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is(한국사)

단종(端宗)의 누이, 경혜 공주

mkpark2022 2016. 3. 28. 20:51

 

 

 

단종(端宗)의 누이, 경혜 공주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

- “나는 조선의 왕실에서 태어났다. 7살이 되던 해에 동생을 낳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왕의 손녀로 세자의 딸로 고귀하게 자라났다. 그러나 운명은 흔들리기 시작하여 아버지가 돌아기시고 이어진 숙부의 왕위찬탈로 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나는 단종(端宗)의 누이 경혜공주다!”

- 조선의 공주란?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주체적인 삶을 살기가 어려웠던 조선의 공주, 공주란 말은 중국에서 온 것으로 중국 최고위 대신 삼공이 주관하여 결혼시키는 여자라 하여 공주(公主)라고 하고 공주의 결혼이 개인이나 가정의 일이 아닌 나라의 일로 간주했다는 뜻으로 공주는 개인의 삶보다는 국가를 위한 삶이 우선인 존재였다는 것

-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등장하는 비운의 왕녀는 경혜공주로 단종(端宗)의 누이이며 단종(端宗) 못지않은 비운의 주인공으로 드라마에서는 홍수현의 한() 서린 눈물 연기에 시청자들은 호평, 조선시대 여인의 외모를 평가하는 것은 양반의 체통에 어긋나는 행위로 누가 감히 공주의 얼굴에 대하여 기록했겠느냐만 야사에 나온 얘기를 드라마 화한 것으로 경혜공주 미모의 진실은 미궁 속으로···

 

어머니를 세자빈으로 만든 경혜공주

- 경혜공주는 문종(文宗)의 세 번째 빈()인 현덕왕후 권씨의 소생으로 재미있는 것은 후궁출신 현덕왕후의 세자빈 간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경혜공주로 문종(文宗)은 이혼을 두 번 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두 왕비에게 소생이 없다는 것, 세 번째 재혼시키기가 어렵게 되자 세종(世宗)은 아이를 낳을만한 후궁 세 명을 들였지만 권씨만이 경혜공주를 낳고 다른 두 명은 아이를 낳지 못한 것 권양원과 홍승휘 중에서 누가 적임자인가? 두 사람 모두 세자가 우대하는 사람이며 우리 양궁(兩宮)이 돌보아 사랑하는 사람이다.” & “세자의 뜻은 홍씨를 낫게 여기는 듯하나··· 권씨는 이미 딸을 낳았으니 의리상 마땅히 세자빈으로 세워야 될 것이다.” <세종실록 14361228>

- 세종(世宗)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왕실의 대를 잇는 것, 세자빈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결국 왕손을 출산한 권씨, 그러나 권씨는 단종(端宗) 출산 다음 날 산후병으로 사망하게 되고 조선시대 왕으로 재위하던 기간에 왕비가 없던 유일한 문종(文宗)

- 태어나자마자 가장 확실한 보호자를 잃게 된 단종(端宗), 세종(世宗) 승하 후 문종(文宗)도 재위 2년 만에 승하하면서 왕실의 엄청난 비극이 생기게 되는 것

 

계유정난의 무대가 된 경혜공주의 집

- 14531010일 경혜공주의 집으로 찾아온 단종(端宗), 그날 밤 숙부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찾아가 철퇴로 격살시키고, 천여 명의 군대를 앞세워 경혜공주의 집을 찾아왔고 살생부를 작성해 반대파 대신들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의 밤으로 피의 살육전이 벌어진 것이다

계유정난 : 1453년 수양이 왕위를 빼앗기 위해 단종의 보좌세력을 살해·제거한 사건

- 결혼 후, 궁궐 밖 사가에 살고 있던 경혜공주는 계유정난 운명의 그날 밤 단종(端宗)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창덕궁 아래의 양덕방 향교동으로 지금의 북촌 인근에 살고 있었던 경혜 공주 경혜공주가 지금 집이 없으므로 그 집을 지으려는 것이다.” & “철거시키도록 명한 양덕방의 인가가 30여 구()에 이른다.” <문종실록 145141>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혜공주의 신혼집 짓기를 강행한 문종(文宗)

-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 몫까지 다해 주고 싶은 아비의 마음이었을 것이고 문종(文宗)이 경혜공주의 신혼집에 공들인 이유 딸에 대한 사랑 어린 왕 단종(端宗)의 안위를 위함, 누구나 문종(文宗)이 얼마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어린 아들을 누가 지켜줄 것인가? 겉으로는 수양대군과 김종서가 있지만 이들은 야심가라서 믿지 못하고 믿을 수 있는 누이 집을 크게 지어 단종(端宗)이 성년이 될 때까지 누이 집에 자주 들릴 수 있도록 하는 배려

- 하지만 아비의 깊은 뜻이 담긴 장소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 아무래도 수양대군이 쿠데타 장소를 궁궐이 아닌 경혜공주의 집으로 선택한 것은 궁궐은 넓고 경호 병력이 많지만 이곳은 민가이기 때문에 궁궐보다 상대적으로 허술한 경비망 때문이었을 것

- 수양대군의 세력 확장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의정부영사·이조·병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 모두를 겸임하면서 집현전에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지으라고 명한 수양대군은 결국 단종(端宗) 재위 3년 만에 세조(世祖)에게 양위하게 된다.

 

남편 정종(鄭悰)의 유배, 경혜공주 세조(世祖)를 협박(?)하다

- 차례로 제거되는 단종(端宗)의 측근들, 공식적으로는 양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압박을 하면서 찬탈하는 것, 이 무렵의 결정적 사건 중의 하나가 세종(世宗)의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이 수양대군의 처사에 반발을 하다가 역모 죄로 유배를 가게 되고 이때 금성대군의 편에 섰던 인물이 경혜공주의 남편인 정종(鄭悰)

금성대군 : 세종의 여섯 째 아들로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 사사됨

- 경혜공주의 나이 21세에 남편은 유배가고 동생은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는데, 실록에는 정종 유배 후 병석에 누운 경혜공주는 수양대군에게 자신의 아픈 소식을 전했다고 기록하는데 경혜공주가 병 소식을 알린 의미는? 아마도 자살이라도 하겠다는 암시(?) 이대로는 못살겠다는 뜻으로 민심을 이용한 경혜공주의 고도의 정치전략(?)

- 결국은 원래 영월로 정종을 귀양 보내기로 했는데, 경혜공주의 병 소식을 듣고 양근(양평)으로 유배를 보내고 다음 날, 이제는 단종(端宗)이 세조(世祖)에게 말을 전하는데 경혜공주가 그 병을 내게(단종) 알려왔는데, 그 의중이 아마도 정종을 돌아오게 하려는 것 같다.” <세조실록 1455617> 자신도 어떻게 될 줄 모르는 상황에서 예상 밖으로 단종(端宗)의 강경한 대응으로 결국 유배 6일 만에 한양으로 돌아 온 정종

 

남편의 유배지에 따라간 경혜공주

- 경혜공주가 병석에서 일어나자 다시 유배를 가게 된 정종, 한양에서 새로운 유배지로 수원 통진(김포)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세조(世祖)의 입장에서도 민심을 살펴야하기에 경혜공주가 함께 유배지로 가게 하여 반발하는 민심을 달래는 방법을 병행 공주가 만약 서울을 왕래하고자 하거든 노비까지도 아울러 공궤(供饋)하도록 하라.” <세조실록 1455813>

- 세조(世祖)는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왕이 되고 나서도 잦은 행차를 하지만 즉위 1년 후인 1456<사육신사건>이 일어나고 이 사건이 정종에게도 영향을 미쳐 경혜공주 부부의 재산과 노비를 몰수하고 단종(端宗) 복위운동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의도를 보이면서 정종은 전라도 광주로 유배를 보낸다..

사육신 사건 : 1456년 단종(端宗)의 명분으로 세조를 축출하고자 한 사건

- 정종의 광주 유배 후인 1457, 단종(端宗)은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면서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端宗), 그래서 더욱 거세진 민심을 두려워한 세조(世祖)는 경혜공주 부부 유배지의 감시를 더욱 강화 난장(欄墻) 밖에 녹각성을 설치 외문을 항상 자물쇠로 잠그고 담 안에 우물을 파서 외부인과 접촉을 차단 부식거리는 10일에 한 번씩 공급

- 이런 상황이 되자 정종을 따라 온 경혜공주에 대하여 민심은 호평 공주가 따라가 있으면서 온갖 곤욕을 다 치렀는데 일반 사람들도 감당해 내지 못 할 바였다. 그런데도 조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기색이 없이 아침저녁으로 아녀자로서 도리를 다하면서 더욱더 경건하게 하며 해이하지 않았다.” <경혜공주 묘지명>

- 정종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처가의 비극적인 운명을 함께 겪는 심정, 혼인 당시 경혜공주는 16세로 내명부에 웃어른이 없었던 조선 왕실, 그래서 세종(世宗)과 문종(文宗)이 직접 고른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 조선시대 왕실 혼인의 부적격자 과부(寡婦)의 자식 역적(逆賊)의 자식 ()이 든 사람 등 이었는데, 당시 해주 정씨의 정종은 과부의 아들로 그런 정종을 과정이 어긋나게 경혜공주의 배필로 세종(世宗)이 결정을 하게 되는데 혼인 부적격 조건을 뛰어넘을 만큼 인정받은 정종

 

유배지에서 아이를 낳은 경혜공주

- 경혜공주가 열여섯 살에 혼인이 결정되자마자 할아버지 세종(世宗)이 돌아가시게 되는데 혼인 직후 문종(文宗)이 승하하면서 연어 상()을 당한 경혜공주, 그렇다 보니 계속 아이가 생기지 않다가 광주 유배지에서 25살인 혼인 9년 만에 첫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 한편 유배지에서 불교에 심취한 정종 영양위(정종)가 외인과 교통하며 담을 넘어 불러들인 형상을 보건대 잡인들과 상통한 것이 하루아침의 일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세조실록 1461726> 그래서 결국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게 된 정종 내가 충신이 되어 주상께 죄를 받았으니 어찌 아픔이 있으리오··· 빨리 상은을 입고자 할 뿐···” <세조실록 1461822> 나는 단종(端宗)의 충신으로 너(세조)에게 받을 상은은 죽음 뿐 이라는 것으로 정종 최후까지의 저항은 세조(世祖)의 악행을 알리는 것

 

관비(官婢)가 된 경혜공주

- <드라마 공주의 남자> “남동생이 죽은지 4년만인 1461년 남편은 한양으로 압송되고, 국문 현장에 있던 당시 나는 임신한 몸이었다. 그리고 그는 능지처참 되었다.” 임신 중에 겪은 남편의 죽음 (정종)이 적소에 있다가 사사된 뒤에 공주가 순천의 관비가 되었다.” <연려실기술>

- 연좌제로 경혜공주와 함께 자녀들도 노비로 전락하는 비극을 맞이하여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경혜공주의 인생, 순천부사는 공주이지만 업무에 충실하려면 노비라서 부리지 않을 수 없었으나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은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연려실기술>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당당했던 경혜공주

- 세조(世祖)의 악행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편 정종의 집안 기록에 따르면 경혜공주가 임신을 했는데, 세조(世祖)는 환관을 보내 공주가 낳은 아이가 딸이면 데려오고 만약 아들이면 목 졸라 죽이라!” <해주정씨 족보> 그렇지만 다행히 세조(世祖)의 부인 정희왕후는 환관에게 만일 법에 따라 목 졸라 죽인다면 문종(文宗)의 핏줄은 영영 끊어지고 만다. 공주가 낳은 아이가 비록 아들이어도 데리고 오도록 하라.” <해주정씨 족보> 그런데 태어난 아이는 아들 왕후는 아이에게 여자 옷을 입혀 궁중에서 길렀다.” <해주정씨 족보>

- 이러한 일들은 실록과 야사가 섞여있는 이야기로 분명한 사실 하나는 정희왕후가 지혜를 발휘했다는 것이고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는 세조(世祖)의 악랄한 행위, 그래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정희왕후는 경혜공주의 자식들을 궁궐로 데려온다.

 

세조(世祖), 저주를 받다

- 세조(世祖) 3년인 1457, 세조(世祖)의 장자 의경세자가 요절하는데, 죽기 직전 하는 말 상왕전하(단종)와 문종대왕께서 환히 웃으시며···” 말을 잇지 못하고 죽게 되는데 단종(端宗)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의 저주라는 소문이 돌고 세조(世祖)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게 되는데,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들이 나타나 울며 침을 뱉자 그 자리에 불치의 피부병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지난날 왕위찬탈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 백성들은 왕실에 찾아온 불운을 세조(世祖)의 업()이라 했다.

- 야사로 전하는 저주받은 세조(世祖)의 이야기, 단종(端宗)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 세조(世祖)가 놀라서 일어나니 갑자기 동궁이 죽었다는 기별이 들려왔다.” <축수편> 실제로는 단종(端宗)보다 의경세자가 먼저 죽었고 세조(世祖)가 피부병으로 고생한 것은 사실로 민심이 반영된 야사

- 1457년 의경세자가 요절하고 1461년에는 세조(世祖)가 아끼는 예종비 장순왕후가 사망하고 이후 줄줄이 후손들이 요절하는 모습들이 나타나는데, 예종(睿宗)의 아들 인성대군도 3세에 사망하고 해양대군(예종)20세에 사망하자 저주라 믿었던 것

- 특히 세조(世祖) 10년에는 후손들의 요절과 세조(世祖)의 피부병을 지켜본 정희왕후는 부처님의 힘을 빌리고자 스님의 조언을 받는데 살아있는 사람들의 원한을 먼저 풀라는 것이때 살아있는 사람 중 가장 원한에 사무친 사람은 경혜공주로 한()을 풀어주라는 코치를 했을 것(?) 결국 본인들의 안위를 위해 경혜공주의 자식들을 거둔 것(?)

 

자식들을 궁궐에 보내고 비구니가 된 경혜공주

- 궁궐에 자식들만 맡기고 비구니가 되어 출가한 경혜공주, 자식들을 노비로 살게 할 수는 없었지만 세조(世祖)의 꼴은 차마 보고 싶지 않았던 것, 기구한 경혜공주의 인생은 공주 노비 비구니로··· 정업원은 고려·조선시대 도성 내에 있었던 여승방으로 단종(端宗)의 부인 정순왕후도 정업원에서 머물렀고, 현존하는 종로구 숭인동의 정업원구기 <동망봉>은 정순왕후가 매일 올라가 동쪽 영월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었던 곳으로 동병상련이라고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시누이와 올케

- 정희왕후에게는 경혜공주를 설득할만한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조선 왕실에서 실질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은 어머니보다 유모(乳母)로 경혜공주에게 믿음을 준 인물은 유모 백어리니(白於里尼), 현덕왕후 권씨의 여종출신으로 현덕왕후 사후에 경혜공주에게 상속되어 유모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 경혜공주의 자식들이 궁궐로 들어간 시기에도 왕실 유모였던 백어리니는 실록에도 총명하고 현실감각이 뛰어난 여인으로 기록되어 정희왕후와 경혜공주의 가교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백어리니 유모 밑에서 경혜공주의 자식들과 함께 자란 아이가 자을산군으로 훗날의 성종(成宗)!

- 정희왕후와 백어리니의 의도는 후손들 간에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면 선대(先代)의 원한도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라는 기대였지만 자을산군이 9대 성종(成宗)으로 왕이 된 것은 의도치 않은 행운, 백어리니의 덕분으로 경혜공주의 자식들이 왕과 죽마고우가 된 셈

- 궁궐에 자식을 맡긴 경혜공주의 마음은 편했을까?

경혜공주의 처지는 복수를 할 수도 없고 자식들도 있는 상황이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불심(佛心)으로 한()을 다스리고 모두가 살 수 있는 길을 선택했을 것

 

경혜공주, 궁궐로 돌아와 세조(世祖)를 만나다

- 정업원에 들어가고 4년 만에 궁궐로 돌아온 경혜공주는 아들을 데리고 세조(世祖)와 대면하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이때는 세조 114월로 세조(世祖)의 병이 가장 심각했던 시기여서 세조(世祖)가 가장 두려움에 떨었던 시기로 이 시점에는 세조(世祖)에게 뭐든 요구를 하면 들어줄 수 있는 준비가 된 시점, 마침 10살이 되어 궁궐을 나가야 했던 경혜공주의 아들문제로 정희왕후가 세조(世祖)를 만나라고 코치했을 것(?)

- 극적인 장면 정종의 아들과 경혜공주가 입궐하여 알현하니 세조(世祖)께서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눈물을 뿌리시고 나로(예종)하여금 전지(傳旨)를 쓰게 하시어 연좌시키지 말도록 하셨으니···” <예종실록 1469129> 결과적으로 자식들을 노비의 신분에서 면천(免賤)시키는 목적을 달성한 것, 그 상황을 상상해 보면 자식을 데리고 세조(世祖)를 만나러 간 경혜공주, 이때 세조(世祖)는 명색은 왕이지만 온 몸의 종기로 추한 모습을 하고 있는 꼴을 봤을 때 경혜공주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만감이 교차했을 것

- <해동정씨 족보>에는 경혜공주 아들의 이름을 세조(世祖)가 지어줬다고 기록하는데, 이런 험한 꼴을 겪지 말고 오래 살라는 의미에서 눈썹 미() · 목숨 수()로 눈썹이 흴 때 까지 오래 살라는 의미 세조가 아이 이름을 미수라 하였으니 오래 살기를 바라는 뜻에서였다.” 이후 세조(世祖)는 경혜공주에게 집 · 토지 · 절까지 지어주며 물심양면으로 밀어주는 모습을 보인다.

- 더 놀라운 것은 세조(世祖)에게 자주 문안인사를 갔던 경혜공주와 아들, 경혜공주는 세조(世祖)를 정말로 용서한 것일까? 경혜공주가 정업원에 들어가서 불교공부를 했다는 것이 무슨 공부였을까?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철천(徹天)에 사무친 원한이 있는데, 그 원한을 품으면 서로가 불행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경혜공주의 죽음

- 경혜공주의 말년은 편했을까?

15세에 돈녕부 직장에 발탁된 아들 정미수! 그런데 안타깝게도 7개월 만에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경혜공주, 마치 영화100여 편을 본 듯한 파란만장했던 경혜공주의 삶은 마음의 병이 해소되니 생()에 대한 긴장이 풀렸던 것은 아닐까?

- 돈녕부는 조선시대 종친(宗親)과 외척(外戚)을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로 직장(直長)은 종7품의 벼슬로 15세의 나이에 파격 승진한 정미수는 공식적인 왕족으로 인정된 것, 그래서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정미수를 돈녕부 직장으로 삼았는데··· 엎드려 바라건데··· 빨리 정미수를 파직 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아니 하였다.” <성종실록 147348> 성종(成宗)이 죽마고우 정미수를 보호한 것(?) 당시 수렴청정 하던 정희왕후의 뜻일 것이고 결국 경혜공주는 살아생전에 자식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것을 보고 눈을 감게 되는 것으로 경기도 고양시 경혜공주의 무덤은 봉분이 하나뿐인데 남편의 무덤은? 능지처참 후 시신 수습이 어려워 옆에 작은 가묘를 조성해 놓은 것

- 어머니가 모든 업()을 안고 가셨는지 자식들은 이후 잘살게 되는데, 딸이 시집갈 때 지금 경혜공주의 딸이 결혼하니 면화 30· 면포 60필을 내려 주도록 하라” <성종실록 1476613> 물론 시대의 흐름이기도 했지만 공주의 안타까운 사연 같은 것들도 함께 고려되면서 단종(端宗)과 정종(鄭悰)은 숙종(肅宗) 24년인 1698년에 복권이 된다.

- 계유정난부터 이때까지 피바람이 불었던 남성들의 왕위찬탈, 그 뒷면에는 여성들이 핍박과 고난을 당했는데, 그 원한을 복수가 아닌 용서로 풀었던 여성들, 결국은 경혜공주 · 정희왕후 그리고 정순왕후까지··· 남성들은 화()를 만들었지만 여성들은 화해를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

- <경혜공주의 묘비명> “무릇 귀한 왕녀의 신분인데도 그 복록을 누리지 못하였으며 정숙하고 화락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장수(長壽)를 누리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비록 그렇지만 하늘이 보답하는 것은 소홀하면서도 잊지 않는 법이니 흐르는 광채와 남은 경사가 장차 후세를 기다려서 더욱더 크게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