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光宗), 개혁의 칼을 뽑다
〇 광종, 개혁의 칼을 뽑다
- 노비안검법 · 과거제 · 관복제정 등 왕권강화에 힘쓰며 혁신적인 개혁을 한 광종, 그런데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500년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진 왕에게 왜 이런 평가를 했을까?!
- <평행이론>이란? 다른 시대를 사는 두 사람의 운명이 같은 패턴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이론, 대표적으로는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과 존 F 케네디로 이들은 100여 년의 차이로 백악관에 입성하여 둘 다 금요일에 암살을 당하게 되는데 고려와 조선에도 똑같은 삶을 산 두 명의 왕이 있다?
- 조선의 태종과 고려의 광종, 광종은 고려 4대왕(재위 949~975) 태종은 조선 3대왕(재위 1400~1418)으로 이들의 공통점은 창업자의 아들이고 적장자가 아님에도 왕자의 난을 통해 즉위했다는 점과 선대(先代)왕은 정종(定宗)이었다는 점
〇 개혁의 신호탄, 노비안검법
- <드라마 제국의 아침> 956년 광종은 중대발표를 한다. 그간 수십 만 백성들이 삼한통일 때 억울하게 희생되어 크고 작은 호족들의 노예가 된 그들을 풀어주겠다는 노비안검법을 발표한다. 노비를 통해 경제적·군사적 이익을 취하던 호족세력은 강하게 반발하지만 광종은 뜻을 굽히지 않고 노비안검법을 시행, 고려 500년 기틀을 다지는 개혁의 신호탄!
-노비안검법이란?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안검(按檢)은 살피고 조사한다는 뜻으로 당시의 노비 중에는 원래는 양민이었으나 호족들이 전쟁포로나 몰락한 양인을 매매하여 노비로 삼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사람들을 조사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은 원래 신분인 양인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것 “노비를 상세히 조사하고 살펴서 옳고 그름을 파서 밝혀내도록 명하였다.” <고려사절요 광종 7년>
- 광종의 노비안검법은 링컨의 노예해방선언보다 900여 년 앞선 원조(?) 광종의 노비안검법은 956년 호족의 경제 ·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 링컨의 노예해방선언은 1863년 노예의 인권향상과 북부산업지대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함인데 미국의 남부가 반발한 노예해방선언처럼 순탄치 않았던 광종의 노비안검법
- 노비안검법에 대해 호족들의 반대가 심한 이유?
당시의 노비는 노동력뿐만 아니라 호족의 사병역할을 하였는데 노비의 해방은 호족의 군사·경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하여 심지어 광종의 부인인 대목왕후 황보씨 마저도 노비안검법에 대하여 반대를 하게 된다.
- 왕권강화정책, 왕후가 적극적으로 지지해줘야 하지 않나?
조선시대 왕비는 정치관여가 불가능했는데 대목왕후의 정치적 세력이 강했던 것은 아닐까? 당시 광종을 지지하는 큰 세력으로는 황주의 처외가 황보 가문과 평주(평산)·개경(개성)의 박수경 세력, 그리고 충주의 외가로 이들은 광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적극적으로 힘을 실어준 호족들
※ 고려를 고려(考慮)하다.
고려시대 왕실에서는 친족 간에서 배우자를 구하는 족내혼이 관행이었는데, 고려 왕실 최초 족내혼은 광종으로 광종과 대목왕후는 이복남매 사이이고 두 번째 부인인 경화궁 부인 임씨는 혜종의 딸로 삼촌과 조카 사이, 하지만 조선시대의 왕비는 외부 간택인 철저한 공모제, 고려는 신라의 골품제를 계승하여 고려 전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① 왕실혈통의 순수성 보호 ② 권력과 재산의 분산을 방지하고자 했던 것
〇 7년의 기다림, 노비안검법
- 호족의 반대에도 어떻게 노비안검법을 추진할 수 있었나?
오랫동안 기다리는데 광종 재위기간 949~975년 중 초반에는 호족의 실세(實勢)를 인정하다 광종 8년째가 되는 956년에 노비안검법 개혁을 시작 “광종이 즉위하신 해로부터··· 정치와 교화가 맑고 태평하였으며 형벌과 상이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승로>
- 초반 7년 동안 개혁에 대한 설계를 하지 않았을까? “사천감에서 아뢰어 말하기를 ‘덕을 닦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자 이로부터 늘 <정관정요>를 읽었다.” <고려사 세가 광종 원년>
※ 정관정요(貞觀政要) : 당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당태종과 신하의 정치문답을 정리한 책으로 제왕학의 교과서로 여겨져 군주와 제왕들이 탐독
- 사실 당 태종은 형제를 죽이고 패륜을 저지르면서 왕위에 오르지만 <정관(貞觀)의 치(治)>로 정치를 잘하여 길이 남은 당태종의 정치사
- 7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노비안검법이라는 칼을 뽑아 든 광종, 노비는 세금도 안내고 군대도 가지 않기 때문에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 이들이 양인이 되면 군대와 세수(稅收)를 늘릴 수 있는 것으로 노비안검법의 효과 ① 호족세력 약화 ② 왕권강화 ③ 국가 재정확충으로 일석삼조의 효과
〇 고려를 뒤흔든 파란 속 인물을 만나다!
- 중국 후주 출신의 쌍기(雙冀)가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이유는?
“대리평사 쌍기가 설문우를 따라 왔다가 병에 걸려서 머무르게 되었다.” <고려사절요 광종 7년> & “병이 낫자 왕이 접견하고는 매우 흡족히 여겼다··· 발탁하여 관직에 임용하였다.” <고려사 열전 쌍기> 귀화할 때 혜택으로 큰 집과 벼슬로 한림학사를 제수
※ 한림학사 : 고려시대 한림원의 정4품 관직으로 황제의 조칙(詔勅)을 담당, 현재의 대통령 비서실의 연설문 작성 담당
- “당시 광종이 투화한 한인(漢人)들을 후하게 대우하여 신료의 저택 및 딸들을 가려 뽑아 그들에게 주었다.” <고려사 열전 서필> & “쌍철이 오니 좌승으로 삼았다. 쌍철은 쌍기의 아버지인데 쌍기가 총애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왕긍을 따라 온 것.” <고려사절요 광종 10년>
- 충신 서필은 귀화인에게 주라며 스스로 집을 내놓는데,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집을 빼앗길 바에야 미리 스스로 내놓겠다는 항거의 의미로 서필 같은 충신마저 정책에 반기를 든 것이고 서필은 외교담판으로 강동6주의 땅을 획득한 서희의 아버지
- 쌍기는 어떤 인물?
쌍기는 후주의 관료 출신인데 중국 당나라 멸망(907년)부터 송나라가 통일하는 979년까지의 시대인 <5대 10국> 중 후주(951~960)는 5대 마지막 왕조로 황권강화와 후주의 개혁에 참여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광종이 탐을 냈던 것
- 쌍기는 정말로 아팠나?
<고려사>의 기록에도 단순히 병으로 남았다만 기록되고 병명의 기록은 없어서 쌍기가 남은 것은 의도적이었다(?) 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
- 당시 고려보다 선진국이었던 후주의 쌍기가 귀화한 진짜 이유는?
재미있는 것이 쌍기의 귀화는 956년 그런데 후주가 멸망한 년대는 960년으로 아마도 쌍기가 망국의 흐름을 읽고 광종의 제안에 응한 것은 아닐까(?)
-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화인을 등용한 이유?
고려 초 관료들의 인적상황은 ① 대부분 무장(武將) 출신 ② 문치(文治)를 담당할 사람이 부족했던 것 ③ 당나라 유학생 격감, 더구나 고려 초는 국가의 제도를 만들면서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국계 귀화인들의 가치가 높았던 것, 또한 왕권강화를 위해 호족세력과 연관이 없는 쌍기 같은 중국계 귀화인을 적극 등용하는 것
- 광종의 치세(947~975) 중 암중 모색기(949~955)를 거쳐 956년 개혁시작으로 노비안검법 · 쌍기 등용으로 과거제 실시 등··· 이미 천백여년 전에 해외전문가를 영입한 셈으로 광종은 열린 정치인으로 인재등용의 폭이 너무 넓어서 빛나거나 광(光) · 미치거나 광(狂) · 넓거나 광(廣)···
〇 최초의 과거시험
- <드라마 제국의 아침> 958년 개경으로 모여든 전국의 수험생, 신분에 상관없이 시험을 통해 벼슬에 오를 수 있는 광종의 혁신적인 인재등용, 우리 역사 최초의 과거시험 시작 “쌍기의 의견을 채택하여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하니 이로부터 문풍(文風)이 비로소 흥성하였다.” <고려사절요 광종 9년>
- 과거의 합격증 홍패(紅牌)에는 관직명 · 시험과 · 서명 등이 기록되었는데 최초의 과거 합격자 최섬의 홍패는 현존하지 않고 1205년 장양수의 홍패가 왕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행정문서로 현존하며 고려시대 홍패는 6점뿐으로 붉은 종이에 썼다 해서 홍패이고 합격증서
- 실제 과거시험 문제는?
기본적으로는 문장실력과 유교경전에 대한 이해 두 가지를 가지고 시험을 보는데, 첫 번째 시험으로는 “시(詩) · 부(賦) · 송(頌) 및 시무책으로 진사를 뽑았는데···” <고려사 세기 광종 9년> 시무책은 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의 중요 사안에 대해 논하는 글로 광종이 과거에 시무책을 포함한 것은 개혁을 함께 할 인재를 얻기 위한 것으로 해석 “쌍기가 여러 차례 지공거(과거시험 주관 관리)를 맡아 후학을 북돋우니 비로소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이 흥기하게 되었다.” <고려사 열전 쌍기>
- 과거제도가 없었을 때 인재등용의 방식은?
일반적으로 귀족의 자재들이 관직을 물려받았으나 과거제도의 실시로 양인이면 누구나 응시가능하고 합격하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혁신제도, 조선시대에 더욱 계승 발전하여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공시 폐지되면서 958~1894년 까지 무려 940여 년간 존속된 제도로 고려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했던 과거제도, 예컨대 몽골과 전쟁을 하고 수도가 강화도로 옮겨진 상황에서도 거르지 않고 치렀다는 것
- 광종의 핵심 키워드 ① 경제개혁의 노비안검법 ② 정치개혁의 과거제도로 특히 과거제는 문치시대를 여는 역사적 사건으로 과거제도가 없었다면 관직과 기득권이 대물림되는 나라가 됐을 것(?)으로 과거제는 백성들에게 희망의 물길을 열어준 제도
〇 광종, 제국의 아침을 열다
- 광종의 세 번째 개혁은 960년 관복정비 “백관의 공복을 정하는데 원윤 이상은 자삼(紫衫·자줏빛) · 중단경 이상은 단삼(丹衫·붉은빛) · 도항경 이상은 비삼(緋衫·주황빛) · 소주부 이상은 녹삼(綠衫·초록빛)으로 하였다.” <고려사 지 광종 11년>
- 관복정비는 왕권강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956년 노비안검법 · 958년 과거제 · 960년 관복정비, 뿐만 아니라 개경을 황도(皇都)라 하고 서경을 서도(西都)라 칭하는데 황도는 황제의 도읍으로 스스로 황제라고 만천하에 알리는 것
- 황제라는 말은 당시 중국에서만 쓸 수 있는 용어 아닌가?
고려라는 것을 고려(考慮)해야 하는 것이 고려는 많은 점에서 조선과는 다른 것으로 고려는 대대로 중국 왕조로부터 책봉을 받기 때문에 중국왕조에 대해서는 국왕이라고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의 체제를 갖추고 있어 외왕내제(外王內帝), 즉 외부적으로는 국왕을 칭하지만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칭하는 체제로 조선의 국왕을 전하 · 왕위에 오를 사람을 세자라 부르지만 황제국 고려에서는 폐하와 태자로 통일하게 되는 것
- 고려는 조선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고려는 스스로 황제 국을 칭하고 걸맞은 제국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고려사>편찬은 조선시대로 조선시대의 가치관에 의해 황제국의 면모가 삭제되어 황제국 고려의 면모를 오늘 날 잘 알지 못하는 것
〇 광종, 숙청의 칼을 뽑다
- <드라마 제국의 아침> 964년 고려 조정이 발칵 뒤집힌다. 태조 이래 최고의 실력자였던 박수경의 세 아들이 참소를 입는 것으로 광종은 개혁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거침없이 숙청하는데 결국 최대 호족 박수경 일가의 몰락과 함께 왕족도 예외는 아니어서 혜종과 정종의 아들인 조카들까지 처형을 하게 되는데, 광종이 또 다른 칼을 뽑아 든 것!
- 광종의 숙청 시나리오(?) ① 노비안검법 실시로 호족세력 약화 ② 과거제를 통해 새로운 인사발탁 ③ 호족세력에 대한 숙청 단행, 평행이론으로 수시로 칼을 뽑아든 것도 태종과 유사, 박수경 일가의 몰락은 광종의 치세(治世)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1기 암중 모색기(949~955) · 2기 개혁의 시기(956~960) · 3기 숙청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박수경은 ① 평주(평산)지역 기반의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호족 ② 태조 왕건의 장인 ③ 광종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던 사람 “아들인 좌승 박승위·박승경과 대상 박승례 등이 참소를 당하여 옥에 갇히자 박수경은 울화병으로 죽었다.” <고려사 열전 박수경> 광종의 박수경 일가의 숙청은 가장 강력한 호족세력이자 자신의 후원세력을 제거한 셈
- 최측근 박수경 일가가 숙청된 이유?
참소의 내용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960년 “평농서사 권신이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 등이 반역을 꾀한다고 참소하자 이들을 내쫒았다.” <고려사 세가 광종 11년> 960년부터 본격적인 숙청을 단행하면서 박수경 일가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당시에는 고발과 고소가 난무하는 시기 “종이 그 주인을 고소하고 자식이 그 아비를 참소하니 감옥이 늘 넘쳐나 별도로 임시 감옥을 두었고 죄 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가 계속 생겼다.” <고려사 세가 광종 11년>
- 그래서 빛나거나 미치거나··· 광종의 개혁정치는 왕권강화를 위한 것으로 왕위에 오를 때 도움을 준 호족세력이지만 왕권강화에 적이 되는 세력에게는 가차 없었던 것으로 이것도 절묘하게 조선의 태종이 왕이 될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처남 민무구 · 민무질을 광종 때처럼 참소로 숙청하게 된다.
- 혹시 광종은 숙청을 위해 참소를 지시했을까?
역사 속에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을 때 짜여 진 시나리오 같아 음모론이 제기될 수는 있으나 모르는 것은 그대로 남겨두는 여유도 필요한 법이라는 것이 <이익주 교수>가 생각하는 역사를 바라보는 방법
- 아무튼 광종의 숙청은 호족뿐만 아니라 왕실까지 미치는데 “두 임금(혜종·정종)의 조정에서는 오직 외아들만이 있었는데 광종이 그들의 생명을 보존해 주지 않았으니···” <고려사 열전 최승로> 그리고 말년에 가서는 “비록 왕의 외아들 왕주라도 의심을 받아 왕을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고려사 세가 광종 11년>
- 역사 속에서 종종 보아 왔던 부지간의 권력다툼, 광종은 왜 아들을 의심한 것일까?
처외가 황주의 호족세력을 경계했을 듯(?) 아들을 앞세워 왕권을 위협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금을 통틀어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법··· “형장에 연루된 자들은 대부분 죄가 없는 이들이었으며 역대의 훈신과 노장들이 모두 죽임을 면하지 못하여 사라져 갔습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
- 노비안검법 · 과거제 등의 업적은 빛나지만 숙청과정의 10여 년 간은 광기(狂氣) “왕이 참소를 믿고 사람을 많이 죽였으므로 속으로는 스스로 회의(懷疑)하여 죄악을 씻어보고자 재회(齋會)를 널리 베풀었다.” <고려사 세가 광종 19년> 광종은 선행을 통해 개인적인 죄책감을 씻으려 했던 것 “가끔 떡과 쌀 · 콩과 땔감을 서울과 지방의 길거리에서 나누어 주곤 하였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 “방생하는 곳을 많이 설치하고 근처 사원에 나아가 불경을 강연하게 하였으며 도살을 금하였으므로 왕의 반찬으로 쓸 고기로 시전(市廛)에서 사다 올렸다.” <고려사 세가 광종 19년>
- 개혁과 숙청 사이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 듯하고 호족을 숙청한 것은 광종이 호족을 두려워했다는 것에 대한 반증으로 혜종과 정종의 몰락을 본 광종은 강력한 왕권을 꿈꾸지 않았을까(?)
〇 평행이론, 고려 광종과 조선의 태종
- 평행이론으로 고려 광종과 조선의 태종, 광종은 고려 4대 왕으로 태조 왕건의 넷 째 아들, 고려판 왕자의 난 후 즉위를 하고 선대(先代) 왕은 정종 <드라마 제국의 아침> 조선의 태조는 조선 3대 왕으로 태조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로 1·2차 왕자의 난 후 즉위하고 선대왕은 정종 <드라마 용의 눈물>
- 둘 다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고 성격적으로도 킬러의 본능이 있다는 것, 다른 것이 있다면 태종은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이 있었다는 것, 왕권강화를 통하여 안정된 나라를 물려주려 한 광종과 태종,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세종 VS 개혁에 후퇴한 경종, 경종·성종 때에는 개혁이 오히려 후퇴하여 억울하게 죽은 자의 자손에게 복수하는 것을 허락하는 <복수법>을 제정하고 노비환천법이라 해서 광종 대에 해방된 노비를 다시 노비로 되돌리는 법이 제정되는 것
- 기득권 세력이 이렇게 무서운 것으로 기득권을 개혁의 동반자로 삼지 못하면 개혁의 반작용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는 것, 광종이 즐겨 읽었다는 <정관정요>에 창업이수성난(創業易守成難)이 나오는데 창업은 쉽고 수성(守城)은 어렵다는 말로 고려나 조선도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지켜나가는 것이 더욱 어려웠을 것으로 고려 광종과 조선의 태종은 수성(守城)의 짐을 지고 나라의 기틀을 다졌던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수성의 기틀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 세상의 모든 일에 적용이 되는 창업이수성난(創業易守成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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