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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신(海神) 장보고, 제 II 편

mkpark2022 2016. 1. 11. 21:04

 

 

 

해신(海神) 장보고, 제 II 편

 



해신 장보고, 염장의 칼에 죽다

- 846년 봄, 해상왕국을 이룩한 장보고가 살해당한다. 그를 죽인 건 신라 장수 염장으로 신라왕실의 청부살인이었다. 동아시아 무역에 새로운 역사를 기록한 장보고, 그는 대체 왜 염장의 칼에 죽임을 당했나?

- <KBS 드라마 해신> 신라 장수 염장이 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찾아와 아무 의심 없이 염장을 반갑게 맞이하는 장보고, 하지만 염장은 빈틈을 노려 장보고의 목숨을 빼앗게 되고 해상왕 장보고의 신화는 염장의 칼 아래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 신라로 돌아와 허무하게 죽은 장보고, 드라마와 기록의 차이는?

궁복이 술에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성왕 8>

- 염장이 장보고를 암살한 이유? <윤재운, 대구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염장의 배후에는 신라왕실이 있었던 것으로 염장 개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고 신라 왕실의 의뢰를 받아 살해한 것, 이유는 장보고가 청해진 설치기간 동안에 동북아시아의 무역을 장악하면서 신라사회를 뒤흔들 만큼 세력이 너무 커졌다는 것으로 아무 배경 없이 맨주먹으로 성공한 장보고는 신라사회의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갑자기 너무 커지자 신라왕실이나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변화가 위협으로 느껴졌을 것

 

장보고, 청해진을 설치하다

- 장보고 성공신화 스토리

오랜 해외생활을 접고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 그는 무역허가를 받기 위해 왕을 찾아가 왕에게 신라의 골칫거리였던 서남해안의 해적소탕을 제안하자 신라 42대 흥덕왕은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고 군사 1만을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제수, 마침내 청해진 설치를 허가 받은 장보고는 신라··일본을 잇는 중계무역항을 탄생시키면서 동아시아 무역의 새로운 장이 열린다.

- 청해진 설치 당시 신라왕실과 긴밀한 관계였던 장보고, 무령군 퇴역 후 아무런 지휘도 갖지 못한 장보고가 평민신분으로 왕과 거래를 성사시켰다는 것은 왕실과 장보고의 관계가 매우 좋았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뛰어난 사업수완을 지닌 장보고

- 무역을 하려면 왕실의 허가가 꼭 필요했나?

당시 동아시아 삼국인 당·신라·일본은 국가 대 국가의 무역만 허용됐고 개인 간의 사무역은 금지 되었던 상황이어서 장보고가 계획했던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자격이 필요했던 것이고 흥덕왕에게 해적소탕을 명분으로 청해진 설치에 성공한 것

- 당시 해적의 피해는 어느 정도?

9세기 초 해적들은 신라양민들을 잡아 당()에 노비로 팔아넘기는 일이 반복이 되자 신라조정은 816년 신라인 매매금지를 당()에 요청하던 차에 무역사업을 위해서도 필요했던 해적소탕은 명분과 실리의 일거양득의 카드이고 신라왕실에서도 환영해야할 해적소탕이라는 장보고의 제안

- 또한 장보고는 신라왕실에 경제적 제안도 했을 것이 당시 당나라 해상무역의 세금을 관장하던 관청인 시박사(市舶司), 여기에서 걷은 세금은 국가재정이 아닌 당() 황실의 재정으로 귀속했던 것으로 장보고 역시 청해진 수익의 일부를 신라왕실에 기증할 것을 약속했을 것으로 추정

- 장보고의 해적소탕 비결?

청해진의 성격 자체가 상업적인 것보다 군진의 성격을 가진 것 “4,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을 지키게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3> 청해진 설치 이후 급격히 감소한 신라인 매매 대화(827~835) 이후 해상에서 신라 사람을 사고파는 자가 없어졌다.” <신당서 동이열전 신라> 신라 서남해안 일대를 확실하게 장악한 장보고는 당나라에서는 용병부대 무령군으로 활약했으나 무령군은 해군이 아니어서 해상전투 경험은 없지만 서남해안의 해안을 장악했던 것

 

장보고, 해적을 소탕하다.

- 장보고는 어떻게 해적을 소탕했을까?

고대 해상전투에서의 전투방식은 두 가지 적함(敵艦) 가까이 배를 대고 싸우는 근접전, 적과 직접 맞붙어서 창··총검 등으로 치고받는 백병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싸우는 원거리 공격, 특히 한반도나 중국에서는 원거리 병기가 발달하여 이 방식을 선호했던 것으로 배에 석궁이나 투석기를 설치해 공격하고 수군에 반드시 일정 비율의 궁수(弓手)를 배치했던 것

- 고대 중국에서는 해전용 쇠갈고리의 일종인 구강(鉤强)을 설치하여 배를 밀어내는 방식으로 거리를 떨어뜨려 적의 근접공격을 막고 활·쇠뇌·투석기 등 원거리 병기로 공격, 또한 구강으로 적선을 끌어당겨 퇴각을 막고 공격하는 방식으로 구강을 이용해 공격하기 최적의 거리를 유지했던 것

- 기록에는 장보고의 해적소탕방식이 전해지지 않고 수군에 비해 전투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해적들은 원거리 전투보다는 근접전을 선호했을 것으로 추정, 하지만 해상에서만의 우위로 해적을 뿌리 뽑기에는 어려웠을 것으로 장보고는 육지의 해적 본거지를 공격하여 소탕했을 것으로 추정

 

장보고, 동아시아 바다를 장악하다

- 청해진 본부는 현재 전남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로 장보고의 고향인 완도의 지리적 이점을 잘 알았던 장보고는 이를 최대한 활용 삼면이 바다로 해상교통의 요지 수심이 깊어 정박에 편리 태풍을 막을 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 많은 섬에 둘러싸인 청해진은 군사적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던 것

- 청해진에서 담당했던 업무?

기본적으로는 무역업무 신라와 당(), 일본의 공식사절 호송 여객 운송 선박의 건조(建造)와 수리 ··일 통역업무 등 바다에 관련된 모든 일을 담당하여 현재의 홍콩이나 싱가폴처럼 국제도시가 연상되는 청해진은 국제무역의 중심지였던 것으로 신라조정의 무역까지 담당했다는 것은 신라의 주요 경제권을 장악했다는 의미

- 당시 청해진을 통해 수입·수출된 물품?

청해진의 수출입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당시의 신라·(일본의 역사서를 통해 추측해 보면 타슈켄트 산 에메랄드인 슬슬(瑟瑟) · 페르시안 산 모직물 · 당나라 산 비단과 서적 등이고 신라에서 당()으로 수출품은 금 · · 금속공예품, 수입품은 서적 · · 비단 · 슬슬 · 향로 · 모직물 등, 비슷한 환경의 동아시아와는 생필품보다는 사치품 위주로 거래했을 것

-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장보고를 신라 왕실에서는 견제하지 않았을까?

흥덕왕은 신라 전역에 수입 사치품금지령을 내리는데, 서라벌을 휩쓴 해외사치품의 유행, 신분에 맞지 않는 사치품 사용으로 흥덕왕은 대노하며 6두품과 진골여성에게도 금지됐던 공작 깃털과 에메랄드 슬슬(瑟瑟), 신분에 따른 복장규제가 엄격했던 것

- 실제로 어떻게 복장을 단속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삼국사기> 잡지편에 신분에 따라 속옷·상의·하의·장식·옷의 재질까지 규제하여 왕이 가장 돋보이는 존재여야 했던 고대사회, 청해진의 사무역 활성화로 외제사치품 사용이 늘자 상대적으로 왕의 권위가 실추됐고 왕의 권위를 바로세우기 위해 흥덕왕은 사치품 금지령을 내렸던 것

 

장보고, 신라사회에 변화를 일으키다

- 페르시아 산 모직물은 6두품 이하는 사용금지 · 향기 나는 나무 침향은 진골(眞骨)도 사용을 금지하여 재력이나 능력으로도 넘을 수 없는 골품제신분의 벽, 장보고는 신분의 한계를 느끼며 억울해했을 것이고 신라 사회의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사치품 금지령,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사치품이 대중화되었음을 의미하고 국제무역의 성공으로 신라의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 시대를 막론하고 경제성장은 신분제를 동요시키는 현상

- 해적소탕을 조건으로 설치할 수 있었던 청해진, 신라 양민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해적에 잡혀 노예로 전락했던 반면, 사치품 금지령을 내린 왕실··· 당시 빈부격차가 심각했음을 말해주는 정황으로 경제발전과 함께 변화하고 있던 신라사회, 하지만 여전히 낡은 골품제도의 신분제에 집착했던 신라 집권층, 또한 장보고와 청해진을 통해 불어온 변화의 바람을 사치품금지령이라는 역풍(逆風)으로 누르려했던 신라 왕실

 

장보고, 왕의 정적과 손을 잡다

- 836년 흥덕왕 사후 왕위쟁탈전에 휩싸인 신라왕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가운데 유력한 왕위계승자였던 김균정은 살해당하고 아들 김우징은 궁지에 몰리자 장보고가 있는 청해진으로 몸을 피하는데 자칫하면 신라왕실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으로 장보고는 왜 김우징을 받아들였을까?

- 장보고가 왕의 정적인 김우징을 받아들인 이유?

구체적으로 장보고와 김우징의 관계를 나타내는 자료는 없지만, 청해진 설치허가 당시 왕의 측근이었고 시중의 직책에 있었던 김우징으로 보아 장보고와 김우징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정황, 그런데 장보고에게 무리한 부탁을 한 김우징은 838년 다시 왕위쟁탈전이 벌어지자 장보고에게 군대요청을 한 것, 자칫 잘 못하면 역모로 몰릴 수 있는 상황에서 군사 오천을 빌려준 장보고

- 김우징을 도운 장보고의 속내?

기록에 따르면 정의감 때문에 김우징을 도왔다는 것으로 김우징의 왕권도전을 지지한 장보고 궁복이 말하였다. 의로움을 보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용기 없는 자라 하였으니 내 비록 용렬하나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민애왕 원년> 군사를 빌려주고 839년 달구벌에서 왕의 군사를 물리치는데 성공

- 흥덕왕 사후 왕위쟁탈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자연스럽게 왕위에 올랐을 김우징으로 장보고의 입장에서는 명분과 승산이 있는 싸움이라 판단하여 김우징에게 군대를 빌려준 것이 아닌가(?)

- 이때 주목되는 것이 김우징 편에 서서 싸웠던 염장은 김우징의 측근 김양 휘하의 심복 부하로 신무왕 김우징을 왕위에 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장보고와 염장은 한 때는 같은 배를 탔던 인물

- <삼국유사>에는 장보고 살해를 왕에게 보고한 염장, 그리고 왕이 벼슬을 내린 것으로 보아 장보고의 제거를 신라왕실이 의뢰한 것으로 염장의 입장에서는 장보고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충실하게 신라왕실을 섬긴 것

- 신무왕 김우징을 왕위에 올린 장보고, 하지만 장보고 제거를 원한 신무왕 김우징의 아들 문성왕,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장보고, 신분상승을 꿈꾸다

- 8453김우징의 아들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삼으려 하지만 결혼을 극렬하게 반대하는 신하들, 장보고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결국 문성왕은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는 것을 포기하여 맨손으로 부()와 권력을 잡은 장보고는 신분의 장벽 앞에서 좌절하게 되는 것

- 신무왕으로 즉위한 김우징은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봉하고 식읍 2,000호를 하사하고 그의 아들 문성왕 때에도 장보고에게 <진해장군>이라는 호칭을 주는데 <장군>은 신라시대 진골(眞骨)만이 얻을 수 있는 칭호로 신라왕실로부터 상당한 대우를 받은 것.

식읍(食邑) : 일정 지역을 하사하고 그 땅의 경제적 이익과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줌

- <장군>이란 칭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 하면은 엄격한 골품제도의 신분제사회였던 신라는 () 민족에게는 가진 세력의 규모에 따라 신분이 결정됐는데, 진골(眞骨)로 편입된 사례는 금관가야 왕족 김유신이 유일한 것으로 역사학계에서는 신() 김씨로 불리는 김유신 집안, 장보고는 진골(眞骨)은 아니지만 진골(眞骨)의 예우를 받은 것.

- 장보고가 굳이 딸을 왕비로 만들려고 한 이유?

장보고에게 2% 부족한 것은 신분으로 딸이 왕비가 되면 자신은 자연스럽게 왕족이 되는 것으로 골품제를 뒤흔드는 싹을 자르려 한 귀족들 궁복은 섬사람(海島人)인데 그의 딸이 어찌 왕실의 배우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성왕 7> 귀족들의 극구 반대로 무산된 결혼 청해의 궁복이 그의 딸을 왕비로 받아주지 않은 것을 원망하여 청해진에 근거지를 두고 반란을 일으켰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성왕 8>

- 진골출신도 아니면서 권력의 핵심에 접근한 장보고를 기득권세력들은 위협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졌을 것, 실제로 장보고의 반란혐의의 보고를 받고도 함부로 처벌하지 못한 신라왕실, 이때 장보고를 제거하겠다고 등장한 인물이 염장, 변화의 상징인 장보고 VS () 체제의 상징인 염장으로 구체제에 짓밟힌 변화의 싹

- 염장이 신라왕실의 편에 선 이유?

염장에 대한 가설(假說)염장은 서남해안 일대에서 활동하던 군소해상세력으로 청해진의 무역독점으로 피해를 입은 군소해상세력들이 왕실과 결탁해 장보고를 제거했을 가능성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으로 장보고의 성공에 가려진 독점의 폐해, 장보고가 개인의 성공만 추구하지 않고 백성들과 상생하는 법을 찾았다면 말로가 달라졌을 것.

 

장보고 사후, 청해진의 운명은?

- 한 동안 염장의 통제 아래 놓인 청해진, 장보고의 부하들은 중국과 일본으로 흩어지고 청해진의 주민들도 염장에게 저항하다가 탄압을 받는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키자 851년 봄 2, 청해진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벽골군(김제)으로 옮겼다.” <삼국사기>

- 청해진 폐쇄가 신라무역에 미친 영향?

청해진 폐쇄로 큰 타격을 입은 신라무역, 동아시아의 해상 네트워크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면서 붕괴되고 신라 각지에서 크고 작은 해상 세력이 등장하는데 개성의 왕건 집안 · 나주의 오씨 집안 · 진주의 왕봉규 · 김해의 이언모 · 울산의 박윤웅 등의 군소 해상 세력들이 독자적인 대 중국무역을 맡게 되지만 후삼국 시대가 되면서 차츰 통폐합이 되는 것

- 장보고의 죽음이 주는 의미 중의 하나는 신라사회가 차츰 붕괴되어가는 상황에서 장보고가 지방호족세력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것으로 장보고는 죽었지만 그 후 2의 장보고인 견훤 · 궁예 · 왕건이 등장하게 되는 것으로 폐쇄적이고 견고했던 신라사회를 흔들고 중세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을 이끌어 낸 인물이라는 점

- 인물로 비교해 보면, 김유신을 품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춘추 VS 뛰어난 인물임에도 장보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신라, 장보고와 같은 인재를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신라가 멸망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