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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인물열전> 제5편 신라의 최후, 경순왕과 마의태자

mkpark2022 2016. 2. 22. 21:11

 

 


 

<고대사 인물열전> 제5편 신라의 최후, 경순왕과 마의태자

 


망국(亡國), 나라가 망했을 때 지도층의 올바른 자세

- 10세기 후삼국 시대, 송악(개성)의 호족세력 왕건의 고려 · 완산주(전주)의 호족세력 견훤의 후백제의 압박 속에서 천년 역사에 빛나는 신라에서는 나라의 운명을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데, 신라 최후의 운명을 둘러싼 이들의 선택

- 경순왕과 마의태자(麻衣太子)는 누구?

충주 미륵사의 미륵불과 제천 덕주사의 마애불은 마의태자와 누이 덕주옹주의 전설이 서린 곳, 하지만 마의태자 전설의 고향은 강원도 인제로 옥새바위 · 수거너머 · 사당 안 비석 · 김부대왕각 등, 마의태자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짧지만 역사의 기록보다 전설로 더 많이 회자되는 마의태자

- 경순왕은?

기본적으로 후삼국 시대의 주역하면 궁예 · 왕건 · 견훤을 떠올리지만 그렇다면 신라의 인물은? 바로 경순왕과 마의태자로 신라는 935년에 멸망하게 되는데, 사실 927년까지 신라 56대 왕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경순왕과 마의태자, 당시 신라왕의 계보는 53대 선덕왕 · 54대 경명왕 · 55대 경애왕은 박씨로 56대 경순왕은 갑자기 김씨가 왕위에 오른 것

 

신라 경순왕, 왕이 된 사건

- <드라마 태조 왕건> 927년 신라 포석정, 신라 55대 경애왕은 잔치를 베풀고 흥에 취해 있을 때 연회장을 급습한 무리들이 있었으니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의 군사로 견훤은 재물을 약탈하고 고려로 달아난 경애왕을 사로잡는다. “견훤이 핍박하여 왕을 자살하도록 하고··· (견훤이)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부하들이 비와 첩을 간음토록 내버려 두었다.” & “적의 포로가 된 자들은··· 땅을 기면서 노비가 되기를 바랐으나 화를 면치 못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4> 이후 신라에 왕을 옹립시킨 후백제 견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즉위하는 순간이었다.

- 견훤이 직접 신라왕이 되지 않은 이유?

신라를 장악할 명분이 필요했던 후백제 견훤은 신라 왕실에 반란을 일으킨 셈이므로 민심을 끌어안기에는 명분과 시간이 필요했던 것,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은 모든 권력을 잡지만 바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민심이 어느 정도 자신에게 돌릴 시간이 필요했듯이 견원이 죄지우지할 수 있는 꼭두각시 왕이 필요하여 경순왕을 옹립한 것

- 당시 신라의 왕들은 견훤은 변덕이 심하고 거짓말을 많이 해 상종하면 안 된다고 험담을 하는데, 견훤의 입장에서는 신라가 고려에 연합하면 복잡한 상황으로 신라와 고려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 포석정을 습격하고 경애왕을 죽게 하는 것

- 그러면 신라왕으로 왜 김부(경순왕)였을까?

김부(경순왕)의 부()는 문성왕의 4대손 김효종으로 효공왕이 912년 후사 없이 승하하고 가장 유력한 계승자를 찾다보니 경순왕의 부() 김효종이었지만 김효종 대신 박씨계가 53대 왕으로 즉위했다는 것은 김씨 VS 박씨의 사이에 뭔가 권력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

- 그렇다면 혹시 김씨 왕족들과 견훤과 사전에 내통을(?)

내통의 가능성은 높지 않고 경애왕의 시신을 옮겨 서당에 안치하고 경순왕이 여러 신하들과 통곡하였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한 단종(端宗), 그리고 단종의 시신을 방치한 숙부 세조, 이는 지난 왕실과의 단절의 표시인 것으로 경애왕에게 반감이 있었다면 경순왕은 예우를 갖춰 장례를 치르지 않았을 것

- 이후 견훤의 행보는?

고려가 있기 때문에 후백제를 비워두면 역습을 당할 우려가 있어서 경순왕을 옹립시키고 왕의 동생 효렴과 재상 영경을 포로로 잡아가고···” <삼국유사 기이 후백제 견훤> 신라에는 친() 후백제 인사들이 고위관직을 차지하고 있어서 경순왕도 그들의 눈치를 봐야 했기 때문에 경순왕 즉위 후 약 3년간은 고려와의 교섭기록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신라의 운명을 바꾼 고창성(안동)전투

- 930년 신라에 던져진 또 다른 운명의 주사위, <드라마 태조 왕건> 후백제의 세력이 강해지자 후백제의 상승세를 꺾기 위한 고려의 절치부심, 9301고창성(안동)에서 맞붙은 고려군 VS 후백제군, 치열한 접전 끝에 8천여 명의 후백제군이 전사하고 압승을 거둔 왕건의 고려군은 후삼국의 판도를 뒤집는다.

- 신라 경순왕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방문을 요청하자 1년 뒤 경주를 직접 방문한 고려 왕건 임금께서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주고 여러 관료와 장병에게도 베와 비단을 하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5> 하지만 마의태자는 고려왕은 우리의 도적입니다. 우리 신라를 훔치러 온 도적에게 속지 마옵소서 폐하!”를 외치는데, 고려 왕건을 향한 마의태자의 외침, 과연 그 진실은?

- 당시 농민반란 등으로 최약소국으로 전락한 신라, 경순왕 옹립 당시 삼국 중 후백제가 우세했으나 상황을 뒤집은 사건이 고창성(안동)전투로 이를 계기로 고려의 전세가 역전되면서 왕건이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 하여 고창은 안동(安東)으로 지명이 바뀌게 된다.

- 고려가 후백제에게 계속 밀리는 상황에서 고려는 절치부심하던 상황에서 고려 승리의 결정적 요인 주력군 투입 후백제의 방심 고창지역 신라 호족들의 지원, 안동의 삼태사는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김선평 · 권행 · 장정필을 모신 사당으로 이들은 안동 김 · 안동 권 ·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되는데, 고창전투 이후 부근의 30여 군현이 차례로 고려에 투항하면서 전세는 완전히 고려로 기울게 된다.

 

후백제와 고려 사이 경순왕과 마의태자 속내?

- 고려에 승전 축하사신을 보낸 경순왕, 아울러 경순왕이 왕건에게 속내를 말하는 기록으로 술좌석에서 견훤이 의롭지 못한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니 어떤 통분이 이와 같으리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5>

- 왕건에게 반감을 보인 마의태자 진실은?

드라마 설정일 뿐, 마의태자가 왕건에게 적대감을 보였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단지 고려 귀부를 강하게 반대했던 마의태자 입장에서는 왕건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었을 수도··· 마의태자에게 선견지명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삼국지>의 비슷한 예로 동탁(견훤)이 왕을 자주 갈아치우자 조조(왕건)가 구해주는 척하지만 결국은 나라를 빼앗아 버리듯이 마의태자 눈에는 미래가 보여 견훤이나 왕건이 똑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 1천여 명의 낭도(郎徒)를 이끌었던 화랑 김효종(마의태자 조부) 호국정신 화랑의 핏줄을 이어 받았다면 충분히 상상가능한 마의태자의 모습, 하지만 피를 물려받았다면 경순왕은(?) 격세유전이라고 할아버지의 기질은 아들이 아닌 손자에게 가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영조(英祖)에서 사도세자 띄고 정조(正祖)로 이어지듯이···

- 신라 백성들의 반응은?

고려 왕건에게 호감 견훤이 왔을 때는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았는데 왕건이 오니 부모를 만난 것 같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5> 그 당시 신라의 모든 지역은 고려의 지배하에 있었고 겨우 경주일대만 다스리던 신라, 진성여왕 때 부족들이 전국에서 들끓고 지방으로부터 조세를 걷지 못해 바닥난 국가재정, 게다가 경주는 20만 인구의 소비도시로 자연적으로 경제적 궁핍에 봉착한 상황, 아울러 망국의 징후인 신라 말기의 끊임없는 천재지변을 보면 당시 신라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것

- 왕건은 9318월 경순왕과 신라 귀족들에게 베·비단·안장 등의 선물을 하사하는데, 민심을 얻기 위한 포석전략의 일환이었겠지만 신라의 귀족이나 관리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도움이 되어 민심을 얻게 되는 것

 

천년(千年) 신라의 운명, 부지지간의 엇갈린 선택

- <드라마 태조 왕건> 고려의 기세가 날로 강성해지면서 신라 주변의 성()들은 물론 지방호족들도 친() 고려로 기울고 마침내 신라의 조정에서는 천년사직의 운명을 놓고 고려에 귀부를 논의, 경순왕은 고려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당장 지탱할 여력도 없는데 어찌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VS 마의태자는 우리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로 비록 지금 형편이 곤궁하오나 언젠가는 피지 않겠느냐? 는 것으로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상반된 선택, 그리고 신라의 운명은?

- 경순왕은 왜 항복하려 했나?

고려의 입장에서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이 세운 왕, 왕건의 선물공세는 신라와 후백제의 연합을 막고 결국엔 신라를 병탄(倂呑)하기 위한 전략, 엄밀히 말하면 경순왕은 항복을 했다하지 않고 <귀우태조(歸于太祖)>귀부(歸附)는 타의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스스로 와서 복종하는 형식이다 보니 마의태자 같은 강경파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굴욕적이라는 것

- 왕이 이런 상황을 만들면 안 되는 것으로 신라 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마지막에 귀부는 말도 안 되는 행동! 왕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자결은 못할지언정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였어야 VS 왕이란 백성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로 어차피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면 귀부가 옳은 것

- 마의태자의 주장대로 고려와 맞싸웠다면 과연 승산이 있었을까?

군수물자는 고사하고 당장 굶어 죽을 입장으로 해가 저물면 걸음을 멈출 줄 아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

- 하지만 왕실이 중심이 되어 백성을 하나로 모으고 신라의 불꽃을 살리기 위한 노력을 했어야 하는 것이 망국의 왕이나 왕자가 갖아야 할 자세 아닌가? 신라 말기 왕실이 보여준 최고의 리더십은 귀부(?)

- 경순왕 VS 마의태자는 조선시대에도 엇갈린 평가

<윤기의 무명자집> “임금은 사직에 죽는 것이 떳떳한 의리인데··· 항복한 포로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구나.” 하면서 경순왕을 비판한 반면 <성대중의 청성잡기>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망쳤지만 백성을 보전(保全)한 것처럼··· 이것도 역시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다.” 라고 하여 200년 전()의 조선시대 사람들도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했던 것

- 하지만 백성들의 선택은 백성의 몫, 문제는 경순왕의 품격으로 고려에 귀부 후 호의호식을 한 경순왕에 대하여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떤 지도자들도 경순왕처럼 백성을 핑계로 나라를 팔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두려운 것, 그래서 이후의 행적은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귀부를 결정한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

 

천년 신라, 고려에 귀부하던 날

- 93511월 결국 경순왕은 고려에 귀부를 결정하고 경주를 떠나 개성으로 향한다.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장을 친 것과 같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9> 길을 나선지 9일 만에 고려에 도착한 경순왕, 그는 왕건에게 항복의 표시로 신라의 보물인 천사옥대를 바치고 이후 경순왕은 태자보다 높은 서열인 정승공 작위를 받고 왕건의 딸과 혼인하여 귀부 이후 40년을 고려인으로 산다.

- 고려로 가는 신라인의 심경은?

흥미로운 것은 백성들이 망국의 현실을 슬퍼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민심이 이미 왕건에게 돌아섰다는 반증

- 경순왕이 귀부결심을 완전하게 굳힌 사건

경순왕보다 먼저 고려에 귀순한 후백제의 견훤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견훤은 맏아들 신검이 아닌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하자 왕위를 노린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자 탈출하여 고려로 도망친 것 견훤이 도착하자 상부(尙父)라 존칭하고··· 양주를 식읍으로 내려 주었으며···” <고려사 태조 18> 신라 귀족들은 이것을 보고 후백제가 망하기 전에 귀부해서 하나라도 더 챙기자는 속셈으로 귀부를 서두르게 되는 것

- 경순왕에 대한 평가를 왜 제대로 해야 하면은 우리는 근세에 고종(高宗)을 조선의 마지막 군주로서의 자세에 대하여 후한 평가를 할 수 없는 것으로 망국의 왕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경순왕은 신라를 위해 한 일이 없고 오히려 고려에 귀부 후 호의호식을 한 왕을 후하게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역사를 평가할 때는 엄격해야 하는 것

 

고려 귀부 후() 끝까지 항전을 주장한 마의태자

- 경순왕의 귀부에 끝까지 반대를 하고 눈물의 하직인사 후 추운 겨울 날 쓸쓸히 개골산으로 떠난 마의태자

금강산 4계절 명칭 : 금강산() · 봉래산(여름) · 풍악산(가을) · 개골산(겨울)

-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떠난 이유?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지름길은 7번 국도의 해안도로를 따라 가는 길, 하지만 마의태자는 내륙으로 향하여 돌아가는 길을 택하는데, 일각에서는 마의태자가 신라 재건을 도모하기 위해서 돌아가게 됐다는 마의태자의 의병(義兵) 모집설을 주장

- 강원도 인제군의 <맹개골>은 마의태자의 의병활동지로 추정되는데 근처에는 의병들의 군량을 쌓기 위해 만든 지역이라 해서 군량리가 있고 신라의 국권회복을 기하는 다무리라는 지역이 있어 신라 재건을 위한 의병활동을 뜻하는 지명이 다수 존재

 

마의태자의 의병활동, 사실일까?

- 기록이 아닌 전설로만 전해지는 의병활동 이야기, 사실 고려인들이 신라 부흥운동이나 의병활동에 대한 기록을 없앴다고 해도 믿지 않을 사람은 없지만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진실로 조선시대 단종(端宗)의 유배길 곳곳에 남아있는 관련 유적을 보면 기록에는 없지만 가능성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

- 의아한 것은 나라가 망했는데 다른 나라와는 달리 부흥운동이나 의병활동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신라, 나라가 망했는데 저항하는 세력이 없었다는 것은 이해불가 하지만 한 가지 희망을 던져보는 것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자도 없었지만 고려 귀부에 기뻐했다는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 뭔가 있진 않았을까?

- 이후 마의태자는?

왕자는 개골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나물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9> 경순왕 VS 마의태자, 신라 백성들 가슴 속에 더 깊이 남아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 상반된 선택과 상반된 결말

- 고려에 귀부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다 978년 생을 마감하며 평가를 잘 받아 왕릉도 개성에서 가까운 경기도 연천에 묻힌 경순왕, 하지만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갖은 고난과 이후의 행적을 알 수 없는 마의태자, 마의(麻衣) 태자는 삼베옷을 입은 태자라는 의미로 한겨울에도 상복(喪服)인 마의를 입었던 태자, 마치 시묘(侍墓) 살이 처럼 망국의 아픔을 표현한 듯해서 더욱 애틋한 것

- 호의호식하며 살다 간 경순왕보다 후대인들에게 마의태자가 더 애틋하게 기억되는 이유가 되는 것 <마의태자>라는 대중가요 달빛만 고요하게 태자성의 슬픈 추억을 바람 따라 물결 따라 길손을 못 가게 하네. ~ 피눈물에 무덤이 된 마의태자 우리 님아 풀벌레 울적마다 눈물이 젖는구나! 태자성 우리 님아이렇게 마의태자가 회자되고 있는 이유<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못한 경순왕을 후손들이 보기에 좋지 않아 경순왕의 대척으로 마의태자를 통해서 신라에 대한 절의라든지 혹시 있었을 줄 모르는 의병활동이나 신라 재건의 바람을 투영한 것이 아닐까?

- 조선의 멸망 당시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물론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황족과 결혼하고 일본군 장성을 지내는 모습과 마의태자를 비교해 보더라도 마의태자의 마지막 모습이 훨씬 자존심을 세우는 일

- 백성을 위해 전쟁 대신 귀부를 선택한 경순왕, 신라 천년사직의 자존심을 지키며 개골산에서 생을 마감하는 마의태자, 이들을 각각 평가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실리도 챙기고 명분과 의리도 아들을 통해서 지키게 한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