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is(한국사)

천추태후, 조카에게 자객을 보내다

mkpark2022 2016. 6. 3. 17:27

 


 

천추태후, 조카에게 자객을 보내다

 

 

<KBS 드라마 천추태후>

- 997년 고려 제7대 왕 목종이 즉위하고 아들을 대신해 섭정(攝政)으로 권력을 잡은 천추태후, 연인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김치양을 요직에 임명해 조정을 장악하고 목종이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김치양의 아들을 낳은 천추태후는 아들을 차기 왕으로 만들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는데 강제로 출가시킨 자신의 조카이자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을 제거하려 하는 것

-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한 황제였던 측천무후와 비견되는 인물의 천추태후는 정말 조카 대량원군을 제거하려 했나?

사실이고··· 아들 목종 대신 섭정으로 고려 최고의 권력자가 된 천추태후이지만 문제는 아들 목종에게 후사가 없는 것이어서 조카 대량원군이 유일한 왕위 계승 후보자

- 대량원군은 태조 왕건의 아들 왕욱과 태조 왕건의 손녀이며 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로 고려 초기 숱한 정쟁 속에 목숨을 잃다보니 이 무렵이 되자 대량원군이 유일한 태조의 핏줄

-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이 왕이 되면 권력을 잃게 될까 두려웠던 차에 자신과 김치양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는 것 천추태후가 김치양과 더불어 (아들을) 왕의 후계자로 삼고자 모의했다.” <고려사절요 목종 6>

- 대량원군은 삼각산 신혈사로 출가하는데, 삼각산은 지금의 북한산의 옛 이름으로 신혈사의 진관이라는 스님이 천추태후가 독살하려는 대량원군의 목숨을 구해주고 훗날 진관스님을 위해 대량원군이 절을 지어 주는데 그 절이 진관사로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에 소재

-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 아버지가 왕족이 아닌데도 왕위계승자가 될 자격이 있나?

비교적 ·녀의 지위가 동등했던 고려사회는 부모 중 한 사람만 왕족이면 자식도 왕족이어서 어머니가 왕족이면 왕위 계승이 가능했던 것

 

대량원군의 야심

- 목종 6년을 기준으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은 한 살 VS 대량원군은 열두 살, 한편 대량원군이 꿈에 닭울음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듣는데, 해몽(解夢)을 해보니 꼬끼오! 높을 고() · 고귀할 귀() · 자리 위(), 그리고 다듬이 소리는 그 당시 어근당!으로 풀이되는데 임금 어() · 가까울 근() · 마땅할 당() “술사가 (꿈을) 풀이하기를 이는 임금이 될 조짐이라고 일러주었다.” <고려사 세가 헌종 총서>

- 결국 누가 정윤이 되나?

정윤을 정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가는 상황으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 VS 대량원군, 이것을 왕실 내 권력다툼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이때 즈음이면 대량원군을 지지하는 세력은 성종 때 등장한 신라계로 고려 정통의 천추태후 세력 VS 새롭게 등장한 신라계 세력의 대립으로 볼 수 있는 것


천추태후 VS 신라계

- 신라계는 성종 때 유교를 앞세워 부상한 정치세력으로 성종이 유교정치 이념을 표방하고 과거제도를 통해 관료를 선발하고 당시 문화전통이 가장 깊었던 경주 사람이 정계에 많이 진출하는데 목종이 즉위하고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면서 유교정치를 부정하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성종의 유교정치에 반발했던 호족세력을 대변하는 천추태후의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 즉 단순한 왕위쟁탈전이 아니라 유교 정치의 신라계 VS 전통적 질서 천추태후 세력의 대립으로 신라계는 유교정치 · 불교행사 금지 · 친송(親宋)외교, 반면 천추태후세력은 불교행사 부활 · 고려 전통과 자주성을 중시하여 한마디로 요약하면 화풍(華風) VS 국풍(國風)의 대립으로 고려의 미래를 건 두 세력의 대립

- 목종이 정윤을 정해주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인데!

알다시피 18세에 즉위하고도 어머니의 섭정을 받은 목종, 심지어 어머니의 애인이 조정을 장악하니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목종은 왕 역할을 하기엔 부족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후계자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 목종의 남색(男色)

 

불에 탄 천추전

- <KBS 드라마 천추태후> 1009년 궁궐에서 성대하게 열린 연등행사, 그런데 그날 밤! 천추전에 화재가 발생하고 목종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고 궁궐을 폐쇄한다. “왕이··· 병이 들어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 <고려사 세가 목종 12>

- 천추전 화재 원인의 추측 우연한 사고 목종을 노린 김치양의 방화 천추태후를 노린 신라계의 방화, 천추전 화재사건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결과는 확실하고 그 사건으로 인해 목종이 병을 얻고 왕위가 비어있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드디어 표면으로 드러난 왕위계승문제! 이러면서 천추태후 세력 VS 신라계 세력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는데, 목종의 위치에 상관없이 두 세력은 다음을 어떻게 한다는 준비를 모의하기 시작한다.

 

오락가락 강조의 거병

- 목조의 충신 강조는 서북면 도순검사로 평안도 지방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고려의 최정예 부대를 이끄는 장수로 천추전 화재 이후 불안해진 목종은 강조에게 호위를 부탁하자 궁궐로 출동하던 도중에 강조가 받은 보고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왕명을 사칭해 강조를 개경으로 불러들인 것이라는 전갈이 강조에게 도착하자 되돌아가려 한다.

- 하지만 강조의 아버지가 보낸 쪽지에는 왕이 이미 죽고 간흉이 권세를 휘두르니 군사를 개경으로 이끌고 와 국난을 바로 잡으라는 것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처단하기 위해 거병하여 5천여 군대를 이끌고 평주에 도착해 보니 목종이 살아있어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계속 가자니 명분이 없어 오락가락하는 충신 강조의 역모사건!

 

강조는 왜 정변을 일으켰나?

- <KBS 드라마 천추태후> 10095월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한 강조는 순식간에 궁궐을 장악,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새로운 왕으로 세운다. 고려 제8대왕 현종이다! 그리고 정변에 성공한 강조는 고려의 1인자로 등극한다.

- <고려사>에 기록된 강조의 정변과정은 목종이 몸져눕자 왕위 찬탈을 꾀한 천추태후와 김치양, 이에 신변위협을 느낀 목종이 강조에게 호위를 부탁하는데, 강조가 목종을 배신하고 역모를 일으키는 것으로 기록

-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고 정리가 잘 되지 않지만 태후는 강조가 오는 것을 꺼려 신하를 보내어 절령을 지키면서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도록 했다.” <고려사 열전 강조> 천추태후에게 강조는 최정예부대를 가진 위협적인 존재라서 계속 강조를 막으려 했고 반대로 강조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신라계는 끝까지 강조를 개경으로 들어오게 했던 것으로 두 세력의 강조를 둘러싼 관계는 분명하게 구별이 되는데 문제는 강조의 태도가 단계별로 달라지고 있는 것

- 사료에 불명확하게 기록된 강조의 태도는 오락가락, 이것은 왜일까?

이것이 왜 그랬는가의 판단은 현재로서는 어렵고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강조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목종을 폐위하려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 각기 다른 이유로 강조의 군사력을 이용하려던 두 세력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일으킨 군대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목종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면 죽을 수도 있다는 판단으로 죽음을 면하기 위해 정변이라는 극단적인 결정을 했을 것이라는 <이익주 교수의 분석>

-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매력적인 사건이기는 한데 강조의 정변에 대한 기록은 훗날 거란의 침입으로 손실되어 기록이 부족하다 보니 해석의 여지도 많아진 사건으로 강조가 정변을 일으킨 명분은 기록에 등장 주상의 병환이 위중한데도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아 간악한 무리들이 왕위를 엿보고 있습니다. 왕이··· 참소와 아첨만을 믿고 상벌을 정확히 행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위난이 초래된 것입니다.” <고려사 열전 강조>

- 정변에 성공한 강조,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은 없었나?

강조가 목종을 폐위한 것은 고려 건국 최초 신하가 왕을 쫒아낸 사건으로 사료의 기록에는 정변 성공 후 왕의 자리 아래에 앉아있던 강조를 보고 만세를 부른 군사들! 만세는 새로운 왕에게 인사한다는 것을 의미 강조가 놀라 일어나 꿇어앉으며 다음 임금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 라고 말했다.” <고려사 열전 강조> 고려 왕실의 권위가 안정된 시기여서 강조가 감히 왕위를 넘보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았던 것

- 강조의 정변 이후, 천추태후는?

강조에 의해 목종과 함께 궁궐에서 쫓겨난 천추태후는 황주로 낙향하고 김치양 부자는 처형당하면서 천추태후의 친속 30여 명은 유배 보내지면서 목종 이후 형성되었던 천추태후의 세력이 모두 제거된다.

- 대량원군의 즉위는 결국 신라계의 승리신라계의 원래 목적천추태후 실각과 대량원군의 정윤책봉이었는데 강조의 초강수로 목종이 폐위되고 신라계를 제치고 고려의 1인자로 등극한 강조

 

천추태후의 몰락

- <KBS 드라마 천추태후> 무려 12년 간 권세를 누리던 천추태후는 1009말 한 필을 받고 목종과 함께 쫓겨나고 왕과 태후가··· 귀법사에 이르러 어의(御衣)를 벗어 음식과 바꾸어 먹었다.” <고려사절요 목종 12> 고려 최고의 권력자 천추태후의 초라한 몰락, 역사에 흔히 등장하는 모습으로 권력의 정점에 있다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장면···

- 목종이 대량원군을 정윤에 책봉하고 신라계의 뜻을 따랐다면 자신의 안위는 지켰을 것, 아니면 효심이 깊었다면 어머니의 뜻을 따라 동생을 후계자로 삼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은 것이 문제! 목종은 매우 선한 케릭터인 것 같은 것이 쫓겨 가면서도 원망은 커경 효심을 보이는데 태후가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왕이 친히 반()과 그릇을 받들었으며 태후가 말을 타려고 하면 왕이 친히 고삐를 잡았다.” <고려사절요 목종 12> 어머니의 뜻만 따르다 왕위마저 빼앗긴 목종, 과연 효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목종은 천추태후의 아바타? 결국은 강조가 보낸 부하에게 임진강변 적성현에서 죽임을 당한 목종, 당시 나이 서른에 세상을 떠난 것

- 목종이 죽은 후, 천추태후는 어떻게 됐나?

천추태후는 살아서 낙향! 김치양과 두 아들 모두 죽고 완전히 힘을 잃은 상태에서 홀로 외가 황주로 돌아가고 그 이후로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 정변 당시 강조가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한 이유는 안정된 왕실의 권위가 분명했기 때문으로 신하가 왕을 죽이는 것은 대사건, 하지만 목종의 경우에는 후환이 될 수 있기 때문으로 목종은 폐위 후 충주로 향하는데 충주는 목종의 향리이기 때문으로 충주에서 향리 세력을 키워 재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세간의 비난을 피하려고 자살을 위장해 시해하는데 천추태후까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큰 부담이 되는 것

향리 : 고려시대 국왕이나 왕비의 지방 근거지로 어머니나 할머니의 고향

- 당시 고려의 전반적 분위기 신하와 백성으로서 원통해하고 분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고려사절요 목종 12> 국왕에 대한 신하의 도전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당시의 민심을 고려해 목종은 몰래 죽이고 천추태후는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

 

천추태후의 죽음

- 1029년 개경, 21년 만에 천추태후가 공시기록에 등장하는데 숭덕궁에서 죽으니 나이는 66세였다.” <고려사 열전 헌애왕태후 황보씨> 천추태후의 마지막은 결코 초라하지 않고 성대한 능에 묻혔다

- 황주로 쫓겨난 천추태후, 개경에서 죽었다?

기록을 보면 천추태후가 당대의 정적은 많았지만 정치를 잘못해 민심을 잃었다는 기록은 없어··· 성대한 능에 묻혔다는 것은 당대의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는 의미로 당시의 민심은 천추태후의 국풍(國風)과 신라계 화풍(華風)의 대립에서 백성들은 기존의 익숙한 전통을 추구하는 천추태후를 지지하지 않았을까?

- 천추태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조선시대 학자들이 부정적으로 인식을 한다는 것, 특히 성리학적 관점에서 여성으로서 권력의 정점에 섰다는 것김치양과 간통해서 자식을 낳았다는 것은 성리학자의 기준에서 보면 최악인 것 천추태후가 음란하여 김치양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왕이 시초에 막지 못하였다가 아들과 어머니가 모두 재앙을 입었고 사직이 거의 멸망할 뻔하였다.” <정도전 삼봉집>

 

정치가 천추태후

- 문제는 천추태후를 오늘 날 우리가 어떻게 볼 것인가?

여성 정치가로서의 천추태후! 목종 초 대부분의 정책들을 천추태후가 추진했을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평가해 보면 성종의 급진적인 화풍(華風)에 반발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천추태후의 정치적 성과 국풍과 화풍을 조화하여 큰 충돌을 막은 것과 대외적으로는 성종 때 거란의 침입을 받았던 고려 거란과 송()의 균형추 역할로 거란의 재 침입을 막은 것,

- 역사를 흔히들 History라 하여 <남자들의 이야기>라 하는데 천추태후는 Herstory <여자들의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역사를 보는 시각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보여 지는 것

- 결과적으로 천추태후를 음란 · 간통이라는 비난은 하지만, 역설적으로 천추태후의 정치를 비판하는 기록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천추태후의 정치적 역량은 인정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추태후도 권력을 내려놓아야 할 시기를 놓친 것이 한계, <버락 오바마>의 명언 The biggest problem in politics is the fear of loss.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 천추태후의 실각과 현종의 즉위는 고려 초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사건으로 고려 건국 지방세력 호족의 시대가 끝나고 중앙 관직 진출 세력인 귀족의 시대가 시작하고 목종 때 유일한 태조의 혈통 대량원군이었지만 현종 즉위 후 아들을 다섯 명이나 낳으면서 이때부터 왕실의 자손이 다시 번성하면서 전통적인 족내혼이 사라지고 타성(他姓) 혼인이 시작된 것, 그리고 현종은 성종의 유교정치를 계승하면서 유교정치 이념이 자리를 잡아가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