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is(한국사)

율곡 이이

mkpark2022 2016. 6. 9. 22:07

 

 

 

율곡 이이

 

 


우리가 아는 율곡 이이

- 그동안 알지 못했던 율곡 이이에 대한 이야기는 1554년 금강산에서 시작, 19살이 되는 율곡 이이는 성리학 공부를 중단하고 금강산으로 가출하여 절에 들어가 불경에 심취 승려들 간에 생불(生佛)이 출현했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7(1584) 11> 이때의 가출은 훗날 율곡 이이의 삶에 큰 걸림돌이 된다.

-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잘 알려진 율곡 이이이지만 자세하게 아는 경우는 드문 것이 흔히들 율곡 이이의 고향을 강릉 오죽헌으로 알고 있지만 태어난 곳은 오죽헌이 맞고 고향은 조상이 대대로 살아 온 파주의 밤나무 골이어서 율곡이 된 것

- 교과서에는 저서와 영향력에 대해서만 언급되고 삶에 대하여는 다뤄지지 않고 윤리시간에는 율곡 이이의 철학에 대해 이기이원론? 이기일원론?? 등을 공부하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깊게 다뤄지지 않는 것

- 학계에서 율곡 이이에 대한 연구는? <김경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워낙 중요한 인물이고 역사적으로 영향이 큰 인물이고 보니 정치·철학·사회·교육에 걸쳐 많은 연구가 이뤄진 인물로 성리학자가 아닌 개혁가·정치가로서의 율곡 이이의 모습을 알아보는 시간이었으면···

 

율곡 이이의 방황, 금강산으로 가출하다

- 금강산으로 가출한 이유?

가출 3년 전 어머니 신사임당을 잃은 16세 소년 율곡 이이는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을 지킨다. “16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손수 제찬을 장만하였고 그릇 씻는 일까지도 종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율곡전서 제35권 행장> 율곡 이이는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슬픔을 잊기 위해 금강산으로 갔을 것, 게다가 가출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사연? 새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 선생(율곡)에게 어떤 사람이 홍시 한 쟁반을 드린 일이 있었다. 선생이 한 개를 손님에게 주고 자신이 한 개를 가진 뒤에 안에 들여보냈더니 서모(庶母)가 두 개가 비어있는 것을 보고 크게 꾸짖기를 이토록 먹고 싶었으면 무엇 하러 들여보냈느냐? 하였다.” <우암문집> 새어머니와의 관계도 율곡 이이의 가출에 영향을 미쳤을 것

- 성리학자인 율곡 이이가 정말 불경(佛經)을 공부했을까?

후대에도 논란이 된 율곡 이이의 불교귀의, 대표적으로 인조(仁祖) 대에 율곡 이이를 문묘에 종사시키려 하지만 찬반의 논란이 심했다 해명하면서 말하기를 율곡이 머리를 빗고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하도 길어 땅에 닿을 정도여서 일어서서 빗었다라고 하였다.” <장유의 계곡만필 제2권 만필> 잠깐 빠진 것이지 머리도 삭발하지 않았다는 기록, 하지만 율곡 이이의 과거 행적을 문제 삼은 반대 세력

- <김경래 박사의 분석> 율곡 이이는 어머니를 잃고 슬픔에 빠져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 수도··· 하지만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율곡 이이는 결국 현실참여를 선택하고 금강산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돌아와 <자경문(自警文)이라는 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써서 성리학에 힘쓸 것을 다짐하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과거준비, 공부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과거를 치르는 조건자체가 어려웠던 것으로 불교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선비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했던 것

- 21세에 소과 초시에 장원급제 하는데, 소과(예비시험)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어 율곡도 성균관에 들어가 알성시(예비시험)를 보려 하는데 “(율곡이이) 알성과에 응시하려 할 때 성균관의 여러 유생들이 그가 출가하였던 것을 혐의로 묘정에 들어서지 못하게 하였으니···” <명종실록 21(1566) 324>

 

율곡 이이, 신래침학(新來侵虐)을 거부하다

- 장원급제한 율곡 이이는 승문원에 첫 출근하고 신래침학에서 폭탄 발언을 하여 논란, 신래침학이란? 조선시대 신래(신입 관리)들의 기세를 꺾고 위계질서를 바로 잡기 위한 풍습으로 선배 관리들이 신래들에게 험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신래침학이라고 부르는데 처음 취지는 나쁘지 않았던 것이 고려 말 낙하산으로 관리가 된 권문세족 자제들의 교만함을 꺾기 위해 시작한 것으로 취지는 좋았으나 과해져서 문제가 된 것으로 신입관리들은 과도한 신래침학에 정신적 · 육체적 고통을 호소

-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신입관리들로 북적이는 승문원, 그런데 야심한 시간에 선배관리들의 긴급집합명령이 떨어지고 이 현장에 율곡 이이도 있었다. 선배관리들이 요구한 진귀한 음식을 바친 신입관리들, 한 신입관리는 정성껏 빚은 떡을 바치는데, 하찮게 여긴 한 선배가 그 떡을 땅바닥에 팽개치며 폭언을 하자 율곡 이이는 부당한 행동을 한 선배관리에게 대항하며 신래침학을 거부하고 율곡 이이의 행동에 논란이 일파만파 신래라 이름 하여 멋대로 침학하기를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온 낯에 오물을 칠하며···” <중종실록 36(1541) 1210> & “신참자 정용성은 몽둥이로 맞아 치사하기까지 했으니 극히 놀랍습니다.” <선조실록 27(1594) 627>

 

악습(惡習)에 대항한 율곡 이이의 강단

- 신래침학을 거부한 이유?

신래침학은 신입관리들에게 너무 가혹한 행위로 선배들이 술과 안주를 요구하는 것은 비상식적으로 가난한 선비들은 가산을 탕진하기도 하고 게다가 부모님께서 어렵게 사주신 옷을 찢고 흙탕물에 구르게 한 것은 자칫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 신래침학은 오래 된 관습이지 않나?

관습이 아니라 고쳐야 할 악습(惡習)이란 인식을 갖고 있던 율곡 이이는 선배가 되면 악습을 완전히 끊겠다고 선언하며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밝히고 신래침학의 폐지를 왕에게 건의할 것을 다짐한다.

- 신래침학이 큰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이 다치거나 죽는 사람도 발생하여 선조(宣祖)는 율곡 이이의 건의를 받아들여 신래침학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한다. “신참 관원을 골탕 먹이는 장난은 언제 생긴 것인지 모르지만 처음 임용되었을 때 율곡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고···” <안정복의 순암집 제2권 서>

- 신래침학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나?

<조선왕조실록><용재총화>에 자세히 기록된 신래침학, 이를 거부하면 어떻게 한다는 기록은 없으나 소외당하고 불이익을 받았을 것, 하지만 율곡 이이는 출세와 상관없이 자신의 원칙을 지키고자 신래침학을 거부했을 것

- 불교에 귀의한 과거행적 때문에 비난을 받았던 율곡 이이가 신래침학의 악습에 대항하는 강단과 용기는 어머니 신사임당을 닮아서 할 말은 하는 대쪽 같은 성격

 

9번 장원급제, 가능한 일인가?

- 가능한 것이 조선의 과거시험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과(예비시험)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하고 생원시에 초시와 복시 & 진사시에 초시와 복시, 대과(본시험)에 초시·복시·전시가 있어서 각각의 시험을 합쳐 9번 장원급제했다고 전해진다.

- 율곡 이이의 공부 비결은?

초학자들을 위하여 쓴 입문서 <격몽요결>에서 자신의 공부법을 공개하는데 입지(立志), 분명하게 뜻을 세워라 혁구습(革舊習), 잘못된 옛 습관을 타파하라 지신(持身), 몸가짐을 바로 하여 정진하라 등으로 실질적인 공부법이라기보다는 공부하는 자세를 말한 듯

- <격몽요결>은 유교의 진리탐구를 위한 책으로 당시 사대부들은 과거를 통한 출세가 올바른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율곡은 출세가 아닌 생계를 위해 과거에 응시했다는 말을 자주하는데 출세와 유교의 진리탐구 사이에서 갈등을 하는 당시의 사대부들

- 오늘 날 청년들의 고민거리인 공부의 목적을 출세 VS 진리탐구로 같은 고민을 한 율곡 사람들이 과거 공부에 얽매여 학문을 할 수 없다하니 이것은 핑계의 말이요. 옛 사람들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하고 품팔이도 하며 쌀을 지고 다니던 자도 있었으니··· 만일 과거 공부를 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잃지 않는다면 과거공부와 이학(理學)이 병행하여 서로 어긋나지 않을 수 있다.” <격몽요결> 율곡 이이도 9번 장원급제하기까지는 16년 걸렸으며 인생에 굴곡이 있어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것

 

율곡 이이, 경장(更張)을 외치다!

- 1567선조(宣祖)가 즉위하면서 개혁의 꿈을 품은 율곡 이이, 이때는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로 훈구파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고 다시 정계에 복귀하는 시점으로 대표적으로는 송강 · 성혼 등으로 이 당시 율곡 이이가 강조한 것은 <경장(更張)>, 경장은 거문고의 느슨한 줄을 바꾸어 맨다는 뜻으로 왕조의 성립과 운영 과정은 왕조를 만드는 창업 시기 제도를 마련하고 지켜나가는 수성(守成)의 시기 제도를 고쳐나가는 경장(更張)의 시기로 창업 수성 경장이 전통적인 것으로 당시 조선이 해야 할 일을 경장으로 본 율곡

- 율곡이 주장한 구체적인 개혁은?

율곡 이이의 경장 공납의 문제점을 바로잡자는 것, 각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을 바쳐야 했던 당시의 공납제, 따라서 돈을 받고 공납을 해결해주는 사람들이 등장하여 공납제의 폐단을 시정하고자 방법을 제시한 것이 <대공수미법>으로 공납을 쌀로 대신 납부하는 제도 군정을 개혁하자는 것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자는 것, 특히 서얼(庶孼)이라도 재능이 있으면 요직을 줘야한다고 주장, 또한 여진족 침략 시 <면천법>을 실시하여 군사 수를 늘리자고 제안하는 등 나라에 필요한 정책들을 적극 제안하는 것

- 율곡 이이의 경장, 선조(宣祖)의 반응은?

1569<동호문답>을 통해 선조(宣祖)에게 자신의 뜻을 알린 율곡, 이에 대한 선조(宣祖)의 대답 상이 말하기를 학문은 온축하여 덕행이 된 뒤에야 밖으로 사업을 일으킬 수 있는 법인데 덕행이 없는 몸으로 어떻게 사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선조실록 2925> 이것은 나! 능력 없는데··· 이건 좀 오버하는 것 아니야? 하는 뉴앙스로 선조(宣祖)는 백성의 삶보다는 권력유지를 중시 한 것일까?

- 이에 대해 율곡이 다시 한 마디 하는데 이이가 아뢰기를 진실한 덕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를 방관한 채 그냥 문란한 대로 놔두시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덕행과 사업은 동시에 서로 닦아 나가면서 같이 발전시켜야 합니다.” <선조실록 2925> 왕의 책임감과 민생안정책을 함께 강조 하며 제기를 한다.

- 선조(宣祖)는 왜 경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전통사회에서는 <조종지법(祖宗之法)>으로 선대(先代)의 임금이 만든 법을 지켜야한다는 것으로 조종지법을 바꾸면 혼란이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선조(宣祖)와 대신들은 율곡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신중론을 취한 것

- 선조(宣祖)가 경장을 받아들이지 않아 실망한 율곡은 외할머니 병환을 이유로 강릉으로 귀향하고 1년 후 선조(宣祖)의 부름을 받지만 벼슬을 사양하고 해주로 귀향하는데, 율곡의 사직은 자신의 경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선조(宣祖)와 반대세력을 향한 일종의 시위였을 것

- 율곡이 몸이 나빴던 것은 사실인 듯 침을 가지고 다니면서 손수 침을 놓기도 하여 오래 전부터 몸이 약해 사직했을 수도 있으나 선조를 향한 정치적 행위이기도 했을 것이라는 <김경래 박사의 분석> 끊임없이 율곡을 부른 선조는 해주에 있는 율곡에게 이조 정랑·의정부 사인·홍문관 부응교·경연 시강관·춘추관 편수관으로 계속 러브콜 하지만 계속해서 벼슬을 거부한 율곡은 어명(御命)이다 보니 관직을 나갔다가 사직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꾸준히 선조(宣祖)에게 개혁안을 제출하면서 <동호문답> <만언봉사> <성학집요> 같은 이론서를 집필해 율곡처럼 관료생활을 하면서 이론서를 많이 쓴 관리는 찾기 어렵다.

 

선조(宣祖)를 향한 율곡의 직언직설

- 사직을 하면서 선조(宣祖)에게 직언을 한 율곡 정사의 폐단과 백성의 고통을 단 한 가지도 해결하지 못한 것은 전하께서 옛 법규만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 “큰 집의 들보와 기둥이 썩고 벽돌과 기와가 깨져 무너질 때 팔짱만 끼고 방관하는 자를 어찌 잘했다고 말하겠습니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선조(宣祖)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한 율곡, 그는 선조의 미움을 살지언정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진정한 개혁가였던 것

-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세 번째 <만언봉사> “전하께서는 의관만 정제하고 가만히 앉아있더라도 끝내 나라를 보존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아니면 바로 잡아 주고 싶어도 그 대책을 모르고 계시는 것이옵니까? 그도 아니면 흥하든 망하든 천운에 맡기고 인력이 쓸데없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현재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수위 높은 발언으로 곤룡포만 입으면 다 왕이냐? 하는 국가원수 모독죄(?) 제자를 꾸짖는 듯한 율곡의 직언

- 선조(宣祖)도 율곡의 상소문을 보고 상이 말하기를 경의 상소문을 보고 충성스러움을 잘 알았다. 나 역시 마음을 가다듬고 일을 해보고 싶다. 그렇지만 너무도 몽매하고 재주와 식견이 부족하여 지금까지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으니 생각해보면 한탄스러울 뿐이다.” <선조수정실록 5(1582) 91> 그러나 실천하는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않은 선조(宣祖)는 부인이 잔소리를 해도 바뀌지 않는 남편!

- 선조(宣祖)가 율곡을 계속 부른 이유는?

<신병주 교수의 생각> 선조(宣祖)는 율곡의 재능을 알고 있었지만 직언을 서슴지 않는 율곡에게 서운함을 느꼈을 수도··· 밀고 당기는 율곡과 선조(宣祖)의 관계, 선조(宣祖)는 고민이 많았던 왕인 것이 방계출신으로는 조선 최초의 임금으로 여러 정치적 세력의 입장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면서 개혁에 신중해야 한다는 대신들과 개혁을 호소하는 율곡의 사이에서 갈등하다 끝난 것이 아닌가(?) 율곡은 현실적인 조언은 하지 않고 왕의 수신(修身)만을 강조한 일부 신하들이 답답했을 것

- 선조(宣祖)가 새겨들어야 했을 율곡의 직언 지금 백성은 흩어지고 군사는 쇠약하여 창고의 양곡마저 고갈되었는데··· 혹시라도 외적이 변방을 침범하거나 도적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대응하려 하십니까?” <선조수정실록 15(1582) 91> 실제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

 

율곡의 <10만 양병설>의 진실은?

- 율곡의 <10만 양병설>은 율곡 사후 제자들의 행장과 연보에 등장, 최근에는 10만이냐? 대상이 일본이었느냐?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 당대에 쓴 <선조실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10만 양병설>의 최초 등장은 <율곡전서> 에서 제자 김장생이 쓴 행장에 등장하면서 10만으로 구체화시켰고 이후 송시열 등의 제자들로 인해 정설처럼 굳어진 것으로 후대에 제자들이 기록하는 과정에서 <10>이라는 표현을 했을 가능성도··· 하지만 율곡이 양병설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

- <김경래 박사의 분석> 율곡의 10만 양병설은 상대가 일본이 아닌 여진족을 막기 위한 대비책이었을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당대의 군정개혁을 제시했고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유용하게 활용된 율곡의 정책, 그렇기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율곡의 <10만 양병설>과 임진왜란을 연결해 생각하게 된 것, 율곡이 끊임없이 국방대책을 제시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지 10만이라는 구체적인 숫자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는 것

 

율곡 이이, 탄핵받다.

- 1583년 선조(宣祖)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던 율곡은 갑자기 현기증을 호소한다. 결국 선조(宣祖)를 알현하지 못하고 귀가하는데, 왕을 기만했다며 율곡의 행동을 비난하는 관료들, 율곡이 탄핵받기 시작한다.

- 율곡 이이가 탄핵 받은 이유는?

상소의 빌미가 된 <전마사건> 1583년 이탕개는 여진족 2만을 이끌고 함경도를 포위하는데 이때 율곡이 활 쏘는 사람들을 뽑아 북방에 투입하면서 당시의 병조판서 율곡 이이는 군마(軍馬)를 바친 사람은 면제해주는데 이를 선조(宣祖)에게 미리 보고하지 않고 후에 황공하다는 내용의 글만 올린 것

- 이것은 선조(宣祖) 8년부터 본격화된 동인과 서인의 붕당정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당시 인사권을 지닌 이조 정랑 자리를 둘러싼 김효원(동인)과 심의겸(서인)의 대립, 율곡은 지금 싸울 때가 아니다 밖으로는 여진족이 내려오고 있고 아직 개혁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라서 동인과 서인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지만 동인들에 의해 서인을 지지한다는 오해를 받은 것으로 나중에는 탄핵의 빌미가 된다.

붕당정치 : 조선 중기 정치운영체제로 조정의 인사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대립

- 율곡을 변호하고 지지한 선조(宣祖), 당시 율곡의 반대세력인 동인의 너무 지나친 비난이 싫었던 것으로 결국 동인의 대표적 인물들을 귀향 보내면서 율곡에게 조정의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판서 자리를 제수하지만 벼슬을 거부한 율곡 이이, 이때 선조(宣祖)상이 답하기를 아아! 하늘이 우리나라를 태평의 치세로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일까? 어찌하여 경과 같은 사람이 때를 얻지 못한단 말인가?” <선조실록 16(1583) 95>탄식을 하자 선조(宣祖)의 뜻에 따라 결국 이조판서 자리를 맡는 율곡 이이는 이어서 호조판서·병조판서 등 말년에 전폭적인 선조(宣祖)의 신임을 받는다.

 

율곡 이이의 죽음

- 15839, 이조판서를 맡은 지 4개월만인 15841월에 세상을 떠난 율곡 이이 상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내어 슬피 통곡하였으며··· 발인하는 날 밤에는 횃불이 하늘을 밝히며 수 십리에 끊이지 않았다.” & “가난하여 친구들이 장례를 치른 뒤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17(1584) 11> 평생 관직생활을 했으면서도 장례비용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율곡 이이의 청렴하게 생활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고 여러 차례 사직했을 때도 처가 해주에 가있었는데 <은병정사>라는 학교를 세워 후학양성을 위해 자산의 대부분을 시용했을 것

- 4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율곡 이이, 하지만 조선 후기 율곡 이이를 계승한 서인들이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주도하면서 후대에도 율곡의 뜻이 전달돼 조선에 구현된 것, 율곡 이이가 강조한 공납과 군정의 개혁은 조선 후기에 실현 대공수미법 대동법으로 자리 잡게 되고 군정개혁 균역법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

- <성학집요>는 율곡의 정치적 이론서로 조선 후기에는 제왕학의 모범이 되어 왕의 경연교재로 활용되어 정치가로서의 율곡 이이도 높이 평가 받는 것으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늘 개혁을 외쳤던 율곡 이이, 그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한 개혁가로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아 <만세사표(萬世師表)> 만대의 스승이라고 부를만하지 않은가?

- 제도개혁이나 경장 등을 많이 했는데, 율곡은 두 가지를 말한다. 제도개혁이나 시스템개혁도 중요하지만 이는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반의 책임의식을 늘 강조한 율곡 이이

- 당시는 본격적으로 당쟁이 시작되는 시기로 비록 서인의 영수로 후대에 오르지만 실질적으로 율곡은 당파간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여 실록의 용어로는 <조제보합(調劑保合)>이라 해서 분쟁을 조정해 서로의 합의점을 찾고 화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현 시점에도 유효한 율곡 이이의 조제보합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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