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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제2편 세종(世宗), 장영실을 버리다?

mkpark2022 2016. 3. 24. 22:24

 

 

 

 

<장영실> 제2편 세종(世宗), 장영실을 버리다?

 

 


개요(槪要)

- 노비라는 신분의 장애를 극복한 조선의 과학자 장영실, 그는 세종(世宗)을 만나 천문과학 사업에 참여하게 되며 세종(世宗)의 든든한 조력자로 활약하던 1442년 어느 날, 장영실이 의금부로 끌려가는 일이 발생하고 급기야 파직처분이 내려지고 이후 종적을 감춰버린 장영실, 1442년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장영실이 의금부로 압송, 파직까지 당했다?

1442년 세종(世宗)의 온천 행을 앞두고 장영실이 의금부로 끌려가고 그일 이후로는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데 장영실이 죄는 불경에 관계되니 마땅히 직첩을 회수하고 장을 집행하여···” <세종실록 2453> 혜성(彗星)처럼 등장했다 유성(流星)처럼 사라진 장영실!

- 세종(世宗)과 장영실의 사이에 틀어진 결정적 사건이라도?

역사적 인물 중에서 미국의 맥아더 장군도 한때는 트루만 대통령과 단짝이었지만 어느 순간 사라지면서 하는 말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그랬듯이 장영실도 천재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장영실의 인생역전, 노비에서 양반으로!

- 중국의 천문관측기구를 관찰하고 명나라에서 돌아온 장영실, 세종(世宗)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며 면천(免賤)을 추진하는데, 대신들은 장영실의 면천을 강하게 반대하지만 세종(世宗)은 결국 자신의 뜻대로 장영실에게 상의원 별좌직에 임명하여 노비에서 양반으로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 조선시대 노비의 신분상승은 거의 불가능하여 영조(英祖) 때 노비 이만강의 일화, 신분을 속이고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만강은 관직에 진출하여 15년간 관료생활을 하다 결국 발각되고 관노 이만강이 성과 이름을 바꿔 과거에 급제한 것이 드러나 흑산도로 유배시키고 다시 관노로 삼았다.” <국조문과방목> 여기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노비에게 신분상승은 헛된 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

- 장영실이 받은 상의원 별좌(別坐)는 어떤 관직?

상의원은 왕실의 물품을 만드는 곳으로 상의원 별좌는 종5품인 오늘날 6급 공무원에 해당하고 상의원 별좌는 무신이 아닌 문신이 담당하는 직책으로 문신들의 T/O를 장영실이 갖게 되자 다른 문신들이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궁궐에서 조회를 할 때 왕을 중심으로 문반(文班)들은 동쪽에 무반(武班)들은 서쪽에 나열하여 이들이 양반(兩班)이 되는 것

- 이후 계속된 수직상승을 하는 장영실은 종5품 상의원 별좌 5품 사직 4품 호군 3품 대호군으로 승진을 하게 되는데, 사실 절충이 된 것이 문반(文班) 상의원 별좌와는 달리 사직 · 호군 · 대호군은 모두 무관직, 3품 대호군은 오늘날 중앙부서의 국장급으로 장영실을 곁에 두기 위한 세종(世宗)의 배려로 장영실을 발탁한 태종(太宗)과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 세종(世宗)

 

세종시대 과학기구와 장영실

- 장영실의 대표 작품은?

세종시대 과학기구들은 간의 · 혼천의 · 일성정시의 · 앙부일구 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다양한 해시계를 개발하여 세종시대는 시계왕국이었고 그 뒤에는 장영실의 활약이···

- 조선의 시간(時間)과 장영실

당시 첨단기술의 집약체인 자격루, 자격(自擊)은 스스로 울린다. ()는 물시계를 뜻하는 것으로 자격루의 작동원리 파수호 · 수수호를 통해 물의 압력차를 이용하는데, 중국과 달리 수수호를 두 개로 늘려 정확도를 높이고 물의 부력으로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에 있는 쇠구슬을 떨어뜨리고 쇠구슬이 인형을 건드려 종··북을 치며 시간을 알려주는 원리로 건전지의 동력을 이용한 뻐꾸기시계와 다른 차원의 알람시계 자격루, 전기가 없던 시절에 오로지 물과 구슬의 힘으로 움직이는 시계

- 15세기 세계 최고의 시계가 자격루로 평가 받고 있고 2007년 국립고궁박물관에 복원된 자격루의 실제 크기는 가로 6m 2m 높이 5.7m로 자격루가 완성되자 세종(世宗)이제부터 자격루를 조선의 표준 시계로 정하노라.” <세종실록 1671>

- 사실 낮에는 굳이 시계가 없어도 태양을 보며 시간을 가늠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밤으로 국가통치에 있어서 밤의 시간을 통제하는 것은 중요한 것으로 물시계 자격루의 중요성은 해시계의 단점을 보완하고 밤의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이며 자격루의 시간을 듣고 각 성문(城門)에서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림

- 농업국가에서 시간과 절기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시간을 안다는 것은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발달에도 중요! 약속이 있어야 거래가 이뤄지는 것이어서··· 조선시대 시간이란 왕실이나 기득권 세력의 전유물, 하지만 자격루의 등장으로 시간을 백성들과 공유하게 되는 것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까지 똑똑하다.” <세종실록 15916> & “여러 기술자 중에 임금의 뜻을 헤아리는 자가 없었는데, 다만 장영실이 임금의 지혜를 받들어서 기교한 방법을 운용하여 임금의 뜻과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연려실기술>

- 강무(講武)는 조선시대 임금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사냥을 하며 무예를 닦던 행사세종(世宗)은 장영실을 옆에 두고 내시 대신 명령을 하달하는 임무를 주는 일도 했다고 하니 천문의기 제작뿐만 아니라 곁에서 보필까지 했던 장영실

 

세종(世宗)의 비밀 프로젝트 천문과학사업?

- 세종이 천문의기사업을 중국은 물론 대신들에게도 비밀로 했다는데 사실?

세종(世宗)이 천문사업을 숨겼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당시의 생각은 천문(天門)이나 역법(曆法)은 중국 황제의 고유 권한으로 생각했고, 중국이나 조선에서도 국가에서 통제하던 학문이었기 때문에 사대관계를 고려하면 공개적으로 천문사업을 진행하기는 어려웠을 것

- 세종(世宗)의 천문사업팀은 집현전 학자들 중심의 이론 팀장영실을 중심으로 한 실무 제작 팀으로 세종(世宗)의 천문과학 프로젝트 팀을 가동하고 비밀 프로젝트 팀의 대표적 작품이 조선의 독자적 달력인 <칠정산내외편>으로 이전까지는 중국이나 아라비아 달력을 사용하다 독자적인 달력을 만들었는데, 세종(世宗) 시대 대표적인 과학 3인방 이순지, 칠정산내외편을 만든 핵심 인물 김담, 천문학자로 뛰어난 자질을 보임 이천, 무관 출신으로 장영실의 후원자이며 활자에 능통

 

조선은 지금, 가마사건의 전말

- 장영실이 의금부로 압송되는 사건이 발생되기 직전 장영실이 있던 곳은 세종(世宗)의 온천 행을 위해 가마를 제작하고 시범운행 도중 가마가 부서지는 참사가 발생, 왕이 탔을 경우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한 것으로 부실 가마 제작에 장영실의 관련 의혹(?) 또 다른 증거 자료 입수 장영실이 가마가 튼튼하지 못하니 다시 만들어야 할 것 같다.” 고 말하자 조순생이 이 가마는 절대 부서지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라고 말한다.

- 가마 사건 후 상황은?

장영실을 비롯한 가마 제작 관련자들은 의금부로 압송되어 처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그런데 장영실과 조순생을 불경죄로 고하지만 세종(世宗)조순생을 처벌하지 말라.” 고 명하는데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세종(世宗)의 처분

- 이후 장영실은 어떤 처벌을 받나?

이 사람들의 죄는 불경에 관계되니 마땅히 직책을 회수하고 장을 집행하여···” <세종실록 2453> & “임금이 장영실에게는 2등을 감형하고 조순생에게는 처벌하지 않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24427> 2등 감형은 장 100대에서 80대로 줄여준 듯(?)

- 장영실과 조순생, 당시 책임 범위는?

당시 장영실과 조순생은 모두 대호군으로 지휘상으로는 비슷하지 않았나(?) 당시 가마 제작에는 사복시의 조순생과 토목공사 담당 선공감이 협력하여 진행하였는데, 사복시는 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하여 일을 맡아보던 관아로 조순생은 사복시에서도 주로 말의 관리를 담당하던 사람으로 가마제작에 대한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추측

- 장영실이 가마 부실 공사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자 조순생이 괜찮다고 했을 때,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것은 같은 대호군이었지만 조순생은 개국공신 조인옥의 손자라는 배경에 밀려 장영실이 수정의견을 계속 밀어붙이지 못한 듯(?)

- 가마가 박살난 것도 아닌데 가마를 감독하여 제조하면서 장식한 쇠가 견고하지 않았으며···” <세종실록 24427> 아무리 왕의 가마라지만 파직(罷職)까지 시킨 것은 과한 처사? 아니면 세종(世宗)의 장영실에 대한 과한 총애가 화를 불러일으킨 것(?) 일부 사대부들에게는 장영실을 내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으니까···

 

장영실은 정말 세종(世宗)에게 버려졌나?

- 혹시 장영실은 용도폐기가 된 것은 아닐까?

장영실 최후의 계기가 된 가마 사건은 1442, 세종(世宗)의 천문사업 프로젝트는 이미 1438년에 완료되어 천문사업 완료 후 장영실의 파직(?) 주목해야 할 사건은 세종(世宗)은 장영실을 파직한 이듬해에 장영실이 만든 간의대를 허물 것을 지시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간의대의 위치를 옮기라고 한 것으로 이 때 세종(世宗)이 한 말 이 간의대가 경회루에 세워져 있어서 중국 사신들로 하여금 못 보게 하는 것이 불가하므로 내 본래부터 옮겨 지으려고 하였고···” <세종실록 25114>

간의대 : 천문관측기구인 간의를 설치하였던 관측대

- 장영실 파직(罷職)과 간의대가 무슨 관계?

천문사업 프로젝트인 간의대를 통해 필요한 천문정보를 획득한 세종(世宗), 사실상 천문사업을 완료한 시점에 중국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해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기라는 것으로 장영실 파면 전후로 명나라 사신들의 잦은 출입과 중국에게 조선은 통제의 대상, 반면 세종(世宗)은 겉으로는 사대외교와 안으로는 자주노선을 추구한다.

- 임진왜란 때에도 선조(宣祖)는 세종(世宗) 때 만든 우리 달력을 명나라에서 알게 될까 두려워하는 대목이 등장 우리나라에서 개별적으로 역서(曆書)를 만드는 것은 매우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중국에서 알고 힐문하여 죄를 가한다면 답변할 말이 없을 것이다.” <선조실록 311222> 그리고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부터는 조선시대 달력에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 가마사건으로 장영실이 사라지고 1년 뒤 한글창제를 하게 되는데 세종(世宗)은 장영실 대신에 한글을 선택했다?! 중국의 통제와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에 세종(世宗)의 선택은 조선만의 역법(曆法) VS 조선만의 글, 게다가 이미 완료된 독자 역법사업으로 한글창제를 완수하기 위해 중국과의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장애물을 미리 정리한 것(?) 그리고 한글사업에 있어 장영실은 필요하지 않았을 듯(?)

- 천문과학기구의 세부적 기술을 알고 있는 장영실, 중국이 문제를 삼을 경우 장영실은 명나라로 압송될 수도 있는 상황으로 명나라로부터 장영실을 보호하기 위한 세종의 전략?! 애민군주 세종(世宗)이 이용가치가 없어졌다고 해서 함부로 버리진 않았을 것이고 가마사건을 빌미로 오히려 장영실을 보호하려고 했다고 믿고 싶은 것

- 사실 장영실이 은퇴를 준비했는지는 모르지만 세종(世宗)에게 바친 장영실의 마지막 선물은 1438년의 옥루(玉漏)로 천상의 시계로 자격루는 백성을 위한 물시계라고 하면 옥루(玉漏)는 세종(世宗)을 위한 물시계로 천체는 흩어져 있어 한눈으로 볼 수 없으나 장영실은 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천지자연의 조화를 원격자동시스템으로 구축을 한 것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세종실록 2017>

옥루 : 천체의 움직임까지 담아낸 자동 물시계

- 그토록 총애하던 장영실을 가마제작의 부실을 이유로 내쫒은 것은 여전히 미스터리~ 옥루(玉漏)가 설치된 흠경각은 왕의 침전인 강녕전 바로 옆 건물로 수시로 옥루를 보며 기뻐한 세종(世宗), 장영실의 파직은 세종(世宗)과 장영실의 공동 작품이 아닐까(?)

- 장영실의 최후에 관한 기록은?

실록은 물론 야사에도 존재하지 않는 장영실의 행방, 소설에서는 다빈치를 만나러 이탈리아로 갔다고··· 만약 장영실이 더 활동했더라면 자격루를 계속 발전시켰을 것이고 보다 작게 개량되어 집집마다 보급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