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판 왕자의 난 - 왕건의 아들들, 왕위를 다투다
〇 개요
- 고려 제2대 왕 혜종은 즉위 2년 만에 병들어 죽게 되고 뒤를 이은 정종마저 즉위 4년 만에 죽게 된다. 이들의 죽음 뒤엔 형제들의 치열한 왕위 다툼이 숨겨져 있는데 과연 그 실체는?!
- 945년 9월 혜종이 승하하고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아들 흥화군이 아닌 혜종의 이복동생, 정식 왕위계승자가 아닌 이복동생이 왕위에 오른 이유는? 29명의 부인과 34명의 자녀를 둔 태조 왕건의 사후, 예견된 왕위쟁탈전
〇 태조 왕건의 아들들
- 태조 왕건의 제2비 나주호족 출신 장화왕후 오씨, 장화왕후에게 후사를 볼 생각이 없었던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의 돗자리 근성으로 태어난 혜종 “혜종은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두고 ‘주름진 임금’이라 불렀다.” <고려사 열전 장화왕후 오씨> & “전라도 나주에 소장한 혜종의 진영 및 소상··· 모두 개성 유후사로 옮겨서 각 능 곁에 묻게 하소서.” <세종실록 1428년 8월 1일> 하지만 현재는 전하지 않는 혜종의 초상화
- 혜종의 돗자리 주름 설은 어디를 보나 창작이고 명백한 음해로 사실여부보다 이야기가 나온 배경이 중요한데, 혜종 즉위 후 왕위 쟁탈전으로 혼란해진 고려 초기의 정치상황으로 이 때 혜종의 반대파에서 혜종은 태조가 원한 아들이 아니다 또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들이라 하여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을 해야 할 것
- 혜종에 대한 유언비어가 퍼질 수 있었던 이유?
어머니 장화왕후 오씨가 나주 호족 출신의 딸이었는데 호족이긴 했지만 다른 호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세(家勢)가 한미했기 때문에 정윤(正胤) 책봉 당시 어려움을 겪었던 혜종, 그런데 왕건이 죽고 나자 왕후 가문인 충주 유씨 · 황주 황보씨 · 정주 유씨가 결탁하여 혜종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 태조 왕건의 제3비인 충주호족 신명왕후 유씨는 자식을 많이 낳아 5남2녀의 다산파로 신명왕후의 아들 왕요·왕소 형제는 연합해서 혜종의 왕위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것, 고려시대 왕후들의 생몰년(生沒年)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는 것이고 왕건과의 혼인 시기도 밝혀지지 않는 것
〇 흔들리는 왕위
- 혜종의 아들 흥화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
원칙적으로 보면 당연히 장자가 세습하는 것이 원칙인데 “왕위 계승은 맏아들로 함이 상례이지만 만일 맏아들이 불초할 때에는 둘째 아들에게··· 둘째 아들이 그리할 때에는 그 형제 중에서 중망을 받는 자에게 대통을 잇게 하라.” <고려사 세가 태조 훈요 3조>
- <불초(不肖)>는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뜻으로 못나고 어리석음을 이르는 말로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여 불초의 의미로 결국 왕위에 오르지 못한 흥화군
- 어느 왕조든 나라를 세우는 것도 어렵지만 수성(守城)은 더욱 어려운 것으로 아직 왕실이 안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장자계승원칙이 정립되지 않은 고려 초기, 또한 초창기의 혼란을 안정시킬 능력 있는 국왕이 필요한 것으로 왕위를 두고 서로 다투게 된 왕건의 아들들 “세 임금이 서로 왕위를 계승한 초기에는··· 개경·서경의 문무 관리들이 절반 이상이 이미 살상되었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 왕건 사후의 혼란스러웠던 정치상황을 말해주는 것
- <일치일란(一致一亂)>은 성인(聖人)이 나타나 태평성대가 이어졌다가 폭군이 나타나 어지러워진다는 맹자의 역사관, 그래도 왕위를 노리는 것은 목숨을 건 도박행위와 같은 것으로 왕요·왕소 형제가 왕위를 노릴 수 있었던 배경?
〇 혜종 VS 왕요·왕소의 고려 왕위쟁탈 대국
- 고려 제2대 국왕 혜종은 32세의 돗자리 근성으로 왕위정통의 힘을 보여 주겠다 VS 고려 태자 왕요는 21세로 고려에 필요한 젊은 피를 수혈하겠다는 각오, 혜종의 첫 수는 외가의 세력으로 나주는 왕건이 후백제와 6년간의 전투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곳, 왕요의 반격은 외가인 충주로 통일신라시대 5소경 중 중원경이 위치한 교통과 정치의 요충지
- 혜종의 두 번째 수는 진주(진천)로 진주는 혜종의 처가, 왕요의 두 번째 수는 승주(순천)로 왕요의 처가, 혜종의 신의 한 수는 경기도 광주로 혜종의 또 다른 처가로 태조 왕건에게 2명 혜종에게 1명의 딸을 각각 시집보낸 광주 호족 왕규의 출신지, 왕요의 반격은 동생 왕소의 처외가 황주로 강력한 호족 세력이었던 황주 황보씨와 충주 유씨로 전세를 역전시킨 왕요·왕소 형제, 혜종은 초읽기에 들어가고 돌을 던진 혜종의 불계패!? 왕요·왕소 형제의 남은 수는? 경주는 누이 낙랑공주가 시집간 곳, 그리고 평주의 박수문·박수경 호족과 평양의 왕식렴도 왕요·왕소 형제를 지지하고 있어 승세(勝勢)를 굳힌다.
〇 왕요·왕소 형제와 호족들의 결탁
- 많은 세력이 왕요·왕소 형제를 지지한 이유?
5남2녀의 자식을 둔 신명왕후 유씨, 형제들끼리 힘을 모은 왕요·왕소 형제이다 보니 상대가 되자 않은 것으로 조선의 1차 왕자의 난 때 이복동생 방석을 제거하기 위해 연합했던 이방원의 친형제들과 같은 케이스로 이복형제 VS 동복형제의 왕위쟁탈 양상이 서로 닮은 고려와 조선
-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도 충주 유씨네가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사돈들과 일가친척을 불러들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왕요·왕소 형제의 승리 요인은 돌의 수(數)도 많지만 돌의 위치도 좋았던 것으로 ① 한반도의 가운데에 위치한 외가 충주, 후삼국 전쟁 당시 충주호족들이 태조 왕건을 도와 세력을 확장 ② 대동강 유역 서경·황주 일대는 통일신라시대에는 국경방어를 위해 최정예군대가 주둔했던 지역으로 서경일대의 세력을 흡수하며 키운 왕건의 사촌 동생 왕식렴의 여러 조카들 가운데 왕요·왕소를 지지하며 그 당시 고려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인 왕후가문과 서경세력이 왕요·왕소를 지지하면서 국왕인 혜종보다 세력이 강해진 것
- 혜종은 동생들이 왕위를 노리는 걸 몰랐을까?
왕요·왕소의 모반을 혜종에게 알린 혜종의 장인 왕규 “왕규는 왕의 동생 왕요와 왕소가 모반한다고 참소했으나 혜종은 무고임을 알고서 동생들에게 더욱 두터운 은혜를 베풀었다.” <고려사 열전 왕규> 심지어 자신의 맏딸을 왕소에게 시집을 보내기까지 하는데, 이것은 고려 왕실에서 최초로 이뤄진 족내혼이 되는 것
※ 족내혼 : 같은 씨족·종족·계급 안에서만 배우자를 구하는 혼인 형식
- 혜종은 착하고 순수한 사람(?) 동생들이 모반할리 없다고 믿었던 듯(?) VS 혜종은 22년 동안 왕위계승자로 궁궐생활을 한 인물로 왕요·왕소 형제의 세력이 너무 컸기 때문에 유화책을 쓴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는 것은 아닌지···
- 혜종이 그 딸을 왕소에게 시집보냈으니 아우이면서 사위로 아우는 모반을 해도 사위는 모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 VS 왕소를 자기편으로 포섭해서 왕요와 왕소의 틈이 벌어지게 하려는 작전은 아니었을까(?!)
- <드라마 제국의 아침> 945년 혜종의 후견인이었던 왕규는 다른 뜻을 품고 난(亂)을 일으켜 새로운 왕을 세우려하는데, 왕규의 계획을 눈치 챈 왕요·왕소 형제는 반란을 막을 방법으로 당숙 왕식렴의 도움을 청하고 서경에서 군사를 이끌고 온 왕식렴의 저지로 무산된 왕규의 계획, 그리고 왕규와 그의 부하 300여 명은 역모죄로 처형을 당하게 된다.
〇 혜종과 왕규의 갈등, <왕규의 난>의 진실
- 한때 혜종의 장인으로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왕규가 혜종에게서 등을 돌린 까닭은?
<고려사 · 고려사절요>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왕규의 혜종 암살 시도 “왕규는··· 자신의 부하를 왕의 침소로 잠입시켜 시해하려고 했다. 마침 혜종이 잠에서 깨어 한주먹으로 쳐 죽인 후···” <고려사 열전 왕규>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혜종의 침소로 자객을 보낸 왕규, 그리고 배후가 왕규란 것을 알고도 처벌하지 않은 혜종
- 많은 의혹이 제기되는 사건으로 사실 자객을 보낸 배후는 왕요·왕소 형제로 왕규가 누명을 쓴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음 VS 왕규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도 조작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 왕규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시점에 딱 맞춰서 평양에 있는 왕식렴이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개경에서 서경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도 140Km 되는 거리, 반란 소식을 듣고 대응하기엔 너무 먼 거리이고 실제로 왕규가 난을 일으켰다는 정황은 확인되지 않는다.
- 하지만 <왕규의 난>을 진압하며 왕위를 차지한 왕요, 그렇기 때문에 <왕규의 난>은 왕요·왕소 형제가 왕위를 노리고 정적인 왕규를 제거한 왕자의 난일 가능성이 있다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조선시대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실록에는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 등이 끝내 반역을 도모하여 왕자와 충신들을 해치려고 꾀하다가···” <태조실록 1398년 8월 26일> 그래서 정당방위라는 것이지만 군사적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정도전 측, 반란혐의로 제거된 고려의 왕규와 조선의 정도전은 실체는 없지만 역사에는 <왕규의 난>으로 기록된 것으로 정치에서 내세우는 명분이 늘 전부는 아닐 것으로 명분 뒤에 숨겨진 진실을 꿰뚫어 보아야 할 것
- 혜종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 <왕규의 난>이 조작된 것이라면 혜종의 죽음도 자연사가 아닐 듯(?) “(혜종)은 즉위한지 한 해가 지나자마자 갑자기 고질병을 얻어 병석에서 오래토록 세월을 보내니···” <고려사절요 성종 원년> 945년 34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한 혜종, 태조 왕건과 함께 후백제 토벌에 활약했던 25살의 혜종이 갑자기 병에 걸렸다(?)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혜종의 죽음, 반대 세력에게 제거되었을 가능성은(?)
〇 정종의 즉위
- 결국 혜종은 승하하고 <왕규의 난> 진압의 공로로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 왕요가 고려 3대 국왕 정종이 되는 것
- 정종의 즉위를 반대한 세력은 없었나?
사료가 많지 않은 고려 초기, 호족들이 정종의 즉위를 반대한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혜종 대를 거치면서 왕요·왕소를 지지하는 호족세력이 이미 대세를 장악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즉위 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정종 “정종은 임금의 형제로 왕위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노력하여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구했습니다. 때로는 촛불을 밝혀들고 조정의 선비들을 접견하였고 정사에 바빠서 늦게 식사하면서 정사를 듣고 결정하였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한 긍정적 평가는 947년 서경 천도추진으로 술렁이는 민심
- 서경 천도 계획의 차질
<드라마 제국의 아침> 정종은 서경 왕성공사를 위해 백성들을 강제이주 조치를 취하고 밤낮으로 공사를 강행하는데 연장된 공사기간과 무리한 노동에 신음하는 백성들, 뿐만 아니라 노역에 징발돼 농사시기마저 놓친 백성들은 생업마저 위협을 받게 되고 조정에서도 서경 천도 계획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엇갈린 조정, 서경 천도 이대로 추진할 수 있을지···
〇 정종의 서경 사랑
- 정종이 서경으로 천도하려 한 이유?
정종은 서경 천도로 독자적인 힘을 키우려 했던 것, 서경은 통일신라시대에 뚜렷한 호족세력이 없었던 곳으로 왕건도 즉위 3달 만에 왕식렴을 보내 서경을 개발하여 개경에 버금가는 도시를 만들려 한 곳이고 정종의 가장 강력한 지지 세력인 서경의 왕식렴, 정종이 즉위하자마자 “공(왕식렴)이 나를 위해 죽기를 무릅쓰지 않았다면 내(정종)가 어찌 오늘에 이르렀겠는가?” <고려사 열전 왕식렴> 그 정도로 정종에게는 중요한 지지기반이었던 서경
- 정종이 다른 지역이 아닌 서경(평양)을 고집한 이유?
서경이 천도지역으로 선정된 이유는 풍수지리로 당시 가장 좋은 길지(吉地)로 지목된 것이고 태조 왕건도 이를 믿고 훈요십조에 “서경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고 대업을 만세에 전할 땅이니···” <고려사 세가 태조 26년 훈요5조> 풍수지리를 중요하게 여겼던 고려시대
- 또 하나는 왕건이 나라 이름을 지을 때 고구려를 계승한다 하여 고려로 정하면서 고구려의 수도였던 서경(평양)을 고구려의 계승임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것으로 조선시대 한양에서 개경으로 천도하려 했던 조선의 정종, 이들은 묘호도 같은 정종(定宗)으로 천도의 꿈도 같이 꾸게 되는 것
〇 광종의 즉위
- <드라마 제국의 아침> 948년 9월 정종은 신하들과 함께 여진 사신을 접견하는데 갑자기 천둥이 치면서 돌변한 날씨에 궁궐 서쪽에 벼락이 내려친다. 정종은 크게 놀라 그 자리에 쓰러지고 이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회복하지 못한 채 친동생 왕소를 불러 왕위를 물려주고 왕소는 고려 제4대 국왕 광종이 된다.
- 믿기 어려운 정종의 병?
기록에도 “왕(정종)은 불교를 좋아하고 꺼리는 것이 많았다.” <고려사 세가 정종 4년> 왕위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피를 묻힌 정종은 죄책감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 “왕이 의장을 갖춘 다음 불사리를 모시고 걸어서 10리 떨어진 개국사까지 가서 봉안했다. 또 곡식 7만 석을 큰 사원에 바치고··· 불법을 배우는 승려를 격려하였다.” <고려사 세가 정종 원년>
정종의 심리를 엿볼 수 있는 기록으로 이런 것들을 통해 자신의 원죄를 만회해 보려 했던 정종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
- 정종의 즉위 과정과 흡사한 왕소 광종의 즉위, 혹시 정종도 억지로 왕위를 물려준 것이 아닐까(?) 왕 발병 후 동생이 즉위하는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된 형제간의 왕위계승과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우연한 사건은 정종이 승하하기 2달 전에 사망한 왕식렴과 든든한 후원자를 잃고 얼마 후 승하한 정종, 광종의 즉위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는 정황들
- 왕위를 두고 맺은 형제간의 계약(?) 역사적인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며 불과 2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정종과 광종으로 보장받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밀약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
- 정종에게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없었나?
정종에게도 아들 경춘원군이 있었지만 왕건의 훈요십조면 불초의 이유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경춘원군, 정종이 병에 걸려 이득을 본 사람은 동생 왕소(광종)로 혜종의 아들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정종, 그리고 광종도 같은 방식으로 왕위를 노렸을 듯(?), 강한 삼촌 정종(왕요) · 광종(왕소), 조선의 세조(수양대군) VS 유약한 조카 흥화군 · 경춘원군 · 단종(端宗)으로 매우 유사한 현상
- 조선시대 왕자의 난을 주도한 것은 태종 이방원, 고려시대 왕자의 난도 진짜 배후는 광종이 아니었을까(?) 짧게 재위한 고려와 조선의 정종(定宗), 반면 왕권을 확립한 고려 광종과 조선의 태종으로 유사한 왕조가 이어지는 것(?) 아마도 조선의 국왕들은 고려사를 공부했을 듯··· 조선의 태종 이방원도 고려의 광종을 벤치마킹했을까(?) 다른 시기에 비해 특히 부족한 고려 초기의 기록들, 이방원이 증거인멸을 위해 폐기한 것은 아닌지···(?)
〇 정종 VS 광종,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형제
- 왕요 정종과 왕소 광종의 세력분열?
충주 외가와 경주의 누이는 제외하고 광종의 처외가 황주와 평주의 박수문·박수경 형제도 광종의지지 세력으로 바뀌게 되고 태조 왕건의 부인 신주원부인 강씨의 양자로 자란 광종, 따라서 신주(신천)도 광종을 지지 하면서 개경 주변의 유력 세력들이 광종의 지지 세력으로 바뀌어 정치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기도 하고 동지끼리 적이 되기도 하는 것
- 왕요 정종과 왕소 광종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이유?
결정적인 것은 정종의 서경 천도 계획으로 천도를 위해 지나치게 서경세력에 의존하자 서경세력을 제외한 대다수 호족들이 반발하고 왕실 역시 서경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왕소(광종)을 지지하면서 정종과 서경세력을 몰아내고 즉위한 광종, 이후 광종을 중심으로 한 왕권강화정책을 추진하는 흐름이 되는 것
- 짧은 재위의 고려 정종과 닮은꼴의 조선의 정종, 하지만 조선의 정종은 태종을 잘 알았다(?) 정몽주 · 정도전 그리고 이복동생 이방석을 죽인 이방원(태종)이었기에 동생에게 순순히 왕위를 물려준 조선의 정종, 태종이 광종을 벤치마킹 했을 수도 있다는 설이 있는데 조선의 정종이야말로 고려 정종을 잘 참고하고 반면교사까지 삼지 않았나(?)
〇 고려판 왕자의 난 - 태조 왕건, 혼인정책의 그늘
- 혼인정책으로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 하지만 혼인정책으로 벌어진 아들들의 왕위쟁탈전, 어떤 정책이든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으로 왕 때는 최선이었던 정책이 후대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
- 고려 개국 후 첫 번째 위기였던 고려판 왕자의 난, 고려는 건국 이후 국왕과 호족간에 공존 · 타협으로 후삼국을 통일하고 유지가 되는데 후계문제를 둘러싸고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이를 계기로 정치 전면에 나선 호족들로 균형을 잃고 혼란에 빠진 고려 초기의 정치
- 하지만 혜종과 정종의 역사는 불과 6년으로 새로운 나라 고려가 제자리를 찾아 나서기 위한 초기의 진통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될 만한 일로 비로소 광종 즉위 후 고려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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