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파계(破戒)를 결심하다
〇 국민 스님, 원효
- 7세기부터 지금까지 무려 1300년 동안 사랑받고 있는 승려 원효 대사, 해골 물 한 잔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는 온 국민이 다 알정도! 그러나 사실 원효는 해골 물을 마시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원효 대사의 충격적 진실들이 밝혀진다.
- 1986년 방영된 KBS 드라마 <원효대사>의 역사적 배경은 7세기 신라시대,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와 의상은 비를 피해 동굴에 머물게 되면서 목이 말라 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갈증을 해소하는데, 날이 밝자 동굴이 아닌 무덤이라는 것과 바가지의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라는 것을 알고 경악한다. “그토록 달게 마신물의 본체가 바로 이것이라니··· 물은 깨끗하다고 생각하면 깨끗한 것이고 더럽다고 생각하면 더러운 것으로 분별은 오직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고 유학을 그만 두기로 결심한 원효의 대중을 위한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 다양한 장르의 소재가 되고 있는 원효의 <해골물 이야기> 중국과 일본에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데 일본 승려의 묘에서 발굴되고 명혜가 지었다고 알려진 <화엄연기>는 13세기 초 원효와 의상의 행적을 담은 두루마리 형태의 그림으로 현존하고 있는 일본의 국보
- 해골 물 일화의 진실은? <최연식, 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화엄연기>의 놀라운 진실은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 <화엄연기>는 10세기 송나라 찬녕이 고승 533명의 전기를 수록한 책으로 <송고승전>의 원효·의상 전기를 기초로 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길가의 토굴 속에서 하루를 묵게 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토굴이 아니고 황폐한 무덤이라는 것이고 폭풍우를 피해 하룻밤 더 머물게 된 원효와 의상은 무덤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마음이 불편해서 긴장하고 원효 같은 경우에는 밤새 귀신이 쳐다보는 악몽에 시달렸다는 기록
- “해골 물 일화”는 12세기 당나라 혜홍의 저술 <임간록>에 등장하는데 사실은 200년 후의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에게 파급력 있는 이야기로 미화된 것, 대표적으로 우윳빛 피를 품어내며 순교한 이차돈의 설화, 해골 물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원효의 깨달음으로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것
- 유학을 함께 떠난 의상은?
원효와 달리 당나라로 유학을 간 의상은 9년 가까이 화엄학을 배우고 금의환향하여 신라에 <화엄종>을 개창하게 되는데 두 사람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된 그 날
〇 원효가 당(唐) 유학을 결심한 이유
-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한 이유와 비용은?
당나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 당시 불교를 배우려면 당나라로··· 7세기 일반적인 당나라 유학경로는 요동을 경유하여 장안으로 가는 육로와 배를 타고 등주를 경유하여 장안으로 가는 해로 “의상과 원효와 함께 길을 나서 요동변방으로 가던 길에 국경을 지키는 군사에게 첩자로 의심받아···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삼국유사 권4의해 제5의상전교> 당시의 상황으로 요동지역은 고구려 땅으로 7세기 중반까지 당(唐)과 고구려가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시기로 적국 고구려를 경유해야 갈 수 있는 힘겨운 유학길
- 당시 신라 불교계의 주축은 자장 · 안홍과 같은 당나라 유학파 승려로 불교계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유학이 필수, 당시의 유학이라는 것은 지금보다 더 어려웠을 것으로 당연히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정치·경제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던 사람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을 것, 그렇지만 원효와 의상의 유학은 학문을 위한 것으로 이의 계기를 만들게 된 동기는 <삼장법사 현장(玄奘)>의 소식을 접하고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玄奘)을 만나 직접 학식을 나누기 위한 것
- 삼장법사의 친구? 손오공·저팔계·사오정, 비현실적인 소설 속의 인물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대단한 학승으로 <서유기>는 실제상황을 바탕으로 한 소설로 영향력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궁궐 추녀마루위에 놓이는 토우인 잡상의 맨 앞이 삼장법사·손행자·저팔계·사화상···
※ 현장(玄奘) : 7세기 당나라 고승으로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인도로 유학하고 많은 경전과 불상을 당(唐)에 들여옴
〇 위대한 저술가, 원효
- 원효의 저술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150여 권으로 당시의 저술이란 한자로 된 경전에 주석을 달아 풀이하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원효가 당시 대표적인 대승불교 경전에 대해서는 거의 주석을 달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대승불교의 사상을 좀 더 알기 쉽게 체계화한 인물이라는 것
※ 대승불교 : 중생의 제도를 목표로 한 종파
- 원효의 학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찬영은 “삼학(三學)에 두루 능통하여 그 나라에서는 만인지적이라 하였다.” <송고승전> 만인지적은 만 명에 필적할만한 인물이라는 뜻으로 중국에서 무(武)의 만인지적은 관우·장비 같은 인물을 만인지적으로 표현하는데, 원효를 그 반열에 올렸다는 것은 그 만큼 원효의 학문의 깊이와 내공을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
〇 원효, 불법(佛法)을 어기다
- 유학을 가지 않고도 최고의 승려로 회자되는 원효는 신라로 돌아온 후 대중교화에 나서고 사찰(寺刹)이 아닌 술집·저잣거리를 누비며 심지어는 부랑자와도 어울리며 승려라기에는 파격적인 행보, 하지만 대중들은 그런 원효에게 환호하고 이러한 상황을 <송고승전>에는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는데 “그의 발언은 미친 듯이 난폭하고 예의에 어긋났으며 상식의 선을 넘었다.” & “늘 주막이나 기생집에 드나들며 여염집에서 유숙(留宿)을 하기도 했다.” <송고승전>
- 원효가 변한 까닭은?
<최연식 교수>의 분석은 ‘깨달음의 실천’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깨달음 이전에는 불교를 이론적으로 연구했으나 깨달음 이후에는 불교를 실제 생활 속에서 활용한 것으로 즉 학자에서 실천가로 변신하여 선과 악 · 좋고 나쁨 등의 차별과 구별의 경계를 없애고자 했던 것이 원효의 깨달음
〇 7세기 신라는 지금
- 7세기는 전쟁의 시기로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에는 고구려의 멸망, 그리고 670년에는 나당(羅唐) 전쟁 등으로 한 세기 동안 150여 회의 전쟁을 치르던 시기로 경제적 ·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신라 백성들, 하지만 당시의 불교는 왕실을 위한 존재로 이른바 호국불교의 가치에 매몰되어 민중들과 유리(遊離)되어 있던 상황이어서 원효는 이를 인지하고 왕실이 아닌 대중을 위한 승려로 변화했을 것
- 당시는 사회적인 갈등이 심화되고 혼란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불교계에서도 나름대로 반성의 움직임이 등장하여 비주류 · 비유학파 승려인 혜공 · 대안 등은 출신도 모르고 미천한 신분일 수도 있으나 나름대로 깨닫는 바가 있어서 찾아가는 서비스로 사찰 밖에서 대중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면서 현실 속에서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었고 적극적이고 체계적으로 대중교화에 나선 인물이 원효인 것
- 한편 원효는 <무애가(無碍歌)>를 만들어 글자 그대로 장애가 없다는 뜻으로 원효의 깨달음 자체가 차별이 없는 것으로 신성하고 더럽다는 것들이 의미가 없는 것이고 차별이나 구별을 넘어설 때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정신
〇 원효, 불교계에서 배척당하다
- 파격적이 행보를 보인 원효에 대한 불교계의 시선은?
그 당시 불교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다섯 가지 계율은 ① 불살생(不殺生) ② 불투도(不偸盜) ③ 불사음(不似淫) ④ 불망어(不亡語) ⑤ 불음주(不飮酒) 등으로 불교계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불법을 어기고 있는 것이고 원효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이미지 파계(破契)도 당시 불교계의 입장에서는 곱지 않은 시선인 것은 사실
- 당시 신라에서는 정기적인 국가행사로 백 명의 고승(高僧)을 모시고 백일 동안 인왕경을 강연하는 <인왕백고좌회>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원효도 왕실의 초청을 받아 참여했으나 원효의 법회참석을 거부한 승려들, 나의 생각과 다른 것은 틀린 것이 되어 버린 격, 하지만 불교에서 배척을 당하는 순간부터 대중들에게는 스타로 떠오른 원효는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는 것
〇 원효, 대중 속으로 들어가다
- 왜냐하면 당시 신라의 불교는 왕실중심으로 백성들에게는 진입장벽이 높았고 게다가 모든 경전은 한자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원천봉쇄 되어있는 상황에서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극락세계에 갈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 “뽕나무 농사짓는 늙은이와 옹기장이나 무지몽매한 무리에게도 모두 불타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였다.” <삼국유사 원효불기>
- <나무아미타불>의 뜻은?
남무(南無)는 ···에게 귀의한다, 라는 범어(梵語)로 ‘아미타불에게 귀의한다.’ 는 뜻으로 원효가 나무아미타불을 세상에 전파했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교교리를 공부하는 것이 어렵지만 노력하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전파했던 것으로 서방정토에 극락세계를 만들어 대중에게 불법을 설파하면서 위엄 있는 승려의 자리를 내려놓고 대중에게 다가간 원효
※ 아미타불 : 대승불교의 여러 부처 중 하나로 과거에는 보살이었으나 오랫동안 수행한 결과 부처가 됨
-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는 원효 대사의 흔적들은 여수 향일암 · 남해 보리암 등, 또한 원효하면 자연스럽게 붙는 대사, 하지만 대사(大使)는 승려를 높여 부르는 말로 세속에 돌아간 원효에게는 붙일 수 없는 호칭
- 원효를 대사라고 높여 부르는 이유?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에게 극락세계의 희망을 준 원효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불법을 어기면서 까지 대중 속으로 들어간 원효, 그런데 그의 노골적인 스캔들
〇 원효, 요석공주를 품다
- 요석공주의 요는 <아름다운 옥 요(瑤)>로 요석공주는 공주의 이름이 아니라 공주가 살던 궁궐의 이름이 <요석궁>, 해골 물에 이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원효의 이야기
- 승려 원효와 요석공주의 열애?
엄격한 신분제의 골품제를 어긴 두 사람의 충격 스캔들로 왕족인 공주와 6두품인 승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당시 당나라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삼장법사 현장의 수제자인 변기가 유부녀인 공주와 사랑에 빠지게 되자 당 태종은 분노하며 변기의 허리를 베어버리는 <요창형>을 내리고 비극으로 마무리되는데 원효와 요석공주 금지된 사랑의 결말은?
- 공주와 원효는 어떻게 만났나?
원효가 요석공주를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래를 만들어 퍼뜨리면서 신호를 보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준다면 내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을 깎아내리라.” 이런 노래가 순식간에 실시간 신라 가요차트 1위를 석권
- 노랫말의 의미는?
자루 없는 도끼는 과부·여성을 뜻하고 하늘을 떠받치는 자루는 임금을 보좌하는 인재로 과부를 내어준다면 내가 임금을 보좌하는 인재를 낳겠다는 의미, 요석공주와 원효의 열애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신라왕실, 그리고 실제 1년 후 요석공주는 사내아이를 낳게 되고 원효의 성씨인 설(薛)과 총명할 총(聰)으로 이름을 <설총>으로 짓는다.
- 원효와 요석공주의 결혼을 인정한 이유?
<삼국유사>에는 “당시 태종 임금께서는 그 노래를 듣고 대사께서 귀부인을 만나 어진 자식을 낳고 싶어 하신다. 나라에 어진 이가 있게 된다면 그 보다 더 유익이 없다.”로 기록하여 원효를 요석궁으로 불러 결혼시켜 과부가 된 딸을 위해 직접 혼인을 주도한 태종
〇 원효의 로얄 패밀리 입성
- 태종이면 무열왕 김춘추(?) 동시대를 살아간 원효 · 김유신 · 김춘추, 원효는 김춘추의 사위이고 김유신과 원효는 동서지간,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고 고쳐주면서 여동생 문희를 이어준 김유신, 원효와 요석공주의 결혼도 김유신의 시나리오(?) “원효는 궁리를 만나자 일부러 물속에 빠져 옷을 적셨다. 궁리(宮吏)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고 그 곳에서 머물고 가게 하였다.”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
- 가능성이 있는 것이 당시 신라왕실의 비 주류층이었던 김유신과 김춘추 <비담의 난>을 계기로 권력에 들어서면서 군사력과 정치력을 장악한 김유신에게 민심까지 움직일 수 있는 원효의 영입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정치가 · 지략가 · 사상가의 결합으로 7세기 트로이카 김춘추 · 김유신 · 원효
- 학계에서도 비중 있게 논의되고 있는 원효와 왕실관련 이야기, 자료상으로는 원효와 왕실관련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으로 <삼국유사> 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전해지지 않는 요석공주와의 로멘스, 실제로 원효의 다른 자료인 설총에 관한 기록이라든지 원효의 비석에는 왕실과의 혼인이야기가 없고 진골출신이 아닌 사람이 과연 진골왕족과 결혼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역사적 사실로 보기에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음
〇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관계
- 원효와 요석공주의 이야기가 전해지게 된 이유?
<해골물 일화>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과장·윤색된 것이 아닐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노래의 가사처럼 훌륭한 승려를 관료로 등용시키고 싶은 왕의 욕심,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에도 뛰어난 승려를 환속·결혼시키기도 함 “진나라 임금 요흥이 항상 구마라집에게 말했다. 법의 씨앗이 될 후사가 없어서야 어찌되겠습니까? 그리하여 기녀 열 명을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고승전, 구마라집전>
- <최역식 교수>의 의견은 설총이라는 뛰어난 인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후대에 어머니를 요석공주로 설정한 것이 아닐까(?) 조선시대의 설화는 오히려 과부이야기에 초점을 두고 병을 앓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원효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로 변형
- 또 다른 19금(禁) 버전은 원효가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누고 난 뒤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로 운우지정(雲雨之情)이 원효의 인생구도의 전환점?? 탄트라처럼 천재 승려의 결혼과 사랑은 당시 파격적이어서 여러 해석이 존재하는 듯
※ 탄트라 : 힌두교·불교·자이나교 등에서 행해지는 밀교(密敎) 수행법
- 원효가 결혼을 했던 것은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으로 세속에 산다고 해서 타락한 것이 아니고 탁한 세상에 살고 있지만 깨끗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몸소 실천한 것(?)
〇 원효의 아들 위대한 유학자, 설총
- 설총은 누구?
원효의 아들로 신라 35대 경덕왕 때 문신으로 유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이두를 집대성한 인물로 최치원 등과 함께 신라 10대 현인으로 추앙되는 인물
※ 이두(吏讀) :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로 표기하던 차자표기법
- 이두를 만든 이유?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이를 쉽고 널리 전파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는 백제·고구려가 멸망하여 유민들을 포용해야 하고 지방행정조직도 바꿔야 하는 시기로 7세기 신라의 삼국통일로 통합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왕권강화는 필수이고 왕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이념으로 유학이 적격인 것, 설총이 이두를 창안한 것도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일반인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한문으로 된 유교경전을 백성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이두를 창안한 것
〇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원효의 영향력
- 676년 신라의 삼국통일, 그로부터 10년 후인 686년에 70세의 나이로 작은 혈사(穴寺)에서 입적한 원효, 그리고 약 100년 후 일본에 사신으로 가게 된 원효의 손자 설중업, 이때 원효를 존경하던 일본의 관리가 그를 극진히 대접하는데 “일찍이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을 본 적 있으나 그 지은이를 직접 만나보지 못한 것을 깊이 한스럽게 여겼는데 신라 사신 설씨가 바로 원효거사의 친손자라니 만나 것을 기쁘게 여겨 이에 시를 지어드립니다.” <삼국사기 권 46 열전 설총> 이것이 신라에 전해지면서 신라왕실에서는 원효를 재평가하면서 원효의 업적을 기리는 서당화상비(誓幢和상碑)를 세우게 되는데, 승려의 비석이 세워진 것은 전무후무한 이례적인 일.
- 실제로 일본의 사찰, 선림사·고산사·동대사 등의 사찰은 원효를 <해동성인>으로 추앙하고 있으며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에 까지 알려진 원효, 최근 구체적인 증거물이 나왔는데 원효의 저술<대승기신론소>의 8~10세기 필사본이 <중국 돈황 고문서> 중에서 발견되어 동아시아를 아우른 원효의 영향력으로 ‘어디서’가 아니라 ‘어떻게’의 중요성을 보여준 원효는 원조 한류 스님(?)
- 지금 우리가 원효를 다시 봐야 하는 이유?
원효의 사상은 화쟁(和爭)으로 다툼을 없애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 다툼이 있는가? 구별에서 차별이 만들어지고 차별에서 다툼이 온다고 생각해보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별과 차별을 없애고 다툼이 없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원효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오늘 날의 화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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