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
〇 고종(高宗)의 고명딸, 덕혜옹주
-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지 2년, 나는 망국(亡國)의 혼돈 속에서 태어났다. 61세에 낳은 늦둥이 딸, 아버지는 유난히 나를 아끼셨다. 하지만 내가 8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내가 의지할 곳은 오빠와 어머니 뿐, 그리고 6년 후 나는 가족과 헤어져 홀로 일본에 가야했다. 그리고 일본인과 정략결혼을 했다. 나는 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다!”
- 소설 · 뮤지칼 · 영화로도 만들어진 덕혜옹주 이야기, 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이 됐다는 것은 그 만큼 삶 자체가 드라마틱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넓은 이마에 아버지 고종(高宗)과 꼭 닮은 덕혜옹주
- <이왕무, 한국학중앙연구원> 고종(高宗)이 덕혜옹주를 정말로 사랑한 것은 환갑에 얻은 늦둥이 외동딸이기 때문 “(덕혜옹주가 태어난 지 2일 째)태왕전하가 복녕당에 나아갔다.” <순종실록 1912년 5월 26일> 삼칠일간 금줄을 쳐서 가족이나 이웃의 출입을 삼가는 민속신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칠일도 지키지 않고 이튿날 · 7일 · 21일에 방문한 고종(高宗) “(덕혜옹주가 태어난 지 21일 째)태왕전하가 복녕당에 왕림하였다. 이희 공 이하 종척과 이왕직 장 · 차관과 칙임관 이상 및 내빈을 인견하고 이어 사찬하였다.” <순종실록 1912년 6월 14일>
- 잠든 아이를 깨울까 봐 상왕 앞에서도 누워서 아이를 본 유모 변복동, 왕실 법도까지도 중요하지 않았던 덕혜바라기 고종(高宗), 사실은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는 그냥 두고 봐야 하는 것이지만 잔치를 한 이후에는 “(덕혜옹주가 태어난 지 50일 째) 태왕전하가 복녕당에 나아가 새로 태어난 아지를 데리고 함녕전으로 환차하였다.” <순종실록 1912년 7월 13일>
- 덕혜옹주가 태어난 1912년의 기록을 보면 5년 전인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제의 제위를 양위하고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주권을 상실하면서 덕수궁에 갇히게 되는 상황에서 1911년에는 영친왕의 어머니 엄귀비가 장티푸스로 사망하고 왕위 · 주권 · 아내까지 잃은 고종(高宗), 암울한 상황에서 고종(高宗)에게 덕혜옹주는 유일한 희망이었을 듯하고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본의 철저한 감시 속에 살았던 고종은 주권 회복을 위한 활동을 전혀 할 수 없었던 상황
- 새벽 3시에 잠든 고종(高宗), 늦게 자는 이유?
누구든지 일생에 한 번 겪기도 힘든 일을 겪은 고종(高宗), 1895년 을미사변으로 경복궁 안에서 일본 자객들에 의해 명성왕후 시해사건을 겪은 고종(高宗)은 트라우마로 인해 잠들기 쉽지 않았을 것
- 특히 1911년에는 자신이 가장 총애하던 후궁 엄귀비가 사망하면서 많은 궁녀들과 가까이 했는데 엄귀비가 사망하자마자 양귀인에게서 태어난 덕혜옹주, 1915년에는 막내아들 이우가 탄생하는데 덕혜옹주는 4살 · 이육 2살 · 그리고 이우가 1살로 65세까지 자식을 본 고종(高宗)은 16명의 자녀를 보았으나 순종·의친왕·영친왕·덕혜옹주 등 3남 1녀만 장성, 늦둥이 아빠라는 사실이 오히려 안타깝기도 한 것이 그 만큼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던 암울했던 현실이기 때문
- 덕혜옹주의 유년시절은?
5세가 되던 1916년 당시 고종(高宗)이 거처하던 덕수궁 함녕전에서 불과 150여 미터의 거리에 처음으로 왕실 유치원을 설립을 하는데, 그 가까운 거리를 고명딸이 가마를 타고 가게 할 정도로 지극히 사랑을 했었고, 또래 아이들을 직접 선발하여 덕혜옹주와 함께 교육을 받게 한 고종(高宗) “태왕전하가 준명당에 임어하여 유치원 학도를 소견하고 필묵을 하사하였다.” <순종실록 1916년 5월 8일> 아버지 고종(高宗)의 세심한 배려 속에서 성장하던 때가 덕혜옹주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
〇 덕혜옹주의 입적(入籍) 문제
- 당시 고종(高宗)에게는 고민이 있었으니 덕혜옹주의 호적등록, 덕혜옹주가 유치원에 갈 때까지 호적에 올리지를 못하는데, 나라를 빼앗긴 후 일본 황실에 속한 조선 왕실은 덕혜옹주의 입적을 위해서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아야 했던 시절 “덕혜는 덕수궁 이태왕 전하의 만년 복녕당 양귀인이 낳은 아이로 여러 사정 때문에 왕가에 입적시키는 절차가 아주 어려웠다.” <이왕궁비사>
- 사실은 덕혜옹주가 태어나자마자 일본 국내성에 보고가 된다. “덕수궁 나인 양춘기가 이번 25일 오후 7시에 여자 아이를 순산하였으니 다행스럽다” <덕수궁 찬시실 일기> 이 얘기는 조선 왕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총독부는 덕혜옹주의 출생 사실을 알았지만 입적문제를 미뤘던 것
- 문제가 되는 것은 덕혜를 인정할 경우 일본은 덕혜옹주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조선 왕실 자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입적을 통제하게 되는 한편, 덕혜옹주 어머니의 낮은 신분 때문에 입적을 꺼리는 측면도 있었는데, 덕혜옹주 어머니는 소주방의 나인출신으로 덕혜옹주가 유치원에 다닐 나이지만 왕실 족보에 입적되지 않은 것
- 그래서 고종(高宗)은 당시 조선 총독 데라우치에게 격무에 시달릴 때는 어린아이를 보는 게 최고라며 고종은 데라우치를 데리고 준명당에 간다. “(고종이) 이 아이가 내가 만년에 얻은 아이입니다. 이 아이가 있기에 덕수궁이 웃음소리로 넘칩니다.” 라고 말하자 “(어린 덕혜옹주를 대면시키자 데라우치가 말했다) 귀여운 아이로군요. 어린 자식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일이겠습니다.” <이왕궁 비사> 그래서 총독도 고종(高宗)의 딸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〇 고종(高宗)의 서거(逝去) 후, 덕혜옹주
- 이 같은 황실 입적은 덕혜옹주의 가혹한 운명을 예고하게 된다. “1919년 1월 21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지 하루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아버지가 일본에 의해 독살됐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두려웠다. 일본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고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으로 떠나야만 했다.”
- 당시의 신문이나 공식적인 보도로는 고종(高宗)이 뇌졸중에 의한 죽음으로 보도하지만, 사실은 고종(高宗)의 시신을 목도한 종친들은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사람들이 통 넓은 한복바지를 벗기기 위해서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윤치호 일기> 때문에 독살설이 파다했던 것이고 고종(高宗)의 죽음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 고종(高宗) 승하 후 일본이 덕혜옹주를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덕혜옹주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더욱 증가하여 학교성적 · 건강 · 여행 등 덕혜옹주의 사생활까지 세세히 보도했던 당시의 언론, 덕혜는 왕실의 아이콘으로 부상하게 된다.
〇 덕혜옹주의 강제 일본 유학
- 일본이 덕혜옹주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던 덕혜옹주의 오빠 영친왕, 그리고 1925년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해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로 덕혜옹주도 강제로 일본 유학을 가지만 고종(高宗)인 아버지가 일본에 의해 독살 당했다고 믿고 있던 덕혜옹주는 일본행이 몹시 두려웠을 듯··· 기차에 오르는 사진이 공개됐는데 얼굴이 퉁퉁 부어있는 이유는 유학가기 전날 엄마 곁을 떠나기 싫어서 밤새 울었기 때문이라고···
- 그래서 그런지 일본에서 학교생활 시절 보온병을 들고 다녔는데 “덕혜옹주가 늘 보온병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어느 날 동창생이 왜 그렇게 많은 보온병을 들고 다니느냐고 물었다. 덕혜옹주는 ‘독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덕혜옹주의 일본 동창생 회고록> 아버지의 독살설을 믿었던 덕혜옹주는 일본생활 내내 자신도 독살의 위협을 느꼈을 것
- 설상가상으로 1926년에는 오빠 순종(純宗)이 서거하고 1929년에는 어머니 양귀인 마저 사망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어머니 장례식에 상복조차 입을 수 없었던 덕혜옹주, 일본 황실에 입적한 덕혜옹주가 궁녀인 양귀인의 장례에 예를 갖추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일본의 논리로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할 수조차 없었던 덕혜옹주, 고종(高宗)이 애썼던 일본 황실입적이 오히려 덕혜옹주에게는 굴레를 씌운 꼴
- 고종(高宗)은 생전에 측근의 시종을 시켜 덕혜옹주와 한국인의 결혼을 추진했었는데, 일본에 발각되어 시종이 덕수궁에서 내쫒기며 물거품이 된 고종(高宗)의 계획, 영친왕을 일본인과 결혼시켜야 했던 고종(高宗)은 이번만이라도 막아보겠다고 했으나 일제의 선수로 실패하고 마는데 일본 황실에 입적되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삶을 살수도 있었던 덕혜옹주였겠지만 고명딸이었던 덕혜옹주가 부족함이 없이 살았으면 하는 아버지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 하지만 폐위된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일본 황실의 권위를 인정하고 딸을 입적시키려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 아마 이중적인 것인지도 모르지만 일본에 의해 명성왕후를 잃고 덕혜옹주를 일본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본 황실에 입적시켰을 수도 있었을 것(?) 이것이 고종(高宗)의 번뇌가 아니었을까? 라는 <이왕무 박사의 생각> 심적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운 고종(高宗)의 선택
〇 덕혜옹주, 대마도 백작과 결혼
- 1931년 5월 8일, 덕혜옹주는 대마도 백작과 정략결혼을 하게 되는데, 1920년 영친왕과 일본인의 결혼 당시 신혼마차 폭탄 투척 미수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좋지 않았던 국민들의 여론, 덕혜옹주의 결혼에 대한 시민의 반응은? <1931년 5월 12일자 조선일보>는 덕혜옹주 남편의 얼굴을 삭제한 결혼사진을 게재하는데 베를린 올림픽 때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삭제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이 원조(?)
- 얼굴 없는 덕혜옹주 남편에 대한 괴소문은 엄청난 추남이라는 것 “노 궁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애꾸눈에 키도 작달막하고 아주 못생긴 추남이었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이 사실을 알고 사흘을 곡기를 끊고 울었다는 것이다.” <김용숙, 조선조궁중풍속연구> 또한 조선 왕실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데 덕혜옹주는 정략결혼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〇 덕혜옹주의 남편, 소 타케유키
- 덕혜옹주의 남편 소 타케유키는 대마도 백작가문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도쿄 출신으로 훤칠한 키에 도쿄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지식인으로 영문학자 + 화가 + 시인, 당시 덕혜옹주 남편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아무리 일본의 백작이라지만 조선 최고의 황녀와의 결혼은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당시에 조선은 일본은 물론이거니와 대마도는 더욱 낮게 보는 경향이 강했던 시절.
- 소 타케유키는 덕혜옹주의 지참금을 노리고 결혼했나?
당시 일본에서는 이왕가가 천황 다음으로 재산이 많다는 소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소 타케유키가 결혼으로 경제적 이익을 누렸을 가능성은 충분한 것
- 일본이 덕혜옹주를 일본인과 정략 결혼시킨 의도는?
그것이 미스터리로 덕혜옹주가 결혼한 이후 아이를 낳고 언론에서 완전히 사라지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 언론에서 사라진 덕혜옹주?
결혼 이후 6월에 대마도 방문을 발표했던 덕혜옹주 부부, 그런데 이틀 전에 갑자기 10월로 미뤄지고 대마도 방문 중 덕혜옹주가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덕혜부인이 느닷없이 자리를 함께하였다. 인사를 드렸지만 한 마디 말도 없이 답례만 할 뿐, 그리고 끊임없이 소리를 내서 웃기를 몇 번이나 했던가? 정말 병적인 거동이었다.” <히라야마 타메타로의 기록> 기록에서도 확연히 느껴지는 덕혜옹주의 이상한 행동
〇 현대 정신의학으로 본 덕혜옹주 <주연호,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 역사 속의 인물 덕혜옹주, 진단 가능한가?
과거 인물을 진료기록이 아닌 주위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기술한 기록을 통해서 진단을 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겠으나 덕혜옹주의 경우는 이방자 여사 등 주변 인물의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여 추정이 가능한 것으로 이방자 여사의 기록에 따르면 10대 후반에 신경쇠약 징후를 보인 덕혜옹주 “덕혜님은 다소 신경쇠약 징후가 있어서 학교 친구들로부터 들은 말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여···” <이방자, 흘러가는 대로>
- 결국 의사에게 왕진을 부탁해 조발성 치매 진단을 받은 덕혜옹주, 일반적으로 조발성 치매라고 하면 치매의 일종이라 생각을 하지만, 조발성 치매는 노인성치매와 전혀 다른 질환으로 후기 청소년기 혹은 초기 성년기에 발병하여 지속적·만성적으로 진행되다 치매처럼 황폐화 되는 정신 기능 장애로 요즘 진단명은 조현병
- 조현병의 증상은?
대표적인 증상으로 피해망상·환청·와해된 언어·정신적 둔감 등으로 보온병을 들고 다닌다거나 놀림을 당했다고 생각했다는 기록들이 사실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덕혜옹주가 보였던 다른 증상들을 보면 일본 학습원 시절부터 피해망상에 시달린 듯하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든지 혼자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환청에 반응한 행동으로 보이고, 또한 음성증상(Negative Symptoms)이라고 해서 의욕상실·무언증·감정이 무뎌짐·자폐증·주의력 결핍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데, 여러 가지 기록들로 보아 덕혜옹주는 일본에서 조현병이 발생한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
- 조현병에 걸린 덕혜옹주가 결혼은 어떻게?
결혼 무렵 “1931년을 맞아 덕혜옹주는 많이 안정되었으며 식사도 잘하시고 조금은 조리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기에 소백작과 결혼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방자, 흘러가는 대로> 조금은 조리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록의 뜻은 옹주의 병이 지속되고 있었으며 결혼 당시 일시적으로 호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현병은 발병 이후 증세가 좋았다 나쁨을 반복하여 진행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급격히 악화되기도 하는 것
- 결혼 이후의 증상은?
결혼으로 인한 사회생활이 덕혜옹주에게는 매우 버거웠을 것, 혼자서만 생활하던 사람이 남편의 가족·친지 등 급격히 확장된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증상이 심해졌을 듯
- 요즘에는 치료가 가능한 조현병, 1930년대 당시 치료법은?
조현병 치료에 쓰이는 항정신병 약물은 1950년대에 개발되고 1930년대에는 사회적 낙인의 대상이었던 정신질환으로 환자의 가족들은 발병 사실을 숨기는 것만이 최선이었던 시대로 일국의 공주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부정적인 사회분위기와 의료수준의 미비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여 1989년 사망할 때까지도 계속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〇 마음의 병을 앓은 덕혜옹주
- 결국은 온전한 정신으로는 그 시대를 살아갈 수 없는 덕혜옹주가 아니었을까(?) 일본 황실 입적부터 결혼까지 덕혜옹주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결정된 비운의 삶, 주권을 잃은 나라의 옹주가 현실에 맞서는 단 하나의 선택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었을까(?)
- 남편 소 타케유키가 덕혜옹주를 학대했는가?
덕혜옹주의 특집 드라마에서는 남편이 아주 포악한 사람으로 등장하는데 사실이었을까? 요즘에는 SNS에 자신의 일상생활을 올리듯 당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썼던 일기, 하지만 어떤 종류의 일기도 남기지 않은 덕혜옹주의 남편 소 타케유키, 오히려 하인의 기록에는 “때때로 지압 마사지를 하는 나이 많은 사람이 왔습니다. 그렇지만 의사 선생님 같은 사람은 온 적이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은 저 병이 정말 지압으로 나을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소백작가 하인의 기록>
- 정략 결혼한 아내가 정신까지 온전치 않으니 방치했던 것이 아닐까(?) 방치도 엄연한 학대인데··· 물론 덕혜옹주 남편의 무관심·방치가 학대(?)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중요한 것은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짐작이 가능한 것, 덕혜옹주 남편의 태도를 추측해 볼 수 있는 사례로 예컨대 ①덕혜옹주가 딸을 낳았을 때, 이름을 정혜(正惠)라고 짓는데 덕혜의 이름에서 따왔을 것으로 추측되고 ② 딸 정혜를 직접 그린 그림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딸을 사랑했다는 것 ③ 조선 황실의 행사에 딸 정혜와 함께 꾸준히 참석했다는 것, 이러한 사정을 미루어 보아 덕혜옹주를 학대하지는 않았을 듯
-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 입원 시킨 남편의 의도는?
결혼하자마자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고 정신병원 입원은 1945년 이후, 소 타케유키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도 2차 세계대전에서는 패전국으로 귀족제도의 폐지로 소 타케유키 백작도 신분이 박탈되면서 구 귀족들에게 붙여진 무거운 재산세로 인해 재산처분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집안일을 돌보던 도우미들도 거의 내보내야 했던 상황에서 아픈 덕혜옹주를 돌보기엔 생업·육아·기타 여러 모로 힘겨웠을 것, 오히려 남편이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킨 것은 사춘기에 접어든 딸을 보호하기 위해서인 아버지로서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 일반적으로 소 타케유키가 일본인이 · 조선의 마지막 황녀를 빼앗아간 사람이라는 것과 결혼도 강제 정략결혼 등 이러한 것들이 복합해서 덕혜옹주 남편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이 지속되었던 상황에서 덕혜옹주 정신병원 입원 소식 역시 남편의 학대로 받아졌을 듯, 결국 1955년 영친왕과의 합의로 덕혜옹주와 이혼한 소 타케유키, 비판적인 여론은 이혼하자마자 소 타케유키가 재혼하게 되는 것 때문일 수도···
- 소 타케유키에게 덕혜옹주란 어떤 존재였을까?
일기를 쓰지 않았던 소 타케유키, 반면 시(詩)를 남기는데 제목은 <사미시라> 부제는 환상 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혼(魂)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 하룻밤도 침실로 들이지 않고 꽃잎 같은 입술도 훔치지 않지만 아내라고 부를 것을 내게 허락해다오! 나이먹지 않고 언제나 어린 아름다운 눈썹의 소녀여!” 덕혜옹주를 떠올리게 하는 소 타케유키의 시(詩), 아픈 부인이지만 덕혜옹주에 대한 인간적인 안쓰러움이 느껴지는 시(詩)
- 딸 정혜는 어떻게 됐나?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진학하여 대학 때 만난 영어교사와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사는 듯 했던 덕혜옹주의 딸 정혜, 그러나 결혼 이듬해인 1956년 8월 자살(自殺)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일본의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어 일본 경찰이 수색을 했지만 때마침 찾아온 태풍으로 인해 끝내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던 것.
〇 덕혜옹주의 귀향
- 덕혜옹주는 1962년, 38년 만에 드디어 고국 땅을 밟게 되어 낙선재의 상궁들과 친척들이 공항으로 마중 나오고 어릴 적 유모였던 상궁이 큰절을 올리면서 반겼지만 덕혜옹주는 아무 것도 알아보지 못한다.
- 어떻게 귀국할 수 있었나?
해방 이후에는 일본의 마츠자와 정신병원에서 지내던 덕혜옹주, 그리고 1950년대 덕혜옹주를 찾아간 김을한 기자, 당시 이승만 정부는 조선황실에 대한 흔적을 지우려는 성향이 강해 귀국이 순조롭지 않았고, 1962년에 <국가재건최고회의>에 건의해서 성사된 귀국, 해방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에 돌아오는 것마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덕혜옹주의 운명
※ 김을한(1906~1992) : 덕혜옹주와 혼담이 오갔던 김장한의 형으로 덕혜옹주의 정신병원 투병 기사를 써서 한국에 알림
-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것은 덕혜옹주 귀국 후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낙선재를 찾아온 소 타케유키, 덕혜옹주와 이혼하자마자 재혼을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지만 덕혜옹주를 돌보던 관계자들이 만남을 거부하며 문전박대, 남편을 만나는 것이 아픈 덕혜옹주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던 것
- 좋든 싫든 부부의 인연으로 격랑의 시기를 함께 한 두 사람, 어떤 의미에서든 한번쯤 보고 싶었을 것이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만나지 못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을 수도··· <피천득의 수필 인연> “그리워하는 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말년의 괴로움을 확인하는 것보다 지나간 세월을 가슴에 묻어 두는 것이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낫지 않았겠는가?
- 귀국한 이후 27년 가까이 회복하지 못한 병세, 당시 보필하던 궁녀들의 기록 “다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손뼉을 치시며 ‘마사에!’ ‘마사에!’(딸 정혜의 일본 이름)를 외치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김명길, 낙선재 주변>
- 덕혜옹주가 말년에 제 정신이 들었을 때 낙서처럼 남긴 글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삐뚤삐뚤하게 꾹꾹 눌러 쓴 글씨체로 권력의 소용돌이가 지난 후 평온한 삶을 살았던 경혜공주나 정명공주와는 달리 마지막 격랑까지 빠져 나오지 못한 덕혜옹주
- 최고의 권력자인 왕의 딸임에도 망국이라는 격랑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았는데 왕의 딸조차 되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 망국의 혼돈 속에서 얼마나 큰 아픔을 겪었을까(?) 나라가 지켜주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고 영혼을 앓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미친 세상이 다시는 오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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