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his(한국사)

윤관, 여진 정벌의 칼을 갈다

mkpark2022 2016. 6. 27. 21:46

 

 


 

윤관, 여진 정벌의 칼을 갈다

 

 


1차 여진 정벌, 고려의 뼈아픈 패배

- 1104년 봄, 여진의 군대가 고려 국경을 침범하여 정주성 밖에 진을 치고 고려 국왕 숙종은 임간을 보내 여진을 막게 한다, 하지만 고려군은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여진 군대에게 크게 패하고 만다, 기세등등해진 여진은 고려의 성을 공격해 수많은 백성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다.

- 놀란 숙종은 윤관에게 여진 정벌을 맡기고 윤관은 30여 명이 넘는 여진족의 목을 베었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결국 많은 군대를 잃고 여진에 패한 윤관은 여진과 강화를 맺고 여진 정벌에 대한 새로운 칼을 갈기 시작한다.

- 거란 전 이후 85년 만에 일어난 여진 정벌, 고려와 여진의 관계는?

원래 사이가 좋았던 고려와 여진은 두만강 유역의 여진 부족의 상당수는 시조가 고려인이라 생각하고 부모의 나라로 섬기기도 하고 고려 또한 여진에게 회유와 동화정책을 펼치며 귀화자에게 땅과 벼슬을 하사했던 것

- 여진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고려에 저자세를 보이며 무역을 계속했으나 무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때때로 약탈자로 돌변해 고려를 침범한 여진은 배를 타고 고려의 해안지방까지 습격하며 경주 · 울릉도 · 일본의 규슈까지 침략을 하게 된다.

- 12세기 초 급변한 여진의 내부 정세, 북만주 흑룡강 성을 기반으로 한 여진족의 일족인 <완안부(完顔部)>가 다른 여진족을 흡수하고 세력이 확장되면서 고려 · 중국 쪽으로 세력을 넓혀 가는데 고려의 동북쪽에 살던 여진족들이 <완안부>의 공격을 받는 일이 생기고 이를 피해 고려로 넘어오게 되면서 국경에서 여진 완안부 기병과 충돌한 고려군 임간이 공로에 눈이 팔린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깊이 쳐들어갔다가 도리어 패배하고 태반의 군사를 잃었다.” <고려사 열전 윤관>

- 여진에게 부모의 나라로 대접받던 고려는 여진에 패배하게 되어 온 나라가 충격에 빠진 것으로 1차 정벌에서 패배하자 숙종은 분노하며 왕이··· 만약 도움을 내려 적자(賊子)를 소탕하게 해준다면 그 땅에 사원을 짓겠노라고 빌었다.” <고려사 열전 윤관> 그리고 바로 2차 여진 정벌을 준비한 속종

 

여진 정벌의 배경

- 숙종이 2차 여진 정벌을 강행한 이유?

당시 고려와 여진은 특수한 관계로 거란(요나라)과 사대관계를 맺은 고려, 하지만 여전히 황제국을 칭하는데 916년 거란이 요나라를 건국하고 960년 송나라가 중국지역을 거의 통일하면서 거란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강자가 없는 국제정세 속에서 적절한 외교 전략을 통해 고려 스스로도 황제국이라 칭한 것

- 당시 고려가 황제국을 칭한 이유?

국제질서 속의 위상을 중요하게 여겼던 고려인들, 요즘 우리가 독립국이라는 것에 대해서 평소에 의식은 하지 않지만 누구나 중요성을 인정하듯이 고려 사람들도 자신이 황제국이고 이를 중심으로 한 천하세계가 따로 존재한다고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이 국가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 국가를 지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는 자부심, 따라서 이것이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로만 보기 어려운 점이 분명히 있는 것

- 그런데 황제국이 되기 위해서는 황제국이라 자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제후국이 필요했고 바로 여진이 그 역할을 했던 것이어서 여진을 제후국으로 삼아 천자국이 되려한 고려, 하지만 제후국인 여진이 더 강성해져서 천자국을 공격해 온 상황이 된 것, 그래서 더 강성해지기 전에 싹을 자르겠다고 생각했을 것(?)

- 고려 내부의 정치적 사정도 있었던 것이 고려 15대 왕 숙종은 왕위 찬탈과정이 조선의 세조(世祖)와 비슷하여 14대 헌종인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정통성이 취약한데다가 외부적으로는 여진에게 패하게 되자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이어서 결코 포기 할 수 없었던 여진 정벌

 

별무반의 창설

- 2차 여진 정벌을 위한 고려의 전략?

여기에서 별무반이 탄생하게 되는데 윤관의 건의로 창설 제가 패한 까닭은 ()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라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사 열전 윤관>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을 창설한 숙종

- 별무반(別武班)은 어떤 군대?

기병을 강화한 특별군대신기군(神騎軍)과 보병인 신보군(神步軍)으로 나뉘고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는 전문부대로 편성되는데 강력한 활로 공격하는 경궁군(梗弓軍)과 강력한 노로 공격하는 강노군(剛弩軍), 그리고 돌을 투척해 공격하는 석투군(石投軍)으로 조직, 또한 대각을 불어 병사를 움직이는 대각군(大角軍)은 전투 중 병사들을 돌격시키는 임무를 수행하고 이외에도 돌격부대로 추정되는 보병부대 도탕군(跳盪軍)이 있었는데 적이 공격대형을 형성하기 전에 돌격해 기세를 꺾는 임무의 소수정예 부대

- 별무반의 전투 방식?

먼저 도탕군이 돌격해 적을 교란시키지만 이들은 소수로 구성돼 있어 목숨을 잃기 쉬운 도탕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격하는 이유는 오자병법·춘추좌씨전·사기 등의 기록으로 볼 때 이들은 죄수나 명예를 잃은 귀족으로 구성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도탕군 지원자들은 남은 가족들의 생계나 명예회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을 것, 도탕군이 서서히 진압되면 강노군과 경궁군이 원거리 사격을 시작하고 적군과 거리가 가까워지면 석투군이 돌을 투척하면 전열을 다듬던 신기군이 여진의 기병을 저지하는 사이 신보군은 여진과 백병전을 펼쳤을 것으로 추정

- 여진기병에 대한 별무반의 전략?

당시 고려군이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대도(大刀)를 썼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고려사에 자주 등장하는 대도는 전한(前漢)시대부터 말을 베는데 사용했던 참마검이 변형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송나라 전투에서도 사용되었던 대도, 중국 남송 초기의 무장이자 학자인 악비(岳飛)장군의 <송사 악비전>에는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대도의 일종인 마찰도를 사용하여 금나라의 중무장 기병을 저지한 것으로 기록돼 있고 조선시대에도 전기에는 장검 후기에는 협도로 발전하여 대도는 북방민족의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꾸준히 사용됐던 것

- 별무반의 규모?

신기군의 자격요건은 전국의 행정단위에 있는 말을 가진 모든 사람들, 신보군의 자격요건은 20세 이상 과거공부를 하지 않는 전국의 모든 남성, 또한 승도는 정식 승려는 아니지만 사원에 예속되어 토지 경작이나 잡역에 종사하며 불도를 닦던 수행자로 이들을 뽑아 편입시킨 승병부대 항마군으로 전시비상사태라서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은 모두 동원

- 별무반의 총규모?

기록에 의하면 윤관과 오연총이 동쪽 국경까지 진군해 병사를 주둔하고 17만 군 병력20만이라 칭했다.” <고려사 열전 윤관> 훈련의 시간이 필요해 1104조직 후 3년 동안 훈련한 별무반, 여진에 대한 고려의 위기의식이 그 만큼 높았던 것

 

2차 여진정벌의 시작

- 2차 여진정벌, 출정 시기는?

1107년 변방에서 보고가 올라오는데 여진이 강성해져 변방의 성을 침구하고 있습니다, 보고가 올라오자···” <고려사 열전 윤관> 보고가 올라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1107별무반의 여진정벌의 출정이 시작되는데, 별무반 창설 1년 후 1105년에 승하한 숙종은 안타깝게도 이를 보지 못하지만 대신 숙종의 뜻을 이어 여진정벌을 추진한 예종은 17만 대군을 동원해 전쟁을 일으키는 건 쉽지 않은 결정으로 숙종 승하 후에도 아들 예종이 그 과업을 이어받은 것은 당시 고려의 여진정벌에 대한 의지가 강했음을 보여 주는 것, 또한 숙종 이후에도 여진정벌이 계속 추진된 데에는 윤관의 영향도 있을 것

- 윤관의 기만전술?

110712월 고려의 17만 대군은 여진정벌을 위해 국경으로 진격하여 포로석방을 제안하며 여진 추장 400여 명을 불러들인 윤관은 이들에게 술을 대접하며 연회를 베푼 윤관, 그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이는 윤관의 기만전술로 복병을 동원해 술 취한 여진추장들을 모두 제거하는 전략으로 3년 간 고된 훈련 끝에 출정한 고려의 17만 대군이 정정당당하게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쉽다 VS 전쟁 상황에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쉽게 이기는 전략을 선택한 것은 합리적인 선택 병자궤도야(兵者詭道也)는 싸움을 하는 자는 속임수나 기이한 꾀를 써야 한다.” <손자병법> 정정당당해야 하는 스포츠에도 페이크(fake) 나 페인트(feint)가 있는 법

- 400년 후인 조선의 중종(中宗) 때에도 문제가 됐던 여진족 문제, 사냥을 나온 여진족 추장 속고내를 잡으려 조선의 조정에는 회의가 벌어지는데 잡으러 가자는 측과 도적의 꾀를 내어 엄습하면 의리에 어긋난다는 측으로 맞서는데 결국 체포에 반대한 성리학자 조광조의 주장대로 체포하지 않기로 결정된다.

 

윤관의 동북 9성 개척

- 본격적인 여진정벌에 나선 고려군은 승승장구하며 영토 깊숙이 진격하여 함주·영주·웅주·길주·복주·공험진 등 6개의 성을 점령하여 의주·통태진·평융진에 윤관의 동북 9성을 개척하는데 기만전술로 추장들을 잃고 기세가 꺾여 달아난 여진족 먼지만 바라보고도 전선을 잃고··· 달아나는 자를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고려사 열전 윤관>고려가 2차 여진정벌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전략을 쓴 것과 더 중요한 것은 1차 여진정벌의 실패를 거울삼아 철저하게 준비했기 때문일 것

- 동북 9성의 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 동북 9성의 위치, 가장 유력한 설은 두만강 북쪽 700리 설 사방 경계는 북쪽으로 공험진에 이르기 700동북쪽으로 선춘현에 이르기 700여 리이다.” <세종실록지리지> & “이 고개(선춘령)는 지금의 종성에서 곧 바로 700리 북쪽에 있다.” <북관유적도첩 척경입비도>

- 그런데 두만강 북쪽 700리 설()을 부정한 1900년대 일본인 학자들은 동북 9성을 함흥평야 일대라고 주장하는데 이 설()은 고려 영토가 두만강 북쪽까지 개척될 리 없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으로 이는 고려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깎아내리려는 식민사학의 영향이 있는 것

- 현재로서는 자료의 기록인 두만강 북쪽 700리 설()이 동북 9성의 위치로 가장 유력한 것으로 봐야할 것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며···” <고려사 열전 윤관> 절묘하게 조선시대 세종(世宗) 때 개척한 6진과 거의 일치하는 동북 9, 이는 300여 년 전에 윤관이 이를 개척했기 때문에 이곳이 우리 영토란 의식이 있었고 그런 의식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6진을 개척할 수 있었다는 <신병주 교수의 분석>

- 고려가 뿌린 씨앗을 조선이 거둔 셈으로 조선은 고려를 이어받은 나라이자 고려의 후예로 고려의 역사의식과 영토의식도 계승한 조선, 그 계승을 가장 잘한 세종(世宗)은 함경도 절제사 김종서를 불러 하명하기를 선훈점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찾을 수 있는가? 윤관이 9성을 설치했는데··· 공험진의 어느 쪽인가? 하였다.” <세종실록 143986> 동북 9성의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6진을 개척한 세종(世宗),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 강동 6주의 서희동북 9성 윤관의 영토 개척, 동북 9성의 위치가 명확하게 밝혀지는 날이 빨리 오기를···

 

고려, 동북 9성의 반환

- 11097, 동북 9성의 반환을 놓고 팽팽하게 맞선 고려 VS 여진, 그 동안 동북 9성의 일대에서 끊임없이 전투를 벌여왔는데 여진 쪽에서 갑자기 화친을 요청하며 조건으로 동북 9성의 반환을 요구해 온 것, 계속되는 전쟁이 부담스러운 고려 조정은 동북 9성의 반환에 찬성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왕이 선정전 남문에서 (여진 사신) 요불 등을 접견하고 9성의 반환을 허락하자···” <고려사 세가 예종 4>

- 여진은 고려인들이 이주할 때 공격하지 않기로 합의하고 자손만대로 고려에 조공할 것을 맹세하며 감히 기와조각 하나라도 고려의 영토에 던지지 않겠나이다.” <고려사 세가 예종 4> 동북 9성 개척 2년 만에 여진에 반환하게 되는데 9성을 개척하기 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넓은 영토를 지키고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고려, 게다가 원래 여진족의 거주지였던 동북 9성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대항한 여진 때문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동북 9성 일대 국가에서도 여러 방면으로 군사를 징발하니··· 기근·유행병까지 겹쳐 백성의 원망이 드디어 일어났다.” <고려사절요 예종 4>

- 사실은 동북 9개척 초기부터 제기됐던 유지문제로 땅이 넓어 보급이 어려웠던 지역, 게다가 적이 매복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노략질함이 잦았다.” <고려사절요 예종 4> 현실적인 문제로 동북 9성을 여진에 반환한 고려

- 300년 후인 세종(世宗) 46진을 개척할 당시에도 고려와 비슷한 고민을 한 조선, 특히 유지가 어려운 6진을 포기하자는 일부 신하들의 주장에 “(명나라)가 여기(6)에 위를 설치하여 야인(여진)에게 위엄을 보이면··· 우리나라는 이미 6진을 버렸으니 다시 무슨 말로 청하겠는가?” <세종실록 143786> 끝까지 6진을 지켜낸 세종대왕

- 고려 예종이 동북 9성을 지켜내지 못한 것은 아쉬운 것으로 3년간의 많은 시간과 인력을 들여 개척하고 2년 만에 돌려준 것은 안타까운 일, 하지만 화친논의 무렵 여진과의 전투에서 계속 패배한 고려의 예종은 동북 9성을 유지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유지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을 했을 것

- 동북 9성 반환에 반대한 인물은 없었는가?

예종 4년 동북 9성 반환을 놓고 신하들과 의논한 예종은 반환 찬성 28VS 반환 반대 2으로 여진사신이 찾아와 애걸하자 다시 논의 “9성 반환 문제에 대한 가부를 물었는데 다들 반환에 찬성했다.” <고려사 세가 예종 4>

- 동북 9성의 반환으로 물거품이 된 별무반 편성과 9성 축조의 윤관의 노력, 설상가상으로 동북 9성 반환논의와 함께 탄핵당한 윤관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패배를 거듭나라에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 거듭된 탄핵으로 어쩔 수 없이 윤관을 파진시킨 예종,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윤관을 복직시키지만 복직 5달 만에 윤관은 세상을 떠난다.

 

2차 여진정벌이 남긴 것

- 허무하게 끝난 2차 여진정벌(?)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9성을 돌려주면서 반환조건 자손 대대로 고려에 조공할 것을 맹세한 여진, 이것은 그 지역의 여진을 책봉함으로써 고려가 황제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을 뜻하는 것 고려를 절대 공격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여진, 계속 세력을 키워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은 동북 9성의 반환이라는 부채를 진정성 있게 생각했던 것으로 금나라가 거란을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멸망시키면서도 고려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정책으로 일관했던 것

- 약속을 충실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동북 9성의 반환으로 실질적인 성과를 얻은 고려, 여진족이 강성해지고 거란을 공격할 때도 그동안 거란과의 사이에서 문제가 됐던 보주(신의주)지역,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는 얻었지만 압록강의 가장 중요한 지점인 보주지역만은 거란이 넘겨주지 않았는데 보주에 대한 영유권을 고려에 양도한 금나라, 이로써 고려가 압록강 이남을 온전히 확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동북 9성의 반환으로부터 시작된 것

- 고려는 군사력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국제관계에서 늘 판을 주도한 듯, 강대국들에게 져주는 듯 하면서도 실리를 챙기는 외교를 펼치면서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국에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한 것

- 결과적으로 보면 6진 지역을 확보한 것은 조선 때이지만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개척한 역사가 있었기에 조선이 6진을 개척하고 반환하지 않고 관리할 수 있는 지혜까지 얻었던 것이고 지금의 한반도 영토를 만든 선구적 시도, 또한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 동북 9성 지역으로 윤관의 동북 9성 개척은 우리의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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