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인물열전> 제2편 김헌창
〇 김헌창의 난, 반란 혹은 혁명?
- 통일 이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태평성대를 누리던 신라, 하지만 100여 년이 지난 822년에 국민의 절반에 가까운 세력들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반란의 주인공은 김헌창! 그는 <장안>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신라사회를 뿌리째 뒤흔들게 되는데, 신라 판 금수저의 진골귀족이었던 그는 대체 왜 이런 선택을 했나?
- 공무원·수능·중고교 시험의 단골출제 문제 <김헌창의 난>, 676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전성기를 누리며 불국사 석굴암을 창건하는 등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 어느 날인 822년 헌덕왕 14년 신라 지방 세력의 절반이 반란을 일으킨다.
- 반란의 주역은 웅천주의 김헌창으로 지방 세력들은 적극 동조를 하게 되고 김헌창은 단순한 반란인 왕권을 노린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국호는 장안(長安) 연호는 경운(慶雲), 김헌창은 왜 반란을 선택한 것일까? 통일 이후 김흠돌의 난 · 96각간의 난 · 장보고의 난 등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던 신라
- 김헌창의 난, 무엇이 다른가? <전덕재,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대체적으로 반란은 왕권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 중심인데, 김헌창의 경우에는 단순하게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라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반란으로 김헌창은 옛 백제의 수도 웅진이 있던 지역인 웅천주의 도독, 도독은 지방 각 주의 최고 벼슬로 왕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행정권·사법권·징병권을 행사할 수 있어서 나라를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으로 김헌창은 많은 지방 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당당히 개국을 선포
- 우리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나라 장안(長安), 김헌창의 반란은 처음에는 기세 좋게 출발하여 신라의 행정 구역 9주5소경 중 5주3소경이 가담하여 지방 세력의 든든한 지지기반 위에서 출발한다.
〇 금수저 김헌창, 신라 왕실에 불만을 품다
- 김헌창은 누구?
난(亂)이 지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촌주? 농민? 으로 생각하지만 김헌창은 신라 최고의 금수저인 진골출신으로 무열왕 김춘추의 후손, 아버지 김주원은 재상 중의 재상인 상재상에 역임하기도 하는 신라 최고의 명문가.
- 차이가 나는 점은 왕족의 정계진출이 금지됐던 고려나 조선에 비해 정계진출은 물론 왕위계승 자격까지 가진 신라의 진골귀족, 김헌창의 경우에는 애장왕 대에는 현재의 국무총리 급인 집사부 시중에 역임하기도 한다.
-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
애장왕 대까지 시중을 지냈지만 애장왕 사후 헌덕왕 대에는 지방을 전전하며 중앙의 요직에서 밀려 난 김헌창은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이 도지사로 좌천된 셈, 또한 당시 김헌창이 반란의 명분을 얻을 수 있었던 계기는 헌덕왕은 13세에 즉위한 애장왕을 위해 섭정을 펼치다가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불법적인 왕위찬탈을 한 것으로 신라 판 수양대군인 셈으로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 ① 헌덕왕의 불법적인 왕위찬탈 ② 헌덕왕의 친인척이 중앙 관직 장악
〇 김헌창 아버지의 운명을 바꾼 폭우
-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헌창 반란의 이유?
“822년 3월 웅천주 도독 헌창이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함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4년> 785년 선덕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차기 왕으로 지목된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은 갑자기 내린 큰 비로 알천(閼川) 강물이 불어나 궁궐에 가지 못하게 되자 귀족들은 폭우가 하늘의 뜻이라고 여기고 김주원 대신 다른 인물을 왕으로 추대하게 되는데, 왕위계승 서열 1위에서 왕이 되지 못한 김주원은 이를 계기로 정계를 떠나 남은 생을 보내게 된다.
- 우리 역사에서 폭우로 역사를 바꾼 대표적 사건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회군의 주요 명분이 폭우로 압록강이 불어 강을 건널 수 없었다는 것으로 실록에도 비만 오지 않았다면 강을 건넜다는 느낌으로 기록
- 김주원 대신 왕이 된 인물은?
모든 사건은 이득을 본 인물이 제1의 용의자! <삼국사기>의 기록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진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여 주원을 임금으로 세우고 싶지 않음이 아닐까?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前) 임금의 동생으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 원년> 37대 선덕왕 재위 당시 상대등이었던 38대 원성왕 김경신은 선덕왕이 왕위 계승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덕왕을 왕위에 올리는 큰 공을 세운 인물, 그 이유로 상대등 직책을 제수 받지 않았을까(?)
〇 원성왕 김경신을 왕으로 만든 꿈
- 신라는 지금, 상대등 김경신은 현재의 국회의장으로 며칠째 출근을 하지 않아서 논란, 그런데 원인이 악몽을 꾸고 출근을 못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 “꿈에 복두를 벗고 소립을 쓰고 12현금(絃琴)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삼국유사 기이 원성대왕> 해몽인즉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쓰게 될 조짐이며 ·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獄)에 갇힐 조짐으로 너무 무서워서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것
- 하지만 다시 출근하게 되는데 6두품 관리인 여삼이 재(再) 해몽하기를 복두를 벗은 것은 공의 윗자리에 앉을 사람이 더 이상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고 12현금(絃琴)을 든 것은 바로 내물왕의 12대 손(孫)이 왕위에 오름을 의미하는 것이며 천관사 우물로 들어간 것은 궁궐로 들어가는 의미라는 것, 전혀 상반된 꿈 해몽으로 안심하고 정상 출근하는 김경신, 역시 꿈보다는 해몽
- 현실적으로는 이미 김주원이 차기 왕으로 결정된 상황 “위에 주원이 있는데 어찌 왕위에 오를 수 있겠소? 왕이 말하자 아찬(여삼)이 대답하기를 청컨대 은밀히 알천(閼川) 신에게 제사 지내면 될 것입니다. 왕은 이에 따라 제사를 지냈다.” <삼국유사 기이 원성왕>
- 적극적으로 김경신을 지지한 귀족들로 보아 김경신의 사전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상황,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이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선덕왕이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상대등 경신(원성왕)이 뭇사람을 위협하고 먼저 궁에 들어가서 왕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이것이 사실에 가장 가깝지 않겠는가(?) 원성왕 즉위 당시에는 이미 세상을 떠난 꿈을 해몽했던 여삼, 김경신 원성왕은 여삼의 자손을 불러 벼슬을 내린다.
〇 왕이 되지 못한 자,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
- 김주원은 그 후 어떻게 됐을까?
권력쟁탈에서 밀린 김주원은 가만히 있다가는 오히려 후환이 두려워 중앙정계를 떠나 명주(강릉)로 가게 되는데, 왕이 된 후 정적을 제거하는 것은 왕위 찬탈공식(?) 하지만 기록에는 원성왕은 즉위 2년 후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책봉하고 양양·삼척·울진·평해 등을 식읍으로 인정하여 김주원의 중앙정계 진출을 막고, 자신의 후손들이 안정적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하면서 이후 김주원은 강릉김씨의 시조(始祖)가 된다.
- 왕위를 뺏긴 아버지를 위해 와신상담한 김헌창(?)
복수라고 하기에는 타이밍의 문제로 김헌창의 난은 그로부터 37년 후인 822년에 일어나고 그 사이 왕이 3명이나 바뀐 상황, 또한 아버지가 죽거나 집안이 망한 것도 아닌데 복수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기에도 힘들 것, 또한 당시 중앙에서 활동하던 김헌창의 형 김종기가 있어서 아버지가 왕위에 올랐어도 김헌창이 왕이 되기에는 힘들었을 것
- 그렇다면 왜 김헌창은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을 반란의 이유로 내세웠나?
태종무열왕계가 계속 왕위를 계승해오다 선덕왕과 원성왕은 내물왕계로 김주원을 내세워 ① 내물왕계 왕위계승의 비합법성을 강조 ② 태종무열왕계 지지 귀족세력의 규합이 중요한 이유였지 않을까(?)
- 신라 왕위를 노리지 않고 왜 새로운 나라를 세웠나?
김헌창은 계속되는 왕위 찬탈전을 지켜보며 신라정치에 환멸을 느꼈을 수도 있고 지방관직을 지내면서 백성들의 참혹한 삶을 목격하고 새로운 나라를 꿈꿨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복수보다는 신라의 리셋 개념으로 나라를 세웠을 것으로 추측(?)
- 우물 속에서 발견된 아이의 해골?
경주 우물 속에서 발견된 인골, 분석결과 키 125Cm 열 살 전후의 여자아이로 밝혀진 유골로 이마의 함몰 흔적은 타살의 증거로 아이는 고대제사에 쓰이는 물건들과 같이 층층이 매장되어 바로 인신공양이 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 우물에서는 왕실에서 제작된 기와조각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아이는 큰 규모의 국가행사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뭄·기근·병충해·역병까지 천재지변이 가져온 고통과 불안을 달래기 위해 억울하게 희생된 아이의 생명, 자연재해와 민생고에 시달린 신라 하대 백성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것
〇 헬 신라의 지방관, 김헌창
- 순장(殉葬)은 지배계층이 사망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인 시체를 함께 묻는 풍습으로 우물 속 사건은 김헌창의 난과 직접 연결돼 있다고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김헌창이 살았던 9세기 신라는 천재지변이나 자연재해에 시달린 것은 사실로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인신공양 제사를 지내지 않았을까(?) “헌덕왕 8년(816년) 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당나라 절동(浙東)지방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 이었다.” & “헌덕왕 13년(821년) 봄, 백성들이 굶주리자 그 자식을 팔아서 까지 생존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 이렇게 사회가 어려운데 중앙 귀족들은 권력쟁탈전으로 민생안정대책을 세우지 못했던 9세기 신라, 하지만 나름대로 경제적 부(富)를 확충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이러한 부(富)가 일반백성들에게는 배부되지 않았다는 것 “신라 전성시대에·· 서른다섯 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으니···” <삼국유사 기이 진한> & “재상의 집에는 녹(祿)이 끊어지지 않으며 노비가 3천 명이나 되고, 갑병(甲兵)과 소·말·돼지도 이에 맞먹는다.” <신당전 동이열전 신라> 전형적인 부익부 빈익빈은 9세기 신라의 그늘이었던 것
- 자연재해보다 더 무서운 진골귀족들의 수탈과 녹읍의 폐단은 농민들을 괴롭혔는데, 과도한 세금부과 → 세금 체납 → 농민 이탈 → 남은 농민의 세금부담 증가,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으로 왕조 말(末) 전형적인 사회현상
- 또한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기 불과 몇 년 전 “819년 7월 당나라 운주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은 ··· 정예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돕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1년> 설상가상으로 강제징집까지 당했다면 민심이 좋을 리 없었을 것이고 귀족들의 탐욕으로 고통 받는 신라 백성들, 의식 있는 지배층이라면 좌시할 수 없는 상황으로 9세기 김헌창이 난을 일으킨 것은 고통 받는 백성들의 시대적 요구(?)
- 김헌창이 있었던 웅천주와 무진주는 특히 빈곤이 심했던 지역으로 김헌창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관들도 농민들의 비참한 삶을 보고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듯(?) <삼국사기>에는 김헌창이 지방 관리들을 위협했다고 기록하지만, 스스로 김헌창과 뜻을 같이 한 지방관들도 많았을 것으로 보여진다는 <전덕재 교수의 분석>
- 김헌창의 난, 반란 혹은 혁명?
반란과 혁명의 기준점은 명쾌한 것으로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반란, 그래서 왕만 바꿔서는 안되고 다시 개국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듯(?)
〇 김헌창이 꿈꾼 나라, 장안(長安)
- 장안(長安)이라는 국호의 뜻은?
당시 당나라의 수도는 장안, 김헌창에 내세운 국호 장안(長安)은 백성들에게 오랫동안 편안한 나라를 세우자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 아닐까(?) 독자적인 연호 경운(慶雲)을 사용했다는 것은 당(唐)에 대한 사대주의를 배격하겠다는 의지로 당시 북쪽에 위치한 발해 역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던 것
- 김헌창의 난(亂) 전개과정
나당전쟁을 마지막으로 통일된 지 100여 년이 지난 신라군, 기강이 헤이 해졌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의외로 빠르고 강력하게 대응한 신라 중앙군은 장군 8명을 왕경(금성) 8방에 배치해 수비를 강화하고 선발대·본진·선봉대로 구성하고 자원한 화랑들도 전투에 참여하여 체계적인 움직임을 보이게 되는데, 김헌창의 난에 승패를 가른 결정적 전투가 되는 삼년산성(충북 보은)은 470년대에 축조된 신라산성으로 고대 산성 중 가장 높은 산성, 삼년산성을 차지하고도 패배한 김헌창 반란군, 중앙군이 속리산으로 진군하면서 반란군을 토벌하고 본진은 성산(성주)에서 반란군을 격파시킨 것.
- 김헌창의 반란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이유?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추정해 보건데, 김헌창 반란군 패배이유 ① 전투 초반 보안에 실패 “완산주 장사 최웅과 조아찬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이 서울로 도망쳐서 역모를 알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4년> ② 신라 중앙군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공격에 전투초반에 승기를 뺏긴 것 ③ 반란군은 전력(戰力)이 낮은 지방군으로 구성 ④ 일원적인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함, 고대의 전쟁은 숫자도 중요하지만 조직력과 지휘관의 지략이 중요했던 것으로 넓은 지역과 많은 세력의 지지를 얻었으나 군사적 역량은 부족했던 김헌창,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 패자의 승리는 사라지고 패배의 기록만 남은 것은 아닌지(?)
〇 김헌창의 자살
- 반란에 실패한 후 김헌창은?
연이은 패배로 궁지에 몰린 김헌창은 가까스로 웅진성으로 몸을 피해 최후의 결사항전을 벌이지만 중앙군이 성(城)을 포위하고 총공격의 열흘, 패배를 예감한 김헌창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고 성(城)이 함락되자 239명의 반란군은 처형이 되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김헌창의 뜻은 사라지고 역사는 김헌창을 반란자로 기록한다.
- 한 달여 만에 진압된 난 “그를 따르는 사람이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묻었는데, 성(城)이 함락되자 중앙군이 그의 몸을 옛 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4년>
- 삼국사기에는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신라 중앙군이 보고 들은 기록만 남아있는 것으로 9주 5소경 중 5주 3소경이 가담하여 새로운 세상을 원했던 세력들은 김헌창의 반란에 적극적으로 호응했을 것
- 자살로 끝난 김헌창의 난,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이때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은 살아남는데 “825년 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 도적 등 백여 명과 함께 모반하여 평양에 도읍을 세우고자 북한산주를 공격하였다.” & “도독 총명이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잡아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7년> 결과적으로 신라군의 입장에서 보면 김헌창의 잔당마저 제거시킨 셈
〇 후삼국 시대의 서막을 연 김헌창의 난
- 김헌창의 난 이후에 중앙권력을 강화한 신라왕실 VS 신라왕실에 대한 저항이 점차 성장한 지방세력,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에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면서 우리 역사의 후삼국 시대를 열어간다.
- 후삼국을 세운 지방호족과 달리 김헌창은 왜 실패했을까?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은 것, 당시 김헌창은 헬 신라라는 시대정신은 읽었으나 새로운 세상을 여는 구체적인 방안은 없었던 것, 왜냐하면 이후 고려를 세운 왕건 같은 경우에는 명확하게 대외적으로는 고구려계승 · 민생안정 · 조세감면 등 구체적인 정책이 줄을 이었으나 김헌창의 경우에는 그렇질 못했다는 것
- 또한 이름도 잘 지어야 하는 것이 국호를 장안이 아닌 후백제라 지었다면 백제유민의 반(反) 신라정서를 끌어낼 수도 있어 오히려 호응의 크지 않았을까(?) 백제의 뒤를 잇는 후백제의 견훤이나 고구려의 뒤를 잇는 후고구려의 궁예, 또한 왕건도 고구려의 뒤를 잇는 고려와 고조선의 뒤를 잇는 조선의 이성계처럼 국호도 매우 중요한 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은 소속감과 연대감에서 발휘되는 것
- 신라사회의 한계는 사회모순을 깨닫고 변화시켜 나가야 할 지배층 진골귀족이 오히려 폐쇄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 대표적으로 장보고가 중앙정계에 진출하려 했을 때 지방촌놈이라고 중앙정계 진출을 막은 것은 변화를 일으키는 지방호족의 성장을 막는 진골귀족 그들만의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새로운 사회로의 발전에 보수적으로 대응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걸림돌이 된 귀족세력
- 또한 김헌창 역시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것, 결국 그 당시 지방에서 난(亂)을 일으키고 지방 세력의 호응은 얻었지만 지방민의 입장에서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어서 실패하게 되고, 김헌창의 난 이후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왕건 · 견훤 · 궁예라는 진골귀족이 아닌 지방의 호족세력의 몫으로 남은 것
- 만약 당신이 의식 있는 진골귀족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분명히 그 당시에는 두 세력이 있었을 것, 시대정신을 고민하는 세력과 또 하나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세력, 만일 의식 있는 귀족이라면 김헌창 보다 더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 반란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대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을 시도하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깨닫고 경국 큰 패배감에 시달리지 않을까? & 진골귀족이며 태종 무열왕의 후손으로서 기득권을 버리고 반란이라는 위험한 선택을 한 김헌창은 오늘날 우리에게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돌아보게 하는 역사의 기록이 되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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