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왕 장보고, 제 I 편
〇 청년 장보고, 신라를 떠나다
- 9세기 신라의 서남해안의 한 섬에 활솜씨가 뛰어나 <활보>라 불리던 소년이 있었는데 그 소년은 돌연 신라를 떠나고자 했다. 그리고 10여 년 후 청년 <활보>는 당나라에서 <장보고>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 9세기 동북아시아 해상을 주름잡던 바다의 왕자 장보고, 그가 신라를 떠난 이유는 무엇일까? 9세기 신라는 진골 귀족들의 왕권다툼으로 혼란한 정국이 계속되고 기근과 수탈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
- <드라마 해신>에는 활보가 밀항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등장하는데, 실제 역사 속에서 청년이 된 그는 마침내 당나라로 떠나고 신라를 떠난 활보는 바로 해상 왕 장보고
〇 우리가 기억하는 장보고 <윤재운, 대구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서남해안의 섬 소년에서 동북아 무역의 한 축이 된 장보고, 바다의 신으로 표현되는 그는 고(故) 최인호의 소설 <해신> 이후로부터 인간 장보고에서 해신 장보고로 탈바꿈 하면서 KBS 대하사극 <해신>은 2004년도에 51부작으로 방영되기도 한다.
- 교과서에서도 예전에는 타이틀로만 소개되던 장보고, 현재는 고대사 부분의 큰 축을 담당하고 책의 한 페이지를 할애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 역사와 설화 사이 장보고의 진실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 기록상으로도 전무후무한 평민출신으로 한·중·일 삼국역사에 공동으로 기록된 유일한 인물로 최치원 같은 경우에도 당나라나 삼국사기에서만 찾아 볼 수 있으나 미천한 신분 장보고가 삼국의 역사에 공동으로 기록된 것은 획기적인 사건으로 그 만큼 삼국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인 것
※ 최치원 : 통일신라 6두품 귀족으로 당나라에서 <토황소격문>으로 이름을 떨친 문장가
- 장보고가 기록된 역사서 ① 당나라 <신당서> ② 시인 두목의 <번천문집> ③ 일본 <속일본기> <일본후기> <속일본후기> 뿐만 아니라 개인의 기록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상세하게 기술
※ 두목(803~852추정) : 당나라 대 활동한 중국의 만당 시인
- 장보고는 소년시절 <활보>라 불렀다?
이름이 4개인 사나이, 궁복(弓福) · 궁파(弓巴) · 활보 · 장보고로 <삼국사기>에는 궁복(弓福)으로 <삼국유사>에는 궁파(弓巴)로 기록, 활궁(弓)에 복(福)&파(巴)는 아이를 뜻하는 접미어 <보>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순우리말은 활을 잘 쏘는 아이의 <활보>로 성(姓)이 없는 미천한 신분인 장보고의 별명 같은 이름
〇 활(弓)로 보는 장보고
- 수련하는 무기에 따라 서로 다른 개성을 갖는 무예인, <칼>을 수련하다보면 냉정하고 마음이 굳세어 지고 <도끼>는 빠른 속도로 적진을 돌파하는 용맹함을 필요로 하고 <창>은 먼 거리에서 조준을 해야 하기 때문에 기회를 놓치지 않는 노련함, 하지만 <활>은 복합성으로 정확성과 강한 힘이 동시에 필요한 무기로 기본기 수련에만 최소 2년이 걸림
- <무예계>의 옛 속담에 “글로는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고 무예로는 그 사람의 덕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특히 활을 쏘는 사람의 심리학적 특성은 용맹한 장수와 섬세한 지략가의 면모를 동시에 갖췄다는 의미
- 체계적인 무예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가난한 섬 소년 장보고가 활을 잘 쏘았다는 것은 영웅적인 자질을 선천적으로 타고 났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영웅의 필수조건인 활쏘기, 온달 · 궁예 등의 활을 잘 다뤘다는 것은 영웅의 비범한 유년기를 강조하는 관용적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추론,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섬 소년의 야망을 드러내는 단서인 활, 나중에 당나라로 떠나는 것으로 보아 더 큰 세상을 보겠다는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〇 장보고가 고국 신라를 떠난 이유
- 청년 장보고가 당나라로 떠난 이유는?
당시 신라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것으로 통일이 되고 나서 신문왕 대의 개혁정책으로 왕권이 안정된 모습을 보이다가 8세기 후반~9세기 중반까지 계속된 중앙귀족들의 왕위 찬탈 전으로 전국적인 혼란기가 계속되면서 더 이상 신라에서는 꿈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떠난 것이 아닐까(?)
- 당시 100년 사이에 10명 이상의 왕이 교체됐다는 것은 그 만큼 중앙정치의 혼란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35대 경덕왕(742~765)대 다시 녹읍이 부활되면서 귀족들의 세력이 커지는데, 녹읍제도 부활의 의미는 지역민의 조세 + 노동력의 수탈이 가능하여 귀족세력이 다시 강화됐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것, 게다가 36대 혜공왕은 8세에 즉위하게 되면서 나라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흉흉한 괴 소문이 무성했던 것
※ 녹읍(祿邑) : 관료에게 직무의 대가로 지급한 논밭
〇 신라는 지금
- 통일신라 건국 이래 최초 국왕시해사건, 왕권을 노린 누군가가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퍼트린 흉흉한 소문이 전국에 나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혜공왕 · 태후 · 원비 · 차비까지 살해되면서 이를 시작으로 귀족진골들의 계속되는 왕위 찬탈전은 끊이지 않는다.
- 37대 선덕왕과 38대 원성왕도 칼로 왕권을 차지하고 39대 소성왕과 40대 애장왕이 직계로 물려받아 왕권이 안정되는 듯 했으나 애장왕 마저 10년 만에 섭정을 하던 삼촌 김언승에게 시해당하고 김언승은 41대 헌덕왕으로 즉위한다.
- 장보고,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가다
왕권다툼으로 혼란에 빠진 신라정국, 이 시기 신라의 민심은 가뭄·기근·한파·지진 등의 심각한 자연재해가 연이어 발생하여 살기 힘든 백성 170여 명이 구걸을 위해 당나라 절강으로 향하게 되는 신라 판 보트 피플! 백성들의 삶은 외면한 채 권력다툼에 눈이 먼 신라 귀족들, 신라인들이 과연 이 땅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 녹읍제도가 부활되면서 귀족들의 불법적인 대토지의 소유로 인해 면세혜택을 받는 <전장>이 점차 늘어나면서 귀족대신 세금을 내느라 빚더미에 앉은 백성들, 사료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많은 백성이 해외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 왕위 찬탈전의 자금필요 → 세금 수탈 → 백성들의 이주 악순환이 반복됐던 것
- 혼란의 8~9세기에 신라를 떠난 청년 장보고,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별도 심했던 것이 당시 신라의 <골품제(骨品制)>는 고위층으로의 상승은 진골출신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 게다가 신라의 수도 경주에 거주하는 왕경인(王京人)과 지방민과의 차별로 개인의 능력을 펼치기 어려운 수많은 사회적 제약의 악조건이 있었던 것
-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장보고의 친구 정년, 초반에는 오히려 장보고 보다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데 특히 잠수실력이 뛰어나 “정년은 또 바다 속에서 잠수하여 50여 리를 다녀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삼국사기 열전 장보고·정년전>
〇 외국인 용병이 된 장보고
- 9세기 당대 최강대국 당나라, 이곳에서 장보고는 서주의 외국인 용병부대인 <무령군>에 입대하여 따라올 자가 없는 출중한 무예실력을 인정받는데, 당시 당나라는 외국인 용병에게 지방반란군 토벌임무를 맡겼던 것으로 장보고는 당(唐)을 위해 싸우는 외국인 용병이 된 것
- 당나라 외국인 용병정책은 예로부터 유명했었는데 장보고도 당(唐) Dream을 꿈꾸고 바다를 건넜을 것으로 추정, 당시 신라는 신분제 사회로 소수의 지배층들만이 성(姓)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나라는 이미 평민들도 성(姓)을 가지고 있어서 용병의 월급명세서에 올린 이름이 장보고로 중국에서는 가장 많은 성씨가 장 씨이고 <장삼이사>는 장 씨의 셋째 아들과 이 씨의 넷째 아들이라는 뜻으로 평범한 사람을 일컫는 말
- 또한 장(張)은 활궁(弓)변으로 시작하여 어린 시절 이름 활보에서 성(姓)을 차용하고 이름 <보고>는 어린 시절 이름 궁복에서 복(福)을 늘려 쓴 것, 우리의 사서에는 보(保, 지킬 보)와 고(皐, 부르는 소리 고)자를 쓰지만 일본에서는 보(寶, 보배 보)와 고(高, 높을 고)를 쓴다.
- 당나라가 외국인 용병 부대를 만든 이유?
당시 당나라는 <초재진용(礎材晉用)>이라고 해서 “초나라 인재를 진나라에서 활용한다.”는 뜻으로 남의 것을 가져다 자기 것으로 삼음을 일컫는 말로 외국인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는 입장을 보인 것, 또한 당시 부병제의 폐지로 병력난이 심해져 용병을 기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돌궐족이나 고구려 유민계통 등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을 것이고 장보고도 같은 경우로 볼 수 있을 것
- 우리나라 출신 당나라 외국인 용병이 또 있나?
고구려 출신 <고선지>와 백제출신의 <흑치상지> 등이 있고 <안록산의 난>은 당나라 중기에 약 9년 동안 전국을 뒤흔든 반란사건으로 안록산과 사사명이 주도했는데, 안록산은 중앙아시아 이란계 민족 소구드 출신으로 당시 세계 각국의 실력자들이 모여든 당나라
〇 장보고, 당(唐) Dream을 이루다!
- 815년 당나라에는 평로치청 이사도의 난(亂)이 일어났는데, 이사도는 15개 주에서 10만 대군을 거느린 고구려 유민으로 평로치청 세력의 우두머리, 평로치청 세력은 이사도의 조부(祖父) 이정기 → 이납 → 이사고·이사도로 이어지면서 3대 째 산둥반도를 장악하고 있던 막강한 세력으로 무려 4년간 이어진 이사도의 난(亂)으로 관군과 군량미를 불태우고 재상을 암살하며 당(唐) 왕조를 위협한다.
- 하지만 819년 이사도의 항쟁이 막을 내리게 되는데, 무령군 소속의 신라인 장보고가 평로치청 이사도의 반란군을 토멸한 것, 그리고 이를 인정받은 장보고는 당(唐)에 온지 10여년 만에 30세의 나이로 무령군 소장으로 발탁, 이는 현재의 대위·소령급 “장보고와 정년이 당나라에 가서 무령군 소장이 되어 말을 타고 창을 사용하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삼국사기 열전 장보고·정년전> 얼마나 용맹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
- 장보고가 토벌한 <평로치청 이사도 반란군>은 어떤 세력?
이들은 산둥반도의 치주와 청주를 평정했던 세력으로 15개 주에 10만 대군을 거느린 당나라 최대의 지방조직, 이사도의 조부(祖父)인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평로치청 절도사를 몰아내고 산둥반도 일대는 이정기 → 이납 → 이사고·이사도가 50여 년간 장악하면서 782년 소왕국 제나라를 선포했던 것
- 당시 당나라 병력의 수는 편제상으로 60만 이었는데 전국에 흩어져 있었고 평로치청 세력의 강세 요인은 ① 산둥반도에 결집한 10만 대군 ② 전투에 유리한 기병이 많았던 점으로 다른 번진이나 중앙 정부와의 전투에도 끊임없이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
- 외국인 용병부대 무령군이 고구려 유민 평로치청 세력을 토벌했다?
우리 쪽의 입장에서는 걸리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당나라의 <이이제이(以吏制吏)> 정책은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전략으로 고구려 유민세력을 또 다른 용병세력으로 하여금 제압하게 하고 그 임무를 무령군이 담당했으며 그 중앙에 장보고가 있었던 것이고 무령군 시절의 활약은 해상왕 장보고의 또 다른 면모
〇 장보고, 무령군을 떠나다.
- <이사도의 난> 진압 후 2년 만인 821년에 돌연 무령군을 떠나는 장보고의 반전 <드라마 해신>의 한 장면 “당나라 황실에서는 나를 반역자로 여길 것이나 나는 반역자가 아니다. 이 땅은 고구려의 땅이었고 나는 잃어버린 내 땅을 찾으려 한 것이다. 헌데 너는 어이해 당나라의 수족이 되어 내 원대한 뜻을 가로막는 것이냐?” <평로치청 이사도 대사> 한 민족으로 고구려 유민인 평로치청 세력을 몰아내면서 자책감이 들었던 것일까(?) 당시에는 한 민족 개념이 없었다고 하니 그 것도 아닌 것 같고···
- 장보고는 떠났지만 친구 정년은 남았다?
<전문가의 분석>은 무령군은 외국의 용병부대로 당나라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많은 재정적 부담을 앉고 있었을 것, 또한 평로치청 이사도의 난 진압 이후 쓸모없어진 무령군은 요즘의 정리해고 비슷한 당시의 초군정책시행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당나라 판 구조조정에서 남아있는 정년과 떠나야 했던 장보고,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큰 미래를 꿈꾸며 스스로 떠났을 가능성도 있을 것(?)
- <무령군> 제대 후 장보고의 행보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2개의 단서 ① “장대사가 천장 원년(824년)에 일본국에 도착했다가··· 일본어를 해득(解得)하기 때문에 곧 통역사로 삼았다.” <입당구법순례행기> ②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가서 왕을 알현하고 이르기를 중국에 두루 걸쳐 살펴보니···” <신당서 동이전 신라> 일본통역사 고용 + 중국 순방 = 제대 후 창업을 위한 초석(?)
〇 장보고, 해상무역에 진출하다
- 드라마 <해신, 2004년> 정년 왈(曰) “나는 성을 이해 못하겠어, 성! 지난 세월 우리가 지난 세월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잊은거야?” 장보고의 대답 “더 이상 당나라 황실을 위해 내 목숨을 걸지 않겠다.” 그리고 신라 황실에 가서는 “저는 큰 뜻을 품었습니다. 그 뜻을 실현하자면 반드시 신라에 거점을 마련해야 합니다.” & “장대관이 품었다는 그 뜻이 무엇이냐?” & “저는 뱃길을 통해 신라와 왜국(倭國), 당나라를 잇는 교역을 할 작정입니다.” 장보고는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 군(軍) 제대 이후 해상무역을 준비했다는 것으로 828년 귀국하여 청해진 설치허가를 받고 1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한·중·일 세 나라의 역사서에 자취를 남겼다는 것은 사전 준비가 철저했다는 증거
- 평로치청 토멸이 장보고의 선택에 미친 영향?
관련이 전혀 없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평로치청이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한 원인은 당나라와 발해 · 신라의 해상무역을 관장하는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의 임무를 위임받아 막대한 부(富)를 축적했기 때문으로 이 과정에서 산둥반도의 해상무역에 종사하는 많은 재당(在唐) 신라인을 활용하는 것을 본 장보고, 장수(藏守)라기 보다는 거상(巨商)의 안목을 가졌던 듯
- 해외사례를 보면 아일랜드인의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는 결정적 계기는 기근으로 인해 감자농사의 흉년으로 인디언 토착세력을 피해 동쪽 해안가에 정착했듯이 산동성의 경우에도 중국의 한족(漢族)들은 내륙 안쪽에 살았고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는 산동성·강서성·절강성의 주로 해안가 쪽에서 원주민을 피해서 정착
- 해적으로부터 평로치청 이정기 세력의 보호를 받고 있던 재당(在唐) 신라인들은 후견인이 없어지자 또 다른 보호자를 원했을 것인데 장보고가 재당(在唐) 신라인의 새로운 우두머리가 되는 격, 두목의 <번천문집>에는 장보고는 장수로써의 능력뿐만 아니라 인품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면 뛰어난 처세와 수완으로 재당(在唐) 신라인의 인기를 얻었을 것
〇 9세기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정세는?
- 당시 사무역(私貿易)은 불법이었고 공식외교사절단의 조공(租貢)무역만 허용되다가 서서히 변하면서 공식외교사절단의 사사(私事)로운 무역이 감지되고 있던 상황, 8세기 중엽이 되면 신라와 일본의 국교가 단절되고 공무역이 붕괴되면서 사무역의 도입계기가 되고 그 틈새시장을 장보고가 노린 것
- 장보고의 세력기반은 크게는 산동성·강서성·절강성 일대의 재당(在唐) 신라인 사회와 한반도에는 서남해안의 완도지역과 일본의 규슈 북부지역인 하카다, 당시에는 GPS나 해도(海圖)가 없던 때로 구전(口傳)되는 정보만으로 항해를 해야 했던 시절로 삼각무역망 구축에 재당(在唐) 신라인은 반드시 필요했을 것
- 나(羅)·당(唐)·왜(倭)의 무역관계?
무역상들에게 가장 인기 품목은 고가의 사치품으로 당시 당나라의 수출품은 비단·자기·서적, 신라는 수공예품·서적·인삼이고 일본의 경우는 기술력이 발달되지 않아 수출품보다는 수입품이 많았고 수출품은 오로지 금(金), 통역사·항해사·조선 기술자 등 무역에 필요한 우수 인력을 두루 갖춘 재당(在唐) 신라인, 장보고에게는 인적자원이었던 것
-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한 이유?
해상수송의 장점 ① 대량수송이 가능 ② 물품훼손 가능성이 희박, 특히 육로수송 시 파손되기 쉬운 도자기
〇 장보고, 재당(在唐) 신라인의 무역거점을 만들다
- 무역의 기본은 이윤을 남기는 것으로 생산자에게서 싸게 구매하여 소비자에게 고가로 판매하는 것, 삼국의 물가정보를 파악하고 각국의 싼 물건을 사서 비싼 지역에 되팔아 중계무역으로 큰 이윤을 남겼던 것으로 장보고의 해상 무역 성공 포인트 ① 사업가로서의 동물적 감각 ② 각국에서 얻은 견문
- 기존 재당(在唐) 신라인은 국제정세를 보는 눈과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고급인력들로 이들을 잘 활용한 장보고, 당나라·신라·일본의 신라인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거대한 사업을 구상하며 개방적이고 통합적인 사고로 융합형 인재의 원조 격인 장보고
- 당시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 신라방은 ① 관리기관인 신라소 ② 사찰인 신라원, 그중 대표적 사찰인 <적산법화원>은 장보고가 세운 절로 의지할 곳 없이 타국생활을 하는 신라인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은 구심점 역할을 했던 곳으로 법회가 열리면 무려 250여 명의 신라인들이 모였다고···
- <적산법화원> 이름의 뜻은?
적산(赤山)은 지명으로 붉은 산이라는 뜻, GPS가 없던 시절 적산은 등대 역할을 했던 곳으로 미국 교포사회의 LA한인교회처럼 신앙 활동뿐만 아니라 정보교류와 화합의 장으로 년간 쌀 500여 섬을 생산할 수 있는 경작지를 가진 대규모 사찰, 중요한 것은 이 토지를 장보고가 기부한 것으로 사회에 환원하면서 신라인들의 안정적인 생활로 해상무역의 인프라를 구축해 나가는 것
- 장보고는 시대가 낳은 영웅이 아닌 시대를 이용해 영웅이 된 인물이라는 평가가 가능하지 않은가? 당나라에서 해상무역을 하고 있던 장보고의 돌연 신라 행, 다음 장보고 II편은 <해신 장보고, 염장의 칼에 죽다>편에서···
'K-his(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효, 파계(破戒)를 결심하다 (0) | 2016.01.18 |
---|---|
해신(海神) 장보고, 제 II 편 (0) | 2016.01.11 |
대조영, 발해를 꿈꾸다 (0) | 2015.12.28 |
<나당전쟁> 신라 문무왕, 당(唐)과의 전쟁을 선포하다. (0) | 2015.12.21 |
황산벌 전투, 김유신 백제를 공격하다 (0) | 2015.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