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만 거란 대군, 고려를 침공하다!
〇 고려 건국 이후, 최대의 위기
- 993년 10월, 거란군은 고려를 침공하고 고려군은 첫 전투에서 대패하여 봉산성이 함락되고 안융진으로 향하는데, 거란 침공의 규모는 약 80만 대군으로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 고려의 운명은?
- <이익주 교수의 분석> 993년은 고려 건국 75주년이 되는 해로 건국 이래 최초의 외세침략으로 이후 27년 간 큰 공격만 3차례 더 있게 되는 고려 VS 거란 전쟁, 봉산성 전투에서 참패하여 선봉군 대장마저 포로로 잡힌 상황, 고려 성종은 거란에 맞서 서경까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며 왕이 직접 전장에 나간 것은 보기 드믄 사례, 하지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는데 예상을 뛰어 넘은 거란의 군사력, 당시 동북아 신흥강자로 급부상한 거란 “거란인은 사람 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 “거란인들은 잔혹해··· 중국인들의 얼굴껍질을 벗기고 눈을 파내고 머리털을 뽑고 팔을 부러뜨려 죽였다.” <신오대사 거란전>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
- <곤발>은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을 깎아내고 양쪽 귀밑머리와 앞이마 쪽 머리만 남기는 거란족의 머리모양으로 외모에서 부터 만만치 않았던 것
- 거란족과 여진족은 어떻게 다른가?
비슷한 것 같지만 확실히 다른 거란족과 여진족, 거란족은 몽골계통의 유목민으로 거란은 요나라(917년~1125년)를 건국하고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종족, 여진족은 거란에 비해 우리와 가까운 것이 발해건국 당시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이고 말갈족이 피지배층이 되는데 말갈족이 발해 멸망 후 여진족으로 불리고 이후 금나라를 건국(1115~1234년) → 후금(1616~1636년) → 청(1636~1912년)으로 변천하면서 이후 만주족으로 불림
※ 말갈족 → 여진족(금·후금·청) → 만주족으로 이어지는 것
〇 고려의 1차 침입, 고려의 대응은?
- 거란의 항복 요구에 고려의 반응은?
거란은 <할지론>을 주장하는데 “서경 이북의 땅을 나누어서 저들에게 주고 황주에서부터 절령까지를 국경으로 삼음이 옳을 것입니다.” <고려사절요 성종 12년>
- 고려 임금 성종의 결정은?
그 당시 조정의 기운이 <할지론>으로 기울자 성종은 중론을 받아들이고 “서경의 미곡 창고는 개방해 백성들이 마음대로 가져가게 하고 남은 곡식은··· 대동강에 던져버리게 하였다.” <고려사 열전 서희>
- 이는 전쟁에서 ‘청야전술’로 주변에 적이 사용할만한 모든 군수물자를 없애버리는 전술로 “싸워봤자 질 것이 뻔하니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피해를 줄이자”는 것으로 백성과 국가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대신들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결정(?)
〇 서희, <할지론>에 반대하다!
- <할지론>에 반대하는 대신들은 없었나?
한국을 빛낸 100인의 위인에 등장하는 서희는 <할지론>에 반대하고 나서는데, “적들이 바라는 것은 고구려의 옛 땅이라 하옵니다. 하온데 서경 이북을 넘겨주면 그들이 그것에 만족하며 물러나겠나이까? 개경의 삼각산 이북 또한 그들이 그것마저 내놓으라 한다면 황도마저 포기를 하겠습니까? 한걸음 물러나면 만 리를 도망쳐야 할 것이옵니다. 바라옵건데 신에게 한번 싸울 기회를 주시옵소서!” 서희는 고려4대 광종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문인 서필의 아들로 부전자전 성품이 엄정하고 조심스럽기도 한 유명한 인물, 고려 전기까지만 해도 출정군의 지휘관은 주로 문신으로 강감찬과 조선시대의 김종서 · 권율 등도 모두 문신 출신
- 서희의 주장에 고려 조정의 반응은?
고려 역사의 흐름을 바꾼 서희는 거란과의 담판을 위해 적진으로 들어가는데 첫 대면부터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인 서희 VS 소손녕, 소손녕은 서희가 무릎부터 꿇고 머리를 조아리라는 것 VS 신하가 임금을 대하는 자리도 아니고 엄연히 양국의 동등한 대신이 상면하는 자리라는 것 “서희는 화가 나서 숙소로 돌아와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목종 1년> 적진에 드러누운 서희장군
〇 소손녕과의 담판, 서희가 절을 하지 않은 이유?
- 서희는 적진에 도착한 순간부터 협상을 시작하는데, 협상 비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선을 제압하는 것, 당시 거란과 고려가 조공 책봉 관계를 맺지 않은 상황이어서 먼저 절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결국 서희의 고집을 꺾지 못한 소손녕 “서희가 소손녕과 더불어 대등한 예로써 읍(揖)을 하고 당에 올라가 예를 갖춘 후 동쪽과 서쪽으로 마주보고 앉았다.” <고려사절요 목종 1년> 약자의 입장임에도 당당히 협상에 임한 서희
- 봉산성 전투 이후 안융진 공격에 나선 거란군, 안융진 전투에서는 거란족을 섬멸하며 승리로 이끈 고려군, 안융진 패배 이후 다급해진 거란 장수 소손녕은 이를 만회하고자 서두는데, 서희가 버티고 있으니 초조해진 것
- 고려 VS 거란의 외교담판, 소손녕의 진짜 속셈?
본격 협상에서 드러난 거란군의 침략 목적,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고 고구려의 옛 땅은 모두 거란의 관할인데 고려가 거란의 땅을 침식하고 있는 것과 국경과 근접한 거란과는 적대시하고 거란의 적국인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는 것
- 고려가 신라 땅이라 한 이유?
신라가 멸망하고 그 자리에 세워진 고려였기 때문에 소손녕은 고려를 신라의 계승국으로 파악한 것
- 고려와 거란 사이는 원래 어땠나?
거란과의 악연은 태조 왕건 때부터 시작되는데 화친을 맺자며 사신과 낙타 50필을 보내온 거란 “거란이 일찍이 발해와의 맹약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이는 매우 무도(無道)하여 이웃으로 삼을 수 없다.” <고려사 세가 태조 25년> 사신도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도 개성인근의 만부교에 방치시켜 굶어죽게 하는 <만부교 낙타사건>이 있었는데 거란의 침공은 51년 전 만부교 사건에 대한 복수(?) 국제관계에서 흔히 하는 말 “우리에게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길 없다!”
- 과연 서희의 실제 대응은?
고려는 신라의 후예가 아닌 고구려의 후계자로 오히려 거란족이 우리 영토를 침범하고 있다는 것과 고려가 거란과 교통하지 못한 것은 여진이 그 중간에 점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면서 만일 압수(압록강)에서 여진족을 쫒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길이 생긴다면 어찌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겠느냐는 것으로 서희가 파악한 거란 소손녕의 의도 ① 고려가 옛 고구려 땅을 침범했다 ② 고려가 송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거란을 적대시 한다는 것
※ 당시 10세기 동아시아의 국제관계 : 송나라와 조공 책봉 관계였던 고려, 문제는 거란이 송을 치기 위해서 내려와야 하는 상황이지만 주력군이 내려올 때 고려와 송이 협공하여 거란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거란의 1차 목표는 고려와 송의 국교 단절이 가장 큰 목표
〇고려 VS 거란의 외교담판, 서희의 협상비결
- 서희는 어떻게 적의 의도를 간파했나?
이때 서희의 나이 53세로 완숙한 시기 ①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던 경험이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소손녕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 ② 병관어사 · 병부상서를 지내 군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는 것
- 기록의 80만 대군은 과장이 된 것으로 당시 소손녕의 관직은 지방관인 동경유수로 이 위치에서 동원 가능한 기병은 약 6만 명으로 추정, 이러한 허실을 서희는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던 듯하며 당시 국제정세와 거란군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것
- 예술에 가까운 서희의 외교술로 서희의 협상 비결 ① 적(敵)의 의도를 파악하라! ② 명분싸움에서 이겨라! 거란과 통교할 수 없었던 것은 여진족이 막고 있기 때문이고 고려는 고구려 후손으로 서경 이북 땅도 우리의 땅이므로 여진을 쫒아내고 옛 영토를 돌려준다면 거란과 통교하겠다는 것, 그러자 소손녕은 송과의 관계를 끊는다면 강동 6주를 내어주며 거란과 길을 터주겠다는 것
- 강동 6주의 중요성?
강동 6주는 압록강 동쪽의 6개 주로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으로 300년 만에 고구려 영토를 회복한 것이고 이후 고려의 북방 방어기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뒤의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도 강동 6주의 하나인 귀주에서 있었던 것이고 1231년 몽골군이 쳐들어 왔을 때에도 강동 6주에서 막아냈던 것
〇 고려의 실리외교, 강동 6주를 얻다!
- 피 한 방울 없이 이뤄낸 쾌거 강동 6주! 당장이라도 만나보고 싶은 서희의 동상은 국립외교원 앞에 위치하고 싸움 없이 승리로 이끌면서 강동 6주의 땅도 얻은 서희의 외교력!
- 서희의 담판에 담긴 또 다른 역사적 의미!
소손녕과 서희의 대화에서 서희가 “우리가 바로 고구려의 후손!” 우리는 모두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알고 있지만 이 사실을 기록으로 밝힌 것은 이것이 최초, 따라서 서희의 발언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내용이고 현재 중국과의 동북공정의 논쟁에서 서희의 발언은 강력한 무기!
- <이익주 교수의 생각>은 고려인들은 설령 왕조가 바뀌어도 고려의 외교가 후손들에게 교훈이 되길 바랐을 것, 고려는 조선의 이웃 나라가 아닌 조선의 역사로 훗날 조선이 역사 속에서 외교의 교훈을 얻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 외교담판에서 거란은 손해?
거란도 패한 싸움이 아니다! 거란의 최종 목표는 송을 제압하고 중원을 차지하겠다는 것, 그런 상황에서 고려가 송과의 친교를 끊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어서 외교담판 후 서희 편에 선물까지 보낸 소손녕, 낙타 열 마리 · 말 1백 필 · 양 1천 두와 비단 5백 필을 선물로 보낸다.
〇 고려의 실리(實利)외교 서희의 담판, 그 후
- 송과 국교를 단절해야 하는 고려, 송과는 어떻게 됐나?
당시 고려가 송과의 친교를 맺은 이유는 송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고려를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는데 거란의 압박 때문에 송과의 외교를 단절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 것, 그래서 고려는 송에 사신을 보내어 “거란의 침략행위를 보복하기 위해 원욱(사신)을 송나라로 보내어 원군을 요청하도록 했다.” <고려사 세가 성종 13년>
- 송에 사신을 보낸 고려의 속셈?
당시 송은 거란과의 전쟁을 벌이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어서 예상대로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송, 이렇게 되면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는 것에 대하여 고려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과가 되는 것
- 고려의 실리외교는 공식적으로 거란과 국교를 하고 비공식적으로는 송과 교류의 여지를 남겨 놓은 것으로 상대에게 속내를 들키지 않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낸 고려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외교로 승리를 거머쥔 것으로 고려 외교정책의 큰 방향은 실리(實利)를 추구하는 것으로 서희의 외교담판은 고려외교의 모범답안
- 조선시대에도 실리외교를 추구했지만 신하의 반대에 부딪혔던 광해군 “조선의 대신들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명(明)과의 사대의리는 지켜야 한다는 것” 죽은 명분에 집착하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나라가 망할 뻔한 조선, 대외정책은 고려가 조선보다 한 수 위
〇 거란, 다시 고려를 공격하다!
- <드라마 천추태후> 1010년 거란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도는데 거란 성종은 고려의 천추태후가 권좌에서 물러난 틈을 타 고려를 정벌하자는 것, 당시 고려는 1009년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한 상황에서 거란은 <강조의 변>을 침략의 빌미로 삼고 “거란 성종이 친히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사 세가 현종 원년> 1010년 11월 거란의 제2차 고려 침공 발발!
- 거란의 2차 침략 정확한 시기와 이유?
993년 거란의 1차 침략 이후 1009년 <강조의 변>으로 현종이 즉위하고 1010년 거란의 제2차 침략, 거란이 다시 침공해 온 이유?
거란은 자신들이 고려의 상국으로 생각하는 것 “거란 성종은 신하들에게 ‘고려의 강조는 임금을 죽인 대역 죄인이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겠다.’ 라고 선언했다.” <고려사 세가 현종 원년> 의군천병(義軍天兵)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쳐들어 온 거란의 성종
- 1년 전의 일을 문제 삼은 것과 1차 침략 때와는 달리 친정에 나선 거란 성종 내심은?
상황이 달라진 것이 1차 침략 이후 더욱 강력해진 거란, 1004년에 송과 전연(前燕)의 동맹 체결로 만리장성 이남의 땅인 연운 16주를 차지하여 오랜 숙원이었던 중원을 장악한 거란, 거란의 성종이 친정에 나섰다는 것은 그 만큼 자신 충만해있었다는 의미
- 표면적인 이유로는 강조를 벌하겠다는 것이지만 이는 전쟁의 명분일 뿐! 거란에서 죄를 묻는다는 뜻의 문서 “우리에게 사대하기로 한 이후에도 ‘동쪽으로는 여진과 결탁하고 서쪽으로는 송나라와 왕래하니 이는 무슨 계책을 꾸미려 함인가?” <고려사 문종 12년>
- 서희의 외교담판 후 송과의 관계는 끝난 것이 아니었나?
공식적으로는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친교를 맺었지만 목종 때 사신을 보내는데 “고려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고··· 거란으로부터 위험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 <고려사 세가 목종 2년>
- 거란이 다시 침략한 진짜 이유는 고려와 송의 재 교류로 거란과 송 모두의 손을 놓지 않았던 고려는 양날의 칼을 든 느낌! 외교의 달인, 서희가 있지 않는가? 이때는 서희가 이미 병사(病死)한 시점 “서희가 병이 들어 개국사에서 요양하자 성종이 직접 가서 문병하고 어의·말·곡식 1천석을 시주하는 등···” <고려사 열전 서희> 결국 998년 57세의 일기로 사망
〇 고려 VS 거란 2차 전쟁의 분수령, 통주전투!
- 거란의 2차 침공으로 4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공격 개시하여 흥화진을 포위 “거란 성종이 항복을 권유하길··· ‘강조를 사로잡아 보내면 회군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개경으로 쳐들어가 너의 처자들을 죽일 것이다’” <고려사절요 현종 원년> 이에 양규 장군은 단칼에 거절 “몸과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천 년의 성스러운 고려의 위업을 받들 것입니다.” <고려사 열전 왕규>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며 협박에 굽히지 않고 흥화진에서 맞선 양규 장군, 그러자 흥화진을 포기하고 군사 20만을 이끌고 통주로 향한 거란의 성종! 거란 전술의 특징은 강한 성을 만나면 우회하는 것으로 통주 → 서경 → 개경으로 곧장 향할 작전을 세운 것
- 통주에서 거란의 성종에 맞설 고려 장수는?
통주는 고려 30만 주력군을 이끈 강조가 주둔하는 곳, 거란 기병에 맞서는 고려군의 전략? 의외로 산성이 아닌 평지에서 거란 기병에 맞선 강조, 비장의 무기는 전투에서 쓰이는 수레(병거)로 삼국지의 재갈공명이 사용하던 무기, 병거는 이동식 성벽으로 보병들이 병거 뒤에 숨어 안정적으로 공격이 가능
- 중국에서 개발한 병거와는 달리 고려에서 개발한 <검차>, 조선시대에도 고려 검차의 우수성을 인정! “우리나라 지형이 수레를 이용하기에 어렵다고 하지만 고려 현종 때 강조는 검차(檢車)를 이용하여 거란을 격파했고···” <정조실록 24년 3월 9일>
※ 검차 : 차체와 바퀴살에 단검을 꽂아 적(敵)을 공격한 고려의 전차
- 검차의 등장! 고려군 승리의 청신호?
초반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고려군, 패배의 원인은 강조의 자만심으로 강조가 몇 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거란군의 내습을 알렸으나 강조는 믿지 않고 ‘입안의 음식처럼 적군이 적으면 오히려 좋지 않으니 많이 들어오게 놔두라’ 라고 말했다” <고려사 열전 강조> 여러 차례 급보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바둑을 두는 여유까지 부린 강조는 결국 포로 신세가 되고 무려 3만 여명이 전사하는 대패
- 포로로 잡힌 강조의 운명은?
강조·이현운 등을 회유한 거란의 성종 “거란 임금이 ‘내 신하가 되겠느냐? 라고 이현운에게 물으니 이미 두 눈은 새로운 해와 달을 우러러 본 터에 어찌 옛 나라를 생각하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 & 이현운의 변절을 옆에서 보고 있던 강조 “강조가 분노하여 이현운을 발로 차고 결국 거란은 강조를 처형하였다.” <고려사 열전 강조> 종잡을 수 없는 강조, 고려에 대한 충성만큼은 오락가락하지 않고 확고했던 것(?)
- 고려의 충신 양규 장군,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명을 사칭해 항복하라고 설득했으나 “나는 왕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명령은 받지 않겠다.” <고려사 열전 양규> 끝까지 맞섰던 진짜 군인! 역사의 무대에서 양규 장군 재조명이 필요~ “양규는 원군도 없이 한 달 사이에 모두 일곱 번을 싸워 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3만 여명을 되찾았으며···” <고려사 열전 양규> 말과 낙타와 병장기를 노획한 것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었다. & 죽음도 장렬하여 “양규는 김숙흥 등과 종일 역전했으나···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고려사 열전 양규> 기억해야 할 인물인 것이 말 그대로 고려를 위해 최후의 일인까지 · 최후의 일각까지 싸운 인물
〇 통주 전투 패배! 그 후?
- 거란의 1차 침략과는 달리 전쟁의 참혹함이 여실히 드러난 고려 VS 거란의 2차 전쟁, 강조의 패배가 뼈아픈 것이 강조의 패배 이후 무너진 고려의 북방 방어기지 강동 6주, 그리고 청천강을 넘어 서경 · 개경까지 진격한 거란군, 결국 수도를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현종 “거란의 성종이 개경에 들어와 태묘와 궁궐 · 민가에 불을 질러 모두 타버렸다.” <고려사절요 현종 2년> 정말 애석한 것은 당시 거란군의 방화로 소실된 고려의 사서(史書)들
- 이러한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되고 결국 험난했던 현종의 피난 길 “호송하던 여러 신하들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흩어져 달아났다.” & “유종과 김응인 등이 거짓으로 왕의 명령이라 일컫고 임금의 말안장을 부수어··· ” <고려사절요 현종 2년>
- 고려 VS 거란전쟁, 무엇을 볼 것인가?
개경이 함락된 것이 1011년 1월 1일, 전쟁의 참혹함은 명절이 제삿날이 됐을 고려인들, 외교의 부재로 전쟁의 참혹함이 드러난 고려 VS 거란의 2차 전쟁, 거란의 1·2차 침입이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은 외교력과 군사력은 국가 안위의 양대 축으로 외교 없는 군대는 맹목이고 군사 없는 외교는 공허하다!
- 거란의 1·2차 침입이 서로 비교되는 것 중의 하나가 1차 침공 당시에는 고려 성종을 중심으로 안정된 정치를 바탕으로 서희 같은 명장들이 활약하는 토양이 성립되어 있었지만 혼란스런 상황 속에서 거란의 2차 침입을 받은 고려, 결과적으로 정치가 안정될 때 국방과 외교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
- 그 동안 소손녕에 대해서 평가절하 돼온 것이 사실이지만, 피 흘리지 않고 위기를 타개하면서 서로 Win-Win한 서희도 소손녕도 결국 승자로 협상과 외교와 정치의 미학은 실리와 명분을 나누는 것이 아니겠는가?
- “전쟁은 외교적 교섭의 계속에 지나지 않는다,” Karl Clausewitz의 <전쟁론> 우리가 전쟁을 볼 때, 누가 침략했으며 누구와 맞섰고 누가 이겼느냐? 의 싸움 자체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두 나라가 전쟁을 일으킨 목표가 무엇인가? 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두 나라뿐만 아니라 두 나라를 둘러 싼 더 넓은 국제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을 볼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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