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인물열전> 제4편 최치원
〇 우리가 아는 최치원 <장일규,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교수>
- 12살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해 대륙에 이름을 떨치며 붓 한 자루로 당나라를 사로잡은 뛰어난 문장가 최치원, 그러나 역사는 최치원을 <비운(悲運)의 천재>로 기억하는데, 불운한 시대를 산 최고의 지식인, 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 2013년 한중정상회담에서 최치원의 시를 읊은 시진핑 주석, 중국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만 명성에 비해 덜 알려진 최치원의 업적, 경주 최씨의 시조이며 현직 교사들이 본 꼭 다뤄야 할 역사적 인물로 꼽고 있는 최치원
- 최치원의 자(字)는 고운(孤雲)으로 외로운 구름, 또 다른 자(字)는 해운(海雲)으로 해운대의 지명은 최치원으로부터 출발 “해운대는 신라 때 최치원이 일찍이 대(臺)를 쌓고 놀았다 하는데··· 최치원의 자를 해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3권> 지금도 해운대 남쪽 동백섬의 바위에 최치원이 새긴 해운대라는 글씨가 남아있다.
〇 조기(早期) 유학의 선두주자,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최치원
- 겨우 12세의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당나라의 유학길에 오른 최치원, 천여 년 전 당나라 조기유학은 흔한 사례? 특별한 경우로 볼 수 있는 것이 신라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의 입학 연령은 15세~30세로 국학 입학보다 3년이나 앞선 당나라 행, 요즈음 부모 같으면 어린 나이로 유학을 보내는 마음이 노심초사했겠지만 “최치원의 아버지는 십년 안에 과거에 붙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부지런히 힘쓰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
- 골품제 사회에서 신분의 한계를 지닌 6두품 최치원, 당나라 조기유학은 신분의 한계를 넘는 유일한 수단으로 최치원이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다는 것은 당나라의 빈공진사시에 급제를 하여 신라에 돌아오면 신라의 관직에 진출할 수 있다는 절박한 심정에서의 유학
※ 빈공진사시 : 중국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실시하는 과거시험
- 당시 6두품 중 가장 명망이 높았던 최씨 가문, 특히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은 경문왕의 명령을 받들어 신라 하대를 연 원성왕릉을 이전하는 일에 참여하고 신라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상황으로 최치원의 조기유학은 아들이 왕실의 인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 마음
〇 9세기 신라 VS 발해
- 872년 당나라, 발해 유학생 오서도가 신라 유학생을 제치고 빈공진사시에 수석을 차지하게 되는데, 최치원은 이 수치를 씻기 위해 인백기천(人百己千)의 정신으로 공부하여 2년 후인 유학생활 6년 만에 18세의 나이로 빈공진사시에 장원급제를 한다.
※ 인백기천(人百己千) : 남이 백(百)을 하면 나는 천(千)의 노력을 해야 함
- 당시 당나라에서 불붙은 경쟁으로 신라 유학생 VS 발해 유학생 “덕분에 이전의 치욕을 씻을 수 있게 되었으니··· 앞으로 신라와 발해의 위상이 혹시라도 바뀌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고운집 제1권 예부 배 상서에게 보내는 장문>
- 당나라는 동아시아의 중심이면서 세계의 중심으로 신라나 발해가 당나라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으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두 나라는 경쟁적으로 사신을 보내면서 당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기 위해 많은 유학생을 보내는데, 840년대부터 빈공진사시에 급제자를 양산한 발해, 오랜 시간 당나라와 인연을 맺고 도당(渡唐) 유학생을 배출해 온 신라의 입장에서는 발해 유학생 오서도가 장원급제 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을 것
〇 노력하는 천재 최치원
- 최치원의 <계원필경>의 서문 “신(身)이 엄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감히 망각하지 않고서 졸음을 쫒으면서 부모에게 효(孝)를 다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6년 만에 이름을 걸게 되었습니다.” 조기유학 성공의 비법은 효(孝)?, 장원급제로 부모와 국가에 보답한 최치원
- 혈기왕성한 10대 소년 최치원, 유학 중 유혹은 없었을까?
당나라의 수도 장안이나 낙양 같은 경우는 오늘 날의 뉴욕으로 신(新)문물이 쏟아지는 별천지로 수많은 유혹들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
- 글로벌 인재 최치원, 이성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의 기록에는 아내나 가족에 관한 기록이 거의 전(傳)하지 않는데, 굳이 이성에 관련된 기록을 꼽으라면 최치원이 쓴 시 중의 <강남녀> 강남탕풍속(江南蕩風俗) 강남땅은 풍속이 음탕하여, 양녀교차련(養女女喬且憐) 딸을 아리땁고 예쁘게 기르는데, 야성치침선(冶性恥針線) 요염한 성품이라 바느질을 부끄러워하고, 장성조관현(粧成調管絃) 화장 마치자 악기 고르네··· <강남스타일>
- 당시 당나라의 강남은 양쯔강 이남지역인 상해·소주·항주지역으로 중국의 4대 미인하면 서시·양귀비·왕소군·초선으로 서시가 춘추전국시대의 강남여자, 중국의 강남에는 수원(水原)이 풍부하여 경제적 부(富)를 바탕으로 발전한 도시의 상을 최치원이 시로 남긴 것이 아닐까(?) 최치원이 당시 강남의 번화한 사회상을 보면서 내면의 현실에 대한 부분을 풍자하여 부잣집 딸과 이웃집 딸의 모습을 보면서 불평등한 세상을 지적한 글
〇 최치원, 자매의 혼백을 품다?
- 뛰어난 문장가 최치원 “고변의 필연의 일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4년 동안 마음을 써서 이룬 작품이 1만 수(首)도 넘었습니다.” <계원필경 서문> 다작 최치원, 이성에 관한 기록은 없는지?
중국 강소성 지역에 전하는 최치원의 여자 이야기로 최치원과 자매의 꿈속의 사랑, 최치원이 투숙한 초현관 앞 두 개의 무덤, 아버지의 강제 결혼으로 소금장수와 차장수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매의 무덤이라는 사연을 들은 최치원은 무덤에 시를 바쳐 자매의 영혼을 위로 “고운 그대들을 꿈에서라도 만날 수만 있다면 길고 긴 밤, 이 나그네를 위로하는 것이 무슨 허물이 되겠소, 외로움이 사무치는 이 숙소에서 운우의 정을 나눌 수만 있다면 귀신이 되어서도 사랑을 나눴다는 옛사람의 노래를 이어서 부르고 싶소.”
※ 운우지정(雲雨之情) : 구름이 녹아 비가 될 만큼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행동
- <최치원의 꿈 이야기> 최치원의 시에 감동하여 한 밤중에 최치원을 찾아온 자매는 밤늦도록 최치원과 시문을 나누며 하룻밤을 지냈다는 것으로 귀신마저 감동시킨 명문장가 최치원의 글
- 쌍녀분이야기는 <신라수이전>설화집에 실린 문헌설화로 쌍녀분설화의 키포인트는 ① 원혼의 마음을 풀어준 최치원 ② 원혼을 달랜 수단은 뛰어난 시였다는 것, 신라의 젊은 지식인이 작은 마을의 원혼을 시로써 풀어줬다는 설화가 중국에 전하는 걸 보면 중국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이야기라는 것
〇 <격황소서>로 이름을 떨치다
- <격황소서>는 황소의 난을 일으킨 황소에게 이제 그만 항복을 권하는 글로 중국 전역에 최치원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다. “너의 몸뚱이는 도끼날에 기름이 되고 뼈는 수레 밑에 가루가 될 것이며 처자는 잡혀죽고 권속들은 베임을 당할 것이다.”
※ 황소의 난 : 875~884년 당나라 말기 소금장수 황소가 주도한 농민 반란
- 영화제작 과정 중 <글 콘티>는 영화촬영 내용을 그림이 아닌 글로 구성한 것인데, <글 콘티> 못지않게 내용이 시각적으로 머릿속에 그림처럼 그려지는 격황소서, 황소도 이글을 읽고 침상에서 내려와 벌벌 떨었다고··· 서양 속담에도 펜은 물보다 강하다는 속담이 있는데, 붓 한 자루로 황소를 제압한 최치원
- <격황소서>의 집필 배경?
빈공진사시에 합격한 후 관직에 나선 최치원, 하지만 지금의 9급 공무원의 직위로 더 높은 관직을 위해 특별승진시험을 준비하던 중이었으나 황소의 난으로 취소된 특별승진시험, 사람이다 보니 개인적인 원한을 표현하지 않을 수야 없었겠지만 <격황소서>의 핵심은 개인적인 원한보다는 군왕은 백성에게 덕화(德化)를 베풀고 은혜를 받은 백성은 군왕에게 보답을 해야 하는데 군왕을 배신하면 당연히 그 대가를 치른다는 경고의 의미, 격문을 쓴 사람은 최치원이지만 당시 난(亂) 진압의 총사령관인 고변의 대필자로 <격황소서>를 쓰는데, 고변의 눈에 들겠다는 계산도 있었을 것, 결국 고변 휘하의 관직을 얻고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활동을 보이기도 한다.
- 최치원은 신라사신으로 당나라에 온 동생이 배를 구하지 못해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에 빠지게 되는데, 당나라에 남을 것이냐 VS 함께 신라로 돌아갈 것이냐? <뮤지컬 최치원> 최치원 역의 강성 씨는 최치원을 천재 문인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작품을 하면서 외로운 타국에서 겪어야 했던 설움 등 인간적인 면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는 것
※ 창작뮤지컬 최치원 (작·연출 이현규 / 작곡 장소영 외) : 2016년 경주 예술의 전당 공연을 시작으로 대구·서울·중국 양저우에서 공연 예정 & 범해(泛海) : 실제 최치원이 당나라와 신라를 오가며 읊었던 시
〇 최치원의 선택 - 하나,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
- 당나라에서 잘 나가던 최치원, 신라로 돌아온 이유?
<격황소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고변은 황소의 난 진압에 실패하고 그 책임으로 관직을 박탈당한 고변은 정치적 실권을 잃으면서 설상가상으로 도교(道敎)에 깊이 빠져들고 정치적 입지 확대를 꿈꾸던 최치원은 난감한 상황
- 당시 신라의 정세는 박씨를 비롯한 진골귀족가문의 득세로 49대 헌강왕은 6두품 유학파를 기용하여 왕권강화를 노리는데, 특히 검증된 빈공진사시 급제자를 귀국시켜 기용하여 그런 문제도 작용을 했다는 것, 최치원의 입장에서는 끈 떨어진 연의 신세로 신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으로 29세에 금의환향하여 헌강왕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계원필경>을 지어 왕에게 올린다.
※ 계원필경 :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의 작품을 간추려 왕에게 바친 문집으로 당시 당나라 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
- 귀국 후 6두품 출신으로 왕실 최측근이 된 최치원, 특이한 것은 서라벌(경주)에서 부성(서산)이나 태산(정읍)의 지방관으로 나가게 되는 것으로 이는 886년 최치원의 귀국 1년 후 49대 헌강왕이 승하하고 최치원이 지방관이 되는 것은 51대 진성여왕 대
〇 신라를 뒤흔든 진성여왕의 스캔들
- 진성여왕(3대 여왕)이 방탕하여 외간 남자와의 추문에 휩싸이게 되는데, 진성여왕은 남편 위홍이 죽고 나서 외로웠던 것인지 젊은 미남자들을 궁으로 끌어들이고 설상가상으로 곡식창고까지 비어 세금독촉으로 흉흉해진 민심 “왕은 몰래 아름답게 생긴 소년 두세 사람을 끌어들여 음란한 행위를 하였고 그 사람들을 중요한 직책에 앉히고 나라의 정책을 위임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분노한 민심은 원종과 애노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진성여왕과 신라, 앞으로의 운명은?
※ 원종과 애노의 난 : 농민 원종과 애노의 주도로 신라 사벌주에서 일어난 농민 저항운동
- 진성여왕의 스캔들 진위여부?
스캔들 속의 미남자는 화랑세력이거나 일부 왕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신라하대는 신라귀족과 왕권의 잦은 충돌, 진성여왕에 대한 소문은 왕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진골귀족의 공격일수도(?)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나라가 번성한 만큼 상대적으로 세력을 키워온 진골귀족, 그러나 800년 이후 잦은 기근과 자연재해로 민생은 불안정하게 되는데, 민생은 뒤로 한 채 왕위 다툼만 벌이던 진골귀족, 따라서 안팎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진성여왕이 즉위하고 진성여왕의 입장에서는 좀 더 나은 백성들의 삶을 위해 즉위 후 1년간 조세를 면제해 주지만, 국고(國庫)가 비는 바람에 오히려 의도와는 달리 백성들에게 더 큰 짐을 지우는 계기가 된다.
〇 혼란에 빠진 신라, 최치원의 <시무10여조>
- 이러한 혼란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최치원으로 개혁안 <시무10여조> 당시 시급한 현안에 대한 개혁방안, 하지만 후대에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당시 시대상황이나 최치원의 저술을 통해 추정 ① 진골귀족 견제를 위한 6두품 출신의 유학지식인 등용 ② 유교적 정치이념을 통한 왕권강화 등으로 <시무10여조>는 대대적인 개혁정책이 아닌 왕실입장이 절충된 개혁안이 아니었을까(?)
- 진성여왕의 <시무10여조> 수용여부?
당시에는 급한 상황이어서 수용했던 것으로 나오고, 결국 최치원은 당시 6두품 최고 관직인 <아찬>으로 승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골귀족의 반발로 시행되지 못하는 <시무10여조> 힘없는 왕권과 지방 세력의 대두 등 여러 이해관계 속에서 스러진 개혁의 꿈
〇 최치원의 선택 - 둘, 해인사로 간 까닭
- <드라마 태조 왕건> 진성여왕 즉위 후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신라는 혼란에 빠지고 이 틈을 타서 새로운 세력이 일어나는데, 궁예를 주축으로 한 후고구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사실상 혼돈의 후삼국 시대를 열어가는 것, 897년 진성여왕은 왕위에서 물러나 해인사로 떠나고, 6개월 후 진성여왕을 따라 해인사로 들어간 최치원의 진실은?
- 최치원이 해인사로 간 이유는?
그토록 원하던 관직마저 버리고 물러난 왕을 따라 해인사로 간 최치원, 사랑이라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6두품 출신의 신분적 한계에 가로막힌 최치원의 꿈, 유리 천장에 갇힌 지식인의 마지막 선택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
- 그러한 점도 없진 않지만 스스로 지사(志士)라고 자부한 최치원, 그런데 귀국 후 계속 혼란한 사회를 만나는 것 “고국에 돌아온 후부터 계속하여 혼란한 세상을 만나 발이 묶이고 걸핏하면 허물을 뒤집어쓰니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가슴 아파하여 다시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삼국사기 열전 최치원>
※ 지사(志士) :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 몸을 바쳐 일하는 사람
- 지사(志士)의 뜻은 명확히 가졌으나 세상이 변했으니 더 이상 나갈 수가 없다 하고 해인사에 들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사(志士)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재야에서도 놓지 못했던 지사의 꿈,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마지막 글은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집필하며 끝까지 무너져 가는 신라를 향한 책임감을 다한 것
- 만약 내가 최치원이라면?
나쁜 시대의 지식인의 처세를 묻는 것으로 <중과부적>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강고한 기득권 세력과 신분장벽의 한계가 답답했을 것. &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이 동시대를 주름잡던 3최인 (최치원·최승우·최언위) 최승우는 893년에 빈공진사시에 합격하고 신라를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후백제 견훤의 책사로 활동, 최언위는 906년에 빈공진사시에 합격하고 귀국하여 신라의 문한(文翰)으로 활동하다 고려에 투항하여 왕건 휘하에 들어가지만, 최치원은 오로지 신라를 위한 지사(志士)로 남는다.
- 지식인 <3최>는 후삼국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당나라에 유학한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신라에 돌아와 사회개혁을 꿈꿨으나 여의치 않자 각자 다른 길을 선택하지만, 최치원의 선택은 신라인으로서 최선의 선택인 것이 끊임없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무너져 가는 신라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 비운의 천재 최치원, 만약 최치원이 난세를 만나지 않았다면 최치원이 쓴 수많은 글들을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난세를 만나 더욱 빛을 발한 최치원의 수많은 작품들, 마지막 고려인 정몽주에 비견되는 최치원의 행보, 그런 이미지 때문에 후대의 고려·조선에서도 항상 유학자 중 최고의 인물로 부각되는 것, 비록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역사에서는 이름을 굳건히 남긴 마지막 신라인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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