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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인물열전> 제3편 우씨 왕후

mkpark2022 2016. 2. 8. 21:34

 


 

<고대사 인물열전> 3편 우씨 왕후



우씨 왕후, 시동생 발기(發岐)를 찾아가다.

- 2세기 고구려 왕실의 큰 파문을 일으킨 한 여성, 조선시대의 <동국통감>그 행위가 돼지보다 심하여 천리(天理)가 무너지고 인도(人道)가 끊어졌다. 천하고금에 더러운 행동과 도덕에 위배된 짓을 한 자는 특히 이 한 사람뿐이다.” 고 기록하여 여성으로써 그리고 사람으로서 최악의 평가를 받는 이유는? 고구려 고국천왕의 왕후이면서 고국천왕의 동생인 산상왕의 왕후이기도 한 그녀, 인륜을 거스른 희대의 악녀 VS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개척한 진취적 여성?

- 형제와 혼인해 두 번이나 왕후가 될 수 있었던 배경은?

1975, 고구려 고국천왕은 제위 19년 만에 후사 없이 숨을 거두자 우씨 왕후는 왕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면서 철저하게 숨기고 그 날 밤 우씨 왕후는 몰래 궁궐을 빠져나와 왕의 첫째 동생인 발기(發岐)를 찾아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말하자 이를 들은 발기는 오히려 아녀자가 밤늦게 다니는 것에 법도를 내세우며 우씨를 비난한 발기(發岐), 시동생에게 크게 창피를 당한 우씨 왕후, 그녀가 발기(發岐)에게서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우씨 왕후가 발기(發岐)를 찾아간 이유는?

<임기환 교수의 분석>은 차기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고국천왕의 첫째 동생 발기가 우씨 왕후 자신과 정치적으로 손을 잡을 수 있는 인물인지 알고 싶었을 것이라는 추론,

- 발기(發岐)가 우씨 왕후에게 화를 낸 이유는?

발기(發岐)에게 왕이 죽은 사실을 밝히지 않은 우씨 왕후, 왕이 살아있는데 차기 왕위를 논하는 것은 역모행위로 왕이 죽은 사실을 모르는 상황에서는 화를 낼 수밖에 없었던 발기(發岐)의 입장은 당연한 것이고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럽게 고국천왕의 사후 대권을 차지할 수 있는데 굳이 우씨 왕후와 손잡을 필요가 없다는 것 왕후 우씨는 임금의 죽음을 비밀로 하여 밝히지 않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우씨 왕후, 둘째 시동생 연우와 손잡다

- 발기(發岐)의 집을 나선 우씨 왕후가 향한 곳은?

왕실 최고위급 인사들의 밀회현장으로 일이 있으면 만날 수도 있다지만 형수와 시동생의 은밀한 만남, 밀회의 주인공은 우씨 왕후와 고국천왕의 둘째 동생 연우, 연우도 의관까지 갖추고 기다렸다는 듯이 문까지 나와 우씨 왕후를 맞이하고 잠시 얘기만 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잔치까지 벌이면서 연우가 우씨 왕후를 위해 직접 고기까지 자르면서 봉사를 하다가 손가락을 베어 피가 흐르자 갑자기 치마끈을 잘라 연우의 손가락을 감싸주는 우씨 왕후

- 잔치가 끝난 후 우씨 왕후를 궁궐까지 배웅하는 연우는 궁궐로 같이 들어가고 왕실은 정확한 해명을 회피하고 있는 상황인데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우씨 왕후와 연우의 관계는?

<삼국사기>의 기록에 근거한 위의 사건들, 연우에게는 고국천왕의 죽음을 알리고 발기(發岐)에게는 숨긴 것 왕후가 말하기를 그는 내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여 사납고 거만하며 무례하게 대하기 때문에 숙씨를 만나보러 왔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창피를 준 형 발기(發岐)와는 달리 극진히 우씨를 대접한 연우

 

고기요리에 담긴 연우의 속마음

- 우씨 왕후가 연우가 내연관계였다는 기록은 없으나 참고할만한 자료는 고구려 무용총의 <접객도> 칼을 들고 식사 시중을 드는 시종(侍從)이 고기를 자르는 장면을 보면 연우가 고기를 직접 잘랐다는 것은 연우가 우씨 왕후에게 시종(侍從)이 될 수도 있다는 간접 표현, 또한 같이 궁궐까지 가게 된 두 사람 왕후가 연우에게 말했다. ‘밤이 깊어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까 두려우니 그대가 나를 궁까지 데려다 주세요. 연우가 왕후의 손을 잡고 궁으로 들어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 고구려에선 왕후가 왕위계승 서열을 바꿀 수 있나?

왕위계승 서열을 바꿀 명분이 없었던 우씨 왕후는 연우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거짓말 왕후가 선왕(先王)의 명이라고 속이며 여러 신하에게 명령하여 연우를 왕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 우씨 왕후의 거짓말, 신하들의 반발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신하들, 이는 우씨 왕후와 신하들이 사전에 정치적 합의가 이뤄졌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

- 그렇다면 고국천왕의 죽음을 암살로 볼 만한 근거는?

<임기환 교수의 분석> 그런 기록은 없고 우씨 왕후가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왕후라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으로 고국천왕이 죽으면 왕후자리에서 물러나 정치적 힘을 잃게 되는 상황이어서 계속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집안 세력인 연나부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왕후의 자리를 유지하거나 그런 조건을 수용할 차기 인물이 왕이 되어야만 하는 것

- 우씨 왕후에게 뒤통수를 맞은 발기의 선택?

발기의 입장에서 보면 연우의 즉위는 모반사건, 그래서 병사들을 이끌고 반격에 나선 발기(發岐), 연우도 이에 대응하여 연우는 사흘 동안 문을 닫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 사람들도 발기(發岐)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심지어 고국천왕 당시 최고의 재상이었던 을파소 마저 발기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정당한 왕위 계승자였지만 지지를 얻지 못한 발기

을파소(?~203) : 12년간 고국천왕 · 산상왕을 섬긴 고구려 명재상

 

왕위를 빼앗긴 발기(發岐), 반격에 나서다

- 발기의 선택은?

<KBS 드라마 대조영> 하루아침에 왕위를 빼앗긴 발기는 한나라 요동 태수 공손씨에게 도움을 청하고 공손씨는 3만 군사를 내주며 고구려를 공격하자 연우도 군사를 보내 맞서 싸우게 되는데, 전쟁으로 번진 형제간의 왕위 쟁탈전으로 고구려는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 우씨 왕후의 입장에서는 연우를 선택했을 때 과연 발기는 어떤 행동을 보일 것인가? 하는 예측된 상황 중에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인데 과연 우씨 왕후가 이를 예측하지 못했을까? 충분히 예측된 상황으로 자신의 목숨과 지지 세력을 건 우씨 왕후의 정치적 승부수로 도박을 한 것, 발기 VS 연우에서 우씨 왕후의 선택은 사랑이 아닌 정치적 선택(?)

- 여기에서 또 다른 동생이 등장하게 되는데, 첫째 남무(男武)는 고국천왕 · 둘째는 발기(發岐) · 셋째는 연우(延優) 산상왕 · 넷째는 계수(瀱須)동생 계수를 보내 형 발기를 진압하게 한 연우, 결국 발기 군대는 크게 패하고 달아나게 된다. “계수가 말하기를 연우가 나라를 양보하지 않은 것은 비록 대의가 아니라 하겠으나 당신이 한 때의 노여움으로 왕실과 나라를 없애려 드니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조상들을 뵐 것입니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계수의 꾸짖음을 듣고 후회하며 자결을 선택한 발기

 

우씨 왕후, 다시 왕후가 되다.

- 발기의 죽음 이후 우씨 왕후와 연우의 행보?

1975월 고국천왕이 승하하고 1979월 우씨 왕후를 왕후로 삼은 연우, 고구려에서는 한 여성이 형제와 혼인할 수 있었나? 고대 사회의 유목민에게는 형사취수는 보편적인 풍습으로 형사취수의 목적 남편을 잃고 생계가 어려워진 부인과 자식을 돌보기 위한 목적 부인이 가져온 지참금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풍습은 부여에도 있었고 “(부여에서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이는 흉노의 풍습과 같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

- 고구려의 형사취수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이런 사례를 통하여 고구려에도 형사취수의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우씨 왕후와 연우의 혼인은 고구려 형사취수의 사례로 비난을 받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며 우씨 왕후에 대한 <동국통감>의 평가는 조선시대의 관점에서 본 것

- 연우와의 혼인을 원했던 우씨 왕후, 발기에게는 이미 교위거라는 아들이 있어서 기혼자 발기를 선택할 경우 우씨 왕후의 설자리는 없어지는 것, 그래서 미혼이었던 연우를 선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우씨 왕후는 형사취수의 풍속에 따라 연우를 선택하면 계속 왕후가 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을 했을 것(?)

- 또한 우씨 왕후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했던 것으로 고구려 여성에게는 그런 경향이 있는데, 고구려 시조 주몽의 부인인 소서노(召西奴)는 주몽의 아들 누리왕이 찾아오자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아들 비류 · 온조와 함께 남하하고, 평강공주 또한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금팔찌를 가지고 궁을 뛰쳐나와 온달과 혼인해 장군이 되도록 내조하는 등, 소서노 · 평강공주 · 우씨 왕후, 이들은 진취적인 삶을 살았던 고구려 여성의 모습으로 선택의 폭이 좁았던 고대에서 과감하게 자신의 삶을 선택했던 여인들

- 시대의 관점에 따라 달리 평가되는 우씨 왕후, 조선의 성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돼지와 같은 행실로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색안경을 벗고 보니 달리 보이는 우씨 왕후

- 다시 왕후가 된 우씨 왕후의 삶?

정치의 실세가 되어 승승장구하지만 우씨 왕후의 치명적 약점은 후사가 없는 것, 일반적으로 왕비가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면 후궁을 들이는 것으로 당시 소후(小后)를 들이고 싶었지만 우씨 왕후가 버티고 있어 소후(小后)를 들이지 못한 연우, 산상왕 7년에 후사를 보기위해 산천에서 기도를 하는데 꿈에서 하늘이 내가 너의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염려치 말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7> 산상왕은 꿈 이야기를 신하에게 말 하면서 소후가 없는데 어떻게? 신하들이 좀 더 기다려 보자는 제의를 하면서 우씨 왕후의 눈치를 살폈던 신하들

 

우씨 왕후의 위기, 라이벌의 등장

- 연우가 왕으로 즉위한지 12년인 208년 겨울에 묘한 일이 일어났는데, 꿈에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 멀리 주통촌까지 도망을 간 것, 그런데 때마침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돼지를 잡아주고 이 말을 전해들은 산상왕은 몰래 여인을 찾아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우씨 왕후는 주통촌 여인을 죽이라고 명하지만 병사들은 여인을 제거하는데 실패한다.

- <우씨 왕후의 청문회> 주통촌의 여인을 죽이기 위해 병사들을 보낸 적이 있나? 그렇소! 그런데 왜 죽이지 못했나? 여인의 뱃속에 왕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소! 그 후로는 자객을 보내지 않았나? ··· “왕후가 노하여 기필코 그녀를 죽이려 했으나 결정하지는 못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 13>

- 우씨 왕후가 주통촌의 여인을 죽이려 한 이유?

권력욕이 강했던 우씨 왕후에게는 경쟁자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을 것, 왕까지도 선택한 우씨 왕후권력도 사랑도 분산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

- 주통촌의 여인은 무사히 아이를 낳았나?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산상왕, 이후로 우씨 왕후는 주통촌의 여인을 위협하지 못하고 아이는 자라서 고구려 제11대 동천왕이 되며 연우의 소후가 된 주통촌의 여인, 산상왕의 꿈대로 실현 된 것

- 산상왕을 주통촌으로 이끈 돼지는 일반 돼지가 아니라 제수용 돼지라는 것으로 이는 하늘의 뜻이라는 의미이며 고구려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할 때 도망간 제수용 돼지를 쫒아가다 발견한 곳이 새로운 도읍지 국내성이고 천도는 곧 하늘의 뜻이라는 것

- 혹시 이 모든 것이 연우의 고도의 정치적 계산(?) 왜냐하면 도망간 제수용 돼지를 잡은 여인과 하늘의 뜻에 따라 결혼하게 하여 우씨 왕후에게 소후를 들일 명분을 설명하기 위한 것(?) 우씨 왕후뿐만 아니라 연우도 정치적 계산이 뛰어났던 것이 모든 것을 얻은 연우 우씨 왕후 왕위 소후 아들 까지··· 진정한 승리자 연우

- 소후 등장 이후 우씨 왕후의 세도(勢道)?

우씨 왕후가 한 수 위인 것이 남편인 연우가 죽은 후에도 계속 왕후로써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세도(勢道)도 만만치 않았던 것소후에게서 난 아들이 동천왕으로 올랐을 때 왕의 어머니 신분으로 우씨 왕후는 동천왕을 시험해 보는데, 사냥 나가는 말의 갈기를 갈기갈기 자르고 또한 시녀로 하여금 국물을 쏟게 하기도 하지만 전혀 화를 내지 않은 동천왕은 우씨 왕후의 시험에 무사통과하여 합격, 동천왕이 우씨 왕후의 의중을 헤아리고 조심스럽게 행동했을 것

 

우씨 왕후의 마지막 선택

- 고국천왕 · 산상왕 · 동천왕까지 3대에 걸쳐 권력을 유지한 우씨 왕후, 한 여인의 입장으로 보면 연우는 다른 여인을 선택을 했고 자식도 없는 상황에서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 상실감이 많이 컸을 것

-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고 우씨 왕후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은 죽음을 앞두고 첫 남편 고국천왕의 곁에 묻힐 것 VS 둘째 남편 산상왕의 곁에 묻힐 것이냐? 마지막 순간 그녀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데, 산상왕의 곁에 묻어달라고 선택을 하는 우씨 왕후

- 우씨 왕후가 산상왕과의 결혼은 스캔들이 아닌 형사취수의 풍습, 하지만 우씨 왕후가 산상왕 곁에 묻어달라는 것은 고구려판 스캔들, 형사취수의 원칙은 부인은 죽은 후에 형 옆에 매장하는 것이 원칙인데 형사취수의 원칙을 깨버린 우씨 왕후, 또한 우씨 왕후의 파격적인 선택을 받아들인 동천왕을 보면 죽는 순간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우씨 왕후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

- 우씨 왕후의 선택에 화가 나고 억울한 고국천왕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무당(巫堂)의 꿈에 고국천왕이 나타나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그와 더불어 싸웠다···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얼굴이 뜨거워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가 조정에 알리어 나의 무덤을 물건으로 가리게 하라. 이 때문에 고국천왕 릉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8>

- 우씨 왕후가 왕실에서 보낸 기간?

180년 고국천왕의 왕후가 되고 197년 산상왕의 왕후, 228년 왕 태후가 되고 234년 사망하여 무려 55, 3대에 걸쳐 왕실생활을 하면서 최고의 권력을 유지

 

우씨 왕후의 선택이 남긴 것

- 우씨 왕후가 고구려 역사에 미친 영향?

우씨 왕후가 선택했던 연우 산상왕 대에 왕권이 안정이 되면서 이후 고구려 왕계는 변함이 없이 모두 산상왕의 후손, 또한 <삼국사기>3대 왕에 걸쳐 남아있는 우씨 왕후의 기록은 그 동안 남성 중심 역사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던 고구려 여인들의 삶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는 것

-고대사 여인들 중 평강공주 · 낙랑공주 · 선화공주보다 기록이 많은 우씨 왕후, 심지어 광개토대왕 보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많은 우씨 왕후, 그 만큼 이 여인이 활동했던 정치적 영향력이나 비중이 컸다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