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인물열전> 제1편 흑치상지
〇 660년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백제 멸망의 그날
- 1300년 전 의자왕이 당나라에 항복하고 절망만 남은 백제, 그때 홀연히 나타나 백성들의 영웅이 된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백제의 장군 흑치상지로 혜성처럼 나타난 그의 선택이 백제의 역사를 뒤흔든다.
- 의자왕을 당나라에 넘긴 역신(逆臣) 예식진 VS 나당(羅唐) 연합군에 맞서 싸운 백제 부흥군 지수신과 복신, 그리고 두 세력 사이의 인물이 <흑치상지> “백제 유민들을 절망 속에서 구해준 영웅” VS “백제를 배반하고 당(唐)의 노예가 된 배신자” 흑치상지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왜(?)
- 흑치상지, 그는 누구인가? <강종원, 한밭대학교 인문교양학부 교수>
주로 충신들을 기록한 <삼국사기> 열전에도 수록된 인물이지만, 교과서에는 스치듯 지나가는 인물 “흑치상지는 키가 7척이 넘고 날래고 굳세며 지략이 있었다.” <삼국사기 열전 흑치상지> 조선 세조(世祖) 때 양성지라는 인물이 전(前) 왕조의 재상들을 배향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리면서 신라 김유신 · 고구려 을지문덕 · 백제 흑치상지를 꼽아 조선시대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던 역사적인 인물
- 흑치(黑齒)는 검은 이빨로 동남아 쪽에 흑치국이 있는데 이들은 빈랑이라는 열매를 자주 씹어 치아가 검게 변색이 됐다고··· 그렇다면 흑치상지는 동남아 출신(?) 하지만 흑치상지는 엄연한 백제인! “흑치상지의 조상은 원래 부여씨로 부터 나왔는데 흑치에 봉해져 자손들이 이를 씨로 삼았다.” <흑치상지 묘지명> 흑치지역이 어딘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여 동남아 필리핀이라는 해외설과 충남 예산이라고 보는 국내설
- 백제를 멸망시킨 배신자 VS 백제의 영웅, 상반된 평가를 하는 흑치상지?
660년 백제멸망하면서 흑치상지의 두 번의 결정이 백제의 역사에서 큰 방점을 찍는 계기가 되는데 그 과정에서 상반된 엇갈린 평가를 하게 되는 것, 660년 7월 나당연합군의 거센 공격으로 백제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제 관료들의 선택은 분열과 변절이었다.
〇 나라가 망했을 때, 살아남은 자들의 선택
- 급기야, 최측근 예식진의 변절로 결국 당나라에 항복한 의자왕은 당(唐) 군의 전승축하연에서 굴욕과 모욕까지 당하게 된다. “소정방이 군대를 풀어 겁략하게 하니 젊고 건장한 자들이 많이 죽음을 당했다.” <구당서> 그 당시 고대에서는 살육과 약탈이 허용된 시기로 공포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백제 유민들, 문제는 지도층인 백제 귀족 세력들의 처신
- 백제 멸망 당시 관료들의 선택은?
백제의 좌평인 임자는 김유신에게 내부정보를 팔아넘기고, 사비성 함락 후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을 웅진성 수성대장 예식진은 당나라에 팔아넘긴다. “백제의 대장 예식진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구당서 열전 소정방전> 개인의 사욕(私慾)을 위해 나라와 백성을 배신한 기회주의자들이 특권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
- 흑치상지의 첫 번째 선택?
흑치상지는 백제 부흥운동을 열심히 펼치고 있었는데, 당나라 군대의 횡포가 심해지자 “당나라가··· 백제인은 노소 가리지 않고 다 죽이고 백제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했다는데···” <구당서 동이열전 백제> 이러한 소문이 돌게 되자 흑치상지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당(唐)군을 피해 장수 10여 명과 함께 임존성으로 도망쳐서 그 곳에서 백제 부흥운동을 펼치게 된다. “임존성에 웅거하며 굳게 지키니 열흘이 못되어 귀순한 자가 3만(萬)이나 되었다.” <삼국사기 열전 흑치상지>
- 백제 입장에서 보더라도 당나라는 당연히 이민족이지만 신라도 지금의 민족개념과는 달라서 그 당시로는 철천지원수지간, 왕(王)도 항복한 마당에 상대는 최강의 당나라로 이에 맞서 백제 부흥운동에 나선 것 자체가 대단한 것, 또한 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다는데 이는 곧 내 부모형제일 수도 있는 것
- 흑치상지가 거점으로 삼은 임존성은 어디?
현재의 충남 예산군 대흥면의 봉수산성으로 추정하고 끝내 임존성 공략에 실패한 당나라 군, 산성이 험악하기도 하지만 흑치상지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던 것 “소정방이 병사를 이끌고 흑치상지를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니··· 마침내 200여 성(城)을 회복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흑치상지>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 흑치상지와 더불어 무왕(武王)의 조카인 복신 · 승려 도침 등이 부흥군의 지도부 역할을 하면서 절망 속에서 백제의 희망이 보이는 순간!
〇 흑치상지, 백제유민의 희망이 되다!
- 661년 2월 당(唐)군이 주둔한 사비성을 포위한 백제 부흥군 “당나라 군 1천여 명이 백제군을 치러 갔다가 궤멸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꺼져가는 백제의 운명에 새로운 불씨를 지핀 백제 부흥군 “백제 부흥군은 무기가 없어 막대기를 들고 싸워 신라군을 물리쳤다. 그 후 무기를 빼앗아 다시 날쌔져 당(唐)군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일본서기>
- 현진건의 소설 <흑치상지> 중에 백제유민들 사이에는 흑치장군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쳐있어 훨훨 날아다니기 때문에 장군의 밑에만 들어가면 무서울 게 없다는 희망의 아이콘이면서 구원의 동아줄!
- 백제 부흥군의 기세를 보여주는 일화! 승려 출신 장수 도침은 협상을 위해 백제 부흥군을 찾은 당(唐)군 사신을 관직이 낮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고 객관에 머무르게 한다.
〇 새로운 변수, 부여풍의 귀환
- 전황(戰況)은 백제 부흥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데 임존성 공격에 실패한 소정방의 주력부대가 고구려 정벌을 위해 당나라로 돌아가게 된 것, 하지만 당나라가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을 인질로 끌고 가면서 백제 부흥군은 구심점을 잃게 되는데, 이 때 30년 전 왜(倭)로 망명한 부여풍이 귀환하게 되면서 부여풍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백제 부흥군
- 부여풍이 백제로 돌아온 이유?
부흥군의 지도자였던 복신의 요청으로 귀국한 것, 당시 당나라로 끌려가버린 의자왕과 태자, 따라서 부흥운동의 중심인물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 당시 백제 부흥군이 처한 상황은?
사실 백제로서는 나라를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왜냐하면 당나라의 궁극적 목표는 고구려 정벌로 소정방의 주력부대를 비롯해 백제 내의 당(唐)군까지 고구려 정벌에 동원될 정도, 또한 신라 역시 당(唐)의 고구려 정벌을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나당연합군의 백제 부흥군 진압이나 경계가 소홀했던 상황
- 복신은 무왕의 조카, 스스로 왕이 될 수 있음에도 부여풍을 불러들인 이유(?)
복신은 부흥군의 지도자로 도침을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여 부여풍을 얼굴 마담으로 두려했던 것, 또한 부여풍 마저 없애려 한 복신은 아프다는 이유로 병석에 누워있다 부여풍이 오면 살해할 계획을 세웠는데 부여풍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심복들을 데리고 병문안을 가서 결국 복신을 처형하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일어나는 부흥군 지도층의 내분! 하늘이 준 기회를 스스로 걷어 차버린 꼴
- 임존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던 흑치상지는 지휘체계가 잡혀있는 상황에서 지휘부 내부의 분열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것이 그는 일개의 장수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는 것, 이후 백제 부흥운동에 어떤 일이?
〇 백제는 지금, <백강전투>
- 백제 부흥군·왜(倭) VS 나당연합군의 전투 <백강전투> 부흥군의 내분을 틈타 당나라 추가병력이 급파되자 이에 맞서 부여풍이 왜군에게 지원을 요청하는데, 왜(倭)의 파병이유 ① 선진문물 창구로써 백제의 중요성 ② 부여풍 등 백제 왕족들의 왜국 내 활동으로 정치적으로 친밀한 관계 ③ 백제가 망할 경우 당나라의 침략 위험 등으로 백제와 왜(倭)는 순망치한의 관계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
- <백강전투>의 전황분석
나당연합군의 전략은 백강하구에서 백제 부흥군의 핵심 근거지인 주류성을 협공할 계획으로 당(唐) 수군전력 170척에 17,000여 명이 백강 하구로 내려오고, 그 무렵 왜(倭) 수군 전력 1,000여 척에 30,000여 명의 병사가 당도를 한 것으로 바다에서는 왜(倭) 수군 VS 당(唐) 수군이 육지에서는 백제 부흥군 VS 신라군이 동시에 일어난 긴박한 상황의 백강전투
- 왜(倭) 수군의 전술은 빠른 속도로 적선(賊船)에 접근해 백병전을 펼치는 것, 반면 당 수군의 전술은 진영을 싸고 활·쇠뇌를 이용한 원거리 공격으로 정반대의 전술
- 전투의 결과는 전력의 강세에도 불구하고 나당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백강전투, 4번의 접전 끝에 왜(倭)수군과 백제 부흥군의 패하게 되는데 패인은?
① 썰물 때 공격하여 근접전이 불가 ②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당(唐) 수군의 원거리 공격 “백강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 <삼국사기>
- 백제 부활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부흥군의 처참한 패배로 주류성 등이 줄줄이 무너지는 상황이 전개된 것,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던지 “이때 왕 부여풍이 탈출하여 고구려로 도주하였다··· 당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寶劍)을 노획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 <백강전투>의 또 다른 비극
당나라군으로 참전한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 결국은 삼촌 부여풍 VS 조카 부여융의 대결인 고대 동아시아의 대전(大戰) <백강전투> 백제·왜 VS 나당연합군의 전쟁으로 백제 부흥군의 운명을 가른 전투
〇 흑치상지의 두 번째 선택은?
- <백강전투>의 패배로 기세가 꺾인 백제 부흥군, 성(城)이 하나씩 함락되고 이제 남은 것은 흑치상지와 지수신이 지키는 임존성뿐으로 당나라군의 포위로 사면초가에 처한 임존성, 이때 당 고종의 회유사신이 도착하고 죽느냐 VS 사느냐? 선택의 갈림길에 선 흑치상지
- 흑치상지의 두 번째 선택은?
결국 당나라군에 항복한 흑치상지, 실제 백강전투에서 패배하고 풍 왕이 고구려로 달아날 때까지도 임존성을 지키고 있던 흑치상지이지만 당 고종이 회유를 했던 것이고 결국 회유에 넘어간 것
- 또한, 투항 직후 임존성을 공격한 흑치상지의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자신이 지키던 성(城)을 자신이 공격! “흑치상지 등으로 하여금 임존성을 빼앗도록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다··· 흑치상지가 성을 빼앗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반면 끝까지 저항한 장수 지수신의 입장에서는 맨붕상태(?) 하루아침에 적(敵)이 된 흑치상지와 지수신
〇 흑치상지의 투항
- 흑치상지가 투항한 이유는?
<강종원 교수의 분석> 당시 당나라군에 속해 있었던 태자 부여융, 부여융이 흑치상지를 회유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당(唐) 군으로 참전한 부여융을 보고 흑치상지는 이미 전의(戰意)를 상실한 것(?) 왜냐하면 흑치상지의 백제 부흥군은 결국 차기 백제왕인 부여융을 위한 것 일수도 있는 것이어서 부여융이 회유했다면 흑치상지는 따를 수밖에··· 그래서 흑치상지는 영웅이라기보다는 충신(?) 혹은 부여융과 같이 훗날을 도모하려고 투항한 것이 아닐까(?) 무한한 상상을 하게 하는 흑치상지의 선택
- 하지만, 일반 평민이라면 <꺼삐딴 리>의 삶을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흑치상지는 지배층이라는 것, 그 동안 누린 권리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가 존재하는 것인데,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직접 무너뜨리다니··· 두 번째 선택은 명백한 변절(?)
※ 꺼삐딴 리 : 일제강점기~1950년대에 이르기 까지 출세를 위해 권력에 아부하며 살아온 상류층 인사의 삶을 그린 소설
- 본인도 상당한 고민을 했겠지만 당시의 상황을 보면 의자왕 사후에 차기 왕위 계승권은 적장자인 부여융에게 있는 것, 물론 왕을 위해서 백성을 희생시키느냐 하겠지만 고대사회는 백성보다 왕 중심의 시대, 한편으로는 부여융을 따라 당(唐)의 신임을 얻어 신라군을 몰아낸 뒤 백제의 정치적 독립을 기대했을 수 있다는 학계의 견해도 있지만 백제 부흥을 이끈 장수 흑치상지라는 점에서 아쉬운 선택(?)은 결코 합리화 될 수 없는 것
- 끝까지 항전(抗戰)한 지수신은?
마지막까지 싸운 지수신은 결국 임존성이 함락되자 “흑치상지 등이 성(城)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이어 고구려도 멸망하게 되어 그 이후 지수신의 행방은 알 수 없음
- 훗날 흑치상지가 백제 부흥을 도모한 흔적은?
임존성을 함락시킨 공로로 웅진도독부의 군장의 직위를 얻고 웅진도독이 된 부여융과 함께 활동은 하지만 구체적인 기록은 없고, 다만 당(唐)의 입장에서는 웅진도독부를 당(唐)의 백제 지배를 고착화시키는데 이용하지만, 결국은 670~676년의 <나당전쟁>으로 한반도에서 쫓겨난 당나라군, 이때 흑치상지와 부여융도 함께 당나라로 떠나게 되어 아직까지 백제 부흥을 도모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음
※ 웅진도독부 :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백제 땅에 설립한 식민통치기구
〇 당나라 장수가 된 흑치상지
- 장수로써의 능력은 탁월했던 흑치상지는 당나라에서 많은 공적을 쌓는데, 대표적으로 678년에 토번정벌로 좌음양위대장군인 정3품의 관직을 받고, 또 다시 돌궐을 격파하여 정1품인 연국공 작위와 식읍(食邑) 3천호를 하사받아 이민족 장수로서는 최고 작위에 오른 흑치상지, 측천무후는 백제에는 흑치상지가 있는데 왜 망했을까? 했다고···
- 실제 주변국에서 당(唐)에 들어가 생존하는 방법은 전공(戰功)을 세우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방법이 없을 것 “흑치상지는 5천여 경에 달하는 둔전(屯田)을 개간하여 해마다 5백만 석의 곡식을 거두었다.” <자치통감> 토벌하는 과정에서 군사력 증강을 위해 변방지역의 땅 개간으로 경제력을 높인 것
〇 영웅에서 배신자로! 흑치상지의 최후
- 689년 당나라 장수로 활약하던 흑치상지는 동료의 모함으로 반역죄에 몰리게 되고 흑치상지는 억울함을 주장하지만 결국 6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만다. “이미 옥에 갇혀 이윽고 하늘을 등지게 되니··· 이때 나이 60세였다.” <흑치상지 묘지명> & “모함으로 반역죄를 얻어 감옥에서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당서 열전 흑치상지>
- 측천무후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많은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처단된 수많은 외국 장수들은 용도폐기가 된 것 아니었나(?) 흑치상지뿐만 아니라 당(唐)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고구려 · 백제 출신 장수들, 하지만 대부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 당하고 만다.
- 측천무후가 이민족 장수를 처단한 이유는 무력을 키워 황권(皇權)을 위협할 수도 있어 당(唐)군부 내 기반구축을 사전에 차단한 것, 이이제이(以夷制夷) + 토사구팽(兎死拘烹) 그야말로 이용만 당하고 죽임을 당한 꼴
- 배신을 거듭하다 죽임을 당한 삼국지의 여포를 보며 흑치상지는 적어도 임존성의 동지들에게까지는 칼끝을 겨누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측천무후 입장에서는 동족까지 배신했는데, 당나라야 쉽게 배신하겠지(?) 결국 흑치상지는 주류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용병으로 이용만 당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고 그런 인물이 당(唐)을 위해 승승장구했다는 것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진실.
- 의자왕을 팔아넘긴 예식진은?
흑치상지와는 달리 당나라에서 호의호식한 예식진, 나라를 팔아먹고도 호의호식하는 선례가 있어서 역사적으로 기회주의자들이 계속 양산되고 있는 것, 그래서 역사는 당대에는 발을 펴고 편히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후대의 혹독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는 것!
〇 흑치상지, 두 번의 선택이 우리에게 남긴 것?
- <일제강점기>를 연상시키는 흑치상지의 선택, 최남선·이광수 같은 인물이 친일행위에 있어서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스스로를 변명하고 합리화시킬 수 있는 논리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역사적 평가에서는 절대로 정당화 될 수 없는 변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하는 것.
- 또한 당시의 상황이나 흑치상지의 개인적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역사는 개인의 변명으로 기록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 그것은 자기들끼리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위안을 주기 위해 쓰는 말이지 역사는 그렇게 기록되어서는 안 되고 정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역사! 그래서 늘 역사 앞에서 두려워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
- 흑치상지의 인물을 통해서 흥분과 안타까움을 가지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백제의 멸망으로 그쳤다면 이런 안타까움이 없었을 것이지만 일제 식민지배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함께 중첩이 되면서 모든 역사는 지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역사라는 것, 천 년·백 년 전의 역사도 현재시점에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사회적 지도자들은 역사적 존재임을 잊지 말고 역사 앞에서 항상 겸손해야 하는 것은 늘 역사 앞에서 평가를 받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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