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29명의 부인을 얻다
〇 태조 왕건과 29명의 부인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10세기 분열과 혼란을 잠재우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 그런 그가 무려 29명의 부인을 거느렸다고 하는데! 태조 왕건 그는 대체 왜 이러한 선택을 했는가?
- <드라마 제국의 아침> 태조 왕건의 임종장면, 마지막 순간을 지키는 수십 명의 여인들이 인상적으로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제1비 신혜왕후 유씨를 시작으로 평생 동안 무려 29번이나 혼인하는데 왕건이 이토록 수많은 여인과 혼인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여인들이 있었기에 고려의 역사는 시작할 수 있었다.
- 드라마에서는 거의 29명이나 되는 왕비들이 도열하듯이 있지만 실제로는 29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고 29명의 부인 중 6명은 왕후 23명은 부인이라고 호칭했는데 아마도 6명의 왕후만 궁궐에서 살았을 것이고 부인 23명은 지방의 친정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
- 태조 왕건은 29명의 여인에게 공평한 사랑을 줬을까?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아랍의 이슬람교 국가에서는 모든 부인에게 공평하라고 코란에서 가르치고 있다고 하며 재산분배는 물론 심지어는 시선이나 시간조차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고 하여 예를 들면 부부동반 여행을 가면 모두 같이 가거나 둘이만 갔을 경우 제2·제3의 부인과도 똑같은 일정과 코스로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
〇 고려 VS 조선, 왕실혼인
- 고려와 조선의 왕실혼인, 어떻게 달랐나?
왕건은 왕비가 6명이지만 조선의 경우 정비는 한 명이고 정비가 승하하거나 폐위될 경우 계비를 들이는 것이고 계비와 정비의 법적 지위는 똑같은 것이고 정비가 살아있을 때 왕의 허전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태종(太宗) 때 마련된 후궁제도, 정비는 무품(無品)으로 내명부의 최고 권력자이고 후궁은 품계가 있고 서열도 있어 정1품 빈 · 종1품 귀인 · 정2품 소의 · 종2품 숙의 · 정3품 소용 · 종3품 숙용 · 정4품 소원 · 종4품 숙원으로 그리고 사후에도 정비 또는 계비의 무덤은 능(陵)으로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은 원(園) 왕을 낳지 못한 후궁의 무덤은 묘(墓)로 지위체계를 달리한다.
- 조선에 비해 단순한 고려 왕실의 혼인제도는 여러 명의 정비를 두는 것을 허용하고 왕후나 부인의 호칭에 관계없이 모두 같은 대우이며 왕의 아들은 모두 태자이고 왕위를 이을 후계자는 정윤(正胤)이라고 불렀는데 국가의 기본인 혼인 제도부터 완전히 다른 고려와 조선
〇 태조 왕건은 영웅호색?
- 자주적 통일을 이룬 영웅 태조 왕건, 영웅호색이라고? 태조 왕건은 진정한 사랑꾼(?) 진정한 사랑꾼은 한 사람에게 헌신해야! 그건 꾼이 아니고··· 진정한 꾼이라면 장인정신을 말하는 것(?) 하지만 고려시대 왕실 혼인을 현대의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일
- 고려사회는 일부다처제?
일부다처제가 아닌 일부일처제였으나 왕실은 예외!! 한 번에 여러 명의 정비를 둘 수가 있었던 것으로 자손 번성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왕실만 예외적으로 여러 명의 정비를 허용했던 것
- 다른 왕들의 부인 수는?
최다 혼인 기록은 태조 왕건으로 고려 임금은 태조 왕건부터 공양왕까지 총 34명으로 왕건을 제외한 고려왕의 평균 부인 수는 3.2명으로 태조 왕건이 독보적인 존재이며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한 명인 것을 보면 고려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왕들의 부인, 삼국시대~조선시대의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부인을 얻은 태조 왕건
〇 태조 왕건 부인들의 출신지
- 황해도 황주를 시작으로·동주(서흥)·신주(신천)·평주(평산)·정주(개풍)·춘주(춘천)·명주(강릉)·광주·충주·진주(진천)·홍주(홍성)·의성부(의성)·해평(구미)·경주·합주(합천)·나주·승주(순천) 등으로 후삼국 통일을 위해 청춘을 바친 태조 왕건의 궤적, 특히 경기도 광주의 원부인 왕씨 · 소광주원부인 왕씨와 동주(서흥)의 소서원부인 김씨 · 대서원부인 김씨는 놀랍게도 친자매로 왕건이 두 딸을 원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것 같고 오히려 두 딸의 아버지가 왕건과의 혼인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
- 첫 번째 혼인 태조 왕건 VS 신혜왕후, <드라마 태조 왕건> 궁예의 휘하 장수 시절, 출정을 위해 정주에 머무르던 왕건은 한 여인에게 첫 눈에 반해 집으로 찾아가고 정주의 호족 천궁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하룻밤을 묵고 그 날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된 두 사람!
- 하지만 왕건은 전쟁터로 떠난 후 소식이 끊기고 여인은 절개를 지키며 홀로 긴 세월을 보내는데 한참 후에 소식을 듣고 궁궐로 불러들이는 왕건, 제1비 신혜왕후 유씨다.
- 송악을 대표하는 해상세력 왕건 VS 송악과 근접한 정주(貞州)를 대표하는 해상세력 신혜왕후의 아버지 천궁, 그래서 왕건이 실제로 909년과 914년에 정주에서 전함을 정비하고 전투를 지휘한 해군 발진기지가 정주 “태조가 천궁의 집에 묵게 되었는데··· 그 집에서 모든 군사를 풍족하게 먹이고···” <고려사열전 신혜왕후 유씨>
- 양가(兩家)의 격이 맞는 것뿐만 아니라 제1비에 걸맞은 여장부 신혜왕후, 궁예를 몰아내기 위해 왕건을 찾아온 장군들 앞에서 왕건이 주저주저하자 거사를 일으키도록 독려한다. “(여러 장수가)태조의 집을 찾아가 궁예를 폐위시킬 것을 의논하면서··· 왕후가 알지 못하게 하려고 뜰에 열린 오이를 따다 달라고 부탁했다. 왕후는 그 의도를 알아채고··· 몰래 휘장 속에 숨었다. 장수들이 태조를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면서 물리침이 매우 심하였는데··· 이때 신혜왕후 유씨가 나타나 ‘이분들의 청을 외면하시면 책임 있는 신료로서의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니 의병을 일으켜 포악한 군주를 폐하고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은 마땅히 장부로서 해야 할 일이니 이 갑옷을 입고 백성들의 여망을 풀어달라고 애원했다.” <고려사열전 신혜왕후 유씨>
- 이때 왕건에게 손수 갑옷을 입혔다고 하는데 남편에게 갑옷을 입힌 또 다른 여인? 세조(世祖)의 왕비 정희왕후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주저하고 있는 사이 왕비가 나타나 갑옷을 입히자 거사를 일으켜 계유정난이 성공한 것으로 태조 왕건과 신혜왕후의 일화를 차용했을 가능성(?)
〇 태조 왕건의 혼인정책
- 태조 왕건이 조강지처를 놔두고 28번이나 더 혼인한 이유는?
왕건이 29명의 부인을 거느린 것은 영웅호색이라기보다는 왕이 된 다음 후삼국 통일을 위한 정치적 전략으로 호족출신 왕건은 전국의 호족과 대등한 위치에서 출발했으며 또한 궁예 휘하의 장수, 이런 사람이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서 견훤과 싸우면서 신라를 의식해야만 했던 상황으로 이때 태조 왕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각 지방의 독립 세력인 호족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으로 믿을 수 있는 호족과 가장 강력한 동맹방법이 혼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어서 전국의 유력한 호족과 결혼함으로써 그 지역의 지지기반을 이끌어 냈던 것
- 호족들은 태조 왕건과 혼인함으로써 훗날 최고의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다봤을 것으로 태조 왕건과 호족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정략결혼, 단순한 영웅호색이 아니라 대의와 전략에 입각한 태조 왕건의 혼인정책, 또한 혼인 시기로 추정할 수 있는 왕건의 치밀함은 전시에는 주로 무장(武將)의 딸과 혼인하고 통일 후에는 신라 왕족의 딸과 혼인하여 정략결혼의 고수(高手)로 태조 왕건의 혼인은 개인사가 아니라 국가정책처럼 치밀한 계산을 했던 것
- 기본적으로 호족연합정권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는 것으로 호족연합체 국가를 중앙집권형으로 바꾸려 한 태조 왕건, 혼인정책과 같은 목적의 또 다른 호족연합정책은 사성제도(賜姓制度)로 유력 호족들에게 왕씨의 성을 하사해 호족들과 가족관계를 형성하는 것
- 왕건의 성씨는?
왕건은 원래는 성이 없고 왕건의 아버지는 용건 그리고 조부는 작제건으로 왕을 성으로 건을 이름으로 분리하여 왕씨 성을 하사하는 것
- 당시 왕건은 왜 성이 없었나?
왕족들과 귀족들만 성을 가지고 있는 후삼국 시대, 삼국시대 왕족의 성은 신라는 김(金)·박(朴)·석(昔), 고구려는 고(高), 백제는 부여씨이고 귀족들의 성은 신라경주지역의 경우 진골→ 6두품 → 5두품이 순차적으로 성을 가지게 됐을 것이지만 왕건 · 궁예 · 견훤은 지방 호족 출신으로 성(姓)이 없었음
- 지방 사람들이 언제부터 성씨를 쓰게 했느냐가 아주 흥미로운 연구인데,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신라 말 ~ 고려 초에 지방 호족들도 성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스스로 성을 만들기도 했지만 대부분 태조 왕건이 성을 하사한 것으로 추정
- 태조 왕건의 부인들 역시 왕비가 된 이후에 성을 하사 받은 것인가?
그럴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 첫 번째 부인인 유씨의 경우 아버지 이름은 천궁이다. 이렇게만 되어있고 두 번째 부인도 오씨이지만 아버지 이름은 다련군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성이 없던 지방 호족들이 왕비를 배출하면서 태조 왕건에게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성씨가 정착된 것이 고려 초 호족 통합을 위한 태조 왕건의 사성정책의 영향
〇 두 번째 혼인, 태조 왕건 VS 장화왕후
- 태조 왕건의 자식들 간에 후계의 다툼은 없었나?
첫 번째 부인 신혜왕후 유씨는 평생 자식을 두지 못했고 두 번째 부인의 아들 이후로 많은 자식들 간에 경쟁이 벌어지는데,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던 제2비 장화왕후 오씨 가문
- 태조 왕건은 왜 제2비 장화왕후와 혼인했나?
태조 왕건과 제2비 장화 왕후와의 러브스토리는 군사를 이끌고 행군을 하던 중 갈증을 느낀 왕건, 순간 나주 금성산 쪽의 상서로운 오색구름을 발견하고 그 쪽으로 가보니 우물가에 빨래를 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어 물 한 모금을 청하자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물을 건네자 사연을 물으니 급히 마시면 체할까 봐서 그랬다는 대답을 하자 여인의 지혜로움에 깊은 인상을 받은 왕건은 여인의 아버지를 찾아가 청혼하고 두 번째 혼인을 한다. 그런데 이 일이 일어나기 몇 일전 여인의 꿈 “왕후가 일찍이 포구의 용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는···” <고려사열전 장화왕후 오씨>
〇 왕건의 첫아들 출생의 비화?
- 첫아이의 출생에 얽힌 은밀한 이야기로 조선 초 편찬된 <고려사>에는 태조 왕건의 큰아들 무의 출생에 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 사람이다. 태조는 장화왕후의 집안이 미천하므로 임신시키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돗자리에 사정했으나 왕후가 즉시 이를 자신의 몸속에 넣었다. 마침내 왕후는 임신하고 아들을 낳았다.” <고려사>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은밀한 이야기로 야사가 아닌 정사의 기록, 조선에 비(比)해 성적으로 개방된 고려이지만 고려시대의 책이 아닌 조선 초에 편찬된 <고려사>는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은 역사서! 때문에 왕건과 장화왕후의 이야기는 사료로써 가치가 있는 것
- 이 은밀한 이야기를 누가, 어떻게 기록했을까?
이것은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라기보다는 그 사건에 대한 소문이 있었다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고려시대 민간에서 그렇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료로서 <고려사>에 기록한 것, 한편으로는 왕건이 한미한 가문출신인 장화왕후와 혼인한 것에 대한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에게 혼인의 이유에 대한 추측이 구전되면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을 것
- <류근 시인의 생각> 태조 왕건의 장자 무의 출생 이야기에는 정치적 마타도어가 담겨있을 것으로 장화왕후에게 장자가 태어난 것은 다른 유력 호족들에게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을 것
※ 마타도어 : 근거 없는 사실을 조작해 상대를 중상모략하는 흑색선전으로 정치권에서 널리 쓰이는 말
- 아마 이야기의 본질은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으로 왕건이 원치 않는 아들을 낳았다는 식으로 알리고 싶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유포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일 수는 없는 것
- 제2비 장화왕후의 가문은?
“장화왕후 오빠는 나주 사람이며 부친은 다련군이다. 대대로 나주에 살았다.” <고려사열전 장화왕후 오씨> 벼슬도 없었던 장화왕후의 아버지 다련군, 하지만 나주는 후백제를 점령하기 위한 배후지역으로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전투를 벌일 경우 나주 토착 세력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 당시는 왕건이 왕이 되기 전(前)이었으니까 당장의 지원을 얻기 위해 장화왕후 오씨와 결합했을 것(?)
〇 태조 왕건의 자녀 34명, 후계자는 누구?
- 다른 부인들은 아들을 낳았나?
29명의 부인 중 출산에 성공한 부인은 14명으로 왕자 25명과 공주 9명을 출산하게 되어 평균 1.2명 꼴, 이중 제3비인 충주의 신명순성왕후 유씨가 5남2녀로 가장 많은데 이들의 사랑이 깊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있지만 충주는 통일신라의 5소경 중 중원경이 위치하기도 했고 당시 후백제 · 신라 · 고려의 삼각지역의 중심지로 전략적 요충지
- 각 지역의 강력한 호족을 외척으로 둔 태조 왕건, 분란을 막기 위한 대책은?
태조 왕건의 유훈으로 신앙 · 사상 · 정책 · 규범 등을 담은 사료 <훈요십조>의 제3조, 적자(赤子)에게 나라를 물려주는 것이 비록 상례이기는 하나, 만약 맏아들이 불초하거든 그 다음 아이에게 물려주고 그 마저 불초하면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에게 중망을 받는 자가 대통을 잇도록 하라
〇 태조 왕건, 후계자를 정하다.
- 921년 고려의 첫 왕위계승자로 정윤(正胤)을 책봉하는데 그 주인공은 태조 왕건의 장자 무, <정윤책봉위원장>에 박술희를 임명하는데 박술희(?~945년)는 호족은 아니지만 궁예 휘하의 무신 출신으로 왕건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고 왕건을 섬기며 훗날 대광의 지위에 오른 인물
- 정윤(正胤) 책봉, 너무 이른 것 아닌가?
정윤의 나이가 10살이고 태조 왕건이 40대 중반이니 오히려 늦은 것(?)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질 호족들 간의 세력다툼을 방지하려는 의도(?) 921년으로 고려가 건국된 직후이고 후삼국을 통일해야 하는 상황인데 쓸데없는 분란을 막아야 하는 것은 사실
- 장자 무를 정윤으로 삼아서 다른 부인들의 반발이 있었을 텐데···
하지만 오히려 태조 왕건은 마음이 담긴 상자를 제2비 장화왕후에게 보내고 “태조가 낡은 상자에 자황포를 담아 오씨(장화왕후)에게 주었다. 오씨가 옷을 박술희에게 보이자···” <고려사열전 박술희>
- 태조 왕건, 황포를 보낸 의도는?
뜻을 전하는 것으로 태조 왕건은 장화왕후의 장남 무를 차기 국왕으로 삼고 싶다는 뜻을 표현한 것으로 그 뜻을 알아챈 박술희는 공식석상에서 무를 정윤으로 책봉하자고 요청하고 태조 왕건은 박술희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장자 무를 정윤으로 책봉하는데 성공하는 것으로 장화왕후의 가문이 한미한 탓에 정윤책봉을 위해 태조 왕건은 다른 호족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
- 이 은밀한 이야기를 누가, 어떻게 기록했을까?
이것은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라기보다는 그 사건에 대한 소문이 있었다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고려시대 민간에서 그렇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료로서 <고려사>에 기록한 것, 한편으로는 왕건이 한미한 가문출신인 장화왕후와 혼인한 것에 대한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에게 혼인의 이유에 대한 추측이 구전되면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을 것
- <류근 시인의 생각> 태조 왕건의 장자 무의 출생 이야기에는 정치적 마타도어가 담겨있을 것으로 장화왕후에게 장자가 태어난 것은 다른 유력 호족들에게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을 것
※ 마타도어 : 근거 없는 사실을 조작해 상대를 중상모략하는 흑색선전으로 정치권에서 널리 쓰이는 말
- 아마 이야기의 본질은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으로 왕건이 원치 않는 아들을 낳았다는 식으로 알리고 싶어서 이야기를 만들어 유포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일 수는 없는 것
- 제2비 장화왕후의 가문은?
“장화왕후 오빠는 나주 사람이며 부친은 다련군이다. 대대로 나주에 살았다.” <고려사열전 장화왕후 오씨> 벼슬도 없었던 장화왕후의 아버지 다련군, 하지만 나주는 후백제를 점령하기 위한 배후지역으로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전투를 벌일 경우 나주 토착 세력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 당시는 왕건이 왕이 되기 전(前)이었으니까 당장의 지원을 얻기 위해 장화왕후 오씨와 결합했을 것(?)
※ 고려사 : 세종(世宗)의 명으로 편찬을 시작해 1451년 완성된 고려 역사서로 세종은 고려에 대한 통사가 없어서 각별한 심정에서 김종서·정인지 등 뛰어난 학자들을 참여시켜 기전체로 편찬한 역사서, 918년~1392년 고려시대 역사를 가장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서로 부족한 부분은 반려시켜 다시 편찬하도록 지시한 세종(世宗)
〇 태조 왕건의 자녀 34명, 후계자는 누구?
- 다른 부인들은 아들을 낳았나?
29명의 부인 중 출산에 성공한 부인은 14명으로 왕자 25명과 공주 9명을 출산하게 되어 평균 1.2명 꼴, 이중 제3비인 충주의 신명순성왕후 유씨가 5남2녀로 가장 많은데 이들의 사랑이 깊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있지만 충주는 통일신라의 5소경 중 중원경이 위치하기도 했고 당시 후백제 · 신라 · 고려의 삼각지역의 중심지로 전략적 요충지
- 각 지역의 강력한 호족을 외척으로 둔 태조 왕건, 분란을 막기 위한 대책은?
태조 왕건의 유훈으로 신앙 · 사상 · 정책 · 규범 등을 담은 사료 <훈요십조>의 제3조, 적자(赤子)에게 나라를 물려주는 것이 비록 상례이기는 하나, 만약 맏아들이 불초하거든 그 다음 아이에게 물려주고 그 마저 불초하면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에게 중망을 받는 자가 대통을 잇도록 하라
〇 태조 왕건, 후계자를 정하다.
- 921년 고려의 첫 왕위계승자로 정윤(正胤)을 책봉하는데 그 주인공은 태조 왕건의 장자 무, <정윤책봉위원장>에 박술희를 임명하는데 박술희(?~945년)는 호족은 아니지만 궁예 휘하의 무신 출신으로 왕건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고 왕건을 섬기며 훗날 대광의 지위에 오른 인물
- 정윤(正胤) 책봉, 너무 이른 것 아닌가?
정윤의 나이가 10살이고 태조 왕건이 40대 중반이니 오히려 늦은 것(?)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어질 호족들 간의 세력다툼을 방지하려는 의도(?) 921년으로 고려가 건국된 직후이고 후삼국을 통일해야 하는 상황인데 쓸데없는 분란을 막아야 하는 것은 사실
- 장자 무를 정윤으로 삼아서 다른 부인들의 반발이 있었을 텐데···
하지만 오히려 태조 왕건은 마음이 담긴 상자를 제2비 장화왕후에게 보내고 “태조가 낡은 상자에 자황포를 담아 오씨(장화왕후)에게 주었다. 오씨가 옷을 박술희에게 보이자···” <고려사열전 박술희>
- 태조 왕건, 황포를 보낸 의도는?
뜻을 전하는 것으로 태조 왕건은 장화왕후의 장남 무를 차기 국왕으로 삼고 싶다는 뜻을 표현한 것으로 그 뜻을 알아챈 박술희는 공식석상에서 무를 정윤으로 책봉하자고 요청하고 태조 왕건은 박술희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장자 무를 정윤으로 책봉하는데 성공하는 것으로 장화왕후의 가문이 한미한 탓에 정윤책봉을 위해 태조 왕건은 다른 호족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
〇 태조 왕건, 정윤(正胤) 무에게 후견인을 세우다
- 918년 고려 개국 후 이른 921년 후계구도를 정한 태조 왕건, 그래서 정윤으로 책봉되는 시점은 29명의 왕비가 있기 전(前)으로 다른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후계구도를 확정하려 했던 것
- 실제로 왕건은 정윤을 얼마나 사랑했냐면 자신의 사후 정윤의 안위를 걱정한 태조 왕건은 자신처럼 튼튼한 호족과 정윤을 결혼시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정윤 무의 후견세력을 만들기도 하는 대책 ① 믿을만한 신하(박술희)를 후견인으로 세움 ② 경기도 광주 유력 호족 가문과 혼인시킨다.
〇 태조 왕건의 죽음
- 943년 5월 병석에 누운 태조 왕건, 그리고 67세의 나이로 승하하는데, 죽음에 임박해 “나는 죽는 것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기니··· 뜬 구름 같은 덧없는 인생은 예로부터 그러하니라.” <고려사절요 태조 26년>
- 고려 2대 왕, 혜종의 즉위
왕위에 오른 첫째 아들 무(武), 태조는 장기적으로 생각한 것이 지금은 무의 배경이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만일 세력이 강한 차남을 왕으로 삼는다면 앞으로 이 나라는 장자계승의 원칙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나라의 유기적인 정치안정을 위해서는 장자계승의 원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무를 책봉하고 후견 세력을 키워 보호했던 것이 아니었나(?)
- 29명의 부인, 남은 삶은 어땠나?
왕건이 전쟁터로 떠나자 비구니의 삶을 살았던 첫째 부인 유씨, 흔히들 고려 건국의 태조 왕건의 부인이라면 화려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질 못했다는 것, 다행히 훗날 왕건이 다시 불러들인 제1비 신혜왕후 유씨, 또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 서흥 출신 대서원부인과 소서원부인의 자매 “태조가 불쌍히 여겨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들이 이미 출가했으니 뜻을 뺏을 수 없다.” <고려사열전 소서원부인 김씨>
- 위의 서흥 출신 두 자매는 후에 왕건이 서경(평양)을 개척하면서 관리를 파견하게 되는데 “행파의 가족을 이주시켜 서경을 충실하게 하였다.” <고려사 세가 태조 5년> 그리고 두 부인을 위해 서경에 대서원과 소서원이라는 사원을 지어준 태조 왕건과 두 딸을 태조에게 시집보내고 출세한 김행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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