한 측천무후는 즉시 토벌단을 보내게 되는데 그 와중에 아버지<걸걸중상>과 말갈족 추장 <걸사비우>를 잃게 되고 대조영 혼자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천문령 전투>를 승리하면서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다.
〇 측천무후 VS 대조영
- 대조영의 라이벌 측천무후?
측천무후(624~725)는 당(唐)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다가 고종의 황후가 되고 아들인 중종·예종을 차례로 폐위시키면서 690년 스스로 황제가 된 인물, 공포정치로 악명을 떨쳤지만 과감한 국정쇄신으로 측천무후의 통치기는 태종이 통치하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간다는 평으로 <무주(武周)의 치(治)>라는 평가를 하기도 하고 측천무후는 중국의 대표적 대외정책인 <판다외교>의 창시자로 685년 일본에 평화사절단을 보내면서 함께 판다를 보내기도 한다.
- 측천무후가 대조영 세력에게 작위를 내린 이유?
<이진충의 난(亂)>인 영주민란을 1년여 만에 겨우 진압한 당나라, 이때 대조영의 무리들은 독자세력을 이루고 요동지역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들이 독자세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안동도호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당(唐)의 요동지배가 난관에 봉착되자 이를 회유하기 위해 고구려 보장왕의 손자 고보원을 충성국왕에 책봉하고 대조영의 부 <걸걸중상>과 말갈족의 추장 <걸사비우>를 그 휘하에 작위를 내린 것, 이를 미끼로 요동지역에 괴뢰정권을 세우려하지만 이미 눈치 채고 있었던 것
〇 발해건국의 전초전, <천문령 전투>
- <천문령 전투> 승리의 비결?
아쉽게도 기록이 거의 없어 제대로 알기 어려운 <천문령 전투> “대조영이 고구려병과 말갈병을 거느리고 이해고에게 저항하니 이해고는 패전(敗戰)하고 돌아왔다.” <구당서>
- 천문령의 위치?
<하늘의 문>이라는 뜻을 가진 높은 산의 고개로 현재 학계에서는 길림의 <합달령>으로 보고 있으며 길림성과 요령성의 경계지역, 천문령 위치추정의 단서 ① 영주에서 탈출한 대조영의 동선(動線)을 파악 ② 대조영은 천문령 전투 후 동모산에 나라를 세웠다 ③ 영주-동모산 사이의 길림성과 요령성 경계로 추정
〇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 동모산으로 간 까닭은?
-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운 이유?
옛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 인근은 신라와 가까워서 위험하고 당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만주의 동모산지역은 무주공산의 지역, 또한 수(隋)·당(唐)은 고구려와 70여 년간을 싸웠는데 격전지는 주로 요동지역·국내성·평양일대로 오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옛 고구려 중심지에 비해 전쟁의 피해가 적은 동모산 일대는 말갈족의 고향으로 건국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인 것
- 영주민란 이후 건국까지는 무려 2년에 걸친 탈출행로로 대조영에게는 발해 대장정으로 동모산에 대조영이 둥지를 틀자 사방으로 흩어졌던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에게 대조영은 새로운 희망으로 698년 대조영은 진국(振國)을 세우게 되자 대조영의 세력 확장에 긴장한 당(唐)은 결국 713년에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고 화친을 제안한다.
〇 대조영의 발해, 고구려의 부활을 꿈꾸다.
- 이후 대조영은 진국(振國)대신 발해를 정식국호로 삼고 당(唐)과 교섭을 통해 새로운 국가 발전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대조영이 꿈꾼 나라는 고구려의 부활, 실제로 발해의 정체성은 고구려의 계승으로 온돌 · 기와의 무늬 · 무덤양식 등 대부분의 고구려 문화를 계승
-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727년 발해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 “무예가···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잇게 되었다.” <속일본기> 고구려인의 용맹까지 물려받은 발해인은 장정 셋이서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낼 정도로 용맹스러웠다고···
- 또한 발해는 일부일처제사회, 용맹스럽다 못해 사나운 발해 여성?? “거란·여진에는 모두 여창(女娼)이 있고 일반인들은 첩·몸종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오직 발해에는 이들이 없었다.” & “남편을 감시하여 첩을 두거나 다른 여자와 연애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일 이런 일이 알려지면 반드시 독을 넣어 죽도록 꾀한다.” <송막기문>
- 진국(振國)에서 발해가 된 사연은?
대조영이 건국할 당시의 국호는 진국(振國)이었으나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을 받으면서 발해가 된 것 “대조영을 도독으로 삼고 발해군왕에 책봉하니 그 후세에 마침내 발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오대사> 당나라의 입장에서 대조영은 반란의 주동자이기는 하지만 동북방면의 거란족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이용하려 한 것이고 대조영의 입장에서는 진국(振國)을 고집할 수도 있었으나 당나라와의 관계도 무시할 수는 없는 입장으로 당(唐)의 작호를 받아들이게 된다.
- 발해의 뒤통수를 친 당나라?
당나라는 흑수말갈 영토에 흑수부를 설치하고 관리까지 파견하여 발해의 입장에서 보면 서쪽에는 당나라 · 동쪽으로는 흑수말갈에 당(唐)의 간접지배체제를 구축하여 발해는 샌드위치가 되는 격으로 상황에 따라서는 이들의 협공을 받을 수도 있는 것
- 또한 지금까지 흑수말갈의 경우에는 대외관계에 있어서 발해와 상의를 했었는데, 726년의 경우에는 발해와 상의 없이 당나라와 직접교역을 시도한 것, 그래서 대조영의 아들인 발해의 2대 무왕이 흑수말갈을 치겠다고 동생 대문예를 공격책임자로 임명, 하지만 대문예는 돌격대를 이끌고 국경까지 갔으나 탈영 후 당나라에 망명하게 되는데 국운이 걸린 전투에서 대문예의 알 수 없는 행보로 발해인들은 충격에 빠지게 된다.
〇 무왕의 동생 대문예의 당나라 망명의 속사정
- “흑수말갈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당나라와 통교하였다. 그런데 지금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면서 우리에겐 알리지 않으니 이는 반드시 당나라와 함께 앞뒤에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문예와 장인 임아는 군사를 거느리고 흑수를 치도록 하라.” <무왕>
- “흑수말갈이 당(唐)에 관리를 요청하였다 하여 바로 공격하게 된다면 이는 당(唐)과 등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나라는 사람이 많고 군사가 강한 것이 우리의 만 배나 되니 하루아침에 원한을 맺는 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것입니다. <무왕의 동생 대문예>
- 무왕의 흑수말갈을 쳐야한다. VS 대문예의 당나라가 보복할 것이다. 사료에 따르면 동생 대문예는 군대를 이끌고 흑수말갈 토벌 직전에 다시 한 번 전쟁은 안 된다는 상소를 올리지만 무왕은 분노하며 대문예의 소환을 명령하자 장래가 불안한 대문예는 당나라에 망명 “무왕이 진노하니 종형 일차를 보내어 대신 통솔하게 하고 문예를 불러다 죽이려 했다.” <신당서>
- 실제로 완전하게 정복은 못했지만 즉각적인 토벌로 흑수말갈과 당(唐)의 교섭 고리를 끊어버린 무왕, 뿐만 아니라 660년에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서 당나라 수군이 출발했던 등주는 당나라 최고의 해군기지로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수군이 등주를 기습 공격하는데 이는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중국 본토를 공격한 것
〇 발해 무왕, 당나라 공격의 속사정
- 발해가 등주를 공격한 이유는?
무왕은 흑수말갈 정복 후 당(唐)에 대문예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당나라는 대문예를 유배 보냈다면서 송환을 사실상 거부하고, 또한 무왕의 아들 태자 대도리행이 당나라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발해의 차기 왕위계승에 관한 문제가 불투명하게 되면서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꺼내 든 무왕의 카드가 등주공격
- 국교수립 후 태자를 당나라로 보낸 발해, 대문예 망명 후에 태자 대도리행의 갑작스러운 사망, 당(唐)의 현종입장에서는 발해의 태자는 이미 죽었고 제2인자인 왕의 동생은 우리 손에 있는 것으로 당(唐)에게는 발해를 압박할 기회이고 발해 무왕에게는 위기인 셈
- 무왕의 등주공격 결과는?
당나라 지방장관인 등주사자 위준이 전투에서 사망하게 되고 당시 최강의 당나라에 맞선 발해수군이 승리하고 당당하게 귀국하면서 앞으로 발해의 운명은? 발해의 등주공격은 단순한 형제끼리의 집안싸움이 아닌 무왕의 대(對)당 강경파 VS 동생 대문예의 대(對)당 온건파간의 발해지배층 내부의 외교정책의 대립
- <등주전투> 이후에 당나라도 보복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발해토벌 당나라군 사령관은 대문예로 이를 선봉에 세워 발해를 치게 한 것, 이것이 당(唐)의 입장에서는 악수(惡手)가 된 것이 발해의 무왕세력들을 결집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준 셈으로 막상 대문예가 쳐들어오자 그를 지지하던 세력마저도 등을 돌리고 대문예에 맞섰던 것
- 당시 8세기 당(唐)과 발해의 치열한 외교전, 당(唐)이 흑수말갈과 손잡자 발해는 일본과 국교를 맺고 등주전투 이후 당(唐)은 신라를 동원해 발해를 협공하고 이에 맞서 발해 무왕은 재차 기습 공격하여 마도산에서 신라군과 맞닥뜨리는데, 신라군에게 나타난 복병은 추위 “큰 눈이 한 자 넘게 쌓이고 산길이 험하여··· 병사들이 죽고 아무 공(功)없이 돌아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8>
-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신라가 당(唐)의 요청에 따라 발해를 공격하자 당나라는 대동강이남 땅을 신라영토로 공식인정하는데,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신라로 하여금 발해를 견제하려는 속셈
- 이후 대문예의 행방은?
무왕의 입장에서는 망명까지는 인정할 수 있을 줄 모르나 적장(敵將)이 된 동생 대문예는 더 이상은 용서할 수 없는 것으로 얼마나 화가 났던지 “무왕이 그 아우를 계속 원망하며 자객을 모아 동로에 들어가 길에서 찌르게 하였다.” & “문예가 그것을 물리쳐서 죽음을 면하였다. 하남에서 자객을 붙잡아 모두 죽였다.” <신당서>
- 당시 당나라의 주적(主敵)은 북방의 돌궐과 거란의 유목민들, 그러나 발해는 거란 · 돌궐과 전략적 제휴관계이고 돌궐과 거란이 수시로 당나라를 공격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발해도 쉽게 당나라를 공격할 수 있었던 것
- 하지만 갑자기 내부분열로 돌궐이 붕괴되고, 또한 거란이 당나라에 투항하게 되면서 신라 또한 발해에 대하여 호전적으로 국제적인 관계에서 고립된 발해, 이 때 당나라 현종이 발해를 공격할 수도 있었으나 이때부터 양귀비와의 로맨스로 서서히 정치에 대해 염증을 느끼던 상황, 또한 대외관계도 무력(武力)으로 유지하다 보니 국내경제도 파탄에 빠지게 되면서 더 이상의 분쟁은 종식하게 되는데 양귀비는 동북아의 평화사절단(?)
〇 해동성국, 발해의 숨겨진 진실?
- 고구려 계승국가임을 자처하며 동북아 신흥강자로 우뚝 선 발해는 한반도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당나라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중앙집권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지면서 왕권을 강화해 나간다.
- 또한, 발해는 주변국가와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다양하며 개방적인 사회로 화려한 문화를 꽃피워나간다. <해동성국> 발해의 또 다른 이름 “발해왕이 학생들을 경사의 태학에 보내어 고금의 제도를 배우고 익혀가더니··· 드디어 해동성국이 되었다.” <신당서> 당나라도 인정한 발해의 국력, 그렇지만 남녀사이처럼 변화무쌍한 발해와 당(唐)의 국제관계
- 발해의 주요 교역 특산물은?
발해의 대표 특산품인 담비 가죽은 일본 조정의 사치품으로 담비 가죽 옷을 입고 일본에 간 발해사신은 앞에 있는 일본의 관리를 보니 5월인데도 불구하고 담비 가죽 옷을 8벌씩이나 껴입고 자랑하더라는 것, 또한 붕어·사슴·토끼·우황·사향·구리·쌀 등 발해 5도를 통해 주변국과 활발하게 교류
〇 발해, 그 때 만주에는? <반기성, 케이 웨더 기후산업연구소장>
- 광활한 영토의 발해, 기후 때문에 융성했다?
<기후와 문명>의 관계에서 날씨가 온화할 때는 문명이 발달하고 날씨가 나빠지면 문명이 쇠락한다고 하는데, 실제 그 당시는 중국의 3차 온난기로 600~985년은 발해의 698년 건국과 926년 멸망의 같은 시기, 당나라의 기록들을 보면 이때 겨울에는 거의 눈이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기후학자들은 만주지역 연평균 기온이 지금보다 섭씨 1도 정도 높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덕분에 농업 · 목축 등 생산 활동이 활발하여 나라가 급격히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겠는가? 로 추정
- 섭씨 1도라면 별 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지만,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폭발로 이듬해 여름에도 유럽에서는 눈·서리가 내리는 등 극심한 추위를 가져오고 식량생산이 감소하면서 폭동·전염병이 창궐하게 되는데, 이 모든 현상이 탐보라 화산폭발로 지구 연평균 기온이 섭씨 1도가 내려가서 일어난 현상
- 백두산 화산 폭발로 발해가 멸망했다는 설(說)은?
최근에 발해 멸망을 백두산 화산폭발과 연계시키는 분들이 많은데, 일본학계에서 북한에서 채취한 삼나무 탄화목으로 백두산 화산폭발 시기를 유추했는데 약 911년~946년 사이에 폭발한 것으로 추정, 실제로 발해멸망은 926년이기는 하지만 백두산 화산폭발이 발해멸망의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을 것, 그렇지만 화산폭발의 영향으로 인해 주변지역의 경제 · 사회적 타격은 상당했을 것이고 이러한 것들이 다른 요인들과 합쳐지면서 멸망의 원인이 되지 않았겠느냐(?)
〇 갑자기 멸망한 발해?
- 융성한 해동성국이었던 발해의 갑작스런 멸망 “926년 1월 14일, 발해왕 대인선이 흰 옷을 입고 새끼줄로 양을 끌며 벼슬아치 300여 명을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였다.” <요사(遼史) 권2 본기 제2> 고려사에는 발해멸망이 926년 1월인데 925년 9월부터 발해장군들이 망명하는 기사가 등장 “925년 9월 6일, 발해장군 신덕 5백여 명이 투항해오다. 925년 9월 10일,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인들이 계속 귀부해 오다. 925년 12월 29일, 발해장수 모두간 등이 귀부해 오다.” <고려사 권1 제1> 이를 종합해 보면 내분으로 인한 지배층 분열로 거란족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으로 추정
- <드라마 대조영> 고구려가 망하기 직전에 죽은 당 태종이 연개소문의 꿈에 나타나 저주를 퍼붓는데 “역사는 승자의 것, 너희들이 자랑하는 천년의 역사를 지우고 다시 쓸 것이다. 고구려의 영토와 역사문물들이 다 우리 것이 되어있을 것이고 너희들은 후세에 빈껍데기만 물려주게 될 것이란 말이다!” <당 태종, 이세민> 중국의 동북공정과 오버랩 되는 장면
- 발해는 누구의 역사인가?
1980년대 발해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켜 버린 중국, 그때 우리는 별 다른 반응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는 냉전체제로 중국과 교류가 거의 없는 상황, 소수의 연구자들만이 중국에서 발해사 연구를 말갈족이 세운 중국 당대의 지방정권이라고 했을 때 국내학계에서는 큰 충격을 받은 것
- 그런데 원래 발해라는 역사가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 · 속말말갈 출신이라는 등의 기록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발해는 멸망 후 계승국이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
- 만주지역과 우리 역사 ① 고대에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무대 ② 근대에도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무대 ③ 현재는 길림·연변의 조선족 자치구로 한민족에게는 역사가 깊은 곳, 중국에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고민을 많이 했지만 고구려의 경우에는<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어떻게 할 수 없었고 기록이 없는 발해부터 <동북공정>의 전초전으로 삼아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켜 버린 것
- 옛 발해의 영토 중 일부는 현재 러시아 땅, 러시아의 입장은?
러시아 학계에서도 발해가 고구려와 말갈이 함께 세운 나라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고구려는 소수이고 대다수가 말갈족의 후손, 따라서 말갈족이 현재 러시아의 소수민족이므로 러시아 역사라고 주장
- 그나마 우리 역사 속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로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를 본격적으로 우리 민족사 범주로 체계화시키면서 기존의 <구당서·신당서> 와 일본 및 우리의 자료 등을 폭넓게 수용하면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하여 체계화했기 때문에 발해의 역사를 다시 우리 것으로 만드는데 있어서 중요한 전기가 되는 것 “고려가 발해사를 서술치 않아 만주 땅을 거란과 여진에 뺏겼다.” <발해고> 그래서 기록되지 않는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 러시아 · 중국 · 북한에 걸쳐있는 옛 발해의 영역, 우리가 직접 연구하기에는 쉽지 않은 상황이고 심지어 발해의 수도 상경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중국, 하지만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으로 중국이나 러시아가 뭐라고 하던 우리는 우리의 한국사 입장에서 발해를 말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할 필요가 있는 것
- 또한, 발해에 대한 이미지가 고구려를 계승한 큰 나라라는 것을 생각게 하는데, 물론 영광된 역사이기는 하지만 역사는 영광된 역사뿐만 아니라 아픈 역사도 기억해야 하는 것으로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는 신라와 발해가 정치 · 외교적으로 거의 단절된 상태였다는 것은 오늘 날의 남북한의 대립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것
- 아울러 발해의 역사는 유득공이 문제 삼기까지 800년 넘게 망각되어 있었던 것으로 발해사를 현대 분단의 입장으로 본다면 우리가 이런 식으로 남북이 계속 대립만 하고 있다가 더 큰 일이 났을 때, 또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우리 역사의 일부분을 또 다시 잃어버리지 않을까? 역사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 뿐만 아니라 발해가 우리와 같은 역사 민족인 신라와의 외교보다는 당(唐)이나 왜(倭)와 외교에 주력했던 모습들은 바로 오늘의 시대에도 투영이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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