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王座)의 게임, 견훤 VS 왕건
〇 견훤 VS 왕건
- 10세기 혼란의 후삼국시대가 도래하여 신라는 점점 쇠퇴하고 남쪽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북쪽에는 신흥강자 왕건이 삼한 통일의 야망을 품고 숙명의 라이벌전을 펼친다! 후삼국의 새 주인을 가리는 왕좌(王座)의 게임, 과연 최후의 승자는?
- 후백제 견훤은 완산주(전주), 고려의 왕건은 송악(개성)에서 천년의 신라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 천여 년 전에 양김시대에 버금가는 세기의 대결, 당시 견훤과 왕건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큰 전투를 두 번이나 할 정도로 본격적인 대립을 했고 후에 이 두 사람의 승자가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〇 두 사람의 이력서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후백제의 견훤은 경북 상주 가은현 출신, 아버지 아자개는 농부출신으로 가문을 일으켜 호족이 됐고 특기는 창 베고 자기, 특징은 지렁이 아들 · 호랑이 젖을 먹고 성장했고 백제의 부활을 주장하고 지렁이 아들이라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수록된 견훤의 탄생설화로 밤마다 처녀의 꿈속에 나타나는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 처녀는 사내의 옷에 실을 꿴 바늘을 꼽아두고 이튿날 실을 따라가 보니 바늘에 꼽힌 큰 지렁이가 쓰러져 있었고 그 처녀가 낳은 아이가 견훤이라는 것
- 탄생설화의 단골손님 용·알·구렁이인데 지렁이라니?
옛 사람들에게는 지렁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에 초점을 두고 이런 이미지를 견훤에게 붙인 것으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후백제의 왕이 되기까지 수많은 역경을 극복해낸 힘을 지렁이의 자생력에 비유한 것으로 지렁이는 미물에 불과하지만 한자어로는 지룡(地龍) · 토룡(土龍)으로 용(龍)의 한 종류로 결코 미미한 존재만은 아닌 것
- 또한 특징에 창을 베고 잦다는 것은?
이는 하급부사인 병졸(兵卒)에 가깝다는 얘긴데, 하급부사에서 비장(裨將)인 부장수급으로 승진하고 결국 후백제 왕이 된 견훤의 발자취 ① 경북 상주 출생 ② 경주에서 군 입대 ③ 서남해안 방수군(防守軍)으로 활동하고 세력을 키워 무진주(광주) · 완산주(전주)쪽으로 북상하면서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 지역민들의 백제 계승의식을 이용한 것
- 왕건은 송악(개성)출신으로 아버지 용건은 송악 대표 호족, 왕건은 궁예의 부하에서 정변(政變)으로 왕이 되면서 고구려의 부활을 주장, <고려사>에는 용왕의 딸과 결혼한 왕건의 조부(祖父) 작제건, 아버지 용건도 용의 후손이며 왕건도 당연히 용의 후손으로 고대국가에서는 용 설화를 통해 신성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
- 고려 건국 후 약 100여년이 지날 즈음인 고려 의종 때 김관의가 편찬한 <편년통록>에는 왕건 관련 기록에 해상(海上) · 용왕(龍王) 등 바다에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 집안이 개성의 예성강 유역을 중심으로 중국 산둥반도를 왕래하면서 무역활동을 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 이 시기 남쪽에서는 장보고가 큰 세력을 이끌고 있었던 시기, 그렇다면 통일신라시대에 남쪽에 장보고가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것과 별개로 독립된 세력으로 왕건 가문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
- 호족이란?
지역 유지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지만 이것이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은 신라 말 왕실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민란 · 도적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했던 지역민들, 이때 지방의 촌주를 중심으로 지역민 보호의 기치 아래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 호족으로 이들은 출신도 다양해서 촌주(村主)·상인(商人)·도적(盜賊)·농민(農民) 등 다양한 세력들이 호족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
〇 공산성 전투, 견훤의 선점(先占)
- <KBS드라마 태조 왕건> 900년 후백제의 왕이 된 견훤은 나당연합에 대한 반(反) 신라정책을 표방한 반면, 고려 왕건은 918년 왕으로 즉위하고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화친을 맺고 친(親) 신라정책을 내세운다.
- 927년 9월 포석정, 신라와 고려의 화친을 끊기 위해 신라를 급습한 후백제, 급기야 견훤의 핍박 속에 자결한 신라의 경애왕, 그리고 후백제의 꼭두각시가 될 새로운 왕으로 경순왕을 내세운 견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왕건은 신라를 구하기 위해 오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나서게 되고 공산성에서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이지만 후백제군의 맹공에 포위당한 고려군, 치열한 전투 속에 신숭겸·김락 장군이 전사하면서 고려군은 대패하고 왕건은 겨우 도망쳐 목숨을 구하게 된다.
- 공산성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왕건?
공산성은 현재 대구의 팔공산이고 신숭겸·김락 장군의 희생으로 왕건은 겨우 도망치는데, 이 전투는 왕건이 즉위한지 10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벌인 전투로 후백제 견훤에게 밀리는 상황! “장군 신숭겸은 얼굴이 왕을 닮았으므로 왕의 수레를 타고···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미수기언>
- 현존하는 공산성 전투와 관련된 지명 ① 왕건의 군대가 싸움에서 지고 흩어졌다는 고개라 해서 파군재 ② 도망친 왕건이 사라진 곳이라 해서 실왕리(시랑리) ③ 왕건이 이곳에 와서 비로소 마음을 놓은 곳이라 해서 안심동
- 당시 후백제의 군사력?
당시의 군사력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뒷날 견훤이 “병사가 북군보다 배나 많은 데도 오히려 불리하니···” <삼국유사> 견훤이 후회스런 회고를 한 것을 보면 후백제가 면적은 좁았지만 군사력은 고려보다 우세한 듯하고, 왕건의 입장에서는 궁예의 나라를 정변으로 획득했지만 아직 반란 · 민심수습 등 체제정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견훤과 힘든 전쟁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 정치 경력도 견훤이 훨씬 선배로 견훤은 왕건이 모셨던 궁예와 동급으로 한 세대 아래이고 건국년도를 보더라도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공식선언하고 왕건은 918년에 고려를 건국하여 왕건에게는 다소 무모했던 공산성 전투
〇 견훤 VS 왕건, 선거 공약 대결
- <견훤의 선거공약> 못살겠다. 갈아 엎어보자!
① 의자왕의 원한, 신라에 복수
② 영토 확장 · 국방강화
③ 세계 속의 백제, 외교 강국
④ 신(新) 서남해양 시대, “견훤이··· 무리를 불러 모으니 가는 곳마다 호응하여 한 달 만에 오천 명에 달했다.” <삼국사기> 망해가는 신라를 갈아엎고 새 나라를 세우려 한 의지는 높이 평가되고, 신(新) 서남해양 시대는 나주를 중심으로 한 서남해안, 이 지역은 궁예시절 왕건의 수군이 점령했던 지역, 따라서 견훤은 북쪽의 궁예·왕건과 대결하면서 배후에 왕건의 세력을 두고 있던 셈
- 견훤은 주변국과의 외교로 후백제가 한반도의 대표이길 희망하고 국제적인 공인을 받으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주지역의 고려세력이 방해를 했던 것이어서 견훤은 왕건이 점령하고 있는 그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신(新) 서남해양시대를 부르짖었던 것
- 공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견훤은 자신감이 급상승하여 왕건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목적하는 바는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어놓고··· 말에게 대동강 물을 먹이는 것···” <삼국사기> 요즈음의 말로는 심리전을 펼친 것으로 선거전에서의 실패요인은 섣부른 판세 낙관으로 또 다른 세력들이 결집을 해서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
- <왕건의 선거 공약> 호족이 살아야 나라 경제가 산다!
① 친(親) 신라정책
② 민생안정 · 세금감면
③ 귀부 호족 우대
④ 중국으로부터 고려국 인정, 공약의 특징은 경제 쪽으로 요즈음의 친(親) 재벌정책(?)
당시의 호족은 요즈음의 재벌이 아닌 신라 하대의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신흥 세력! 왕건은 즉위하고 34일 만에 신하들을 모아놓고 백성들이 세금이 너무 과도해 살 수 없다면서 기존 세금의 1/3로 경감하고 고려시대 내내 최초 조세 수취율 1/10로 고정되는 우리 역사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고 이는 의미 있는 진전, 기록에도 “마침내 민간에 3년 동안의 조세·부역을 감면하였다.” <고려사절요>
- 견훤의 조세감면 정책?
조세감면에 대한 정책을 시행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조세 수취율 1/10은 유교 정치이념에 대한 이해가 있었는가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왕건의 경우에는 도당(渡唐) 유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한 듯하고 견훤에게는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〇 후백제 견훤의 아버지, 고려로 간 까닭은?
- 918년 고려로 한 호족이 귀부해왔는데 그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 이 소식을 들은 견훤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데, 갑작스런 아자개의 고려 귀부, 대체 무슨 일이? “상주 반란군의 우두머리 아자개가 사신을 보내어 귀부해왔다.” <고려사>
- 상주지역은 고려가 남진했을 때와 후백제가 동진했을 때의 전략적 요충지로 이 지역을 누가 차지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로 그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아자개를 왕건이 먼저 공격해서 항복을 받아낸 것이 아니라 귀부의 형태로 받아들인 것에 대한 정치적 의미는 매우 큰 것
- 호족이 귀부할 경우에는 그를 따르는 군사·재산·지역민들도 함께 이동하는 것으로 상주지역을 통째로 빼앗긴 것이나 마찬가지, 한 지역을 이기면 그 지역의 대의원을 모두 가져가는 미국의 선거판과 유사한 것, 당시 아자개 뿐만 아니라 지역마다 독립 세력으로 성장한 호족들을 견훤 VS 왕건이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서로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는 것
- 선거의 중간 상황, 견훤 VS 왕건
공산성 전투 이후 후백제는 나주 서남해안까지 차지하면서 견훤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귀부를 했지만, 결국 선거의 최대 승부처인 신라 주변 지역의 호족들에 대한 민심을 누가 얻느냐가 관건 <견훤과 왕건의 공약 평가> 왕건의 신라식 관등 · 지명을 일부 허용한 것과 귀부 호족들에게 재물 · 벼슬 등을 하사하여 귀부 호족 우대에 감명을 받아 안동지역의 호족들은 왕건의 공약에 더 호감을 갖고···
〇 고창성 전투, 고려왕건의 반격
- 후백제 견훤은 전쟁을 통해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930년 고창성 전투에서 고려군과 맞서고 “견훤이 고창군 밑에 주둔해 왕건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8천여 명이 전사했다.” <삼국사기> 고려군 승리의 배경에는 안동 호족들의 협조가 있었던 것으로 이후 신라를 방문한 왕건은 선물 등을 베풀며 신라로부터 호의를 얻어내는데, 삼한일통을 향한 견훤 VS 왕건의 대결에서 과연 최후의 승자는?
- 고창성 전투의 결과?
전투 결과 신라 동쪽 110개의 성(城)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여 고려의 압승으로 판세를 뒤엎은 고창성 전투, 이 당시 왕건과 견훤의 치열한 전투에서 유래된 안동지역의 민속놀이인 차전놀이는 지금도 유명
※ 안동차전놀이 : 고창성 전투 때 사람들이 견훤을 낙동강으로 밀어 넣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고 팔짱을 낀 채 어깨로만 상대편을 밀어내는 특징
- 호족들이 왕건을 도운 이유?
가장 큰 선물은 호족 세력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왕건은 귀부해 오는 호족들의 독자 세력을 인정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는데 <중폐비사(重幣卑辭)> 호족들에게 후한 폐백을 주며 자신을 낮추는 정책을 펼치면서 호족들을 동맹의 관계로 받아들이겠다는 것
- 이와 비교할 때 견훤 역시 호족 정책을 시행하지만 포용보다는 호족을 지배하려는 속성이 왕건보다 강한 편으로 여기서 왕건과 견훤의 차이가 있는 것, 이즈음인 926년 발해의 멸망으로 많은 유민들이 고려로 귀부하는데 그들을 포용하다 보니 왕건에 대한 우호적인 소문이 돌았던 것
〇 견훤의 고려 귀부, 대체 왜?
- <후백제 견훤의 중대발표> 고려에 귀부하겠다는 것! 장남 신검이 아닌 넷째 아들 금강을 왕위계승자로 책봉하자 차기 후백제 왕위를 둘러싼 내분이 원인으로 장남 신검에 의해 왕위에서 내려온 견훤, 귀부라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만 배웠는데 오늘 날로 치면 대권 후보자가 기권하면서 상대 당에 입당한 꼴~
- 장남 신검이 아닌 넷째 아들 금강을 왕위계승자로 책봉?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도 많아서 견훤이 특히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고 싶어 했다.” <고려사> 견훤의 장남 신검의 외가는 광주지역 호족가문이고 넷째 아들 금강의 외가는 전주지역 호족가문으로 후백제 내분의 배경에는 광주 VS 전주 외척 간의 세력 다툼
- 조선의 태조(太祖)도 첫째 부인 신의왕후는 함경도의 시골 세력가의 딸로 후계자 선택에 있어서도 신의왕후 소생이 아닌 신덕왕후의 소생인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는데 지금 방석이 금강과 같은 역할이라면 이방원은 신검과 같은 입장
- 어쨌든 견훤이 귀부하게 되면서 후백제뿐만 아니라 신라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때까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신라가 견훤이 귀부하는 것을 보고 뒤이어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게 되는 것
- 고려에 귀부한 후백제 견훤 “견훤이 오자 상보(尙父)라고 부르고 남궁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삼국사기> 극진한 환대 속에 고려에 안착한 견훤은 이후 왕건에게 “내가 고려로 온 것은 나의 말년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놓은 못된 자식 놈들을 벌하려는 것” 이라고 속내를 털어 놓는다
- 결국 왕건과 함께 후백제 공격에 나선 견훤, 고려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후백제, 결국 신검의 항복으로 936년 마침내 고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
〇 후백제 멸망, 왕건의 후삼국 통일
- “늙은 신하가 전하에게 투신한 이유는 전하의 위엄을 빌려서 반역한 자식을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 후백제가 망하면서 왕건의 후삼국 통일시대가 개막되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자식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나라의 멸망을 택한 견훤?? 애틋한 부자 사이가 왕실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는 듯···
- 얼마나 원통했으면 신검이 항복한 이후에 화병으로 죽게 되는데 “견훤은 울화가 치밀어서 등창이 났다. 결국 며칠 만에··· 죽으니 그의 나이 70세였다.” <삼국유사>
- 견훤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고려에 귀부한 아버지 아자개의 배신과 반역을 한 아들 신검으로 아주 불행한 사람, 그런데 개인적인 불행과 국왕으로서의 처신은 별개의 문제! 견훤이 복수심에서 후백제를 없애겠다고 한 것은 그때까지도 후백제라는 국가가 탄탄하지 못했음의 반증
〇 견훤 VS 왕건, 승패 요인 분석
- 왕건은 호족 때문에 성공했고 견훤은 손쉬운 성공 때문에 실패했다! 왕건은 호족들의 협력을 얻었기 때문에 성공을 했고 또 자신도 호족, 그러나 견훤은 신라에 대한 복수를 내세워 후백제 건국에 성공한 견훤, 여기까지는 쉽게 성공할 수 있었지만 반(反) 신라 감정을 가지고는 절대로 후삼국을 통일할 수 없었던 것
- 왕건은 덧셈의 정치로 성공했고 견훤은 뺄셈의 정치로 실패했다! 왕건의 덧셈 정치인 포용과 통합 VS 견훤의 뺄셈 정치인 배척과 독단, 결국 그것이 두 사람의 큰 차이였고 왕건이 최후의 승자가 된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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